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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전복을 씻는다
칼등이 스칠 적마다 움찔거리는 발바닥
겹겹 눌어붙은 찌든 때가 밀려나온다
파도를 등에 지고 거친 바위를 걸었을
단단한 바닥 하얗게 드러난다
군데군데 부비트랩 숨어 있던 아버지의 길은
언제나 가슴 졸여야 했고
피딱지 엉겨 붙은 물집 잡힌 발바닥엔
뜨거운 슬픔이 고여 있었다
늦은 밤 고단한 아버지 몸이 앓는 소리에
단칸방 문풍지가 파르르 떨리곤 했다
있는 힘을 다해 껍질에 몸 붙인 전복
예리한 칼끝이 멍든 핏줄기를 건드렸는지
푸른 내장 주르르 흐른다
전복 등껍질 벗겨내자
때 절은 거뭇한 패각 안쪽에
아버지의 한 생애 아롱져 있다

 

 

여자만汝自灣

 

뻘배 탄 아마조네스 꼬막껍질을 밟고
태고적 자궁 속으로
밀림 같은 아득한 세월 달려 나온다
여자만의 사내들은 뻘 밖에서 불을 쬐거나
꼬막을 구워 소주를 마신다
세상의 문 닫는 시간 안개주렴 발을 내린다
나문재 꽃무늬 속치마 축축이 젖어온다
바람도 없는 바다호수 밤새 뭍의 허리 껴안고
아랫도리 뻐근해지도록 자맥질하는 바다
구멍마다 드러누운 파도 호흡이 거칠다
움트는 꽃잎, 검은 자궁 들썩인다
달이 여문다
여명의 문고리 잡고 몸 푸는 만삭의 여자만
양수 터진 갯벌은 질펀한 해산을 하고
태를 자른다
딱딱한 껍질 열고 젖꼭지 찾는 여린 혓바닥들
스멀스멀 뒷걸음질 치는 바다
첫국밥 들인 여자만에
해미가 빠진다
충만한 밤을 지낸
여자만 여자들
뻘배를 타고 또 하루 문을 연다
꽃 없는 포구 花浦에 흐드러지게 참꽃 핀다

 

빨래경전

 

어머니
지겹지 않으세요
아침마다 손으로 읽는
그 페이지
오늘은 세탁기에서 읽어요
비누거품 풍선 불면
얼룩 팡팡 터져요
통돌이 난타 두드려요
온 가족 윙윙 부비부비 춤 춰봐요
우주로 밥상 날린 아버지 외박한 오빠
다 함께 차차차,
어깨를 흔들어요
온 가족 신나게 트위스트
늘어진 브래지어 고리 물고 림보 해봐요
막내 새까만 발바닥 요리조리 헤엄쳐요
벨 울려도 허리 굽히지 마세요
스텝 꼬인 빨래 쏙쏙 뽑아
비행기를 날려요
한 장 더 넘기면
어머니, 햇살 눈부셔요

 

 

하관

 

볕 좋은 선산발치
가묘 걷어낸 네 귀 반듯한 방에
아버지를 모신다
하관 밧줄 내리자
흰 국화 꽃송이 가슴에 얹고
상두꾼 올리는 흙밥 받으신다
달구질로 꾹꾹 눌러 쌓아올린 고봉
어머니 자분자분 어루만지니
아버지 두 다리 쭉 펴신다
새로 지은 봉분에 향 피워 혼백 부르고
메 올려 잔 친다
형제들 차례로 줄지어 엎드린다
크고 작은 등 산맥처럼 이어지는
한 家系 그윽하게 읽고 계시는 아버지
고향동네 내려 보이는 금당 산마루
양지바른 푸른 집에 언제든 다녀가라
갈참나무 가지 흔들어 눈짓 하시고
청솔 누비는 시원한 바람소리에
밝은 잠 드신다

 

미로 찾기

 

길을 잃었다
환한 통로에서 길과 엉켜버린 발
오르던 계단을 돌아서 내려가자
지하의 동굴이 迷路인지
좀 전 플랫폼이 건너편이다
빛 속으로 달려 나온 전동차는
멀미처럼 @@골뱅이를 쏟아놓는다
컴퓨터 화면을 누비던 핏발들이 몰려나와
지루한 반복 음으로 바닥을 두드린다
사방으로 뚫린 迷路에서
사람들은 未路 속으로 떠밀려간다
길눈 어두운 나는
낯설고도 익숙한 경계에서
아직도 두리번거리고
벽에 걸린 지도는 명쾌하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길을 찾는다는 것
지하철 진동이 무겁게 닿았다
또 떠나고
몰려오는 발자국 소리들
미로를 빠져나간다

 

 

당선소감(이언주)

어느 날 詩가 내게로 왔다. 손 내밀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은데, 한 뼘 모자라는 곳에 서서 더 이상 거리를 좁혀주지 않았다. 시인이고 싶었다. 잡히지 않는 갈망으로 신열을 앓았던 시간들. 이제껏 한 가지 일에 매여 이렇게 몸서리친 적이 있었던가.

 

가끔씩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문학소녀 시절, 행여 삼류소설이나 쓰고 있을 미래의 자신을 상상하기 싫어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전공을 택했다. 그러나 유목민으로 낯선 곳을 떠돌던 한 때,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푸른 초원 위에 화살처럼 쏟아져 내리는 햇살 때문에 글을 쓰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지나온 곳마다 국적 잃은 향수병을 발자국으로 찍고 다녔다.

 

내게 시는 ‘기쁨 두 배, 고통 네 배’이다. 수염뿌리를 허공으로 내밀어 가쁜 숨을 몰아쉬던 열대도시 가로수처럼 공기 속으로 생각의 뿌리를 내리고 연명하기엔 언제나 목이 말랐다. 다가가면 저 만치 달아나는 시를 잡기 위해 새 해가 되면서 두 권의 공책을 준비하였다. 우연이었을까. 한 권은 표제가 ‘詩作’ 이고, 다른 한권은 始作이란 뜻의 ‘카이스’ 라고 붙였다.

이제 정말 시작이다!

 

언제나 희망을 잃지 않게 용기를 준 뚝방동지 정하린 오정순씨 정말 감사하고, 당선과 함께 친정을 만들어주신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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