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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쉬

 

라린코나다, 바람의 분진같은 사내 몇몇이
하루종일 동굴 천장에 매달려있다.
조도를 낮추며 새어들어오는 뙤약볕, 때때로
바람은 예고도 없이 굴 속에 침입한다.
그들은 라린코나다 갱도에서
지층의 나이테를 긁어모으고 있다.

강원도 정선 화암광산 안
석탄처럼 검은 얼굴을 가진
아버지는 너무 오래 병을 참아왔다.
이젠 하나의 폐광이 되어버린 아버지의 몸,
말을 내뱉을 때마다 호흡곤란처럼
세상이 가르릉가르릉 거렸다.
폐가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 것으로 보아
곧 밤이 찾아올 것입니다. 아버지는 꿈속에서
페루의 갱도로 들어서고 있을까
저녁은 독성 폐기물처럼 번지듯 퍼져오고
시간 위로 오래된 수면이 뚝
뚝 떨어지고 있다.

사내들의 허기가 뙤약볕에 황금처럼 반짝거린다.
안데스에 반흔으로 남겨진 것은
이들의 몸 속에 긴 세월 박혀있던
금들이 내비치는 것은 아닐까
빙하 밑 광산에 묻어놓은 뼈조각들이
우글우글 부풀어오르고 있다.
어둠 속으로 점점 깊숙이 들어가는 발자국 소리.

사내의 등에 묻어있던 사금가루가
아버지의 폐로 날아든다.
시간이 전속력으로 공회전하는 오후 병실
아버지도 골드러쉬 행렬을 따라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신문 속
폭설같은 눈동자에서 이따금씩 아버지가 비춘다
나는 혼자서 햇무리를 반시계 방향으로 돌리다가
여기로 돌아왔다.

 

 바람에 실려

 

풍성한 바람들이 몇 갈래로 나뉘어지는 저녁
양탄자 위에 실직의 시간을 펴놓고
신밧드가 머리 위의 수건을 고쳐 맨다
신밧드는 여행할 때처럼 반쯤 누워서
텔레비전 속의 사막을 집으로 실어 나른다

누런 모래 알갱이를 껴안고 웅크려있는 신밧드
수많은 여행을 기록해 온 것처럼
머리의 수건이 해져있다
소녀들의 치마같이 펄럭거렸던 양탄자도
그가 집으로 돌아오던 길목처럼 사방이 구겨져있다
바람에 실려 칼라하리 사막을 옮겨 나르는 동안
신밧드도 길을 잃었던 것일까
올이 풀려 여기저기 흩어지는 햇빛이
바짓단 속의 모래를 잠깐씩 들춰본다
수시로 이동하는 모래언덕처럼
텔레비전의 전파가 느닷없이 끊긴다 순간
리비아 근처에서 퇴직을 한 바람이
집안을 맴돌다 사라진다 신밧드는
바람에 의지할 때처럼 몸을 꼿꼿이 세우고
그가 실어 나는 대륙을 떠올려본다

신밧드 얼굴에 주름처럼 지도가 새겨진다
동화책 속 사막 한 가운데서 모험을 하던 신밧드가
텔레비전 앞 곤히 잠든 아버지를 부르고 있다.

 

타자에 대한 단상

 

순간포착을 하는 순간
타자의 손이 방망이에 붙어 달아난다
달리는 말처럼 고삐를 늦추지 않고 날아간다

바람을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
곤봉에 붙은 체조선수의 손가락처럼
방망이에 붙은 뭉툭한 손바닥이 날아간다
한 때 타자의 뼈에 붙은 갑각이었던 손
타자의 손은 원의 균형을 잃지 않는다

방망이를 원으로 돌리며 공에 붙기 위해
안달 났던 타자의 호흡도 날아가고 있다
퇴족하듯이 뒷걸음질 치는 선수
육체가 하나의 활시위가 되고
팽팽히 당겨진 타자의 얼굴이
늘어난 고무줄처럼 울퉁불퉁하다

뼈마디를 퉁기며 달아난 화살하나가
어지럽게 선수의 눈동자 속을 돌고 있다.

 

 

 

 

어바웃 프리다 칼로

 

매일 같은 그림을 보는 것처럼 세상엔
마음에 잘 담아지지 않는 것들이 있다
가령, 두 다리를 벌리고 누워서
하혈하는 그녀 침대 끝자락에 누워있는
그녀의 생애를 유산하고 있다.
저만치 창밖에서 뜬 해는 때때로
피같고 태아같다.
수정란을 쏟아내고
끝없는 터널 같은 세상의 혈관 속으로
칼로가 몰래 들어간다
365일 하혈하는 밤, 그림을 그리며
농도 짙은 달빛이 물감처럼 허공에 번진다
가랑이 사이로 빠져나가는 시간을 쥐고
그녀가 앞으로 고꾸라진다
홀로 저만치 굴러가는 물컹한 기억
누군가 그릇에 담긴 조그마한 씨앗을 들고나간다
그녀의 몸에서 나온 태아가 굳어간다
배를 드러낸 그녀가 몸을 떨며
탯줄을 끊고 나간 아기를 생각한다
나를 닮아 눈썹이 갈매기처럼 이어져있을까
어떤 수평선 위로 날아가고 있을까
핸리포드에 찍힌 그녀의 발자국이 흐느낀다.

병실 안 병든 아침이 먼저 일어나 창문을 연다
그녀가 그 앞에 추모비처럼 서있다.

 

인쇄소

 

인쇄소는 귀가 밝다

귓바퀴 속으로 들어가는
하루의 소리들은 전단지처럼 여기저기 뿌려지고
사내들이 이끌어 간 발자국 위로 활자들이 우수수 쏟아진다
아침마다 책 뭉치처럼 부러져있는 인쇄소에는
하루 종일 수군거리는 말싸움이 가득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프레스가 덜컹거리면
겹겹이 쌓인 잉크통 위로 더께가 앉고
인쇄소는 지나간 시간만큼 더 무거워진다 때때로
분철하느라 동그랗게 뚫린 종이들처럼
인쇄소엔 멈추지 않는 함박눈이 내린다

돋보기를 쓴 채 구겨진 포장지처럼 잠들어 있는 주인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말들은 끊임없이 술렁거리고
여기저기서 맡긴 기억들로 인쇄소는 항상 분주하다
밑바닥부터 차곡차곡 쌓여지는 종이처럼
가끔 인쇄소도 통째로 이 동네의 밑바닥이 된다

새벽부터 길목엔 막 찍어낸 신문지 냄새가 나고
바람 저만치엔 박스도 뜯지 않은 소설책들이 산처럼 쌓여있다
기억을 되풀이 하는 삶이 빛으로 복사되는 아침이다

 

 

당선소감
시를 쓰는 동안 아이를 잃은 프리다 칼로처럼 아무것도 만들 수가 없었습니다. 두근대는 깊은 밤 폐광 속으로 들어가는 여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펜을 잡을 때마다 밤이 길을 이끌어오고, 바람은 집 앞에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누군가 버린 것들, 혹은 잃어버린 것들을 짊어지고 늘 어디론가 숨어 들어갔습니다. 그 자리에서 시를 썼지만, 그것 역시 헛것일 때가 많았습니다. 항상 생각했습니다. “시는 언어의 스펙트럼에 나만의 색깔로 내뿜는 아름다운 운율의 생명체 이므로 때로는 진지함으로 때로는 발랄함으로 때로는 따스함으로 때로는 날카로움으로 시가 나를 선택하게 하자, 그리고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자” 라고 다짐했습니다. 가끔씩 제 몸이 깊은 터널처럼 느껴져 저는 밤이면 수없이 빨려 들어갔습니다. 온 몸 전체가 현악기의 몸통처럼 수없이 울릴 때가 있었습니다. 멀리서 터져오는 메아리, 메아리 같은 것들이 밤마다 저를 일으켜 세우고 또 펜을 잡게 했습니다. 시를 쓰지 않아도 늘 어두운 밤들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터널 밖으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늦은 저녁 골목길에 낮게 깔린 안개처럼 저는 항상 밑에서 서성거렸습니다. 끝없이 빨려 들어가는 동안, 제가 의지해온 것은 터널에서 낯선 궤도를 따라 멈칫멈칫 하던 저를 붙잡아준 펜, 한 자루였습니다. 오늘 한통의 전화로 깊은 폐광 속으로 더욱 더 밀어 넣어 주신 심사위원 분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도 어두운 나머지 딸이 길을 잃을까 걱정하시는 부모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때로 길을 잃을 때마다 늘 제가 옳은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격려해주셨던 전상국 작가, 이윤학 시인, 시 선생님인 신동옥 시인, 윤한로 선생님, 모든 분들을 항상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제였던가 감히 시는 허락된 거짓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상처받고 버려진 것들을 아름답게 하는 것, 세상을 떠나는 것들을 잡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것이 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펜을 잡으면 사람들의 슬픔이 떠오릅니다. 반짝하는 것은 모두 눈물이고, 먼 하늘에서 힘주고 있는 별들에 대해서 저는 오늘 밤에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눈물을 담는 가슴이 되고 싶습니다. 몇 편의 시로 자욱한 그리움들을 몰아내기는 어렵겠지만 자만하지 않고 결코 쉬지 않겠습니다. 분발하기 위해 견고한 날개를 만들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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