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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가리, 호랑이 / 이정훈

 

 

나는 가끔 생각한다

범들이 강물 속에 살고 있는 거라고

범이 되고 싶었던 큰아버지는 얼룩얼룩한 가죽에 쇠촉 자국만 남아

집으로 돌아오진 못하고 병창[i] 아래 엎드려 있는 거라고

할애비는 밤마다 마당귀를 단단히 여몄다

아버지는 굴속 같은 고라댕이[ii]가 싫다고 산등강으로만 쏘다니다

생각나면 손가락만 하나씩 잘라먹고 날 뱉어냈다

우두둑, 소리에 앞 병창 귀퉁이가 와지끈 무너져 내렸고

손가락 세 개를 깨물어 먹고서야 아버지는 집으로 돌아갔다

아버지가 밟고 다니던 병창 아래서 작살을 간다

바위너덜마다 사슴 떼가 몰려나와 청태를 뜯고

멧돼지, 곰이 덜걱덜걱 나뭇등걸 파헤치는 소리

내가 작살을 움켜쥐어 물속 산맥을 타넘으면

덩굴무늬 우수리 범이 가장 연한 물살을 꼬리에 말아 따라오고

내가 들판을 걸어가면

구름무늬 조선표범이 가장 깊은 바람을 부레에 감춰 끝없이 달려가고

수염이 났었을라나 큰아버지는,

덤불에서 장과를 주워먹고 동굴 속 낙엽잠이 들 때마다

내 송곳니는 점점 날카로워지고

짐승이 피를 몸에 바를 때마다

나는 하루하루 집을 잊고 아버지를 잊었다

벼락에 부러진 거대한 사스레나무 아래

저 물 밖 인간의 나라를 파묻어 버렸을 때

별과 별 사이 가득한 이끼가 내 눈의 흰창을 지우고

등줄기 가득 가시가 돋아났다 심장이 둘로 갈려져,

아가미 양쪽에서, 퍼덕,

,,,,,,

산과 산 사이

와 여울, 여울과 가 끊일 듯 끊일 듯 흘러간다

坐向 한번 틀지 않고 수 십 대를 버티는 일가붙이들

지붕과 지붕이 툭툭 불거진 저 산 줄기줄기

큰아버지가 살고 할애비가 살고

해 지는 병창 바위처마에 걸터앉으면

언제나 아버지의 없는 손가락, 나는

 

[i]'절벽'이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ii] '골짜기'란 뜻의 강원도 사투리

 

 

 

 

2013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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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세 번 도리질했는데두 아이 이름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갑니다

 

세상의 하고많은 배역 중 왜 제게는 나귀 한 마리와 끝없이 걸어야 하는 길이 주어졌는지

 

밤마다 손바닥을 들여다봅니다 후벼서 미안하다는 듯 흐르는 이 강을 오늘은 애수라고 불러봅니다 내가 강가에 마을 하나 지어놓으면 밤나무 두 그루와 낡은 슬레이트 지붕이 떠갑니다 뇌운 용항 도돈 판운 멀리 주천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여울 가 삐익 삑, 노루새끼 호드기 붑니다

 

고지를 받았을 땐 지실고개를 넘고 있었습니다 아니요, 세 번 도리질 했는데네 번 맞다고 해서 박달재를 넘을 땐말씀으로 수태한 처녀 같았습니다 딱! 밤톨 떨어지는 소리가 만종처럼 울려 다릿재 꼭대기 노을을 몰고 시속 팔십 킬로미터 붕붕 서쪽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립고 고마운 이름이 왜 없겠습니까 만나경 해오니 두 아이의 이름 울금빛으로 적어놓고 또 밤길을 줄여야합니다

 

고형렬 선생님, 감사합니다

 

 

 

쏘가리, 호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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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독특한 개성의 탄생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 보는 듯

 

세 명의 심사위원이 투고작 전부를 나눠 읽고 거기서 추린 작품을 토대로 논의를 거듭한 결과 '쏘가리, 호랑이'(이정훈)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합의했다.

 

'쏘가리, 호랑이'를 비롯해 이정훈의 작품은 요즘 우리 시단에서 보기 힘든 신화적 상상력의 눈부신 질주를 보여준다. 그 상상력은 강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산맥을 치달리는 호랑이로 치환시키는 마법을 가능케 한다. 우리 민족 고유의 향토적 풍광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시는 마치 이 땅에 산업사회가 도래한 적이 없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언어의 구체성과 밀도를 획득하고 있다. 이 독특한 개성의 탄생을 축하하며 다만 그의 시편들에 내포된 일종의 아나크로니즘(의도적인 시대착오성)을 앞으로의 시작을 통해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모색해주길 바란다는 권고를 덧붙이고 싶다.

 

'단풍나무 빵집'의 손현승은 심사위원들에게 오랜 망설임의 시간을 강요한 응모자였다. 대화체를 적절히 활용한 이 시는 대상이 되는 빵-빵집-빵집 여자에 범용한 일상성을 뛰어넘는 서정적 후광을 씌워주는 데 성공하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따스하면서도 원숙한 시선이 인상적인 이 시는 읽다보면 고소한 빵냄새가 주변에 감도는 듯한 풍미를 선사한다. 심사위원 구성이 조금만 달랐다면 최종 결과가 다르게 나왔을지도 모를 만큼 이 작품이 주는 매혹은 상당했다.

 

'곰이 돌아왔다'의 장유정도 아까운 응모자였다. 투고작 전부가 일정한 수준을 유지한 견고한 시적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이미지의 조형이나 어조의 완급조절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전체적으로 시적 발상이 새롭지 않다는 난점을 갖고 있었다.

 

이밖에 '누군가의 단검'의 김지연, '애플파이 레시피'의 고태관, '골목은 모퉁이를 돌면 막혀 있다'의 유병현, '불룩한 체류'의 이문정 등도 기억에 남는 작품을 선보인 응모자들이었다. 이들 모두에게 건필의 응원을 보낸다.

 

심사위원 황현산(문학평론가) 황지우(시인) 남진우(문학평론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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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면 채굴기 / 류성훈

 

 

몸 누일 곳을 모의하러 온 새 몇 마리가

소독된 달 표면을 마름질했다

실외흡연구역의 담뱃불이

바람 안쪽에 수술선을 그었을 때

세 번째 옮긴 병원에서도 아버지의 머릿속

돌멩이는 깨지지 않아

한 몸 추슬러 가던 길들만 허청거렸다

온 세상이 앓으면 아픈 게 아니고

매일 아프면 그것도 아픈 게 아니라고

위독한 시간들을 한 곳에 풀어놓으면서

아버지가 고요의 바다 어디쯤을 채굴하고 있었다

병들도 힘 빠질 무렵

두개골을 망치질하는 마른기침이

울퉁불퉁한 삶 쪽으로 흔들렸다

몸속의 돌은 달 뒤편의 돌 같아

닳고 닳은 땅 밑보다도 단단하고

검을수록 깊은 광맥에 이어져 있는데

어느 갱도에서 그는 길을 잃었을까

저 큰 굴착기가 가지고 나올 단단한 돌

돌아와 때때로 돌아눕던 그는

다리의 성근 터럭을 젊은 내게 보여주었다

달의 얼룩이 지구에 뿌리를 내린 날

아무에게도 거기서 뭘 했는지 말해주지 않았다

창 밖 저탄 더미. 캐낸 달빛이

벌써 내게 문병오고 있었다

 

 

 

 

2012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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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 같은 지금의 느낌을 기억할 것"

 

바다 건너에 북진일도류(北辰一刀流)라는 옛 검술이 있다. 그 창시자는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가르쳤다 한다. "'깨달음'이라는 이름의 괴물은 오직, 다 버리고 초연하게 내던지는 무기로만 잡을 수 있다."

 

아직 미숙한 내게 등단은 그런 식으로, 다소 비현실적으로 찾아왔다.

 

숨을 고르며 새삼 뒤돌아본다. 문학을 배우겠다고 덤빈 날이 어느덧 두 자리 햇수를 넘겼을 때, 내 앞의 시는 노력과 버림 사이에 있었고 초연함과 무덤덤함의 사이에 있었다. 그렇기에 희망이 없어도 캐어낼 순 있었고, 오랜 그늘 속에서도 사라지진 않았다.

 

다시 태어나기 전 하얀 재로 내려앉은 것 같은 지금의 느낌을, 나는 늘 기억할 것이다. 또한 가깝고도 먼 그 간극을 '사이'가 아닌 ''인 것이라고 뜨겁게 한 번 우겨보려 한다.

 

나의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도록 만들어주신 분들, 부족한 내게서 재능보다 노력을 높이 보아주셨을 고마운 분들에게 언제 이 은혜를 다 갚을지 행복한 걱정이 앞선다.

문학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나를 보살펴주신 김석환 교수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권혁웅 조연호 선생님을 비롯한 금요반 모든 시인들, 그리고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문우들에게 이 행복과 감사를 돌리고자 한다. 이젠 내가 이 따뜻한 빚을 갚아나갈 차례일 것이다.

 

그리고 늘 촌스럽지만 피해갈 수 없는 마음. 철없이 문학을 하겠다고 설치던 이 천덕꾸러기 아들에게 단 한 번의 반대도 불만도 없이 끝까지 믿음을 주셨던 부모님께, 차마 부끄러워 표현할 수 없던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행복하게 전하고 싶다.

 

 

 

 

보이저 1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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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입체적인 상상력에 눈길, 수사의 과잉은 아쉬워"

 

시 부문 심사는 예심 없이 심사위원들이 투고작을 나누어 읽고 추천된 작품을 교환해서 읽고 토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신춘문예의 특징이기도 하지만, 난해하고 실험적인 시보다는 서정적 화법으로 일상적 삶의 순간을 포착하는 작품들이 대세를 이루었다. 하지만 독창적인 감수성과 화법이 잘 발견되지 않고, 언어에 대한 자의식 없이 정형화된 감정과 관념을 전달하는 데 그친 익숙한 신춘문예 유형의 작품들이 많아 아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 된 작품은 '그늘말'(박하랑)'연애의 국경'(여성민), '월면채굴기'(류성훈)였다. '그늘말'은 투명한 감수성과 정갈한 언어들이 돋보이는 시였다. 생에 대한 따뜻한 태도와 언어에 대한 맑은 감각이 좋았지만, 함께 투고된 작품들을 고려할 때, 세계에 대한 해석과 상상력이 평면적인 차원에 머무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연애의 국경'의 경우는 발랄하고 독특한 화법이 매력적인 시였다. 다소 거칠게 느껴지는 부분이 없지 않지만, '연애''국경'을 연결시키는 상상력은 흥미로웠다. 그런데 언어와 형식상의 안정감이 떨어진다는 우려를 떨치기 힘들었다.

 

당선작이 된 '월면채굴기'는 우선 그 상상력이 입체적이고 화려하다. 아버지의 병과 생의 이야기를 아버지 몸속의 돌과 두개골과 달 뒤편 돌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발상은 매혹적이었다. 언어를 다루는 능력도 뛰어나며 아버지의 병과 생애를 둘러싼 깊은 시선이 구체적인 이미지를 얻고 있다. 다만 수사의 과잉이 있고, 다채로운 이미지의 구축에 치중하는 작법이 어법 자체의 신선함을 보여주지는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 아쉬움은 앞으로 쓰게 될 미지의 작품들을 통해 극복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시 쓰는 일이 외로움을 무릅쓰지 않고는 불가능한 시대에, 투고해준 모든 분들에게 감사를 전한다.

 

심사위원 황지우(시인) 정일근(시인) 이광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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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는 없다 / 박송이

 

 

우리의 책장에는 한 번도 펼치지 않은 책이 빽빽이 꽂혀 있다

 

15층 베란다 창을 뚫고 온 겨울 햇살

이 창 안과 저 창 밖을 통과하는 새들의 발자국

우리는 모든 얼굴에게 부끄러웠다

 

난간에 기대지 말 것

애당초 낭떠러지에 오르지 말 것

 

바람이 불었고

낙엽이 이리저리 굴러 다녔다

우리는 우리의 가면을 갖지 못한 채

알몸으로 동동 떨었다

 

지구가 돌고

 

어쩐지 우리는 우리의

눈을 마주보지 않으면서

체위를 어지럽게 바꿀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멀미를 조금씩 앓을 뿐

 

지구본에 당장 한 점으로

우리는 우리를 콕 찍는다

이 점은 유일한 우리의 점

 

우리가 읽은 구절에 누군가 똑같은 색깔로 밑줄을 그었다

 

새들은

위로 위로

날아

우리는 결코 가질 수 없는

새들의 발자국에게 미안했다

 

미끄럼틀을 타는 동안

우리의 컬러링을 끝까지 듣는 동안

알몸이

둥글게 둥글게

아침을 입는 동안

 

우리의 놀이터에

정작 우리만 있다

 

 

 

 

201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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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숲에서 종종 길 잃어내 사랑에 대답할 차례"

 

나는 작년 이맘 때 대학 노트에 이렇게 쓴 적 있다. '숲은 만져 본 적 없는 울음의 낯선 천국이다. 숲은 헐벗은 동공이다. 그리고 메마른 바람이 지나치는 언젠가 살아본 그만그만한 표정이다.' 나는 자주 숲길에 들어섰고 숲에 난 길을 따라 무작정 걷곤 했다. 숲은 늘 낯설고 평온했다.

 

종종 숲에서 길을 잃었고 숲길을 한참 걷다보면 어느새 어둠이었다. 숲 어딘가에 퍼질러 한나절 먹먹하게 울고 싶다가도 간혹 숨이 턱턱 막혀왔기에 느리고 길게 호흡해야만 했다. 내가 한 때 메마른 심장으로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고 싶었음을 고백한다.

 

노트에 나를 적는 밤이 짧아지기를 바란다. 나 아닌 다른 여행자의 숲길에서 나 아닌 무수한 여행자들에게 말 걸 수 있는 밤이 오래 찾아 들기를 바란다. 이것은 내가 여태 사랑해 왔던 모든 사랑을 되찾는 작업이 아니라 내가 앞으로 마주할 모든 사랑을 준비하는 과정임을 안다.

 

어쩌다 우리는 이렇게 먼 거리에서 서로의 여행과 마주하는 것일까. 나는 여전히 숲길을 따라 걷는 중이다. 내가 무심결에 지나쳤을 숲길 사이로 한 무더기의 빛이 쏟아져 내린다. 나는 내 사랑에 대답해야 할 의무를 갖고 싶다. 나는 빛의 표정으로 또 다시 살고 싶어진다.

 

한남대 국어국문학과 신익호 지도교수님과 여러 교수님들께, 문예창작학과 김완하 교수님을 비롯한 교수님들께,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만질 수도 볼 수도 없지만 멀찌감치 어떤 절실한 힘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애인에게 감사드린다.

 

 

 

 

조용한 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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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새의 존재에 대한 통찰 돋보여 앞으로의 가능성에 낙점

 

예심 없이 모든 투고 작품에 대한 심사위원들의 숙독과 합평으로 심사가 진행됐다. 시국 탓인지 꽤 많은 작품에서 유행처럼 죽음을 서슴없이 다루는 것이 우려스러웠다. 또한 빈번한 외래어의 사용과 심지어 영어를 그대로 시에 사용하는 것은 21세기 시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

 

심사위원들은 죽음보다는 희망을 가진 작품에 기대를 걸며 '가족의 탄생'(팽샛별), '감독의자'(지석현), '새는 없다'(박송이)를 최종심에 올렸다. '가족의 탄생'은 영화를 보듯 선명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 눈에 시를 들어오게 하는 힘이 좋았다. 하지만 당선작이 되기에는 시가 가지고 있는 강한 산문성이 문제였다. 그런 산문성이 시가 가지는 독특한 맛을 잃게 해 아쉬웠다. 앞으로 가벼워지는 것에 대해 노력해주길 부탁한다.

 

'감독의자'는 신선한 소재의 참신한 작품이었다. 산문시였으나 시의 흐름도 부드러웠다. 하지만 투고한 다른 작품이 그와 같은 무게를 보여주지 못했다. 앞에서 밝혔듯이 모국어로 쓰는 시에 영어를 그대로 쓰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는 것을 당부한다.

 

'새는 없다'는 새의 존재와 상징성에 대한 통찰이 돋보였다. 다른 시들에 비해 긴 길이의 시인데도 불구하고 빠른 속도감에 좋은 점수를 얻었다. 투고자들이 흔히 가진 애매모호함을 극복하는 선명성도 좋았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기에는 힘의 결락이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새는 없다'는 좋은 작품이라는 것보다는 가장 가능성이 높다는 것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자로 대성을 바란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투고자들에게는 다음에도 기회가 있다는 격려의 말을 전한다.

 

심사위원 신경림(시인), 정호승(시인), 정일근(시인 경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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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구두 / 김성태

 

 

그에게는 계급이 없습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좁은 동굴이며

구름의 속도로 먼 길을 걸어온 수행자입니다

궤도를 이탈한 적 없는 그가 걷는 길은

가파른 계단이거나 어긋난 교차로입니다

지하철에서부터 먼 풍경을 지나

검은 양복 즐비한 장례식장까지

그는 나를 짐승처럼 끌고 왔습니다

오늘 나는 기울기가 삐딱한 그를 데리고

수선가게에 갔다가 그의 습성을 알았습니다

그는 상처의 흔적을 숨기기 좋아하고

내가 그의 몸을 닳게 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와 정면으로 마주한 적은 없지만

가끔 그는 코를 치켜들기 좋아합니다

하마의 입으로 습기 찬 발을 물고 있던 그가

문상을 하러 와서야 나를 풀어줍니다

걸어온 길을 돌아보는 마음으로 그를 만져보니

새의 날개 안쪽처럼 바닥이 움푹 파였습니다

두 발의 무게만큼 포물선이 깊어졌습니다

그의 입에 잎사귀를 담을 만큼

소주 넉 잔에 몸이 가벼워진 시간

대열에서 이탈한 코끼리처럼

이곳까지 몰려온 그들이 서로 코를 어루만지며

막역 없이 어깨를 부둥켜안고 있습니다

취한 그들이 영정사진처럼 계급이 없어 보입니다

그가 그에게 정중한 인사도 없이

주인이 바뀐 지도 모르고

구불구불 길을 내며 집으로 갑니다

 

 

 

 

2010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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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눈물의 마운드에 섰다 나는 아직 2군이다

 

홈런을 치지 못한 예비 시인들이 흘림체로 경기장을 빠져나간다. 미안하다. 그 어느 날을 위해 그 어느 날은 패전투수처럼 연필을 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나는 뜨끈뜨끈한 눈물의 마운드에 서있다. 심사위원 선생님이 선발등판을 허락해주셨다. 관중석 한 구석에서 나를 응원하는 그녀가 보인다. 그녀 이름은 김재숙, 어머니다. 보희 누나와 아버지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함성 소리가 들린다. 모자를 벗는다. 고개를 숙여 감사드린다.

 

대형서점에서 시집은 다섯 평의 영토만 갖는다. 식민지적 삶이라고 해도, 나는 시를 떠나 살 수 없다. 내 피는 C()형이고 종이는 피부이기에 서걱거리는 연필을 놓을 수가 없다. 노트를 넘길 때마다 밤바다 소리가 들린다. 검은 모래사장 흰 고래처럼 갸릉갸릉 심연에 쌓여있는 언어를 불러본다. 단어 하나를 잃을까 봐 공포에 떨기를 여러 번, 처절하게 시를 썼고 홀로 외로워했다. 남루해지는 얼굴을 보고 슬펐다면 가난해지는 시를 보고는 분노했다. 이렇게 내가 시인이 되었다. 문학하는 당신이 나를 찾아줬으면 좋겠다.

 

나에게 시는 간절함이다. 짝사랑하는 마음은 문장을 슬프게 만들고, 대상을 그립게 만들고, 행동을 재촉하게 만든다. 타고난 무엇도 절박한 무엇을 이기지 못한다. 부끄럽게도 아직 나는 2군이다. 오늘도 헛스윙이다. 다시 주저앉아 조용히 시를 써야 한다. 진정 왜 시를 쓰는가. 초 단위로 담뱃불이 명멸한다. 내 등은 내가 볼 수 없는 자리다. 시인으로서 내 뒷모습이 슬프지만 아름답게 그려졌으면 좋겠다.

 

 

 

 

[심사평] 일상의 관찰력·꿰맨 자국 없는 표현 미덕

 

심사자들은 응모작을 셋으로 나눠 예심을 본 후에 올린 20편의 작품을 가지고 한 자리에 모여 당선작을 결정하기 위한 논의를 하였다.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정움의 '실종', 이정현의 '빗살무늬토기의 냄새', 김성태(필명 김아타)'검은 구두' 3편이었다.

 

'실종'은 산악 등반을 소재로 하여 극한상황의 고통을 담담하게 성찰한 수작이다. '주인 없는 발자국도 신앙'인 고지대, '짐승의 몸을 가진 바람', 사방에서 채찍을 휘둘러오는 길 등과 같은 자연의 원시적인 힘과 작고 나약한 육체에서 꺼낸 의지를 대비적으로 실감나게 드러냈다. 감정을 잘 통제하면서 종교적인 경지가 느껴질 정도로 강한 극기의 사유를 관념과 감각을 조화시켜 그린 점이 돋보였다.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신석기 사내가 비와 흙과 하늘로 빗살무늬토기를 빚는 과정을 상상한 시다. 오랫동안 보아서 사내의 몸에 충분히 육화된 빗줄기를 흙에 넣는 과정이 재미있게 그려져 있다. 빗살무늬 속에 내재된 기억의 원형을 현대인인 화자의 시점에서 읽어내고 신석기와 현대의 시공간을 빗줄기와 흙 속의 냄새로 결합시키는 상상력이 특히 볼 만하였다.

 

'검은 구두'는 쉽고 평이해 보이지만 구두를 통해 삶을 관통하는 시적 인식을 보여주는 방법은 결코 평이하지 않다. 평범한 사물을 통해 일상의 새로움을 발견해내는 관찰력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꿰맨 자국이 잘 보이지 않는 자연스러운 표현과 그것에 잘 어울리는 유머러스한 어조도 이 시의 미덕인데, 그것은 삶의 다양한 경험들이 오랫동안 육화되었다가 저절로 흘러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세 작품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을 만큼 뛰어났으나, 아쉽게도 두 작품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실종'은 시를 인위적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보여 전체적으로 부자유스럽다는 지적을 받았으며, '빗살무늬토기의 냄새'는 같이 논의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밋밋하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적되었다. 그에 반해 '검은 구두'는 삶에 단단하게 밀착되어 있으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럽고, 작은 것 속에서 의외성을 발견하는 발상도 참신하여,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하며, 우리 시단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길 기대한다. 끝까지 논의되지는 못했지만, '매머드 뼈'(김영각)'프로필'(기리나)도 매력적인 개성을 지닌 가작이었음을 밝힌다. 용기를 잃지 말고 더욱 분발하기 바란다.

 

- 심사위원 김광규, 이시영,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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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럭무럭 구덩이 / 이우성

 

 

이곳은 내가 파 놓은 구덩이입니다

너 또 방 안에 무슨 짓이니

저녁밥을 먹다 말고 엄마가 꾸짖으러 옵니다

구덩이에 발이 걸려 넘어집니다

숟가락이 구덩이 옆에 꽂힙니다.

잘 뒤집으면 모자가 되겠습니다

오랜만에 집에 온 형이

내가 한 눈 파는 사이 구덩이를 들고 나갑니다

달리며 떨어지는 잎사귀를 구덩이에 담습니다

숟가락을 뽑아 들고 퍼 먹습니다

잘 마른 잎들이라 숟가락이 필요 없습니다

형은 벌써 싫증을 내고 구덩이를 던집니다

아버지가 설거지를 하러 옵니다

반짝반짝 구덩이

외출하기 위해 나는 부엌으로 갑니다

중력과 월요일의 외투가 걱정입니다

그릇 사이에서 구덩이를 꺼내 머리에 씁니다

나는 쏙 들어갑니다

강아지 눈에는 내가 안 보일 수도 있습니다

친구에게 전화가 옵니다

학교에서 나를 본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나는 구덩이를 다시 땅에 묻습니다

저 구덩이가 빨리 자라야 새들이 집을 지을 텐데

엄마는 숟가락이 없어져서 큰일이라고 한숨을 쉽니다

 

 

 

 

2009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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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서른인데 세상이 참 아픕니다 살아서 지구를 지키렵니다"

 

이런 날이 안 오는 줄 알았습니다. 전화를 받고 엉엉 울다, 마음 가라앉히면, 또 눈물이 났습니다. 대학 다닐 때, 스쿨버스 안에서 매일 시집을 읽었습니다. ''이란 시창작 모임에도 나갔습니다. 사는 게 즐거웠습니다만, 시를 너무 못 써서 서러웠습니다.

 

제겐 시에 대해 이야기할 동기도, 등단한 선배도 없었습니다. '이 외로움은 내 거야, 동생들에겐 물려주지 말아야 해' 하며 늘 강한 척했는데, 속으론 무너지기 직전이었습니다. 당선한 것보다 '' 동생들에게 희망을 주었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시답지 않은 작품 읽어주신 홍은택, 심재휘 선생님, 죄송합니다. '금요반'의 기둥 권혁웅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께도 몸 둘 바 모르겠습니다. 특히 조연호 '티처'에겐 거듭 감사해야 합니다.

 

겨우 서른인데 세상이 참 아픕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살아서, 지구를 지켜내야겠습니다. 이영주, 이용준, 김한선, 자랑스런 '' 가족, 치열한 '금요반' 식구들, 눈부심 그 자체인 'GQ' 스태프들, 왁자지껄한 '문장의 소리' , 좋은 친구는 나의 영예입니다. 아빠, 엄마, , 당신이 곧 나입니다. 등 두드려주신 박상륭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10년을 매진하면 안 될 일이 없다, 말씀해주신 서범석 선생님, 그 진리가 저만 두고 갈까 무서웠다고 이제 고백합니다. 어느 오후, 대책 없는 제 시를 읽고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이시던 모습이 자꾸 떠올라, 눈물이 납니다.

 

심사위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종이야, 쉼표야, 말줄임표야, 오래오래 미안.

 

 

 

 

나는 미남이 사는 나라에서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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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희귀한 감각과 상상력신인다운 신선함 돋보여

 

시 부문 응모작은 양과 질이 모두 풍성하여 선자들을 즐겁게 했다. 응모작의 경향이 변화하고 있음을 확인한 것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최근 수년 동안 신춘문예나 문예지 응모에서는 젊은 시인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포스트모던하고 전위적인 실험시를 흉내 내는 시들이 많았다.

 

실험정신과 발랄한 어법을 특징적으로 보여주는 젊은 시가 문단에 활력을 준 것은 긍정적이지만, 삶의 현장과 역동적으로 맞물리지 못하고 헛바퀴를 돌리는 듯한 아쉬움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번 응모작들에서는 이런 흐름이 크게 줄어든 반면 삶의 현실을 체감하거나 강하게 끌어당겨 미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늘었다. 이것은 기존의 역량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시적 경향이 변화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최근의 경제적인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이우성의 '무럭무럭 구덩이'와 장예은의 '만월'이다. 이우성의 시는 감각과 상상력이 희귀하고 개성적이며 생기있고 활력이 있다. 목소리도 힘있고 거침없고 속도감과 리듬감이 있어 신인다운 신선함이 돋보였다.

 

장예은의 시는 꿰맨 자국이 보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러우면서도 세련된 섬세함과 발랄함을 갖고 있다. 밝고 싱그러운 서정적 감각도 인상적이었다. 가장 완성도 높은 한 편을 고르라면 주저없이 손이 갈 만한 작품이다.

 

논의를 거듭한 끝에 이우성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함께 응모한 그의 다른 작품들이 편차 없이 고르게 살아있는 감각을 보여주어 앞으로 계속 좋은 작품을 쓸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와 믿음이 컸기 때문이다. 장예은의 다른 작품들은 기복이 있어 끝까지 믿음을 주지 못했다.

 

오윤희의 '뫼비우스의 띠'와 박은지의 '열쇠 도적'도 만만치않은 역량을 보여주었다. 앞의 시는 시사적인 내용을 풍자적으로 재치 있게 드러냈으나 거친 것이 흠이며, 뒤의 작품은 안정적이고 참신한 목소리를 지녔으나 산만하여, 각각 논의에서 제외되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며 더욱 정진하기를 바란다. 뜻을 이루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용기를 잃지 말고 다시 도전해줄 것을 당부한다.

 

- 심사위원 신경림(시인)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교수)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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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창밖, 풍경 빈곳 / 정은기

 

 

철길은 열려진 지퍼처럼 놓여있다, 양 옆으로

새벽마다 물안개를 뱉어내는 호수와

<시골밥상>이니 <대청마루>니 하는 간판의 가든촌이

연대가 다른 지층처럼 어긋나 있다

등 뒤로 떨어지는 태양이 그림자로 가리키는 북동의 방향으로

질주하는 춘천행 무궁화호 열차

지퍼를 채우듯 튿어진 자리를 꿰매며 달려가는 것은 열차의 속도였다

 

기차의 머리가 향하는 방향을 보여주는 것은

긴장을 잃고 곡선으로 휘어지는 구간에서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곳에 자리를 튼 마을이 호수에 기대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제 <가정식 백반>의 가정을 찾아 속도에 몸을 싣고 거꾸로 달린다

이곳에서는 두고 온 먼 곳의 시간을 추억하는 일도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풍경을 관람하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박물관을 찾는 일만큼이나 자본주의적이다

직선의 끝에는 목적지가 있어

마을은 머지않아 먼지의 전시관이 될 것이다

 

곁길로 샐 수 없는 것이 슬프다는 것을 호수는 알고 있을까

튿어진 굴곡을 따라 살을 드러낸 풍경의 허리를 휘감고

돌아가는 기차, 가끔씩 창밖으로

활처럼 휘어지는 기차의 곡선을 본다면

퇴락을 거듭하는 호숫가 옆, 한 마을이 생각날 것이다

 

 

 

 

2008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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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내속에 들끓었던 고민과 갈등에 위안"

 

오래전부터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저자의 약력부터 살피는 습관이 있었다. 그리고 책의 가장 처음에서 남들과 다른 특별한 이력 한두 개쯤 발견하고 나면 어떤 특별함도 없는 나의 이력을 지리멸렬한 것으로 치부해버리곤 했다. 시의 문장은 어떤 비기와도 같은 천재성과 결부되어 있다고 믿었었고 조용히 우리 가족의 기원을 의심해보기도 했었다. 나는 왜 천재가 아닌가하는 치기어린 열등감이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부터 나는 가족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내가 받은 사랑을 나누는 방법을 배우지 못해 늘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서툴렀다. 때문에 너무 쉽게 타인의 상처에 이름을 붙이고 긍정하려했고 뒷전에 물러나서는 슬플 것 없는 내 삶에 대해 불평하기도 했다. 매우 어리석었다.

 

계속되는 낙선의 고배를 마시는 동안 나에게 특별한 재능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시는 특별한 이력이나 천재성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배우게 되었다. 나는 오히려 평범한 내 삶과 무거운 엉덩이와 큰 머리, 굵은 손가락,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무대뽀식의 내 젊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제 한자리에 끝까지 앉아서 오랫동안 응시하고 무겁고 육중한 시를 쓰는 일이 내 체질에 어울린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로 당선소식을 전해 들었던 지난 밤, 아직은 설익은 작품으로 당선된 것에 대해 내 속에서 들끓었던 많은 고민과 갈등에 작은 위안을 삼고자 한다. 무엇보다 부족한 작품에서 가능성을 보아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꾸준하게 오래도록 쓰겠다는 다짐으로 감사드린다. 참된 삶으로 이끄는 시를 쓰도록 격려해주신 김재홍 교수님과 게으름과 나태에 끊임없이 죽비를 내려주시던 박주택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늘 애정을 가지고 시를 보아준 思詩美의 호남형, 학중형 그들보다 먼저 이름을 걸게 되어 미안하다. 경희문예창작단에서 함께 시를 쓰고 있는 재범형, 경섭이, 은지, 규진이 그리고 많은 선후배들, 사랑한다. 아직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 서툴지만 그들에게 하나둘 배우고 있어 매우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리고 당선 소식에 눈물로 축하해주신 우리 김복순 여사님과 아버지 정채용씨, 동생 다금이, 사랑합니다.

 

 

 

 

[심사평] "언어적 감수성·말걸기의 새로움 번뜩"

 

시는 말 걸기다. 시적 대상에게 말 걸기. 하지만 여기에서 그친다면 아직 시가 아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건다는 것은 결국 독자에게 말을 건다는 것이다. 시는 대화다. 그러니 시적 대상과의 대화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독자와의 대화는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수많은 응모작 가운데 한 작품, 즉 새로운 시인을 가려내는 과정은 곧 개성적인 대화 능력을 선별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심사위원들이 최종적으로 여섯 편의 응모작을 논의 대상으로 삼았다. 홍종화의 <투명한 돌밭>, 신희진의 <온난화>, 임재정의 <나를 겨누다>, 임경섭의 <자동판매 김대리>, 박은지의 <뿔의 냄새>, 정은기의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이 가운데 먼저 네 편을 제외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투명한 돌밭>은 비유와 묘사가 탁월했지만 전체적으로 조화를 이루지 못했고, <온난화>는 구성과 전개가 자연스러웠으나 결말이 어색했다. <나를 겨누다>는 단단한 기본기가 눈길을 끌었지만 애인과의 이별과 사과를 깎는 행위가 작위적으로 보였다. <자동판매 김대리> 역시 시적 주체의 행위가 개연성을 갖지 못했다.

 

남은 두 작품은 박은지의 <뿔의 냄새>와 정은기의 <차창 밖, 풍경의 빈 곳>. 삶을 바라보는 시선은 박은지의 작품이 성숙했지만, 표현의 차원에서는 정은기의 작품이 뛰어났다. 결말 처리는 박은지가 우수했고, 도입부는 정은기가 참신했다. 두 응모작은 상호 보완 관계에 있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정은기의 언어적 감수성에 점수를 주기로 했다. 시적 대상에게 말을 거는 방식의 새로움이 독자와의 신선한 대화로 이어진 것이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내는 동시에 최종심에 오른 다섯 분들의 분발을 기대한다. 부디 출발 시점에 연연해하지 말고, 길게 보시기 바란다. 10, 20년 뒤 누가 더 좋은 시를 쓸 것인지는 그 누구도 예측할 수 없다.

 

심사위원 이문재, 정호승, 이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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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펀트맨 / 이용임

 

 

사내의 코는 회색이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사내는 가만히 코를 들어올린다

형광불빛에 달라붙어 벌름거리는

사내의 콧속이 붉은지는 알 수 없다

여자를 안을 때마다

사내는 수줍게 코를 말아올리고 입술을 내민다

지리멸렬한 오후 두시에

사내는 햇빛을 쬐며 서툴게 담배를 핀다

사내의 코가 능숙하게 따먹을

푸르고 싱싱한 나뭇잎들은 없다

계절은 바람과 구둣소리에 쓸려

태양의 서쪽으로 이동했다

구내식당에서 이천오백원짜리 밥을 먹을 때마다

사내는 코끝이 벌개질 때까지 힘껏 코를 들어올린다

버스가 급정거할 때마다

손잡이에 걸린 코를 황급히 움켜쥐며 한숨을 내쉰다

담배연기와 밀어와 휘파람과 잠꼬대

사내의 긴 코 어딘가에서 아직도 바깥으로 흘러나오고 있을

환절기가 되면 사내는 지독한 축농증을 앓는다

가을마다 잎이 다 떨어진 나무 아래 서서

사내는 코로 낙엽을 주워올린다

가지에 올려놓은 잎사귀가 떨어질 때마다,

다시

 

 

 

 

2007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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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희미하게 이정표를 본 기분"

 

털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가 유모차를 밀고 지나가십니다. 형아는 언제 오나, 형아 보고 싶어요, 아이쿠 추워라, 중얼중얼 노래하듯 유모차를 미십니다. 담요에 싸여 눈만 까맣게 내놓은 아기가 그 소리에 벙긋벙긋 웃습니다. 말랑말랑한 손가락을 내밉니다. 그 조그만 손가락 끝에 바람이 감기는 듯합니다.

 

당선 통보를 받던 날 아침에는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습니다. 잠깐 지상구간을 달리는 지하철 창문으로 안개 너머 어렴풋하게 지붕들이 보였습니다. 저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이 안개를 뚫고 한참을 가야 하겠구나, 했습니다. 그리고 점심을 먹으러 일어나다가 당선 통보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직은 한참을 헤매어야 하겠구나 하며 지친 무릎에 힘을 주며 일어나려는데 희미하게 이정표를 본 기분이랄까요. 어리둥절해 앉아있다가 문득 왈칵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단순한 기쁨이 아닌, 두려움이 뒤섞인 설렘이었습니다.

 

시의 집으로 건너가기 위해선 아직 한참을 더 안개 속으로 들어가야 하겠지요. 그 길에서 거대하고 친절한 손가락이 튀어나와 이쪽, 이쪽 하면서 방향을 가르쳐줍니다. 그럼 이제 이 한 발짝이 다시 첫 발걸음이지요.

 

죽음으로 건너가는 것보다 더 멀게만 느껴지는 시의 집으로 가는 길, 중간에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르고 매서운 바람에 손가락 발가락 끝이 다 얼어붙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시를 쓰는 마음이란 유모차를 밀고 형아는 언제 오나, 형아 보고 싶어요, 하고 노래 부르는 일이라 믿습니다. 마음을 바닥에 대고 마음으로 바닥을 밀면서 온몸으로 나아가는 길이라 믿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보다 더 낮게 낮추었을 때, 그 밑바닥에는 연민이 있습니다. 핍진하고 고독하게 연민하는 자, 그 열렬한 사랑이 감히 시인일 것이라 말해봅니다.

 

이 첫걸음을 뗄 수 있도록 모자란 시를 다독여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곧 살아간다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 없이 몸으로 보여주신 차창룡 선생님, 온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속되지 않고 진실한 시의 길을 일러주신 이경림 선생님, 감사합니다.

 

언제나 애정으로 다독여주신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모든 선생님들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시의 나라에 있는 고독한 창틀에 기대어 오늘도 시를 꿈꾸는 뿌리 동인들께 이 기쁨을 돌립니다. 길모퉁이에서 만난 많은 도반들에게 다정한 인사를 건네고 싶습니다. 유미, 정화, 희경, 혜정, 너희들이 있어서 나는 언제나 행복하단다. 정직하게 그리고 열렬하게 살아가는 것을 가르쳐주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동생 욱이가 있어서 저는 오늘도 웃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 영혼과 몸, 그 너머의 무엇까지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저 위대하고 사랑스런 자궁에게 눈물을 바칩니다. 어머니, 사랑해요.

 

 

 

 

시는 휴일도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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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성 시단 상투성 벗어난 독특함 지녀

 

금년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에 임하면서 심사위원들이 가장 기대한 것은 무슨 특출난 개성의 출현이나 세련된 이미지의 조형 능력 같은 것은 아니었다. 다양함이나 분방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한국 시단에 차고 넘친다는 생각이 들었고 적어도 본심에 오른 작품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기량 면에서는 다 어느 수준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박한 차원에서나마 읽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절실함을 간직하고 있는 시,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개안(開眼)을 보여주는 시는 의외라 할 만큼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쓴 사람 자신의 영혼이 충분히 고양되지 못한 가운데 서둘러 마무리된 흔적이 역력한 작품들이 상당수였다. 그런 응모작일수록 절제와 균형이 부족했고 산문적 요설이나 추상적 관념의 나열로 흐르는 경향이 많았다. 고심 끝에 심사위원들은 다음 두 응모자의 작품들로 선택의 폭을 좁히는 데 합의했다.

 

<흰목물새떼> 2편의 작품을 투고한 박현진씨의 경우 언어를 다루는 장인적 기량이 우선 믿음을 주었다. 묘사의 구체성이 살아 있으면서도 신산스런 삶의 한 귀퉁이를 포착해내는 눈길이 범상치 않았다. 특히 투고작 가운데 <부황자국>은 여자의 몸을 공간 이미지를 빌어 생동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었다. <엘리펀트맨> 4편을 투고한 이용임씨의 작품은 기성 시단의 상투형을 훌쩍 벗어난 독특함을 지니고 있었다. 소시민의 일상을 우화적으로 형상화한 이 작품은 평이하고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가시적 지평을 넘어선 다른 세계를 현현시키는 힘을 보여주고 있다.

 

논란 끝에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엘리펀트맨>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모범답안 같은 안정감보다는 아직 미정형이긴 하지만 뭔가 새로운 가능성을 내장하고 있는 듯 여겨지는 이 응모자의 미래를 믿어보기로 한 것이다. 앞으로도 섣부른 잠언의 유혹에 빠지지 말고 보다 긴장된 언어와의 싸움을 주문하고 싶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마음을 전하며 다른 응모자들에게도 건필을 당부하고 싶다.

 

심사위원 김승희(시인ㆍ서강대 국문과 교수) 김사인(시인ㆍ동덕여대 문창과 교수) 남진우(시인 문학평론가ㆍ명지대 문창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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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집 / 김두안

 

 

그는 목수다 그가 먹줄을 튕기면 허공에 집이 생겨난다 그는 잠자리가 지나쳐 간 붉은 흔적들을 살핀다 가을 비린내를 코끝에 저울질 해본다 그는 간간히 부는 동남쪽 토막바람이 불안하다 그는 혹시 내릴 빗방울의 크기와 각도를 계산해놓는다 새털구름의 무게도 유심히 관찰한다 그가 허공을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 떠난 허름한 집을 걷어내고 있다 버려진 날개와 하루살이떼 돌돌 말아 던져버린다 그는 솔잎에 못을 박고 몇 가닥의 새 길을 놓는다 그는 가늘고 부드러운 발톱으로 허공에 밑그림을 그려넣는다 무늬 같은 집은 비바람에도 펄럭여야 한다 파닥거리는 가위질에도 질기게 버텨내야 한다 하루 끼니가 걸린 문제다 그는 신중히 가장자리부터 시계방향으로 길을 엮고 있다 앞발로 허공을 자르고 뒷발로 길 하나 튕겨 붙인다 끈적한 길들은 벌레의 떨림까지 중앙 로터리에 전달할 것이다 그가 완성된 집 한 채 흔들어본다 바람이 두부처럼 잘려 나가고 거미집이 숨을 쉰다

 

 

 

 

2006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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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 같아

 

늦은 저녁 전화 한 통이 걸려오고 머릿속에 달 하나 뜬다

 

뻘밭에 김 말뚝을 다 세우고 아버지와 나는 배를 밀어낸다 갯벌에 종아리를 박고 등으로 민다 섬 사이에 닻을 내린다 깍두기 국물에 밥을 말아먹고 낚시줄을 던진다 환한 수면이 잔잔히 밀려오기 시작한다 달 속에 수수깡찌가 보인다 낚싯대가 휘어진다 배가 출렁거리고 달빛이 끈길 것 같이 팽팽하다 아버지의 가시등이 휘어오른다 달이 뽑힌다 팔뚝만한 농어가 꿈벅꿈벅 아가미를 벌리고 허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고향 섬 임자도를 떠나온 지 오래 되었습니다. 습관처럼 김포 들녘을 걷습니다. 별똥이 논둑으로 사라지고 군데군데 남아 있는 눈이 은하수처럼 반짝입니다. 얼어붙은 논바닥에서 기러기 한 무리 소리 없이 날아오르고 있습니다. 겨드랑이에 바람이 스밉니다. 나는 좁고 판판한 들길이 절벽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 절벽을 기어오르는 희미한 달그림자를 봅니다. 나는 어딘가에 내 그림자 하나 버리러 갑니다. 아버지와 눈빛도 없이 살아가는 어머니 얼굴이 보입니다. 저에게 힘든 길을 안겨주신 심사위원 선생님, 그리고 한국일보에 깊은 감사 드립니다. 김포 지인들에게도 오래 고개 숙입니다.

 

 

 

 

물론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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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 정직하게 읊어내

 

심사위원들이 골라 온 작품은 모두 11편이었다. 응모된 전체 작품 수를 고려하면 뜻밖에도 너무 적은 양이었다. 그것은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한국일보 신춘문예의 시 부문 심사 절차가 지닌 독특성이 고려되어야 할 듯하다. 즉 예심위원이 본심을 겸하는 만큼 아예 예심 단계에서부터 본심에 임하는 각오로 작품을 선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미다. 어쨌든 11편을 두고 예심을 치러 아쉽지만 6편을 탈락시켰다.

 

이여명의 돌을 쪼다정철웅의 철거민이유훈의 저수지에서 경전을 읽다조인호의 알라딘과 코카콜라의 요정이연희의 장독하나 묻어두고김두루의 얼룩말이 그 작품들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 가운데

 

박희진의 햇쑥은 인고의 계절을 딛고 선 초봄의 여린 햇살처럼 따스하고도 빛나는 서정성이 돋보였으나 작품을 구조적으로 맵시 있게 갈무리하는 솜씨가 다소 서툴러 보였고, 또 소품에 그치고 만 것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정지현의 직선의 방정식의 일반형은 곧고도 날렵한 음조를 지닌 의욕적인 목소리와 능란한 은유의 구사가 매력적이었지만, 아직은 저 수사가 소리의 의욕을 충분히 감당하지 못한 듯했다. 작품의 제목을 정하는 데에도 보다 오랜 고민과 세밀한 관심이 필요하다는 조언을 드린다. 배호남의 고래꿈은 구조적으로 매우 안정된 작품이어서 오랜 습작과 훈련의 세월을 읽게 만들었다. 그 점은 함께 출품된 사군자의 꿈같은 시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결정적인단 한 편만을 뽑을 수밖에 없는 심사위원들의 처지에서는 그 결정적인 무엇인가가 부족해보였다. 당선작과 마지막까지 경합한 작품은

 

오선희의 꽁치로서, 구조적 완결성에 있어서 발군의 솜씨를 보여준 작품으로 평가되었다. 실직 가장의 죽음과 구운 꽁치의 이미지를 절묘하게 결합하여 삶의 엄숙함과 핍진함을 형상화한 이 작품이 당선작이 되지 못한 데에는 그러므로 순전히 운명의 여신의 장난이 작용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실망하지 말고 계속 정진하시길 각별히 당부드린다.

 

당선작인 김두안의 거미집은 어떠한 과장된 수사나 현란한 말재간도 사양한 채, 차라리 어눌할 정도로 느껴지는 작고도 여린 목소리로 이 삶과 존재의 미세한 결을 한 땀 한 땀 정직하게 발음해내는 섬세한 내면 감각이 단연 돋보였다. 세상의 말들이 제 가치를 잃어가고 있는 시대에 시의 언어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다시금 일깨워주는 기회가 되었다. 함께 제출된 입가에 물집처럼도 저 우직할 정도의 정직성을 높게 사 아울러 당선작으로 뽑는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드린다.

 

심사위원 김기택 황인숙 김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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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도마 /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 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2005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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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인공눈물 떨구며 웃고 슬펐다"

 

얼마 전 안과에 갔었다. 왼쪽 눈의 각막이 좀 벗겨졌단다. "당신은 눈물이 없습니다." 의사 선생님의 말씀이 눈물이 없는 눈은 쉽게 상처가 난단다. 안과의 처방전대로 약국에서 인공눈물을 샀다. 그걸 자주자주 눈 속에다 몇 방울씩 떨어뜨려야 했다. 당선을 알리는 전화를 끊고 난 뒤에도 인공눈물을 눈 속으로 떨어뜨렸다. 웃기고 슬펐다. 그것은 정말 꼭 한 편의 희극이었다.

 

플러그 빠진 냉장고 속의 고깃덩어리처럼, 두고 온 고향의 집이 머리 속에서 썩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할머니가 없는 빈집, 썩는 냄새가 후욱 풍긴다. 할머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리며 살았다. 시가 당선되는 일이 9급 공무원시험 합격같은 것으로 생각하셨던, 할머니가 지금 곁에 계셨다면 많이 기뻐하셨을 것이다. 9급 공무원 감투를 쓴 나를 자랑스러워 하셨을 것이다. 우습지만 이제, 죄책감에서 아주 약간은 벗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랬으면 좋겠다.

 

고마운 분들이 많이 계시다. 모교의 존경하는 은사님들, 김혜순 선생님과 신수정 선생님께 큰절을 드린다. 부족한 글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에게도 함께 드린다. 곁의 문우들, 우리들의 김점진 조교님, 후배이자 선배이자 친구인 김원, 그리운 시골의 친구들, 서울의 친구들,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러주는 이들,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그 누구보다도 정이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겨울이 다 가기 전에 함께 고향집에 다녀와야겠다. 가족처럼.

 

 

 

 

분홍색 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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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존재론적인 고통 생동감 있게 풀어내

 

당선작을 선정하는 동안, 언어를 다루는 능력과 구성력이 뛰어난 시들이 많아 그 가치를 어디에다 두느냐에 대한 고심이 많았다. 결국 아름답거나 쓸쓸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만이 아닌, 뭔가 고통스러워도 육화되어 있어 속이 후련해지는 작품에 심사의 척도를 두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런 맥락에서 신기섭의 나무도마를 올해의 당선작으로 뽑는다. 존재론적인 고통을 풀어냄에 있어서 고통의 근육을 느끼게 하는 생동감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지가 서로 오가는데 걸림 없어 자연스러웠다.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같은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통찰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겁고 진지한 주제를 형상화하는 솜씨가 시를 오래 써온 장인의 결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을 축하하고, 시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몸을 끝까지 싣기를 기대한다.

 

이번 응모작품들을 통해 한국 시의 현주소를 가늠해보았는데, 예술에 온 정신이 팔려 지극히 자아적인 것에 머물러 있거나 언어를 다루는 세련미에 몰두한 흔적들이 엿보여 보는 이의 마음을 아쉽게 했다. 함께 응모한 심은섭의 북쪽 새떼들몸의 악보를 더듬어의 박신규, ‘대마찌의 조길성, 등도 최종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김정환, 장대송, 함민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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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 / 예현연

 

 

금간 항아리 사이로 그녀와 내가 교차한다

비어있는 것들을 배경으로 그녀는 흐릿하다

先史보다 아득하게 먼지낀 세월이

두터운 유리벽으로 앞을 가로막는다

古代의 여인이 회갈색 미라로 누워있다

유폐된 황녀의 마지막은 고통뿐이었다

벌린 입 속 수천년을 견딘 치아들이 온통 틀어졌다

푸른 비소 알갱이 갈앉은 자기병이 그녀의 유품이다

벽옥 파편들은 멸망한 족속의 文字처럼 어지럽다

지하 전시관에서 부식되는 황녀의 초상

흩어진 채색, 이제는 밑그림만 남았다

낯선 유적에서 마주치는 그녀와 나의 낡은 눈동자

저 자기병에 맺힌 유약은 수천년 전부터 글썽여온 울음이다

그녀도 엇갈리는 因緣 속에서 때론 그 실오라기를

애써 끊으며 살았을 것이다 붉게 힘준 잇바디

고리 끊어진 장신구는 한때 그녀의 저녁을 치장했다

가슴팍에서 사그락대던 벽옥 구슬들은

한순간 쉽게 끊어져 내렸다

멀리까지 굴러가는 구슬을 멍하니 보고 있는 그녀

그러모아도 쥐어지지 않는 것들을

놓아버린 순간이 遺蹟의 저녁이다 불이 꺼진다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만이 어지럽고

출구를 가리키는 비상등은 꺼져버린다

어둠 속에서 모든 금간 유물들이 무너져 내린다

 

 

 

 

2004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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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드러냄과 숨김의 숨바꼭질

 

아카시 나무로 둘러싸인 기숙사에 산 적이 있다. 나무 그늘 때문에 볕이 잘 들지 않는 3층 끝 방에 웅크리고 있으면 낮에도 밤 같고 밤에도 밤 같았다. 혼몽한 시간들 속에서 가끔 눈뜨면 나뭇가지들이 바람불 때마다 창을 끽끽 긁으며 불 꺼진 방을 들여다보았다.

 

긴 시간이 지난 뒤 창을 열자 노랗게 물든 잎들이 수천 수만 마리 나비떼처럼 한밤중을 배경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지독하게 아름다운 한 순간이 나머지 생을 지탱해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따금 그 기억을 떠올려 보는데, 그 때 내가 본 것은 꿈이 아니었을까? 점점 확신이 없어진다. 내가 실제로 본 것과 보았다고 믿는 것 사이의 거리감. 꿈과 기억이 뒤섞이고 꿈과 현실이 뒤섞인다.

 

세상 속에서 나는 늘 낯설고 오래된 꿈을 꾸고 있는 기분이다. 미성숙한 내가 어른의 하이힐을 신고 비틀비틀 걸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낯설음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시를 쓰는 동안 계속, 나를 드러내고 소통하고 싶다는 욕망과 무수한 글자 속에 나를 감추고 싶다는 욕망 사이를 오갔다. 두 가지 욕망의 줄다리기는 아직 진행 중이다.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립고 고마운 가족들, 짧지 않은 세월을 함께 건너온 문학반 사람들, 따뜻하고도 엄격하신 수요팀의 모든 분들, 시와 삶이 일치해야 됨을 가르쳐주신 만호형, 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손잡아준 국화와 단혜, 재미있고 훌륭한 친구 정미, 햇빛 잔잔한 물결 같은 규윤 형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다. 그리고 서툰 글쓰기를 되돌아 볼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 늘 새로움을 일깨워 주시는 최동호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심사평] 시적 묘사의 묘미 체득한 작품

 

시가 당대적 현실을 비켜가지 않고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올해는 유난히도 가족의 집단 자살이나 살해, 사체 유기 같은 우리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소재로 하는 시들이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이런 시의 대부분은 산문적이거나 결론이 뻔한 풍자여서 왜 굳이 시란 장르를 택해서 그런 소재를 다뤄야 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예심을 거쳐 본심에서 20여 명의 작품을 선택한 다음, 다시 4명으로 좁혀 논의했다. 먼저 김륭의 라면은 나쁘다5편은 현실에 있을 법한 사건들을 서사적으로 진행해 나가지만, 그 상황을 시적으로 변모시키는 노련한 솜씨가 돋보였다. 그러나 시인 자신이 나서서 설명하는 부분이나 과장하는 부분이 걸렸다.

 

백윤경의 멜론은 그물을 치고3편은 대상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통해 대상, 혹은 하나의 세계가 숨기고 있는 비의를 천착했다. 시들을 읽고 나면 하나의 멜론이 무덤으로 확장되고, 아스팔트에 페인트로 그려진 사람의 형상이 시지프스처럼 일어서는 것을 목도하게 되는, 이미지의 진행을 따라가는 재미도 만만찮았다. 그러나 간혹 눈에 띄는 상투적 표현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신기섭의 가족사진6편의 시 세계는 모두 달랐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건이나 정황을 묘사함으로써, 결국 죽음에 이르고야 마는 우리 삶의 진한 슬픔을 시 쓴 사람과 공유할 수 있게 만들었다. 시 한 편, 한 편을 구축하는 솜씨도 있었다. 그러나 단 한 편의 밀도 있는 완성작을 선택하기에는 미흡했다.

 

예현연의 유적7편은 시 쓴 사람 자신의 작은 경험 하나로부터 시작된 묘사를 치밀하게 진행하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그 묘사를 통해 일상의 경험에서 채집된 보잘 것 없는 시간과 공간이 조금씩 넓어지고, 의미를 띠기 시작했다. 시적 묘사의 묘미를 체득한 사람의 시였다.

 

같이 응모된 내 창 밖, 고양이도 재미있고 신선한 작품으로 논의됐다. 심사위원들은 응모된 7편의 작품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는 예현연의 작품을, 그 가운데서 시간의 겹침을 무리 없이 소화한 유적을 당선작으로 정하는 데 쉽게 합의했다.

 

심사위원 신경림, 정호승, 김혜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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