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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기원  / 민경란

 

이것은 노아의 방주 이래 물의 연대기를 기록한 서

음감이 뛰어난 거인 하나 구름의 전신에 폭우의 음보를 그려 넣었다 한다

 

팔을 들어 폭풍의 도입부를 연주하자

지상의 모든 물줄기들이 자제력을 잃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한다

 

한 악장이 끝나자 지상의 체온이 상승했다 한다

다음 악장이 끝나자 '꽃이 피고 지고'라는 글귀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우기로 가득 찼을 때

어제 헤어졌던 적도의 사내를 오후의 카페에서 다시 만날 지경이라 했다

'내 안의 침묵이 부서지고 있어 이 정도는, 눈물 한 점 떨어뜨린 것에 불과 해'라고

거인이 중얼거렸다 한다 

 

역류, 침하, 붕괴, 수몰을

표류하는 물위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눠 쓰고 있었다 한다

 

어느 날, 누군가 해로부터 달려왔다 한다

자신을 거인의 옆에서 악보를 넘기던 페이지 터너*했다 다음 악장이 준비될 때까지

뉴턴의 사과를 심으라 했단다

 

그제야 꼭지가 떨어져 나간 우산 아래 옹송거리던 새들이

유실된 항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한다

   

 

 * 페이지 터너 : 연주자의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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