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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비

 

태양의 가난한 침묵을
보았다 힘겹게 무너진 벽을 짚고
나는 반토막 어둠으로 흔들리고 있다
좁은 골목을 우회하는 끈적한 욕망들
파리한 그림자를 따라 파란 담벼락을 기어오른다
나는
애초부터 폐허의 주인이었다!
폐허를 감추기 위해 더 넓은 이파리가 필요하다
완전히 어두워질 그때를 기다려
창살을 움켜잡는다
처음 가지를 뻗는 휘어진 벽
눈을 감고 이파리를 펴며 간다
부서진 창틀을 지나야한다 문득
새들이 가볍게 날아간다
악착같이 버티고 있는 나는
중지할 수가 없다 돌아갈 수조차 없다
나는 납작 엎드려 친친 올라간다

 

 

정류장 근처

 

은행나무에서 누런 시간이 무겁게 떨어진다
아스팔트 바닥에 노을이 부서진다
하나 둘씩 네온 불빛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어색한 침묵은 끝내 나뭇가지를 흔든다
버스는 오지 않는다
이파리 하나 도로에 떨어진다
그림자를 핥고 가는 찬바람이
노선 위를 서성이는 사내의 기침을 쓸어간다
비에 젖은 사람들의 영혼은 무겁다
가지 끝에서 괴로워하는 잎들의 떨림은 무겁다
바람은 이제 나뭇가지를 흔들지 못한다
외투 안으로 어둠이 파고든다
사내가 뱉어놓은 기침소리가 나무를 흔든다
잠들지 못한 빈가지가 흔들린다
핼쑥한 가로등은 먼지를 뒤집어쓰고
고통스럽게 떨고 있는 그림자를 핥고 있다
하지만 정작 떨고 있는 것은 내 등뼈 속의 심장이다
나를 대신하여 우는 누런 잎이 바닥을 치며
어둠 속에서 버스를 기다린다
보도블록 위에
영혼이 가벼워진 비둘기들의 털이 나뒹군다
노선도는 언제나 그 자리에 꽂혀 있다
오지 않는 버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두고나온 집

 

채송화 꽃잎들은 잠이 들고
하늘을 쳐다보던 해바라기가 나를 응시한다
내가 대신 하늘 향해 고개를 쳐든다
늙은 감나무 가지를 올라탄 능소화
모자를 찾다가 모가지 채 떨어진다
바닥에서 까맣게 말라가는 것은
능소화 꽃잎이 아니라 나의 고독이다
내 그림자가 땅을 쓸어가면서 신음한다

마룻바닥을 핥는 오래된 바람
나는 잠시 지친 몸을 그 위에 앉힌다
늙은 감나무 가지가 푸르다
툭 떨어지는 능소화의 울음소리
무서워 달아나버린 직박구리 어린 새
빙빙 돌아 어디로든 날아가면 그만이지만
그만이지만
내 몸 반을 가려주는
낡고 부서진 지붕은 자꾸 그림자를 밀어내고 있다
해바라기 씨 자국보다 깊게 패인 두 눈
나는 오래된 마당에서 꿈도 없이 구름모자를 쓰고 있다

 

 

염창동 버스정류장에서

 

속도를 늦추는 바퀴들
알 수 없는 한숨을 내려놓는다
제각기 다른 얼굴들을 한 사람들이 걸어간다
엉켜있는 시간들을 끌고 막차는 떠나고나는 이곳에서 꽤 오랫동안 웅크린
자세로 병든 비둘기 걸어가는 자세로
불빛을 펴며 익숙한 장애물을 찾는다
다른 사람들 분주히 길 위에서 날개를 펴고

침침한 시력으로 간판들을 읽어간다
삼겹살 3300 돈가스 2900 피자 5900
광어한마리 9900 안주+생맥주500cc 9900
김밥 한줄 1000 로또누적금액 118억
신발 끈이 풀어진 사람들을 따라간다
지친 발자국 수효만큼 어지러운
보도블록 위로 비틀거리는 발목들

그렇게 새벽이 왔다
이파리들은 아직 타올라야 할 것처럼 무성하다
바람이 분다
나무는 하얀 불꽃같이 웃는다
잠시 머물다가는 자동문이 나를 향해 열린다
속도가 길 위를 쓸고 지나면
욕망들이 외상값처럼 달려든다
나는 긴장한 눈으로 노선도를 쳐다본다
바퀴들이 멈춰 있다

 

구름이 사는 골목

 

먹구름이 바닥에 총을 겨누고 있어
채송화 콘크리트 비집고 붉은 꽃잎 뱉어내고 있어
집 앞 하수구가 텅 비어있는 것은
동사무소 계약직 할머니들이 삽질을 잘했기 때문이야
수백 번의 구직검색을 하면서도
먹구름이 몰려 올 거라는 걸 몰랐던 거지
자고 일어나면 실신한 구름들이 빈 병에 채워지곤 했지만
하릴없이 푸른 병들을 세어볼 순 없었어
헝클어진 구름을 끌어내려 가위질하고 망치질하여
다시 지붕 위에 올려 놓았어
건축기사처럼 간단하게 틈을 막아버렸지
오늘은 왜 미친바람이 불어오는지
비 섞인 바람은 고통스럽게 바닥을 쓸어가는데
참, 실직 중인 것을 잊어버렸네!
와이셔츠 단추를 잘라내어
아들놈의 장난감차에 헤드라이트를 붙여야겠어
빗방울이 창문 틈새로 들이치고
우리집 창문은 몇 개였더라?
쑤군거리는 낡은 책상 위
이력서의 글자들이 숨죽이며 꿈틀하는 것은
서랍 속 모나미 볼펜이 지렁이를 낳고 있기 때문이야
아주 늦게 창문을 열어야겠어
불빛은 맨홀 뚜껑 구멍으로 힘없이 빠져
지렁이 몸통에서 꿈틀하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있어
창문을 열고 바람 속에 웅크리고 한참!

 

 

당선소감

늦게 시작한 詩作, 뜻밖의 소식에 부끄러웠다.
한 편 한 편 시 쓰는 것에 늘 최선을 다했다. 사실 시를 쓰다보면 시와 맞닿는 나의 고통스러움을 중지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도 책상에 배를 대고 글자만 찍고 있다. 시의 뒤를 따라가는 끈적한 욕망들이 나를 자꾸 재촉하고 있기 때문이다. 매일 조금씩은 고통을 위하여 살고 싶다.

紅詩 동인의 선생님들 그리고 일 년 넘게 자신감을 심어준 고영선생님께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는 선생님 말씀대로 맘껏 나를 드러내며 쓰겠습니다.
시사랑 사람들 원희언니 혜선언니 혜숙언니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다.
내게 있어 사철나무와 같은 호애클럽이 없었다면 시를 썼을까. 혜란 미라 세정 지연 성신 모두에게 이 순간의 기쁨을 나누고 싶다.
사랑하는 내 아들 동언 승언 그리고 21년을 무심히 지켜봐주는 내 님에게도 지독한 고마움을 전달하고 싶다.

내 시가 첫 인사를 할 수 있도록 미숙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진심 가득한 감사를 드린다. 부지런히 시 쓰겠다는 것으로 약속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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