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 김일영
들이 깨어져 모래알이 되고
조개들은 그 빛의 알갱이로 집을 지어
파도에 마음을 실어 보냈다가
다시 불러들이던 섬
밥 묵어라
어둠이 석양 옷자락 뒤에 숨어
죄송하게 찾아오는 시간,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
달빛 계곡 꿈을 꾸면
쪽배가 저보다 큰 텔레비전을 싣고
울 아버지 하얗게 빛나는 이빨을 앞장세워 돌아오듯
이제 다친 길을 어루만지며 그만 돌아와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
여린 삐비꽃을 씹으며
애들 소리 사라진 언덕에 앉아 있으면 석양은
머리가 하얀 사람들이
애벌레처럼 담긴 마당에 관절염의 다리를 쉬다 가고
빌려서 산 황소가 다리를 꺾으며
녹슨 경운기 쉬고 있는 묵전을 쳐다 보는 섬으로
늙은 바람이 낡은 집들을 어루만져주는 고향
그대가 파도소리에 안겨 젖을 빨던
그 작은 섬으로
* 묵전: 묵혀두어 잡초가 무성한 밭
[당선소감] "굳은살 연해지지 않게 매진"
주소를 잃어버린 내 몸 속의 캄캄한 골방에 감기 바이러스를 눕혀두고 집주인 할머니처럼 오래된 냉장고 코드도 뽑고 잠이 들었다. 긴 잠을 잤다. 그런데 어떤 목소리가 그 침침한 잠 속에서 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어둠이 이미 방안에 살얼음처럼 깔리는 시간, 아직 내 몸에 꿈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어 서둘러 그것을 털어내느라 잠시 당황했었다. 감기 바이러스도 잠결에 놀라 캄캄한 골방 벽에 이마를 부딪쳤는지 잠시 잠잠하다.
그 동안 나는 이렇게 서둘러 당선 소감이라는 것을 쓴다. 그간 걱정거리만 되던, 이 소식에 기뻐해줄 사람들의 얼굴이 슬라이드 사진처럼 지나갔다. 전화번호를 누르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왼쪽 손바닥으로 핸들을 좌우로 필요 이상 돌리며 운전을 하던 초보 때가 생각난다. 그런 시기가 얼마 지나고 운전대에 자주 닿던 중지 못 미친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겼다. 마찰에 의해 가끔 따끔거리기도 하던 자리.
그 굳은살을 누구에겐가 자랑을 해 보이기도 하던 기억이 생각난다. 나에게 시 쓰는 일은 살아내면서 생긴 기억이나 상처가 묻어 언어들이 딱딱하게 박힌 자리를 더욱 못살게 구는 일이었다.
오만한 얘기지만 마지막에 두 번 떨어져 혼자만 시인으로 2년을 살다 보니 굳은살은 이제 처음부터 내 살인 듯이 친근하다. 그 굳은살이 연해질 틈이 없도록 삽으로 산도 옮기고 솔가지 같은 손들도 열심히 잡아보아야겠다.
먼저 시를 써 가는 자리가 술에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으셨을 많은 분들께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제가 먼저 당도해서 썩고 있을 테니 언제 오셔서 빛나는 한 그루의 과일나무를 심어주시기를….
저 같은 무지렁이를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단단한 발판이 되어준 중앙대학교와 그곳의 교수님들, 신상웅 선생님, 김형수 선생님 그리고 이영진 선생님, 모국어의 장래를 위해 한 생을 바치셨던 이 땅의 많은 시인들, 이 자리도 영광된 자리라고 한다면 그분들이 팔 할의 지분을 갖고 계심을 내 오만도 부정하지 못할 것이다.
짜증스러울 법한 내 얘기들에 귀를 빌려주며 보이지 않는 힘이 되어준 여러 문우들, 이경에게도 고마웠다는 말을 전한다.
볼품없는 제 시를 믿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더 좋은 시로 보답드리겠다. 그리고 시를 살다 가신 것으로 추정되는 아부지와 섬에서 홀로 늙어가고 계신 어머님과 형과 누이들에게 고마웠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전한다.
국민들의 역동적인 힘으로 새 대통령이 당선됐다. 나 또한 좀 더 희망의 편에서 시를 써가고 싶다.
[심사평] 특별한 안목·가능성 높이 평가
예심 과정 없이 우리는 응모작 수천 편을 직접 다 읽어야 했다. 이렇게 많은 응모작 앞에서 우리는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 ‘신춘문예’라는 아름다운 계절병이 도지고 있다는 것, 누군가에게 읽혀지기를 원하는 시의 의지가 폭넓게 퍼져 있다는 것에 경이감과 함께 의아스러움을 느낀다. 그만큼 우리 사회의 시적 리터러시가 높다 하겠다.
이는 시가 과거의 유물이거나 소수 마니아를 위한 장르로 치부되고 있는 세계 여러 나라의 경우와 달리, 우리가 이례적으로 누리고 있는 시의 축복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분에 넘치는 시의 복지가 한낱 거품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응모작들을 읽어가는 동안 떨쳐버릴 수 없었다는 것도 우리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응모작의 태반이 이것도 시라고 생각하고 쓴 것일까 하는 당혹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워드 프로세서의 보급으로 곧바로 눈 앞에 뜨는 활자체가 시 아닌 것도 시처럼 보이게 하는 착각을 주기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전반적으로 시를 너무 쉽게, 혹은 함부로 쓴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엇다. 아니면 지금의 우리 삶이 그렇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어떤 것이 시이기 위해서 가져야 할 제한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시를 이렇게 쓸 수밖에 없는 어떤 내적 필연성을 갖고 있는가? 이 두 물음을 견딘, 김일영씨의 ‘삐비꽃이 아주 피기 전에’와 고경희씨의 ‘겨울단상’, 그리고 차주일씨의 ‘삼베옷에 밴 땀내’를 최종심에 놓고 우리는 고심하였다.
차주일씨의 ‘삼베옷…’은 삶에서 우러나오는 체험의 심도가 있어보인다는 점이 눈길을 끌었다. 꾸며서 쓴 것 같지 않다는 것도 장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시가 어떤 시상을 향해 응축되기보다는 풀어져 있으며 그것의 구성에 있어서 다분히 평면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고경희씨의 ‘겨울단상’은 그의 다른 시편들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으로 시를 유지시키는 고른 수준을 획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평가받을 만하다.
자신의 어떤 정신적 외상과 관련된 듯한, 어딘지 병적인 상흔들이 드러나기도 하지만 그것을 시의 무늬로 그려나갈 줄 안다는 점도 돋보였다. 그러나 그의 시가 단아하고 안정감을 준다는 것이 우리를 불안하게 하였다. 그것은 금방 소품주의(이것은 시가 짧다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의 한게에 안주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완성도는 다소 떨어져 보이지만 지금 씌어진 것 그 이상의 시, 호흡이 긴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 때문에 우리는 김일영씨를 당선자로 결정하는 데 동의하였다.
‘슬쩍 따라온 별이/ 가장 넓은 밤하늘을 배불리 빛내던’과 같은 구절에서 보듯 그는 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이 되게 하는 특별한 안목을 터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 시의 후반부나 그의 다른 시편에서 드러나듯 언어의 과부하가 걸려 시적 인식이 비전도체처럼 막혀버리는 과욕을 앞으로 그가 조절해야 할 것이다. 정진을 바란다.
심사위원 김광규, 정희성, 황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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