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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사슴동굴  / 김정임


 오동나무 안에 당신이 누워있다 부은 무릎을 펴는지 나무 틈 사이 삼베옷 스치는 소리가 새 나왔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빙 둘러서서 제를 올렸다 


 어디쯤에 꽃잎이 열린 곳일까 눈이 어두운 사람처럼 오동나무 무늬를 더듬어야 우리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추억들이 푸른 핏줄을 터뜨리며 둥글게 솟은 흙 속으로 스며들자 검은 구름이 터질 것 같이 어깨를 들썩였다

     

 당신은 이미 저 빙하기 붉은 사슴동굴에서 슬픔이 깃든 뼈를 수만 번 누이는데 나는 어느 시간의 물거품을 휘젓고 있는 것일까


 물기 빠져나간 바람의 흰 깃털이 저녁 숲에 흩날렸다 깊은 숨을 몰아쉬는 당신이 달력 속에 굵은 빗금을 천천히 그었다

 

 

 

 

 

[심사평] 몽환, 혹은 제의적 상상력 돋보여


  몇 편의 후보작을 두고 논의한 끝에 우리는 쉽게 김정임 시인을 이번 수상자로 정하자는 합의에 도달했다. 심사에 올라온 약 10여 편의 그의 작품들은 고른 수준을 유지하는 가운데 꽤는 독특한 시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었다.

 그의 시편들은 주로 암각화내지 각종 구비전승 속에 남겨진 원시부족들의 삶이나 툰드라 지역민들의 습속을 성찰하고 있다. 굳이 말을 만들자면 이들 시편의 상상력은 제의적 상상력이라고 할 터였다. 그래 그의 시의 주체들은 하늘과 땅, 인간 세계의 경계를 허물고 넘나든다. 뿐만 아니라 생과 사 역시 격절된 세계가 아닌 연속된 시간 위에 놓여 있다. 이 일련의 시적 사고내지 상상력은 그의 작품을 몽환적으로 읽게 만들고 있다.

 이번 수상작으로 결정을 본 「붉은 사슴동굴」 역시 사자(死者)가 시적 주체인데, 그는 제를 올리는 사람들과 달리 지금 이곳을 벗어나 붉은 동굴에서의 회귀적 존재로 거듭나는 기이함을 보여준다. 이 같은 작품세계란 우리 시단에서 독특한 시세계이자 유니크한 개성의 하나로 읽힌다. 우리는 그가 앞으로 한결 더 참신한 시세계를 열어 갈 것을 기대한다. 


                                         본심 : 강 우 식, 문 효 치, 홍 신 선(글)  

                              예심 : 미네르바 편집위원회



 

|수상소감| 조용한 울림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쁨보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이 상을 받을 자격이 있는 걸까, 매순간 시적 시간을 충분히 살았는가, 하는 자책감에 제 시를 돌아보았습니다. 시는 저에게 우주라는 기호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정신의 에너지를 제대로 부려 보았는지를 되물었습니다. 

             

생은 무언가 끊임없이 지불하기를 요구합니다. 어둠에 밀리면서 어두운 글자를 빌렸습니다. 이제는 마왕 대신 파가니니를 듣겠습니다. 


동굴 벽에 부딪쳐 돌아오는 원시의 조용한 울림을 만나기 위해 앞으로도 호젓한 숲길을 헤매게 되겠지요. 돌아갈 수 없는 날을 가득 품은 시원의 음악이라 불러도 될까요. 시가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의 인연이 가장 아름다운 오늘입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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