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상] 파도에 그리는 편지 / 이호근
파도가 목구멍 문턱 넘어
솔잎 피죽 가슴 후벼 되돌아갑니다
그게 하루 이틀인가
되돌아가는 파도의 손바닥에
팔십 노모의 안부 몇 자 쥐어 보냅니다
수없이 썼다 썰물로 풀어지는
수평선 너머 흐린 글씨가 언젠가
푸른 이파리 내밀어 지족해협을 건널 것입니다
오늘은 우물도 파고 물 한 종지와
소금 절인 솔잎 한 움큼을 씹다
저물녘 햇덩이를 물고 있었습니다
사방 파도 소리와 바람에 맞서 보면
두 눈에 박힌 작은 모래알에서
꽃망울 먼저 드미는 세상사 주렁주렁 듣습니다
귀 열어 바람의 속옷을 입어봅니다
부러질 듯 휘청이다 제자리 돌아서는
대숲의 곧은 말씀의 뿌리에 온몸 기울여 싹을 틔워봅니다
한번 까스했다가 이내 식어버리는 아랫목보다
불 피지 않아도, 한 겨울 파도가 실컷 누웠다 가도
그대로 푸른 살 돋는 솔잎 댓잎 같은 날이 좋습니다
허나, 정쟁의 팽팽한 매듭 같은 들판에 서면
허기진 야생의 풀씨처럼
굳은 땅 속눈 꼿꼿이 뜨는 것을 어찌합니까
내 곧은 말 마디마디는 오늘 밤 푸른 눈 비벼
결코 눕지 않을 것입니다
수천 년 푸른 물빛지어 흐를 것입니다.
기억해주십시오
파도에 씻긴 세모네모 마름모 각진 돌들이 서로
이야기 둥글둥글 굴려 노도 바닷가 걸어갑니다
주름지는 기억의 수평선 위로
꼭, 그날이 괭이갈매기처럼 날아오를 것입니다 어머니!
창 밖 파도 꿰매는 삯바느질 소리가 가랑비처럼 스며드는 밤입니다
- 이호근 시집 <파도에 그리는 편지>(도서출판 도화)
파도에 그리는 편지
deg.kr
[금상] 시골 제빵사 / 박응수
내 집은 순수하다. 그 어떤 데커레이션도 없다
그저 허름한 나무판대기 위 궁서체 명패가 내가 사는 곳이다
동틀 무렵 집 앞 가로등이 흐릿한 할매 돋보기를 깨끗이 닦고
이슬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일 때
그제애 아버지는 의사 마냥 순백의 가운을 걸치고
순산을 위해 자궁을 따뜻하게 데운다
자궁 옆 가지런히 쌓인 포대 속에서 내 줄기세포를 하나하나 끄집어낸다
각 세포마다 수분을 넣고 혈관으로 이음새를 만들면
아버지는 밀대로 가볍게 내 어깨를 두드린다
내 외모는 순전히 그의 의지에 따라 좌우된다
그래서 그는 신이라 불린다
가볍게 손바닥을 쥐어주면 하얀 뭉개구름이 생겨나고
손가락 마디마디에는 세상을 칠하는 분이 묻어난다
몇 번의 밀대 질과 빠른 손놀림 뒤 나는 자궁 안으로 착상된다
200도씨에서 20분간 인고의 시간을 거치면
그의 불룩한 아랫배 지방덩어리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른다
출산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밸소리가 울리면
아버지는 분주해진다
하얀 생크림과 향긋한 초코, 딸기 시럽이 내 몸을 감싸고
그렇게, 한 생명의 탄생을 창조한다
어느덧 가로등 불빛은 꺼지고
그의 가운은 한 폭의 아름다운 산수화를 담고 있다
창문을 타고 넘나드는 빛의 떨림에
아버지의 거친 손은 흐느끼며 나를 왈칵 안는다
땅랑딸랑 종소리 울리면
달콤한 하루를 맞이한다
[은상] 까치집 / 문경희
저 막막한 허공을 다시없을 반석 삼아
누군가는 집을 짓고 삶을 의탁 했나보다
휘영청, 하늘로 부신, 생을 켜는 집어 등
범접 못할 시선 끝에 시렁처럼 걸쳐 놓고
남모르는 온기로 버티어 낸 시간들이
아직도 뜨시게 남아 봄을 적는 풍경 속
혼이 떠난 육신처럼 바람살에 위태해도
무념란 시간의 꾸리 촘촘히 되감으며
시리게 푸르던 역사 등피처럼 닦고 있다
[은상] 낙화 / 윤옥란
칠판에서 뼛가루 같은 백묵가루가
내 어깨에 떨어졌다
온 몸에 통증이 만발한 두 사람의 이름을 지웠다
삼월의 황매화로 피었던
정끝심이연손김막녀 이름들,
나는 아직도 때맞춰 물을 갈아 주면 향기를 내고
제 색깔의 꽃을 피울 거라 믿었는데 물컹하던 줄기는 꽃잎을
더 이상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앰뷸런스에 실려 온 찢어진 이파리들,
마지막 예의를 갖출 틈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곡할 자식도 없이 눈을 감는 붉은 눈동자 눈물이 울컥 솟는다
시원한 그늘 밑에서 쉬어가라던 할머니도 밤새 끙끙 앓는
젊은 여자의 신음소리도 날이 새기도 전에
지우개 하나로 수장되었다
식물도감에는 없는
새로운 꽃들의 이름을 칠판에 꽂는다
내게 밥이 되고 향기로운 이름이 되는 체온들,
오월의 나무들처럼
칠판이 푸르게 흔들린다
[동상] 난지도 / 안민식
눈물로
꽃이 핀다는 말이 맞다
적어도 이곳 난지도에서 만큼은,
상처의 뿌리는 어디쯤인가
꽃들의 미소 속에 슬픔이 보인다
너무 기쁠 때 눈물이 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너무 슬플 때 왜 자꾸 헛웃음이 나는지 알 것 같다
한숨으로
풀이 자란다는 말이 맞다
적어도 이곳 난지도에서 만큼은,
한없이 바람 불어 흔들려도
결코 눈물 흘리지 않는 풀들
사람들은 억새의 눈부심에만 환호하지
그것이 어느 날의 아픈 손인 줄 알지 못한다
사람들은 꽃이 가득하면
세상 모두가 행복한 줄 안다
사람들은 풀이 푸르면
어제는 쉬 잊고 내일에만 가슴 부푼다
사람들은 지난 추억은
다 아름답다고 말한다
난지도엔
오늘도
꽃이 피고 풀이 자란다
[동상] 어머니의 대지 / 장월순
김매러 가시다 산고가 시작되면 집으로 돌아오신다
아이를 낳고 당신 손으로 탯줄을 자르고
가난이 쌓인 빈곤의 시절
첫 국밥은 녹살 밥이다
광목 호청 속에 목화송이가 마틀 마틀 돌아다니는
포푸린 천으로 덧씌운 이불 한 채,
한 살 두 살 터울이다 보니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가마솥 굴뚝 연기로 피어오른다
찬바람 불던 날 카시미론 이불 한 채 사오셨다!
콧망울 아려오는 겨울밤 우리들은
장미꽃이 피어있는 정원 속에
꽃사슴이 뛰어노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밍밍한 아랫목을 따숩게 지키는 속에서
아랫목 차지전쟁이 시작된다
머리가 나오면 지는 놀이라 심한 장난 때문에
문밖에서 벌을 서야 했다
할머니 이불 천으로 만든
옥양목 홑껍데기, 무릎과 팔꿈치는
누비기를 반복해서 유격훈련 전투복 같다
코가 빨개지고 귀가,
떨어질 듯 아려온다
다시는 장난 안친다고 하며
처마 잃은 새떼처럼 수수 알 울음을 쏟아놓는다
서로 얼굴을 보면 반은 웃고 반은 울다 방에 들어가
얼추 몸이 녹으면 또 장난을
오늘도 어머니는 뒤란에 정한수 치성을 드릴 것이다!
[동상] 거미 / 최광현
쪽방 구석구석에 거미줄이 둘러쳐져 있다
나처럼 혼자라서 외로운 줄이다
거미줄 틈으로 난 작은 문을 나선다
밖은 또 다른 거미줄이 총총히 자리하고 있다
나처럼 혼자라서 외로운 줄일까
그들도 그리운 날개를 기다린 걸까
살아간다는 것은 드러낸다는 것
세상 언저리 쳐 두었던 줄에는
날개 달린 흔적들이 걸려 있다
살아가기 위한 본능
몇 가지는 고르고 아픈 날개를 사라질 때까지 두자
시간이 지나면 또 새로운 날개가 들어오겠지
세월이 흐른다고 다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늘도 거미줄에는 무수한 날개들이 날아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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