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조치원(鳥致院) 지나며 / 송유미


밤열차는 지금 조치원을 지나가고 있는 중이다

조치원이 어딘가, 수첩 속의 지도를 펼쳐보니

지도 속의 도계와 시계, 함부로 그어 내린 경계선이

조치원을 새장 속의 새처럼 가둬놓고 있다

나는 문득 등짝을 후려치던 채찍자국을 지고

평생을 떠돌던 땅속으로 들어가서

한 점 흙이 되어 누운 대동여지도 고산자를 생각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었던 사나이, 그가

살아서 꿈 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 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몇 달째 가뭄 끝에 지금은 밤비가 내리고

논바닥처럼 갈라진 모든 경계선을 핥으며

비에 젖은 풀잎들이 스적스적 일어서고

나는 불우했던 한 사내의 비애와

상처를 품고 앓아 누운 땅들을 생각한다

대숲이나 참억새의 군락처럼, 그어질 때마다 거듭

지워지면서 출렁이는 경계선을 생각한다

납탄처럼 조치원 역에 박힌 열차는 지금

빗물에 말갛게 씻긴 새울음 소리 하나를 듣고 있는 중이다






인공눈물


차를 몰다가 엔진이 꺼져버린 것처럼

눈물이 말라 모래알갱이가 들어간 것처럼

눈물이 말라서

내 몸이 사막처럼 쓸쓸해서

인공 눈물 약을 사러가는

풀섶 우거진 길로 접어들 때

스르르 맴맴맴 풀벌레들이

한 트렁크씩 눈물 탱크를

등에 지고 울어대는군요.

절친한 친구가 죽은 영안실에서도

잘 나오지 않는 눈물 때문에

참으로 비참했던 기억이 있었지요.

사람은 풀벌레처럼 시시때때로 울어야 인간적이죠.

그러나 내 귓속으로 누가 모래알을 잔뜩 집어넣는지

인공 눈물 약 한 병으로는 어림이 없죠.

울음은 나약한 자의 것, 슬픔은 감상주의자의 것,

오감이 삭제되어 마네킹처럼 깨끗하게 살았지만,

아, 그리운 슬픔, 아 그리운 눈물,

찌르르 스르르 맴맴맴

풀벌레 울음소리를

한 탱크 귓속에 주유하면서,






풀씨의 꿈


끝까지 몰려봐라 끝까지 몰리면 누구나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는 예각의 귀퉁이를 이룬다.

얼마 전까지 앵벌이 꼬마가

두 손을 벌리고 앉아 있던 육교

계단 한 귀퉁이에 흙무더기가 도보록하다.

아이는 어디로 가고, 포장도로밖에 없는 이곳에 웬 흙무더기인가

그제사 지하철 공사장에서 끓어오른 먼지와

오르내리는 사람들 신발 바닥에서 떨어져 내린

흙부스러기를 떠올린다, 차량의 분진과

잠시 앉았다 떠오르는 황사를 끄집어내려

비바람에 쓸어 모았을 귀퉁이, 건조한 날이면

애써 모은 흙알갱이들이 쉬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지나가면서 뱉어낸 가래침방울까지 달게 받아먹었으리라

뿌리내릴 곳을 찾지 못해 발 동동 구르며 떠돌던 씨앗 하나를 품고

떨어져 내리는 치욕으로 기꺼이 목을 적셨으리라

통행에 방해가 된다고, 거무튀튀한 흙빛 낯짝이 못내 거북하다고

슬며시 고개를 돌리던, 스쳐 지날 때마다

포장도로만 딛고 온 발목 께가 자꾸 슬며시 욱신거려오던 그곳

오늘 아침 어린 풀잎이 하나 불쑥 고개를 내밀고 있다.



 

송유미

서울 출생

중앙대 예술대학원 수료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수주문학상 수상

평화신문 신춘문예 '동극' 당선

 

 

 

 

부재의 건너편을 향한 시선


  제3회 '시와창작' 문학상은 비록 빈번하게는 아니었을지라도 그 동안 문단의 몇몇 지면을 통해 작품세계를 드러내준 시인 송유미의 투고작으로 결정했다.

  "살아서 꿈꾼 지도 속의 세상과 죽어서 꿈꾼 지도 밖의 세상은 어떻게 다를까"

  그의 200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조치원(鳥致院) 지나며'에 들어있던 한 구절이다. 그 질문에 앞서 그는 조치원이 지도 속의 경계선들에 의해 새장 속의 새처럼 갇혀있다고 말한다. 조치원이 고산자(古山子) 김정호의 출생지인 것도 아니고, 시의 곳곳에 등장하는 새의 이미지로 보아 그는 아마도 '새가 다다르는 마을'이란 뜻의 지명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시는 이후 그가 발표하는 시편의 조감도 역할을 하고 있다.

  송유미의 시선은 이상하리만치 후미진 곳이나 무언가 있었다가 없어진 흔적을 향한다. 뭔가 궁지에 다다른 대상을 보거나 생각할 때 창작의지가 발동하나 보다. 늙음과 부재는 그의 시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중심 제재이며, 그것들을 새와 풀과 흙과 눈물 따위가 조연처럼 등장하는 시편이 많다. 특히 그의 시를 읽으면서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요소는 시세계에 묻어있는 불교적 관념과 색채인데, 그로 인해 그는 존재 이전과 부재 이후를 다루다 빠져들기 쉬운 대책 없는 절망을 벗어나곤 한다. 희미해져가는 세상 속에서 새로이 못을 박으며 신의 자리를 지켜 나가야할 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심금은 그래도 꾸준히 울리고 있다. 작은 풀과 그보다 더 작은 풀벌레들과 새둥지를 우편함삼아 먼 곳과 교신하는 새와 다양하게 변주되는 눈물과 지고 나서도 이듬해면 반드시 도로 피어나는 꽃들과 일상에서 만나는 생불들을 통하여…….

  '풀씨의 꿈'은 이렇게 시작한다.

  "끝까지 몰려봐라 끝까지 몰리면 누구나 / 더 이상 밀려날 수 없는 예각의 귀퉁이를 이룬다."

  하지만 '앵벌이 꼬마가 두 손을 벌리고 앉아있던 육교'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던, 스쳐 지날 때마다 / 포장도로만 딛고 온 발목 께가 자꾸 슬며시 욱신거려오던 그곳'이지만 시의 말미에 이르러선 결국 '오늘 아침 어린 풀잎이 하나 불쑥 고개를 내'미는 곳이 된다.

  우리가 주목하는 부분은 이 점이다. 막무가내 억지스런 희망이 아닌 시적인 논리와 인식이 뒷받침한 힘에서 비롯된 희망을 생산하는 것! 우리는 부재의 건너편을 향하는 그의 시선을 소중히 여긴다. 시대가 급속도로 바뀐다고 하여 시인에게 곡비(哭婢)의 역할과 예언자의 소명이 사라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수상을 축하하며 앞으로 왕성한 활동을 기대해 본다.

                                                            

 - 시와창작 심사위원단




당선소감


  당선 연락 전화를 받고 문득 베트남의 오래된 노래를 흥얼거렸다.... 얼마나 많은 벼가 논에서 자라야 할까/ 얼마나 많은 강물이 굽이쳐 흘러야 할까/ 숲 속에 낙엽지면 누가 쓸어 담을까/ 바람아, 나뭇잎을 떨구지 말아다오/ 얼마나 많은 나뭇잎을 누에가 먹어야 색색깔의 비단을 짤 수 있을까/ 얼마나 많은 비가 내려야 빗물이 눈물로 바다가 넘칠까/ 얼마나 오래 기다려야 깊은 밤 달님이 떠올라 내 곁에 머물까/ 내 마음 훔친 그대를 위하여 영원토록 기쁨의 노래 부르리...

  참 먼 길을 기차를 타지 않고 맨발로 걸어온 것 같다. 나에게 있어 시의 길은 유클리드의 공리처럼 어느 지점에서 만났다가 멀어지고, 또 만났다가 사라지는 평행선 같았다. 내가 절실해지는 만큼 다가왔다, 내가 무심한 만큼 멀어지는 시의 길 위에서 오늘 받은 전화는 평행선과 평행선이 만나는 그 지점일까....그러나 더 많은 바람 속을 걸어가야, 이 찰나와 같은 기쁨을 다시 몇번 더 만날 수 있는 것일까. 얼마나 더 길은 남아 있는 것일까.

  그동안 내 곁에 머물던 사랑하는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로 먼저 떠났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동생, 친구, k 와 J와 B 와 G....나는 그들을 위해 어떤 노래도 지어서 부르지 못했다. 내 곁에는 지금 가물거리는 촛불이 타고 있다. 이 촛불이 탈 때까지 나는 시를 붙들고 있을 것이다. 그 사이 얼마나 많은 빗물이 바다에 닿고... 얼마나 많은 달이 떠올라.. 내 곁에 머물지 잘 알 수 없지만, 열심히 시의 길을 걷겠다. 선해 주신 심사위원님과 ‘시와창작'사에 감사드리며,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신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