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글루 / 김현욱
포스코 사거리 한 귀퉁이에 이글루가 들어섰다
북극곰의 어금니로 말뚝 박고
푸르뎅뎅한 얼음천막으로 서슬 퍼런 집
이마에 검은 띠 두른 에스키모 인이
결가부좌로 들어앉아 있다
불의 경계 밖으로 쫓겨나면
누구나 날고기를 먹어야 하는 법
이따금 확성기에서
비정규직 철폐라는 낯선 낱말들이
대낮 오로라로 펄럭거리다가 주저앉는다
이곳은 불의 나라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경고에
용광로의 교시(敎示)를 받드는 곳
불씨를 가진 사제(司祭)만이
수많은 목숨의 도가니마다
불 지필 수 있는 땅에
고드름처럼 거꾸로 매달려 있는
에스키모인이 천천히 녹기 시작한다
이글루를 둘러 싼
거대한 불의 바리케이드 틈으로
차가운 희망이 뚝뚝 떨어질 것이다
얼음불꽃으로 타올라 세상 덥힐 때까지
입동
나뭇잎이 링거액처럼 뚝뚝 떨어지고 있다 눈에 띄게 수척해진 늦가을, 하늘의 심전도를 체크중인 저 오래된 청진기는 누구의 귀에 닿아 있을까 열 십 자 대열로 날아가던 철새의 무리가 부르튼 늦가을의 발바닥에 반창고로 붙어 있다 엎드려 누운 산의 어깨마다 수북이 꽂혀 있는 약침(藥鍼) 바라보며 누군가 거대한 휠체어를 밀고 간다
입구가 환하다
귀향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불안했다
세상으로부터 단 한 톨의 희망조차 배급받지 못하고
빈 손 빈 가슴으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오르막이다
그 오르막 끄트머리에 꿇어앉은 집
늙은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빈 소주병처럼 널브러져 있고
오래 비어져 있던 누이의 방
너무 일찍 세상의 비린내를 맡았던 것일까
허물처럼 벗어놓은 너의 희디흰 교복만
그리움처럼 개어져 있는데
너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느냐
가슴으로만 메아리치는 서러운 안부가
저 밀려오는 어둠의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다
늦은 밥상을 물리며 아버지가 내놓으신 새 학기 등록금
그 구겨진 만 원권 지폐 속으로 내 삶보다 무겁던
25mm 철근이 아버지의 어깨 위에서 휘청거리고
먼 서울의 사하라
내가 찾던 진실과 희망의 오아시스는
늘 신기루로 떠돌아 목마른 영혼
갈 길 모르는 순례자여
낙타 한 마리 없이 이 젊은 날의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날 밤,
늙은 낙타 한 마리와
내 누이를 닮은 아랍여인이 꿈속의 나를 이끌어
사하라를 지나
저 푸른 사랑의 바다 지중해로
한 걸음 한 걸음 인도하고 있었네
겨울역
小雪
언제부턴가 박씨가 보이지 않았다 고향이 태백이라며 배추농사 짓는 홀어머니 걱정에 자주 소주 나발을 불던 박씨
冬至
노숙에도 룰이 있다 따뜻한 바람 솔솔 나오는 역 대합실 화장실 주변 통로는 대빵들의 차지다 지하도 구석 자리는커녕 텃세에 밀려 수원역으로 쫓겨 내려간 노숙자는 그날 밤 한 번 더 서럽게 울었으리라
밤새 한파 몰아친 아침이면 대합실 의자에 웅크린 채로 지하도 구석에 엎드린 채로 가린스럽던 삶의 끈 붙잡고 복사꽃 흐드러진 고향집 사립문 활짝 열어젖히는 꿈 깰까 봐 절대로 그들은 서로를 먼저 깨우지 않는다 이따금 구급차가 와서 얼어 죽은 노숙자를 싣고 가는 날이면 기차는 연착을 하곤 했다
재활센터로 들어갔던 몇몇은 일주일 만에 돌아와 깡소주를 마셨다 지나가는 사람 붙잡고 구걸하거나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철도 공안과 늘 실랑이가 벌어졌다
광장의 비둘기를 모두 잡아먹어야 이곳을 떠날 수 있으리라
大寒
용산역에서 전자상가로 가는 굴다리 앞에 노숙자들 긴 줄 서있다 용산역 광장 무료급식이라고 쓴 1톤 탑차의 문이 열리자 구수한 된장국 냄새가 하느님보다 먼저 그들을 싸안는다
역전 시계탑 긴 시침이 막 정오를 알리는 순간 용산역 대합실에 말쑥한 박씨가 선물꾸러미를 들고 탑승구 전광판을 눈부신 듯 바라보고 있는 게 보였다
휴면기休眠期
환경 미화원이 도심 가로수에
잠복소(潛伏所) 설치하고 있다
볏짚으로 만든 잠복소는 겨우내
오갈 데 없는 애벌레 불러 모아
하루 6000원에 반 평짜리 희망 임대한다
쪽방에 쪼그리고 누워
날마다 사랑의 집에서 배달된 도시락
관 뚜껑처럼 밀어 올리는 애벌레는
욕창과 바퀴벌레까지 식솔로 딸린
4층 구석방의 고약한 침묵으로
다짐하듯 입가심 한다
백내장 앓는 뿌연 창밖으로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라는
플래카드가 떨켜처럼 모질고
소식 끊은 3남매의 어릴 적 사진은
더 이상 광합성 하지 않는다
봄꽃 피면
철거 용역반이 들이닥친다는 소식에
이미 마음의 짐 부려 놓은 잠복소의
애벌레는 뿌리로도 가닿지 못하고
꽃가지로도 가닿지 못한 불임의 시절
우두커니 바라보다 번데기처럼 갇힌다
그 모습 줄곧
곁눈질하던 휴면기의 가로수
보채는 꽃망울의 등 토닥거리며
좀 더 자라고 아직은 깰 시간이 아니라고
조용히 뿌리의 방문을 닫는다
이듬해,
유난히 봄소식이 늦다며
잠복소 소각하던 환경 미화원
불꽃 속에서 호랑나비 한 마리
팔랑팔랑 날아오르는 광경에 눈을 비빈다
그때서야 비로소
참았던 숨 내쉬며
꽃망울 밀어 올리는 가로수의 눈동자가
겨우내 더욱 깊어진 것을 본다
오동도
이혼 조정 위원회에서
우리에게 준 마지막 시간은
한 달, 그러나
아무 것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멀고 먼 옛날 오동도에 한 여인과 어부가 살았는데 도적떼에 쫓기던 여인이 벼랑 창파에 몸을 던져 정조를 지키고 이 사실을 뒤늦게 알고 돌아온 남편이 오동도 기슭에 정성껏 무덤을 지었는데 북풍한설이 내리는 그 해 겨울부터 하얀 눈이 쌓여 무덤가에 동백꽃이 피어나고 푸른 정절을 상징하는 신이대가 돋아났다는,
전설은 여기까지다
아내가 이혼의 벼랑으로 몸을 던져
지키고 싶은 건 무엇이었을까
누군들 시간의 도적떼를 피할 수 있으랴만
내 마음의 텅 빈 무덤 가
난데없이 눈시울이 붉어진 동백꽃
해풍의 모진 음성에
툭, 툭 꽃대를 떨어뜨린다
잘가라, 아내여
공소시효가 다 된 사랑이여
뿌옇게 먼지 앉은 시침(時針) 같은 신이대
째각-째각 새로운 사랑을 찾아 돌아가는 소리
비로소 겨울 오동도에서 듣는다
산불
그는 망나니다 백발성성한 노송의 머리채 싸잡아 넘어뜨리거나 산짐승의 보금자리 쑥대밭으로 만드는 일쯤은 심심풀이다 지난 봄엔 고로쇠나무가 그토록 연모하던 산목련을 겁탈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이 더 예쁘더라며 이 산 저 산 떠벌리고 다니는 통에 산목련은 함박웃음 잃고 숨어 버렸다 그 후 지리산 어딘가에서 제 가슴에 눈물구멍 뚫어 흐느끼고 있는 이가 고로쇠나무를 닮았다고 한다
죽음만 무성하다 그가 지나간 자리는 집집마다 조등이 걸리고 문상객은 타닥타닥 쩍 이상한 곡소리 낸다 그럴 때마다 상주는 한 줌 재로 남은 문상객 쓸어 담아 그가 지나간 길 위에 뿌린다 아무도 그가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 들리는 풍문으로는 바람이 키운 자식이라고 한다 보잘 것 없는 자신을 일으켜 세워 세상을 향한 분노와 광기를 가르쳐 준 바람을 그는 한없이 사랑하고 있다
너무 오래 된 ( )
-괄호 안에 들어갈 낱말은?
미국제 소가죽으로 만들었다는 ( ) 태평양 고래힘줄보다 질긴 ( ) M-16 아니면 시레이션으로 무두질한 ( ) 곰팡이 쓸고 악취 나는 ( ) 아홉살 미진이 자궁 찢어지던 ( ) 한강 독극물 방류사건 앨버트 맥팔랜드 뻔뻔하게 앉아있는 ( ) 장갑차 아래 질질질 깔려죽은 미선이 효순이 여리디 여린 살점들 내장들 아직 거득거득 묻어있는 ( ) 핏물들 점점점 젖어 들어가는 ( ) 우리들의 부끄러운 괄호 속에 너무 오래 된 ( )
불꽃 디자이너
불꽃 쇼가 시작되고 첫 번째 폭죽 터지는 순간 자궁 빠져나올 때 보았던 불꽃 기억하느냐며 희나리 같은 남자가 물었다 수시로 내 머리 위에서 우윳빛 불씨 사정하던 땔나무가 아버지의 것이었다면 아궁이 속에서 완전히 연소해버린 나는 한 덩이 숯이다 밥상 뒤엎을 때마다 튀어 오르던 스파크가 엄마의 머리채로 옮겨붙었던 첫 불꽃 쇼는 불행하게도 관객이 없었다 세상의 모든 화약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번갯불처럼 강렬할 줄 알았던 꽃잠이 불량품 폭죽처럼 피씩 바람 꺼지는 소리 내며 밤바다로 사라지던 무렵, 스무 살이었다 불쏘시개로 마구 내몰리던 시절 누군가는 제 몸에 불씨 그어 한 줄기 불꽃으로 생을 마쳤고 대개는 고시원으로 고향으로 위태로운 불씨 옮겨 연명하고 있었다 이따금 광장으로 몰려나온 수많은 촛불이 피었다 지고 사람의 망루에서 칼춤을 추던 불꽃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뱀눈을 한 불꽃의 사제가 대지 깊숙이 화약을 박아 넣으며 단군 이래 최대의 불꽃 쇼를 장담하는 동안 나는 자궁 빠져나오며 보았던 불꽃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사실 한 덩이 숯으로 태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것들이 내 밑에서 지펴져야 했던가 제 안에 이미 한가득 모아놓은 생의 축포들 밤하늘에 부릅뜬 저 불꽃의 눈동자에 남김없이 들키는 순간 아, 목숨이란 자궁에서 쏘아 올려진 폭죽이라는 걸 고개 숙일 때마다 어김없이 보이던 불꽃의 추진력으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아름다운 폭발을 위하여 아직도 날아오르는 수천수만의 불꽃 디자이너들 뇌관 젖힌 제 불꽃을 찾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고독사孤獨死
악취 나는 부고는 얼마나 호소력 짙은가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받을 첫 조문弔問의 설레임, 그는 분명 외마디 비명 지르며 뛰쳐나가겠지만 금세 제복 차려입은 조문객의 종종걸음으로 아파트 복도는 부산해지리라 살아서 찍지 못한 영정사진은 비로소 찍으리라 플래쉬가 터질 때를 위해 미리 감은 눈은 얼마나 지혜로운가 기독채널에 맞춰놓은 텔레비전에선 끊임없이 찬송가가 울려 퍼지고 최후의 순간까지 납세의 의무 다했을 자동이체의 흔적이 내 유언을 대신하리라 알맞게 문드러졌을 살갗마다 들끓는 구더기로 염습殮襲 끝내고 콘크리트로 짠 아파트관棺 속에 누워 독야청청獨也靑靑 한 그루 오동나무를 생각하리라
김현욱
1977년 경북 포항 출생
대구교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7년 진주신문 가을문예에 ‘보이저 氏’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 시작
2010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동시 당선
포항문학 및 <푸른시> 회원
제9회 시와창작 문학상 발표
본선에는 모두 7인의 원고가 올라왔다. 시집 일곱 권의 분량을 읽어야 했다. 발행인 말이, 회를 거듭할수록 응모열기가 더해간단다. 좋은 일이다.
일곱 분 모두 ‘언어가 시로 불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기초적인 조건’을 잘 이해하고 있었으나, 전체적으로 볼 때 우려를 자아내는 두 가지 상극된 특징에서 아주 벗어나진 못했다. 따라서 이번 선정은 이 두 가지로부터 가장 크게 벗어난 분을 고르는 일이었다.
하나, 맥락이나 미적인 논리를 무시한 느닷없는 비유와 상징을 사용하면서 이를 시인의 특권인 양 여기진 않았는지 응모자들은 생각해 주기 바란다. 이 현상은 기성 문인들의 책임도 크다 하겠다. 하지만 아름다운 여인도 흠결은 있기 마련이다. 따라 하기 편하다 하여 그 흠결까지 따라 해서야 되겠는가. 공부하고 또 공부하자.
또 하나, 이미 수천수만 번 활용되어 일상어로 쓰여도 상한 냄새가 나는 생각과 표현을 시어로 삼지 않았는지 생각해 주기 바란다. 시는 메타포라는 말이 있다. 서로 무관해보이기까지 한 대상들이 시인의 밝은 눈과 뜨거운 가슴을 거쳐 하나로 자연스럽게 융화됨을 보는 일은 시 읽기의 첫째가는 즐거움이다. 인식에서든 표현에서든.
한국사회의 ‘문단’은 기실 딱히 존재하는 무엇이라기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다양한 모임들이 서로의 일부를 공유하는 형국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등단’이라는 낱말을 사용해 문인 삶을 시작했다는 프로필을 삼지만, 이 또한 현실을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양질의 작품을 많을 출산하는 문단에 등단한 자와 내놓는 족족 말의 쓰레기인 문단은 공유하는 부분이 거의 없다. 등단이 향후 작품세계의 발전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본선까지 올라온 응모자 다수가 소위 등단 절치를 한두 차례씩 겪은 분들이기에 노파심에 드리는 이야기다.
시와 창작 문학상의 심사는 ‘시집을 상자할 만한가?’ 하는 질문에 ‘이 정도면’의 느낌을 주는 분을 고르는 작업이다. 따라서 심사자의 취향이나 선호도보다는 30~40편으로 보여주는 응모자의 ‘세계’가 중요함을 밝혀둔다. 모든 예술이 다 그러하겠지만, 시 또한 자기 세계를 찾아 세우고 허물고 다시 세우는 일이 미덕이다.
7인 가운데, 가장 끝까지 겨룬 두 사람은 김현욱 씨와 주선화 씨였다. 주선화 씨는 심사평의 앞부분에 밝힌 두 가지 우려에서 본인이 얼마나 벗어났는지 스스로 점검하는 시간을 갖기를 따로 청하는 바이다. 시집 출간은 그 때 해도 늦지 않다. 김현욱 씨는 시집을 출간하고 홀가분함과 후회를 동시에 체험해볼 때가 되었다고 보기에 추천했다. 조금 기쁠 것이며 크게 후회할 것이다. 그만큼 또 한 번 발전할 것이다. - 심사위원 : 양영길, 임정일, 유용선(대표 집필)
당선 소감
삶. 사람. 문학 사랑.
당선 연락을 받고 문득 대학 시절 몸담았던 문학회 구호가 떠올랐다. 자신만만했고 무엇이든지 사랑할 수 있을 것 같던 시절의 구호였다. 하지만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가 되는 아이러니를 겪으며 견디며 그것은 까마득하게 잊혀갔다. 그런데 오늘, 내 안에 잠들어 있던 희열을 일깨우는 한 소식을 들었다. 이른 봄, 얼음이 쩡, 하고 갈라지듯 내 오랜 나태와 게으름의 동토에도 한 줄기 햇살이 내린 기분이다. 고개를 못들만큼 부끄러운 시작(詩作)이지만 그래도 나는 다시 시작(始作)할 것이다.
부족한 작품을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리며 지역에서 함께 활동하고 있는 <푸른시> 동인과 포항문학 선생님들에게도 고개 숙여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무엇보다 올 10월, 출산을 앞둔 나의 아내와 뱃속에서 함께 기뻐하고 있을 ‘은유’에게 이 기쁨의 전부를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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