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생각을 했다 / 박은숙
오늘은 두어 명의 남 생각과
또 두어 명의 나를 생각했다
거울이 늘어나면 결국,
반사되는 얼굴들은 조각이 되겠지
생각과 오래 대화하는 일이
조각난 거울 속을 한데 모아
와장창 깨지는 일과 닮았을까
문득, 또는 불현듯 같은 순간들이
깨진 사금파리같이 눈을 찌를 때
두어 명의 남 생각과
내 생각에 찡그린 정각이 찾아온다.
때로는 늦은 일이 빠르기도 하고
더딘 것이 오히려 나을 때도 있지만
정각이 울렸다는 것은 이미
늦었거나 지나쳤다는 것이다.
그런 일은 두어 명의 남이거나
두어 명의 나의 일에 불꽃이 튀었다는 것이다
남의 일이 곧 나의 일
남처럼 두근거리는 일도 없다
내가 오늘 기쁘다면
그건 두어 명의 남이 해결된 일이다
남은 언제나 나보다 크고 넓다
그들이 나보다, 가 아닌
내가 그들을 더 미워한 일이 많다
어쩌면 남 생각에 너무 불려 다녔는지
오늘은 유독 피곤하다
[심사평]
2021년 제23회 수주문학상 심사는 2회에 걸쳐 이루어졌다. 1차심사에서는 허연(시 인), 김소연(시인), 안현미(시인), 김언(시인), 이명원(문학평론가) 등 5명의 심사위원들이 응모된 모든 작품을 읽고 각각 우수작 후보 2~3인씩을 선정했다. 그렇게 해서 선정된 후보 작품들을 2차 심사과정에서 심사위원 전원이 활발한 논의를 통해 검토하고 최종 수상작을 선정했다.
심사과정을 통해서 논의된 사항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응모작 가운데 산문시적 경향의 작품이 상당수 있었는데, 산문적 형식의 활용에 따르는 내적 필연성을 설득할 수 있는 작품의 성취가 필요해 보였다. 둘째, 응모 편수가 많다 보니, 연작시적 경향의 시도 제법 있었는데 모티프의 반복 등을 피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개별 시편들의 시적 성취에 편차가 있거나 기계적 반복에 머무르는 것은 아쉽게 느껴졌다. 셋째, 시적 자아가 1인칭의 진술을 동반하는 일이 자연스럽다고 하더라도, ‘타자’와 단절된 고립무원의 심경을 표현하는 데만 머문다면, 문학의 ‘대화적’ 성격의 약화를 초래할 가능성이 있다. 나와 타자의 접촉면을 고뇌하고 성찰하는 시적 태도는 여전히 필요해 보였다.
이런 단점들을 잘 극복하고, 나와 타자 사이에 연루된 ‘관계성’을 시적으로 아름답게 천착한 「남 생각을 했다」외 9편을 심사위원들은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시는 나와 타자 사이의 ‘관계’ 안에서의 기대와 좌절, 인식과 오인, 희열과 절망과 같은 모순감정을 서늘한 ‘미적 거리’를 통해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수상작과 함께 응모된 9편의 작품들 역시 정제된 시적 형식과 대상에 대한 시적 자아의 섬세하고도 차분한 응시를 통해, 관성화된 일상을 뚫고 솟아오르는 인식론 적· 감각적 ‘낯설게 하기’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일상성의 생기(生氣)와 그 안에 숨겨져 있는 삶의 통찰적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들이었다.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심사위원 일동은 만장일치로 「남 생각을 했다」외 9편을 2021년 제23회 수주문학상 수상작으로 결정했다. 수상자에게는 진심 어린 축하를, 다른 응모자들에게는 위로의 인사를 올린다.
심사위원: 허연(시인), 김소연(시인), 김언(시인), 안현미(시인), 이명원(문학평론가,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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