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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 강지혜

 

유리부는 사나이가

대롱에 숨을 밀어 넣었다

행성처럼 부푸는

 

이윽고 사내가

숨을 들이마시자

따뜻한 유리물이

식도를 타고

 

흘러 갔다

 

폐와 혈관에 맺히는 성을 바라보며

 

박수를 치는

쥐 떼

 

들이시면 들이쉴수록

사내의 볼을 뚫고

 

유리가락이 흘러 나왔다

음악처럼

고양이 수염처럼

 

외부인의 그림자가 스치는 공방의 밤

 

종종 떠나지 않고

 

내부가 유리로 된

사내들이

조심조심 가마 옆으로 모인다

 

기적처럼 해가 뜰거야

 

스노볼을 부풀려 줄게

 

박제된 기관지로

 

그리고 키스를 나누는 몇 사람

 

신장이나 고환에서

교회와 해변이

태어나고

 

벌려진 입술 사이로

떠도는

따옴표들

 

미로를 얻은 사내들이

소리를 듣는다

 

어디에도 간 적 없는

 

어디로도 온 적 없는

 

 

 

 

 

[수상소감]

 

시 쓰는 일은 힘이 듭니다. 아무런 힘도 없는 것의 힘에 매료되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것이 힘이 됐을 줄은 몰랐습니다. 힘을 나눠 준 사람들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아름다운 아빠, 엄마, 경구. 시를 사랑하는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상현. 심재휘 선생님, 이영주 선생님, 시를 만나고 바라볼 수 있게 해 주셔서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고개를 들고 조금 더 걸을 수 있게 해 주신 김행숙 선생님, 이원 선생님, 서동욱 선생님, 고맙습니다. 대진대 문창과 선후배들, 힘을 가진 것들은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습니다. 꿈을 향해 간다며 대단하다 말해 주는 친구들, 이 비루한 시대에서 우리 힘을 잃지 말자. 그토록 바라던 일이 생겼는데 저는 이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내야 하나, 다시 힘이 듭니다.

……

이것이군요. 시의 힘이란. 두려움을 짓밟는 언어의 능력. 그 힘을 갖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겠습니다.

 

 

 

 

 

돌고래 선언문 / 최지인

  

   손과 죽음을 사슬이라 부르자. 그들이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엉켜 있는 오브제라 부르자. 그들은 손가락을 쥐고 엄지와 엄지를 마주한다. 구부러진 몸이 손을 향해 있다. 손이 죽음을 외면하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자. 빠져나갈 수 없는 악력이 그들 사이에 작용한다. 손이 검지와 중지 사이 담배를 끼우고 죽음은 불을 붙인다. 타오르는 숨김이 병원 로고에 닿을 때 그들의 왼쪽 가슴은 기울어진다. 손에 입김을 불어넣어 주자. 손이 기둥을 잡음으로써 손은 기둥이 되고 그것을 선(善)이라 부르자. 죽음이 선의 형상을 본뜰 때, 다리를 반대로 꼬아야 할 때, 무너질 수 있는 기회라 부르자. 사라진 손을, 더듬는 선을, 부드러운 사슬을, 죽음이라 부르자. 그들의 호흡이 거칠어지면 담뱃재를 털자. 흩어짐에 대해 경의를 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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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물고기 / 김영진


시원始原의 바다를 헤엄치고 있을 물고기가

삭아가는 암자 추녀 끝에 매달려

영원을 헤아리듯 그네를 탄다

은빛 비늘을 물방울로 튕기며

요리조리 대양을 누빌 날쌘 몸이

놋쇠 종발鐘鉢에 갇혀 몸부림을 친다

이따금 스치는 바람에 떨렁떨렁

맑은 소리는 시원으로 향하는데

투박한 형해形骸는 굴레를 빗겨가지 못한다

저녁공양 목어의 간절한 울림이

쉰 목소리로 텅 텅 메아리 치고

산그늘 드리워 밤은 깊어 가는데

갇힌 물고기는 제 몸으로 공양을 한다

풍경風景과 풍경風磬속에서

풍경風經으로 뱃속을 채우고

빈속을 채워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신호를 일상 보내지만

울림은 바다를 향해 가고 싶다는

은빛 비늘을 번득이며 나가가자는 신호일 뿐

암자 추녀 끝에 매달린 물고기는

영원을 가늠하는 그네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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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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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상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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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드름의 기원 / 김광섭

 

고드름을 쥐여 주고 떠났네.

돌아서면 녹아내리는 울상

얼룩처럼 곡선을 이루었네.

낙원을 떠난 그대,

운명은 서서히 변방으로 흘러갔네.

그대에게 직립을 가르친 세계에서

하강하는 순간순간

붙잡으려 할수록 손금에 그늘이 서렸네.

사과나무 아래서 해빙의 기록을 써 내려갔네.

정수리로 선과 악을 밀어내며

뱀의 허물에서

곧게 서는 척추의 문장을 적었네.

낙하

낙하

내면에서 방울지는 음악.

그대는 걷는 생각에 골몰했네.

발자국은 늑골 안에서 발견되었고

엇갈리는 일은 깍지를 끼는 일.

투명해졌네.

사천 년이 흘러 되찾은 갈빗대

봄의 입속으로 뿔을 감추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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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지하 등고선 / 김시언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산정이 있다
침침한 지하 속을 걸어 오르는 산,
지층과 지층 사이
반지하 쪽방 곰팡이 핀 벽지를 뜯어낸다
벽지 속에 첩첩이 덧대어 껴입은 벽지들
층층이 등고선 무늬를 이루었다
어느 바위에서 떨어졌을까
모래알들 서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벽지 틈
비를 머금은 구름이라도 지나가는지
이불을 덮고 뒤척이는 물소리가 들린다
손바닥만 한 창을 비집고 드는 햇살을 따라
따글따글 끓어오르는 먼지들,
반층 눈높이로 보는 하늘은 반층 더 높아서
무릎을 꺾어 펴는 계단마다 등고선 주름들이 굽이친다
모란꽃을 뜯어내면 아메바가 나오고
아메바를 뜯어내면 푸른 하늘이,
아이들 찡그린 낙서들을 품고 있다
매미 유충처럼 벗고 싶은 허물들
꽃무늬 포인트 벽지 한 장으로 다시 등고선을 그린다
무늬가 촘촘할수록 가파르고 거친 산
방이 벼랑을 품고 융기한다

 

 

 

 

도끼발[斧足]*


  지동차 타이어를 갈갈이 찢어놓을 거야 천 년을 벼린 도끼발로 단숨에 내리칠 거야 터진 타이어 조각은 차선을 바꾸며 나뒹굴고 길바닥엔 급정거한 금들이 뱀처럼 서로 엉켜 들겠지 백 리 천 리를 걸어도 굳은살 하나 박이지 않던 뻘밭, 그때 내가 휘두른 도끼는 혀를 닮아 있었지 파도와 해초와 바위와 입맞춤하던 혀 하지만 이제 나는 단단해졌어 딱딱한 도로를 걷느라 강철보다 더 굳어져버렸어 바닷가 신도시 오늘도 나는 아스팔트길을 밀고 올라와 맨발로 걷지 아주 오래전에 죽은 동족이 석회질로 다닥다닥 붙어 있는 길 제한속도를 위반한 차들이 스키드마크를 내며 질주하는 길

 

  타이어 바퀴 아래 부서진 모래알이 되어 저 껑충한 아파트를 기어오를 거야
  아파트를 내리쳐 벽마다 균열을 내고
  벌어진 틈으로 해식동굴 빠져나가는 바람 소리를 낼 거야
  걷다 보면 부은 발 어루만져주던 파도가 그립기도 하겠지
  야반도주하듯 떠나간 낙지 일가는 어느 해변에 이삿짐을 풀었을까
  잊지 마 나는 바다의 도끼발
  바다가 다 사라져도 나는 사라지지 않지

 

  * 부족斧足 : 조개의 도끼 모양 발을 일컫는다

 

 

김시언:
1963년 서울 출생. 경기대학교 인문대학 독어독문학과 졸업.
인천대학교 교육대학원 독어교육학과 수료.
<주간경향> 교열기자. <인천IN> 취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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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의 모자 / 권민자

 

안부는 도로 입속에 넣어줘

토마토의 色을 빌려주겠니? 가지나 타조의 色 같은 것도

괜찮아?

나의 발은 완전히 몽롱해졌으니

은신시켜놨던 자학이나 꺼내야겠다

엉망진창 울고 있는 얼굴과 불쌍한 어깨는 쓰레기통에 처박고

나는, 폐빌딩에서 나올 법한 동전

내 등짝은 폐빌딩의 문짝처럼 너덜너덜해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열쇠와 양말을 챙겼다

밤은 밤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토마토가 필요했다

토마토처럼

굴러가기 좋은 동전을 폐빌딩에서 발견한 나는

모자 쓴 밤의 모자를 벗기겠다

모자의 얼굴과 내 얼굴을 구분 못하겠다

떨어지지 않는 발과 떨어진 발을 고르고 고르다 할 수 없이

괜찮아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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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 시산맥 하반기 신인상 시 당선작] 김대호 / 이진욱

 

허공의 마디 / 김대호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

 

나이들면 표정에 마디가 생기나 보다

나무의 옹이 같은 것이었는데, 단단한 그 안에는

뱉고 싶었던 말이 굳어 있을 것이다

할 말 못하고 있는 생각이 흐르다가 또 다른 마디가 되고

기억이 차곡차곡 쌓이던 분기점을 돌아

아침에 같은 약을 두 번 먹는 지점에 서 있고

 

어느 날, 마디에서 헛기침이 새나왔다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던 말 말 말들

입만 벌리면 허공에라도 내뱉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낯설어서,

아니민망해서 

입을 꽉 다문 채 얼굴만 붉히고 있었다

 

 

 

은밀함에 대하여

  

밤이 왔다

어둠은

빛나던 것들이 부식된 붉은 저녁과

붉은 열정이 타오르다 재가 된 시간을 거쳐왔다

어둠을 본거지로 한 은밀한 생이 움직인다

태초에 우리는 은밀하였다

우정과 희망과 결혼제도가 우리의 은밀한 소굴을 점령해 버렸다

희망은 비극에서 나온다는 글귀도 뭉개버렸다

사람들이 일회용 희망에 맛들기 시작하자

오래된 맛집인 비극은 문을 닫아 버렸다

슬픔이 없이 인생을 깨달을 수 없듯이

오래된 비극이 없이는 진정한 희망은 없다

밤은 우리에게 잘 익은 비극을 선물한다

은밀한 거래 은밀한 생이여

지금 은밀함은 해석이 잘못되어 천대 받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은밀함의 자손이다

그대여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밤이 되면

진정 은밀하여라

 

 

  

그늘을 베다

 

   몸에서 나무 한 그루 자란다

   대물림된 그 나무는 사춘기 때 성장이 가장 빨랐다

   내가 가출했던 며칠 동안

   십 년의 성장을 끝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잿빛을 닮아간다

 

   그 나무를 척추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척추를 다쳐 입원했을 때도 나무

는 꼿꼿하게 자라고 있었으니까, 나무옹이가 어떻게 단단한 의지를 숨기

고 사는지 알았고 내 몸을 어둡게 한 것이 나무의 그늘이었다는 것도 알

았다 나무를 베지 않으면 그늘도 사라지지 않을 것

 

   아버지는 그늘을 피해 사막에 갔다 원양어선 타고 구소련에도 다녀왔

지만 어두운 얼굴로 요절했다 그늘이 숙주의 살과 피를 모조리 빨아들인

것은 갓 오십을 넘긴 무렵이었다

 

   뿌리가 끈질기게 흡수한 욕망

   핏줄 따라 뻗어나간 독극성 잔가지들

   시퍼런 잎사귀들의 허연 입김들

 

   나무를 베면 그늘이 사라지고 쓰러진 나무는 다리가 되어 저쪽으로 날

데려갈 것이다 저쪽 세상엔 일인칭은 없고 무수한 간지러움만

 

   항상 등이 근질근질하다고 말했나요? 꿈속의 아버지 

 

 

 

개를 몰고 산책하다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간다

어제도 개를 몰고 산책했다

나는 누굴 닮았고

날 닮은 누군가는 지금 어디 살고 있을까

그는 왜 날 닮았을까

산책은 길어지고

난 집으로 가는 지점을 돌았다

내가 책으로 읽었던 문장들은 판타지가 되었다

난 이제 무엇을 읽으며 살아야 하나

사소한 불편을 참지 못해

이 시대는 황홀한 소멸의 길을 걷는다

나는 걷는다

수술 후 증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매일 산책하는 나는

우익과 좌익을

우회전 좌회전하면서

걷는다 개를 몰고 걷는다

 

 

  

까마귀

  

고소공포증이 있는 까마귀는

하늘 높이 날지 못하고

창문 밖에서 울었다

나는 까마귀에게 커피 한 잔을 대접했다

이 커피는 멀리 케냐에서 날아왔단다

까마귀는 어디선가 본 듯한 표정으로 나와 커피잔을 번갈아 보았다

구도로에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있었다

까마귀는 괴로워했다

도대체 난 누구죠? 도대체 나 어디로 흘러가고 있단 말예요

 

까마귀의 조상은 공황장애였다 불안증이었다

그리고 예측불가능한 미래였다

 

태생은 어쩔 수 없군!

지나가던 까치 너구리 메뚜기가 욕을 해댔다

아냐 아냐 난 그래도 검은 내 형식과 내용이 좋아

내가 슬퍼하는 건 잃어버린 기억 때문이야

도대체 기억나지가 않아

닭살이 돋던 그 감동들

온몸을 던지던 그 열정들

 

까마귀가 떠났다

엉금엉금 기어서 큰도로쪽으로 갔다

그의 고소공포증을 내가 해결해 줄 수는 없다

읽어버린 그의 기억 역시 내가 어찌해 줄 수가 없다

나는 그에게 조용히 커피 한 잔을 내밀었을 뿐이고

그는 큰길행을 선택했을 뿐이다

오늘도 저녁은 올 것이며 그 전조 뒤

밤이 오면

온 세상은 검은 까마귀 떼로 뒤덮힐 것이다

 

 

 

 [당선소감]

   

내장이 없는 아침, 개를 데리고 산책 나간다.

어제도 개를 몰고 산책했다. 나는 누굴 닮았고, 날 닮은 누군가는

지금 어디 살고 있을까? 그는 왜 날 닮았을까.

산책은 길어지고, 난 집으로 가는 지점을 돌았다.

내가 책으로 읽었던 문장들은 판타지가 되었다.

난 이제 무엇을 읽으며 살아야 하나

사소한 불편을 참지 못해 이 시대는 황홀한 소멸의 길을 걷는다.

나는 걷는다, 수술 후의 증세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매일 산책하는 나는 우회전 좌회전 하면서 걷는다, 개를 몰고 걷는다.

 

어느새 중간을 돌았다, 중심은 관통하지 못하고 빙빙 돌면서 눈치나 보는 시간을 견디고 있다.

무엇이 자꾸 치밀어 오르는데, 난 그걸 긴 호흡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소곳한 음악과 쾌활한 물줄기가 내 곁에 있다. 그것이 어쩌면 희망이다.

추풍령 아래 조그만 커피집을 차린지 3년이 되었다.

난 그 작은 세계에 담겨 조심조심 시간의 활보를 지켜 보았다.

매일매일 같은 시간이 찾아왔고

12시나 3시 따위, 생기는 순간 중고가 돼 버리는 시간들의 압제를 받으며 난 괴로워했다.

그런 괴로움들이 날 키웠다.

그리고 자문해본다 난 어디쯤 와 있는 걸까?

 시를 공부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의 은혜를 입었다 특히 곁에서 지지부진한 성장을 지켜봐 준 아내에게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같이 공부하고 아파했던 주위의 문우들, 그들에게도 좋은 글로 보답하고 싶다.

부족한 글을 선해 주신 심사위원 여러분께도 깊이 감사의 절을 올린다.

 

 

  김대호:  1967년 경북 김천 출생.  2010년 수주문학상 수상

 

 

 

 

 

 

희곡(喜曲)을 기다리다   / 이진욱

   

1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

음부터 피곤함에 절어 있었어 행동이 느려지는 순간 효과음은 아래

쪽에 모로 세웠어 쉰 목에서 나오는 대사는 푹 삶아 졌어 꿈틀대

거친 숨결도 그렸어

 

2

   중간 즈음 언덕도 하나 만들었어 그곳에 사는 소년의 눈동자를

세밀하게 써 내려갔어 조명은 절정이 막 지날 때 F. I* 됐어

   아- 조금 늦었어

   아무 대사도 못 쓰겠는데 원고지 속 배우들은 나만 보고 있어

Staff도 관객도 극장 경비도

 

3

   오늘 밤에는 못 오지만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해 달랍니다**

는 말을 소년은 늙은 배우를 향해 중얼거리고 있었어

 

4

  사실,

   내가 틀렸든 부족했든 모두 비웃었어 막이 내린 뒤 늙은 배우가

원고지에서 튀어나왔어 소년은 상기된 얼굴로 눈치만 봤어 끌고

가지 못할 희곡을 쓴 내 탓이라고 원고지 속에서 웅성거렸어 자판

도 창문도 천정도

   눈이 빠질 듯 아팠고 귓속은 윙윙거렸어

   조용히 해 제발!

 

5

   파쇄기로 밀려들어 간 늙은 배우는 잘려나갔어 준비 없는 무대에

그림을 그린다고 나만 호들갑을 떨었어

소년의 중얼거린 말은 나에게 했던 것이었어

 

6

   난 지금도 비상구를 찾아 꺼진 모니터 안에서 우두커니 기다렸

어 먼지 쌓인 무대처럼

 

 

*페이드인 F. I(Fade-In): 무대가 차츰 밝아지는 것, 용명(溶明)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중 소년 대사 인용

 

 

   

모항*

 

태풍이 올라온다는 예보에

넣어 두었던 바다가 보고 싶어졌다

밀물을 움켜쥐었을 서쪽의 그 바다

 

해안은 이미 뒤집힌 초라한 살림

바람은 날카로운 호흡으로

방파제를 눕혔다    

생채기가 생길수록

어선들은 둥글게 부여잡고

들썩이며 어깨를 떨었지만

이곳엔 태풍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섬의 길목에서 유혹했던 남동풍 따라

대폿잔에 별을 담아 오신 아버지

그 발자국을 뒤밟아

어머니는 하루같이 물질하셨고

소쿠리씩 검버섯을 캐 오셨다

처녀 같은 바다는 어느 틈엔가 주름에 쌓였다

 

경계는 시간을 덧바르며 가장자리부터 아물며

다시 어린 바다를 출산했다

 

깊은 주름에 밀물이 들어왔다

 

 

*모항: 격포 부근에 있는 조그만 한 항구

 

  

 

나는 없소

 

깨진 사기그릇에

빗물은 마르다 썩은 흔적을 남겼고

항아리는 입 벌리고 돌아앉았다

바람에 문짝은 콜록거렸고

그런 날은 창자가 꼬이듯 비틀렸다

삐쩍 마른 마당과 대충 자란 풀은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땅거미는 기울어진 어깨에서 꺼졌고

등고선 같은 흉터가 빈방으로 빨려 왔다

파 먹힌 벽지엔 내던진 손때만 잠겼다

 

상수리나무 가지로 날아든 산까치

출구를 찾지 못했다

경계 없는 시간 속에 부재(不在)가 찾아왔고

탯줄 같은 시선은 흔들리는 시간을 꺼냈다

 

사기그릇에 빗소리가 멈추면

자디잔 별들이 돋아났다

 

 

 

독을 만지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마당 모퉁이에 박힌 몇 개의 독에서 들려온다

 

제금*날 첫 세간은 실처럼 금 간 귀 떨어진 항아리

기반 잡을 때까지 보리쌀 서너 되는 넣을 수 있을 거라며

가난한 속곳에서 꾸깃꾸깃한 당신을 떼어 주셨다

 

매일같이 뚜껑을 다듬으셨고

손맛을 먹은 뚜껑은 자르르하게 변해갔다

함지박으로 달빛 부스러기를 건져 올리던 새벽

엉킨 조바심은 정안수 한 사발로 살살 풀었던

그 시절 어머니는 항아리셨다

 

부족한 쌀독도 되어 보고 된장독도 되셨던

덜어 주고 퍼 주어도 만족해하시던 어머니

유독, 독 주변으로는 가지 않기를 바라셨고

난 빈 만큼 더 퍼 가려고 늘 독만 주시했다

 

이맛살에 줄이 생기고야 독을 감싼 금을 보았다

검게 탄 독에 다가가 만져도 보고 닦아도 보고

귀도 가까이 붙여 본다

 

나는 어머니의 깨진 종지였다

   

*제금 : 출가의 전라도 사투리

 

 

 

 

보리숭어

   

마을이 들썩인다 그 녀석들이 왔다

늙은 서방은 마이크를 들고 아낙들은 양동이를 잡는다

노인들은 굽은 허리를 달래며 잰걸음으로 온다

 

허벌나게 거시기 해붕께 퍼뜩 준비 혀쑈 잉

, 요 때 뿐잉께롱 후딱 챙기쑈 잉

 

물살 튕기며 올라오는 팔뚝만 한 느낌표

갈마바람 타고 온 윤슬 비린내로 넘실거린다

평상 대야 싣고 냄비랑 뜰채는 먼지를 턴다

탁배기로 속 닦던 사람들 이날만큼은 향기를 담은 술로 달랜다

두엄 만들 때나 썼다는 개숭어*

두루 뭉실 앉아 숭어가 온 바다를 한 토막씩 혀에 올린다

 

보리가 설익은 밤 떠난 감 나무집 아지매

숭어가 올 즈음 돌아온다며 이슬을 쓸었다

감나무 그늘이 곱절로 커가는 동안 늙은 서방은 숭어만 기다렸다

 

아따, 그랴도 니가 왔응께 얼굴이나 볼라고 그라제 누가 찾관디

 

짬떼기**도 종일 마실 보내고

덜 여문 보릿대 머리카락 날리듯 풋내 뿜어낸다

숭어가 올 무렵 온다던 그 아지매

 

*개숭어: 보리숭어의 전라도 사투리

**짬떼기: 엇박자의 전라도 사투리

 

 

 

 

 

[당선소감]

   

 실현 가능한 상상력을 낯선 글로……

 

   ‘당선이란 두 글자를 받고 소감문을 쓰려고 자판 앞에 앉으니 제 모습이 이토록 어색해 질진 몰랐습니다. 저의 시는 초라하고 가진 것 없으나 오늘 소감문은 살 좀 찌워야 하겠습니다.

     아직 저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어스름 기운이 감돕니다.

   샛별을 보고 한참을 쫓다 패랭이꽃 향기에 취해 길을 잃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정신을 차렸을 땐 모든 불빛이 꺼진 어두운 밤이었습니다. 북극성인 줄 알고 쫓아가던 빛은 마지막 남은 반디였다는 건 한참 후에 알았습니다. 이 때 ?시산맥?이라는 큰 산을 만났고 그 맥이 저에게 선물을 주었습니다. 산맥의 보드라운 흙이, 나무가, 새소리가 또 앞서 지나간 선배들의 만들어 둔 자취였습니다.

    지난 시간 참 많은 글을 써왔고 지금도 쓰고 있습니다. 광고Copy와 시 그리고 시, 또 시. 문단의 변두리와 그 고샅길 사이에서 가장자리를 못 찾고 턱에 걸려 넘어져 무릎이 까이기가 수십 번. 항상 시라는 것은 저에게 얼 비춰 주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제가 안착해야 할 글이라는 걸 지난 시간 내내 깨달았고 프로 골퍼 자격증을 딸 때 손바닥에서 피가 나도록 채를 휘둘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밤새 손가락이 짓무르도록 펜과 자판을 잡아왔던 그 첫발을 오늘에야 내 딛습니다. 몇 날 밤을 거실이 환하게 날 빛 가루가 쏟아지는 줄 모르고 실현 가능한 상상력을 낯선 글로 써오는 동안 묵묵히 지켜봐 주고 글을 쓰고 책을 보도록 서재를 마련해 준 반려자인 쌍둥이의 엄마 김은진과 함께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또 제 내면에 자고 있던 순수문학을 깨워 주고 20여 년을 함께 해준 연극반멍석鹿友會 회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합니다. 사실 저의 시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시작되었으니 부모님께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더불어 같이 글공부를 도와준 한국작가회의 양주지부함시동인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의 시가 골짜기에서 비로소 마루로 찾아갈 수 있는 감각과 나침판을 볼 수 있는 눈을 뜨게 해준 계간 ?시산맥? 심사 위원들께 감사의 뜻을 마침 글로 전합니다. 감사합니다.

   

이진욱

1969년 전남 고흥 녹동 출생. 원광대학교 경영학과 졸업. ?함시동인. 카피라이터.

 

 

 

 

 

 

 

 

 

 

[심사평] 시산맥을 지킬 기둥들을 찾아서

   

 『시산맥을 통해 등단하는 시인들에게 ?시산맥?은 고향일 것이며, 그런 시인들이 고향인 ?시산맥?을 지키는 기둥들이 될 것이라는 공통된 합의를 바탕으로 심사위원들이 심사에 임했다는 사실을 우선 말씀드린다. 최종심에 올라온 분들은 이진욱, 김대호, 오유경, 이선자와 홍영수 등 다섯 분이었고 이 중에서 김대호와 이진욱 두 분을 등단의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탈근대의 시대에 이르러 시인들이 깨닫게 된 것은 언어가 기본적으로 은유라는 사실이었다. 김대호는 이런 사실을 본능적으로 채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호는 어떤 식으로든 말하지 않으면 터져버릴 것 같은 말이 있었다/ 그때 말했어야 했다/ 그 순간이 지나가자/ 내 앞에 서 있던 말이 떠났고 이 일 저 일 시간을 궁리했다라는 허공의 마디1연에서 축자적(literal) 표현이 더 이상 자존(自存)할 수 없는 상황을 지적하고 있다. 김대호는 은밀함에 대하여에서 태초에 우리는 은밀하였다라고 전제하면서 지금 은밀함은 해석이 잘못되어 천대 받고 있지만/ 우리는 모두 은밀함의 자손이다라고 현시대의 상황을 비극적으로 진단하고 있다. 이런 탈근대적 인식의 구체적 작품화가 그늘을 베다, 개를 몰고 산책하다까마귀등에서 시도되고 있는데 은유가 편리하게 상징으로 안착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김대호의 시세계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진욱은 희곡(喜曲)을 기다리다의 괄목할만한 성취로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받았다. “상연하려고 쓴 연극의 각본인 희곡(戱曲)이 아닌 이 시의 제목에서 제시되고 있는 즐거운 노래라는 뜻의 희곡(喜曲)’이란 용어는 코믹 오페라인 희가극(喜歌劇)을 연상시키는데,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다시 쓰기하면서 극적 상상력이 의미심장하게 발휘되고 있는 작품이다. 특히 어둠이 납작하게 내린 날/ 모서리에서 동선이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어 늙은 배우는 처음부터 피곤에 절어 있었어라고 현실의 정경이 연극의 무대와 빈틈없이 오버랩되는 첫 부분부터 이진욱은 자신의 공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진욱은 극적 상상력이 충분히 발휘되었을 때 작품의 완성도가 높아지는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데, 모항에서 섬의 길목에서 유혹했던 남동풍 따라/ 대폿잔에 별을 담아 오신 아버지/ 그 발자국을 뒤밟아/ 어머니는 하루같이 물질하셨고/ 한소쿠리씩 검버섯을 캐 오셨다/ 처녀 같은 바다는 어느 틈엔가 주름에 쌓였다라는 묘사는 한국시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던 부모 묘사의 센티함을 극적 상상력으로 멋지게 극복하고 있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없소, 독을 만지다보리숭어는 앞의 두 작품보다는 다소 힘이 떨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욱의 시세계에서 극적 상상력이 앞으로 어떻게 발전할 것인지 기대하게 하였다. 등단한 두 분께 축하의 말을 전한다.

 

이 만 식(본지 편집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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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부문 - 석지연 <오래된 의자> <횡단보도>

시부문(가작) - 박혜민 <거울> <사막에서 길을 잃다>

 

 

 

오래된 의자 / 석지연

 

당신처럼 내 엉덩이를 좋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내 아랫도리의 크기를 가늠해보려고 온 몸을 벌리고 서있는 나의 낡은 당신

곪은 살갗 위로 곧게 뻗어 붉은 등줄기들

당신은 내 휘어진 등뼈의 시간을 사랑한다

 

당신의 품에서 오래도록 읊조리던 나의 음절들

온 마음으로 발로 찼던 첫사랑의 흉터

아무렇게나 펼쳐지는 나는 당신의 흐트러진 독서

당신은 내 찰나의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입술 바깥으로 고백을 하다 만 주스의 축축함과

튕겨나간 과자의 각질이 남긴 가벼움

당신은 뭐든지 마시거나 뱉을 수 있을 것 같아

 

당신은 넣어서야 잠이 든다

오래도록 내 흩어진 냄새의 꿈을 꿨던 쪽문 옆 당신

 

 

 

사막에서 길을 잃다 / 박혜민

 

1.

모래바람이 길 안쪽으로 세상을 밀어 넣는 곳

얼굴에 터번을 쓴 사내들이 구릉지대 위를 천천히

고비를 넘기듯 걸어간다

 

2.

병실 안 링거액이 노인의 팔을 타고 흐른다.

사막의 모래가 여러 갈래로 나뉘듯

뼈만 남은 살 위엔 주사바늘이 반흔으로 남아있다.

호흡은 마지막을 향해 긴 돛을 펼친다.

숨이 가빠진다. 노인은 몸을 뒤척인다.

창 밖에서 침식된 시간이 건기를 넘어 다가온다.

 

3.

총알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라 사람들이 걸어간다.

땅 위로 드러난 총성에 스며들 듯 새겨지는 사막 위의 선

위로 드러난 총구의 불빛과 짧은 우기처럼 사라지는 빗물에

모래알만 사방으로 흔들리고

 

4.

움푹 꺼진 노인의 눈자위 위로 사막의 없는 계절이 찾아온다.

멀리서 들리는 발자국 소리 모래 언덕을 건너는 순례자들의 발자국이 병실 앞에서 서성인다.

병실의 바깥쪽에는 아직도 낙타 몇 마리가 슬프게 울어댄다.

마지막은 예측할 수 없는 순간들로 가득 찰 것이다.

총부리를 당기는 손가락처럼 짧았고 그걸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숨가빴다.

사내들은 모래 언덕 위를 타고 올랐다.

몸을 가누는 일로 일생을 마무리한 헐벗은 숨소리들.

그 生을 가늠하는 동안 모래알이 시리게 흩날렸다.

미세한 밀도에 대해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은 끝내 발견되지 못할 것이다.

그 무의식의 한 지점에서 노인은 여전히 사막 위를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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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교양 / 황인욱

 

흑사병의 역사를 뒤로하고 눅눅한 지하를 거닐던 쥐들이

시장의 외곽으로부터 이곳저곳을 누비며 악마의 씨앗을 뿌린다

높은음자리표를 따라 선율이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면

이내 악마는 굽어보는 선단 위에서 지휘봉을 들고

품위 있는 연주를 시작한다

귀품 있는 ㄴ귀족부인의 영국식 치마 끝자락을 타고

머나먼 땅에 도착할 때쯤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들조차 악마의 연주에 황홀해 마지않는다

 

기사는 투구를 쓰고 오래된 갑옷을 걸친 채

악마의 교향곡을 음미하곤, 소리의 진원지를 따라간다

형용할 수 없는 정의감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울려퍼지며

죽음을 바라볼 때 경건해진다

 

기사는 오래된 나무 단상 위에 올라서

이내 악마를 단두대 앞에 세운다

단두대의 핏물이 바구니로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새로운 시대를 바라보았으리라

바구니 가득한 수많은 머리들 중 하나로 남겨질 악마의 자취

하지만 악마는 자신의 운명 앞에 미소로 응답한다

곧 칼날이 공간을 비틀고 악마의 목을 강타하니

사람들은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악마의 바람이 이루머지며

악마는

저주받은 암흑 속에서 휘파람을 분다

기사의 죽음은 단지 악마의 비석 앞에 놓인

안개꽃 다발 속에 하나의 이파리에 불과할 뿐

악마를 찬송하는 사람들의 함성이 광장 가득 울린다

이 얼마나 고결한 교양이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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