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닫이 외 4편 / 정진혁
도시의 산동네가 낯선 서산댁은
낡은 반닫이 문을 연다
바다가 펼쳐지며 먼 갯벌에서 불어온 비린내가
온 방안을 적신다
서산댁은 맑은 눈으로 바다를 뒤져
뭔가를 꺼내고 있다
길게 비벼온 생의 자국들이 시커멓게 눈을 뜬다
갯벌에서 막 나온 낙지의 발이 지난 기억처럼
반닫이 밖으로 삐져나오고 있다
한참을 뒤지다 찾고 있는 것을 잊은 듯
미동 없는 짐승이 되어
세월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다
남편이 간 물길을 쳐다보는 것일까
집채만 한 파도가 일렁인다
거기 황혼의 빛이 있고
죽어라 갯벌 속을 긁어대던 호미소리며
굴 까던 시린 손이
조개국물 같은 진한 슬픔을 찾는 것인가
생의 비릿함에 문을 연 것은 아닐 터
먼저 보낸 남편의 따듯한 손길이 배인 옷 한 벌이며
갯벌 속을 헤매며 입던 후줄근한 몸빼바지
몇 벌 꺼낸다
이고 지고 살아온 보따리가 어지럽다
낙지며 소라 바지락 맛조개
보이는 것만을 믿고 잡아 올리던 손이
그 어디를 뒤져도 헛손질이다
살다보면 그런 게 있다
어디서부터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것인지
도대체 잡을 수 없는
낮잠 같은
반닫이 속을 다 비우고도 찾을 수 없는
통곡 같은
시커먼 갯벌 속에서
찾을 것이 더 있다는 듯
서산댁은 쉽게 문을 닫지 못하고
그녀의 몸이 점점 갯벌 속에 잠긴다
바람 부는 날
반쯤 내용을 잃어버린 바람이 불고 있다
연둣빛 테이프에 붙어 날리는 하얀 종이
男시다 모집에서 力(역)시다만 남은
길 잃은 개의 사진에 개꼬리만 남은
회생이 없는 파산만 남은
빌라월세 있음이 어울리는 옹색한 글자들이
너덜너덜 전봇대에 붙어 나부끼고 있다
지나는 행인들은 글자에 담긴
밑바닥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이 지나가고
찢겨진 글자들은 세상이 궁금해
몇 안 되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면
생의 모서리에 달라붙어 숨을 조이는
연둣빛 테이프가 손에 힘을 준다
한낮의 전봇대는
그저 그림자만 낳고 생각에 잠겨 있다
바람이 불수록 기억할 것이 있다는 듯
파다다닥 한낮을 깨우는 초라한 소리 깊어 가는데
아직 닿아야 할 길을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가두고
생을 반쯤 잃어버린 사내가
전봇대의 양쪽 어깨를 잡더니
머리를 처박으며 마구 흔들어 댄다
검게 탄 목덜미가 울렁이며 헐렁한 바지가 펄럭인다
그의 손이 연둣빛이 되어 전봇대에 달라붙는다
반쯤 내용을 잃은 바람이 소리소리 지른다
길 잃은 사내가
회생이 불가능한 사내가
개꼬리만한 가난을 숨기지 못하고
바람에 숨차게 흔들리고 있다
수도배관
너를 만나기 위해 나를 깎는다
거칠게 일어나는 쇠의 소리 앞에서
너를 향한 길을 연다
세월로 깊어지는 골짜기 만나기 위해
만나서 이어지고 상처 아물어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흐르기 위해
막막한 산 속에서
꼭대기와 꼭대기가 이어지는
하얗게 빛나는 나사산 정상에서
날카로운 쇠의 냄새 앞에서
밋밋한 시간의 틈에 앉아 둥글둥글 살아온 삶을
그늘진 마음만큼 깎아낸다
어디선가 꾸르륵 이어져가야 할 소리 들린다
나사 절삭기 앞에서
이편에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삽입길이를 확인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중이다
오래 나를 따라다닌 그리움이 나사산을 센다
하나 둘 셋……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 소리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너
깎이는 아픔이 커서 열이 나고 단내가 나더라도
내게서 너에게로 가는 거친 마음에 기름이 흘러
아픔을 식힌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테프론으로 감는다
아픔 새나가지 않도록 하얗게 감는다
네 몸속으로 들어간다
새롭게 난 길
수도꼭지를 틀자
내 생의 내면을 가로지르며
쏟아지는 물소리
신경치료
생의 옷자락이 너덜거린다
구석에서 구석으로 몰리며
질기고 딱딱한 삶을 씹어대다
귀퉁이가 깨지고 금이 간 사내는
삶에 바람이 드는 것을 시리게 아파한다
가장 위험한 이빨이라고 의사는 입속을 뒤진다
신경을 죽이는 그의 손에
지난 시간의 푸르고 시린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단단히 뿌리를 박고
억센 가시도 씹어대던 당찬 맞물림이
이를 갈아대는 기계소리와 신경을 긁어대는 세상 인심에
무표정으로 죽어가고 있다
한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꿈속에 길게 뿌리를 뻗는 죽은 신경의 끈을 잡고
이제 역이든 공원이든 어디에서도 잘 수 있다
사내의 헝클어진 머리 모양은
사내의 옷차림은
이미 신경치료가 끝났다
이빨 모양을 본떠 금 간 삶을 덮어 씌어야 한다
투구처럼 반짝이는 생기가
깨진 생을 감싸 안는다
다른 재질로 다른 빛깔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어금니 옆에서 반짝인다
지녀온 삶의 각도를 다시 조정해보는 거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한낮의 거리에 잠들어 있는
술 냄새 풍기는 사내를
시리게 하지 못하고 비껴간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치부하고 있다
그 방치의 일부분에
신경이 죽은 이빨이 침묵하고 있다
어둠의 집
고구마 상자를 열자
지난 여름의 햇살이 꿈틀대고 있었다
살아갈 날들이 뿌리 없는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 온 나는 죄인이었다
발자국도 없이 걸은 길이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엉켜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빛
네 귀퉁이 틈으로 줄기가 발을 뻗었다
뻗어 나가지 못하는 시간을 밀어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한 틈으로
손을 내민 마음
상자 안을 온통 지탱하고 있었다
마당이 없이 방 하나가 전부인 집
수원시 북수동 273번지
등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벽에서 언제나 어둠의 냄새가 묻어나던 집
일곱 켤레의 신발이 쉴 곳을 찾지 못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
창이 없는 집
밤이면 내 누울 자리
아버지 너무 답답해요 창이라도 하나 내요
아버지는 소리로 벽을 밀어보다가
방문 앞에 상자를 깔고 한뎃잠을 주무셨다
온종일 자전거 페달을 밟던 다리를 웅크리고
상자 위에서 주무시는 아버지
어둠의 집을 지탱하며
가난의 틈을 비집느라 자꾸 말라가고 있었다
물기하나 없이 줄기를 키우는 고구마 안에
아버지를 먹고 자라던 수척한 기억이 새겨 있었다
■ 심사평
일백여 명에 가까운 응모자 가운데 본심에 올려놓은 임혜진, 정진혁, 권지현, 하얀, 고민교, 서로, 임태경, 전은영, 황인산, 최정하, 이설야, 김나래의 시들은 기성 시단과 다른 나름대로의 개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로의 <신상명세서>, 임태경의 <현대인의 생활백서>, 하얀의 <메어리 포핀즈의 초대>, 임혜진의 <머리카락이 길 때쯤엔> 등은 읽기의 재미와 신선함을 주었다. 그 가운데 임혜진의 시들은 전편이 고른 수준이라는 인상을 주어 한참동안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 시의 문장들이 어쩐지 생활 경험과 충분히 손잡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당선의 대상에서 먼저 내려놓았다. 황인산의 작품들은 생활 경험과 감정을 시원시원하게 진술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운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작품들이다. 마지막에 남은 정진혁의 시들은 폭넓은 제재로 화자의 현장을 잘 붙잡고 있었다. 또 모든 시편을 긴 호흡으로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정진혁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제재는 “방 하나가 전부인 집”이며,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이고, 수도배관과 치과의 신경치료를 하면서 얻은 삶의 은유이다. <반닫이>에서는 도시 산동네로 와서 사는 바닷가의 인물이 반닫이 문을 열면서 바다로 향하는 상상과 기억의 진술이 자연스럽다. 남편을 일찍 여읜 인물의 갯벌 노동과 “조갯국물 같은 진한 슬픔”과 “생의 비릿함”이 시 전체 어조와도 잘 어울린다. 몇 편에 보이는 이런 시의 진술과 구성 능력을 높이 사서 당선작으로 뽑았다.
- 심사위원 : 공광규(글), 김선태, 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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