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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경(桃源境) / 김경철

  전생에 한 번 와 봤음직한 어느
  후미진 뒷골목, 오래 전 잃어버린
  집 주소지를 찾은 듯 멈추어 서서
  오래전 잊고 있었던 복사꽃 향기를
  훅 하니 맡는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곳을 찾아왔다지만
  내일은 운이 나빠 이곳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담에 어린 꽃문양이 손 사이로 지나간다 안방의 벽에서부터 흘러왔을, 뿌리내린 자잘한 금들의 냄새가 훅하니 다가온다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을 저 자잘한 금들, 안을 열면 고스란히 귀뚜라미의 젖은 눈썹들이 쌓여 있을 법한, 햇살에 감긴 눈꺼풀에 한 세상이 어린다. 혼몽한 꿈결에서나 본 듯한 시절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빗물이 소복이 고인 장독대며 말라버린 우물에 철렁 떨어진 불빛들이 고스란히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내 눈의 일부가 저 불빛 속에서 자랐다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복사꽃 환하게 핀 집 안을 남몰래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졸다가 지나가버린 한 생처럼 오래 전 이곳에 묵었던 바람에 타고 있는 저 향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주문
- 절벽에 찍혀 있는 새 

  입을 열자, 산철쭉에 앉은 붉은 점모사 나비가 파르르 떠는 스님의 눈가에 스쳐 날아간다. 거북의 등껍질 속 갑골문자를 읽는 듯한 저 주문은 서쪽으로 지는 저녁해를 달았다. 목구멍 너머 발끝에 걸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말문(末文)은 아니었을까? 목구멍 속, 울대에 매달린 붉은 꼬리 원숭이가 목젖에 범벅이 되어 있다. 끄아악 끄악 입으로 넘어오려는 저 포유류는 주문의 근원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제 목소리를 닮은 짐승 하나씩 키운다. 햇살 한줌과 터럭에 걸린 이슬을 모아 한 끼를 때운 듯한 가랑잎 위에 맺힌 다시래기 소리처럼 저 주문은 쓸쓸한 화전의 열기는 아닐까? 스님의 콧잔등에 어린 땀방울은 열을 마친 염주알로 둥글게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허공에서의 삶을 다 마친 거미의 속눈썹이 땅 그늘에 맺혀 있다. 박제된 벌레들의 날개 소리 속에서 불고 있는 주문의 열은 스님의 눈을 해동시킨다. 눈알에 절벽에 새가 찍혀진 것처럼 금이 간다.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

혹,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졌다면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은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달렸을 것이다 초목과 유목민이 사는
몽골 어디쯤, 흙 속에 움트는 씨앗처럼
몽골 고원지대를 소원했을 것이다
나침반처럼 자장 끝을 매섭게 노려보는
저 말, 말 등잔이 몽골알타이에서
고비알타이로 이어진 산맥처럼 씰룩이며
울란바토르의 젖줄, 툴강이 생각난 듯,
처음 켜는 시동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과열된 엔진처럼 부동액을 끌어올리며
전생에 한 번 스쳐온 듯한 그 길, 그 고원,
그 광야를 떠올리면서
수백 억 년에 걸쳐 묻어두었던
원유를 뽑아 올리면서 화염처럼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신호도 없고 경계도 없는
그 광야로 택시미터기 안에서 뛰고 있는 저 말은
한없이 뛰어간다 마침내 택시 그림자가
택시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진 듯
택시 한 대가 눈동자 속 터널을 빠져나간다


 



천 개의 고원

심장에 닿기 위해 내 안의 말은
사방팔방 몇 십 리,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 내달려간다 히말라야
산하에서 내려다본 무수한 하천 너머
푸른 대지를 녹이는 한낮의 햇살처럼
작고 따사로운 풀잎에게 눈인사하는
내 안의 말은, 산양의 피를 마시는 저
저녁의 목책까지 훌쩍 뛰어 넘어간다
동음이의어로 가득한 일상의 목울음까지
내 안의 말은 새롭게 되새김질한다
산과 바다를 향해 절벽이 끌어안는
포말까지, 버티고 서서 우는 내 안의 말은
잠시 말울음으로 흩어진 갈매기떼를
정렬시키고 다시 비상한다 내 안의 말은
심장 너머를 본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하천이 모이는 이 바다에서 내 안의 말은
말갈기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본다
내 안의 고동이 저기 저 천 개의 고원까지
둥둥둥 울려 퍼지는 뱃고동으로 전해진다
하루를 천년처럼 충전하는 하루살이처럼
내 안의 말은 잠깐 동안 반짝인다, 눈빛을


 



  시집가는 날

  가을에는 붉은 단풍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집간다. 자기 가문을 떠나 다른 가문으로 이동하는 바람의 가마를 탄다. 허나 눈물짓지 아니하는 단풍이 없고 뒤돌아 손 흔드는 쓸쓸함이 베이지 않은 나뭇잎이 없다. 부정의 부정을 손 흔드는 단풍이여, 가을이여. 나 시집간다.
  황금 들판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는 새떼들에게 한 편의 시를 띄워 보낸다. 허구처럼 쓸쓸한 날, 지나온 생이 그렇다. 저 논에 무르익어 가는 벼들은 왜 고개 숙일까. 밑동이 베이는 아픔을 삭이기 위함인가. 나 빈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겨울 지나 봄을 맞는 새색시 같다. 허나 시집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텃밭을 가꾸다, 꽃 지고 속내 오므리는 열매처럼 단 하나의 씨앗을 뱉어내는 것. 붉은 저고리 하나 푸는 밤. 하늘은 높고 쓸쓸한지 이내 손톱을 깨문다. 철렁, 우물에 떨어진 두레박처럼, 다시는 길어 올리지 못할 마음 하나 깊고 깊다. 문풍지 너머 벌레들의 울음이 밤송이처럼 까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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