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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노인이 지은 집 / 길상호

 

 

그는 황량했던 마음을 다져 그 속에 집을 짓기 시작했다

먼저 집 크기에 맞춰 단단한 바탕의 주춧돌 심고

세월에 알맞은 나이테의 소나무 기둥을 세웠다

기둥과 기둥 사이엔 휘파람으로 울던 가지들 엮어 채우고

붉게 잘 익은 황토와 잘게 썬 볏짚을 섞어 벽을 발랐다

벽이 마르면서 갈라진 틈새마다 스스스, 풀벌레 소리

곱게 대패질한 참나무로 마루를 깔고도 그 소리 그치지 않아

잠시 앉아서 쉴 때 바람은 나무의 결을 따라 불어가고

이마에 땀을 닦으며 그는 이제 지붕으로 올라갔다

비 올 때마다 빗소리 듣고자 양철 지붕을 떠올렸다가

늙으면 찾아갈 길 꿈길뿐인데 밤마다 그 길 젖을 것 같아 새가 뜨지 않도록 촘촘히 기왓장을 올렸다

그렇게 지붕이 완성되자 그 집, 집다운 모습이 드러나고

그는 이제 사람과 바람의 출입구마다 준비해둔 문을 달았다

가로 세로의 문살이 슬픔과 기쁨의 지점에서 만나 틀을 이루고

하얀 창호지가 팽팽하게 서로를 당기고 있는,

불 켜질 때마다 다시 피어나라고 봉숭아 마른 꽃잎도 넣어둔,

문까지 달고 그는 집 한 바퀴를 둘러보았다

못 없이 흙과 나무, 세월이 맞물려진 집이었기에

망치를 들고 구석구석 아귀를 맞춰나갔다

토닥토닥 망치 소리가 맥박처럼 온 집에 박혀들었다

소리가 닿는 곳마다 숨소리로 그 집 다시 살아나

하얗게 바랜 노인 그 안으로 편안히 들어서는 것이 보였다

 

 

 

 

2001 신춘문예 당선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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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언제부터인가 집에 대한 생각이 쾅쾅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한 생각들은 몇 달이 지나도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국 제 자신에 대한 반성이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자리잡은 집이 너무 허술하다는 생각이 새벽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발을 들여놨다가 좁아서 나가버리고, 비가 오는 날이면 빗물 뚝뚝 떨어져 돌아서 버리고, 누구도 오래 머물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래도록 그 허술한 집을 지키고 앉아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허물어진 담을 다시 쌓아주면서, 새는 지붕을 덮어주면서 저의 집을 지탱해준 사람들. 그들 때문에 마음속 집은 아직 허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위해서라도 따뜻한 집 한 채 세우고 싶어졌습니다. 그때부터 시를 쓰는 일은 저에게 집을 짓는 일이 되었습니다.

 

모든 일에 아직 서툴기만 한 저의 집짓기는 언제 끝이 날 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머리칼 허연 노인이 되어도 끝끝내 그 아름다운 집을 이루겠다는 마음 변치 않을 것입니다.

 

부족한 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의 기대도 앞으로 튼튼한 기둥으로 저를 받쳐줄 것입니다. 선생님들께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여러모로 많은 지도와 관심을 베풀어주신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의 강정희ㆍ신익호ㆍ김균태 선생님 외 여러 선생님들, 문예창작학과의 김완하 선생님, 글쓰기의 고통을 함께 했던 청림문학동인회 선후배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누구보다도 부모님께 사랑의 마음을 전하고 더욱 힘찬 걸음으로 걷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끝이 났어요 내일 이야기는 내일 하기로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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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편이나 이번 시 부문 심사만은 그렇지 않았다. 기대가 큰 만큼 그 기대에 부응하는 작품이 여러 편 있었다. 최종심까지 올라온 작품은 김상호의 '그 노인이 지은 집', 김남극의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 정선용의 '달팽이', 박판식의 '장지', 최요기의 '2월의 강' 등 모두 다섯 편이었다.

 

'마른 물푸레나무 한 묶음'은 역동성과 천진성이 돋보였으나 '가련한 생들 아니랴'와 같은 미숙한 표현이 지적되었다. ''이라는 말을 직접 쓰지 않고 생을 노래하는 것이 시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었다.

 

'달팽이'는 달팽이에 대한 생태학적 관찰을 통해 인간의 생태학적 여정을 충실히 그린 작품이었으며 , '장지'는 할머니를 땅에 묻고 돌아와 통닭을 먹는 나와 가족들의 회한과 상처를 깊게 그리고 있었으며, '2월의 강'은 침묵에 대한 가치를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모두 '그 노인이 지은 집'에는 못미치는 작품이었다.

 

'그 노인이 지은 집'은 군계일학이었다. 한 편의 시가 마치 한 권의 책과 같은 질량감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었다. 한 노인이 집에 들어가는 과정, 즉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아무런 무리 없이 균등한 밀도를 바탕으로 통일감을 형성한 점이 크게 돋보였다.

 

특히 서사적 요소에 서정적 요소를 차근차근 잘 어우러지게 한 데서 오는 감동이 커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

 

이번 심사를 통해 심사위원들은 한국의 서정시가 본 궤도에 오른 느낌을 받았다. 한때 과도한 부담으로 느껴졌던 현실참여라는 짐을 이제 비로소 내려놓은 것 같았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자는 부디 노력을 통해서 대성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김남조 김광규 정호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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