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가끔씩 열리는 문이 있다 열린 문 뒤로 다가가 가만 들여다보면 웃음 속살 같은 쌀알들이 껍질을 벗고 있었다 미끈하고 반질반질하게 태어난 알맹이들 열어젖힌 정미소 문 앞에 차르르르 마술처럼 쏟아졌다 헐떡거리며 돌아가는 거친 기계음과 깊고 어둑한 그늘을 등지고 아버지 당신의 노동은 흥얼흥얼 사다리를 오르내렸다 밥과 응석과 꿈을 받아 삼키며 나의 한나절은 뱅뱅 맴을 돌다 가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쌀알을 밀어내고 껍질을 벗은 노란 쌀겨들이 정미소 앞마당을 꽃가루처럼 날아오르는 순간 당신의 현기증은 허공을 딛고 나의 놀이도 멈추었다 기계의 발톱에 물린 사나운 시간들 다시는 그 마당에 가지 못했다 굳게 갇힌 문안에서 그 어떤 소리만 새어나와도 멀리 달아났다 어느 날 늙은 기계들이 밧줄에 묶여 끌려 나갈 때까지 나는 그 문을 마주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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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식당 정씨
사내, 한때 푸른 등을 넘어 파도를 꺾었다 부챗살 같은 굵은 가시를 펴고 사방을 헤엄치던 그 사내의 어깨가 오늘은 변두리 개천에서 꿈틀 거린다 오늘 따라 성가신 지느러미를 달래며 새벽 장을 보러 나간다 펄떡거리는 날비린내와 개흙처럼 미끈거리는 길바닥에서 일없이 담배를 피워 문 사내의 손이 타들어 간다 꼬막을 퍼 담는 할머니와 고등어 토막 내는 청년의 눈빛이 힐끔 거린다 오늘은 떨이 물건 없수다 달고 쓴 손님 척척 발라내는 고수들의 칼끝 푸르고 깊은 한 가운데 나자빠진 활어 한 마리 낚지 못하고 퍼덕이는 지느러미를 몰고 새벽시장을 빠져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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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화나를 위하여
흐린 눈 껌벅이며 먹이를 삼키는 먹구렁이 깊고 검은 입 반 쯤 벌린 채 멀리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번들거리는 배를 끌고 조금씩 다가오는 그를 만나러 갑니다 빙빙 다른 길을 맴돕니다 멀리 서둘러 달려온 출발점도 되돌아봅니다 어느 곳으로도 도망칠 수 없는 돌아서면 다시 앞을 가로막는 칭칭 먹구렁이 다 큰 개망초 언덕마다 부시게 피고 움츠린 몸이 천천히 먹힙니다 더듬더듬 검은 입 속으로 들어갑니다 발밑에 어둠이 똬리를 틀고 미끄러운 비탈 오르고 내리다 엉킨 몸이 풀립니다 마침내 취한 해가 둥둥 떠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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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사탕
출출한 빈 그릇이 식탁마다 둘러앉은 다 저녁 밥집에 털퍼덕 주저앉았다 육개장을 기다리며 자꾸 부어오르는 허벅지를 문지른다 이걸 어째 다섯 시간은 더 버텨야 할 두 기둥을 달랜다 달래다 일없이 휴대폰 1번을 꾹 누른다 혼자 라면을 끓이던 아이가 숙제 다 했구요 준비물도 다 챙겼어요 뒷말 이르기도 전에 아이는 전화기를 내려놓는다 야, 야 쥔아줌마 잔소리로 볶아 내온 밥상이 차려지고 벌건 고추기름을 걷어낸 세상은 여전히 맵다 육개장에 다시 밥을 만다 이번엔 휴대폰이 울린다 안사장 내일 세시쯤 갈게 벌써 한 달, 건물주가 과일을 씹으며 통보를 한다 입안이 화끈거리고 삶이 부어 오른다 쥔아줌마 내미는 박하사탕 받아들고 차가운 외투 부스럭부스럭 사탕 한 알 쥐어주고 돌아서던 아버지의 등 뒤를 오늘은 내가 따라 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