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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굳이 방사선 연대측정법에 따른

지구 연대기 도표가 아니어도

겹겹의 지층을 이룬

반지하의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고생대 양치식물이 원시림을 구축한다

만약에 침묵의 석탄기 숲이 없었다면

빙하기보다 더 혹독한 오늘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적당한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생성된

흑갈색 가연성 암석이 이 밤을 덥히고 있지만

퇴적된 날들에 매몰된 일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광맥을 찾고 있다

꿈은 쉽게 채굴되지 않고

허기는 단속반처럼 기세등등한데

돌아누울 틈조차 없는 일가족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칼잠은 더욱더 날을 번득이며

무허가의 밤하늘에 무수히 칼금을 긋는다

어린 아들의 칭얼거림에도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일가족의 잠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연탄가스를 적당량 흡입하자

고요한 식물의 꿈이 되어

갱도보다 깊은 서로의 속을 헤아리며

겨울눈을 틔우려고 단단히 오므리고 있다

 

  

 

 

내 생에 탄광촌

 

 

도대체 수직 갱도는 주민들 가슴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던 걸까

미소만 빼고 모든 게 시커먼 탄광촌,

하얗다는 것만으로 이적 표현물이 되는 그곳에서

흰 눈마저도 귀순용사처럼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탄가루가 날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막장에서

아버지들이 산업역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땅벌 같은 아이들은 저마다 탄맥을 찾아 수직 하강했다

세상의 모든 레일은

오직 탄광으로 향할 거라고 믿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캄캄함에 익숙해졌다

갱도는 38선처럼 철통같았기에 자주 무너졌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들킨 것처럼 숨죽여야 했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는 속죄양이 되어

탄광촌을 떠나야 했다 마을에 남겨진 아이들은

떠난 아이에 대한 기억을 탄 더미에 파묻곤

시커멓게 흐르는 시냇물에 손을 씻었다

 

폐광 이후, 사람들은 흑백의 기억을 지우고

총천연색 삼차원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누구도 무너진 갱도에서 구출되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후미진 골목에서 연탄재를 만나면

들킨 것 같아 함부로 걷어찬다.

 

 

 

 

 

자위적 발포

 

 

몽정을 할까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대청마루에서 뒤척이다가

잠결에 귓속말로 들었다

엄마와 이모는 머리를 맞대고

봄밤의 정적을 깨물며 속삭였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탄알은 서늘한 등짝에 박혔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구멍 숭숭 뚫린 밤하늘을 끌어당겨

하얗게 질린 얼굴을 덮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내 시신을 찾아 헤매 다녔다

끝끝내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보다 진한 정액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희멀건 정액으로 얼룩진 팬티를

옷장 깊숙이 감췄으나

자꾸 발기하는 사타구니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끊임없이 나를 검열해야 했고

문득문득 불심검문에 걸려들었다

불순하게 발기하는 날들,

잔혹한 폭력을 상상하며 자위행위를 했다

자위적 발포인 양 정액을 쏟아내고

백기를 펄럭이듯 화장지로 훔치면

움츠러든 사타구니는 시무룩했지만

사정권에서 벗어난 것처럼 안심이었다

비릿한 생을 발칙하게 창밖에 내다 건

꽃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딱지치기

 

 

쉽게 접혀지지 않는 날들이었다

통일달리기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을

억지로 구겨 손바닥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바드득 어금니를 갈며 밤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밥상을 뒤집어엎는 일로 하루를 마감했다

나는 국물을 뒤집어쓴 채

달력에 남아 있는 날들을 몰래 들춰봤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재빨리 뜯어낸 달력이

딱지가 되어 빳빳하게 날을 세우면

나는 치기배처럼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세상은 거대한 정화조였다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불순물 같은 아이들은

쉽게 엉켜 정치판모양 딱지치기를 했다

도대체 무엇을 뒤집어엎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나가떨어지기 일쑤였고

허망하게 뜯겨나간 일기장은

배설의 흔적을 지웠다

위인전 책 표지를 뜯어 딱지로 접으며

내일을 기약해 보려 했지만

쌀자루까지 탐욕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도블록으로 일으켜 세운 세상

 

 

밤이 깊도록 사내는 보도블록을 깔고 있다

그의 길은 해체된 지 오래,

낮에 엉망이 된 보도블록을 파헤칠 때 사내는

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완강하게 버텨온 어깨를 허물 수밖에 없었다

들쭉날쭉한 보도블록은 행인들의 발을 잡아채기도 하고

밟을라치면 지뢰처럼 행인에게 물폭탄을 퍼붓기 일쑤,

조각조각 흩어진 날들을 짜 맞추는 사내의 손놀림은

꼼꼼하고 세심하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

끈끈한 온정을 덧바르고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는다

그는 길과 불화했던 걸음걸음을 되밟는다

보도블록을 땅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쳐서

그 잔해로 벌였던 투쟁의 날들,

이제 그는 자신이 허공에 내던져야 했던

젊은 날의 고뇌와 열정의 부스러기를 모아

걸음과 길의 합일점에 찾고 있다

사내의 어깨 위에서 밤하늘이 자꾸 칭얼거린다

누군가에겐 보도블록이 빛이 된다는 걸 알기에

그는 한 조각도 소홀함이 없이 모자이크한다

사내의 긴 궤적을 쫓아

별똥별이 급하게 밑줄을 그었다

 

 

 

5ㆍ18기념재단 문학작품공모심사위원회 

심사위원 박두규
심사위원 김성범
심사위원 이화경

* 심사평*

ㆍ시 부 문 심사평 : 심사위원 박두규

  5·18문학작품 공모심사는 5·18정신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5·18정신의 문학적 형상화는 단순히 5·18 항쟁 당시의 시대정신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닌 5·18정신의 본질에 대한 현재적 인식과 실천이 녹아 있는 삶의 궤적에 대한 형상화 작업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 속의 한 시대정신이 이후 역사 속에서 당대의 국가나 개인에게 어떤 문제의식으로 작동해야 하는가의 고민 속에서 시가 쓰여 졌기를 바라며 심사를 했습니다. 

  구체적인 심사는 먼저 기본적으로 문학적 기량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며 55편 중 29편을 선별했고 그 선별된 작품들을 5·18정신의 본질에 대한 현재적 인식과 문학적 형상화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14편을 뽑았고 3번째 읽을 때는 감동이 있는가와 작품의 완결성 정도에 중심을 두고 5편(「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 「이 시대 언어를 찾아서 외」,「와플카페 외」, 「나의 양심 외」,「바람을 읽다 외」)을 골라냈습니다. 그리고 당선작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작품으로 마지막 2편(「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와플카페 외」)을 골랐습니다. 

  두 편 중 「와플카페 외」는 시어의 구사가 탁월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좋은 시였으나 시상의 전개가 좀 산만하고 시의 구성과 내용의 집중도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는 모두 5편으로 화려하고 잘생긴 시는 아니지만 튼튼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내용의 집중도가 높았으며 감동이 있었습니다. 당선작으로 내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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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계

 

 

명서영

 

 

 

거실 정면에서 바늘이 앞뒤로 오락가락

 

고장 난 저것은

 

중심을 찾는 것이 분명하다

 

오르지 한 방향으로만 치닫던

 

생각들을 수선하고 있다

 

덜컹덜컹 달려온 길이

 

삶의 궤적으로 서있는 숫자 앞에

 

잠시 자신을 내려놓는 녹슨 바늘

 

새털보다 가벼웠던 세월을 추억하며

 

비로소 활짝 편 손은 편안하다

 

하늘을 꿈꾸던 나뭇잎이 바람에 날아가듯

 

몸은 뜨거웠으나 헛바퀴를 돌던 사랑이나

 

쉬지 않고 일했으나 빈손 일 때나

 

돌아보면 그립기만 한

 

휘돌린 생

 

발병 나고서야 제자리에서 맴돌았던

 

시계視界가 살짝 열린다 

 

 

 

 

 

 

외각지대 2

 

-이끼

 

 

 

이끼가 그늘을 좋아한다고 가볍게 말하지 마라

 

어둠이 두렵다, 그는

 

출구 찾다가 온통 그늘을 뒤덮었다

 

 

 

 

얼마나 발버둥 쳤으면

 

햇볕을 받지 않고도 푸른 피가 돌고

 

잎과 줄기의 구별을 명확히 할 겨를도 없었겠는가?

 

 

 

 

 

어떤 것은 일 센티 크는데 백년이 걸린단다

 

무겁고 허기진 잎

 

 

 

 

 

그의 작은 키는 그늘의 슬픔이다, 평생

 

음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운명도 있다 

 

 

 

 

 

 

 

외각 지대 3

 

 

 

 

홀로 앉아 있는 노인

 

연못을 낚시질 한다

 

회사를 그만둔 후 날마다 왔지만

 

물고기 한 마리 낚지 못한다고

 

목구멍에 낚싯바늘이 걸린 듯

 

타들어가는 그의 목소리

 

표정마저 바늘에 걸려 요지부동하다

 

시간을 엮고 있나, 노인과 물고기

 

바늘 없는 낚싯대만 서로 붙잡고 있나*

 

검버섯꽃 핀 손이 물고기의 낚싯대에 잡혀있다

 

마른 나뭇잎 하나 미끼가 되어 못에 빠진다

 

물결무늬 깊게 새겨진 노인의 얼굴에서

 

먹이 찾아 수심 깊은 곳까지 빠닥빠닥

 

밀물졌을 그의 삶을 상상한다

 

세상을 들여다보기엔 너무 큰 그의 눈

 

안에는 그렁그렁 갇히지 않은 물이

 

어디론가 파도를 일으킬 것 같다

 

입질하듯 그가 긴 숨을 내뿜으면

 

동글동글 연못에 꽃이 핀다

 

 

 

 

 

*姜尙의 一子釣針에서 차용

 

 

 

 

 

 

 

까치 마을

 

 

 

 

헐렁했던 산의 품이 금세 꽉 낀다

 

까치집을 가운데 두고

 

수컷인 듯 두 마리가 쫒고 쫒기고

 

암컷인 듯 두 마리 마주보며 우짖는다

 

숲의 내장까지 들여다보며 읽던 바람도

 

찔끔 눈 한번 감아버리겠다는 심사

 

나무 뒤로 숨고

 

바람 한 점 없는 팽팽한 숲은

 

한쪽 귀퉁이가 찢어지고 있다

 

작년 초 산자락에 들어선 아파트에

 

낚여 채인 산

 

한 나무에 까치집을 여럿, 겹겹이 들고

크게 흔들린다

 

나무들 점점 키를 높이는

 

바람이 숨차게 넘어간 능선 쪽으로

 

어린 까치의 눈들이 총총 박혀있다

 

 

 

 

 

 

 

거문고소리

 

 

 

 

 

 

나는 깊은 산중의 기도다

 

끝내 완성시키지 못한 채

 

내다버려진 목조부처의 곡이다

 

싸개를 풀어헤친 뿌리와 이파리의

 

오랜 울음이다, 노래다

 

세상이 나를 반 토막 내고

 

내 몸짓에 박수 보내지만

 

골방 한쪽 귀퉁이를 떠나

 

공명으로 하늘을 두드린다는 것을 모른다

 

내 소리의 근원은

 

심지 깊은 뿌리의 다짐이며

 

흔들려도 한쪽으로 쏠리지 않으려는

 

이파리의 정신이다

 

그 산의 푸른 기억들을 우려내어

 

미완성의 염불을 읊는다

 

한 옥타브를 낮춰 너를 끌어안는다

 

때로는 울음이 세상을 추스릴 것이다

 

 

 

5ㆍ18기념재단 문학작품공모심사위원회
심사위원 김형수
심사위원 임동확
심사위원 윤기현


* 심사평 

[시부문 총평](심사위원 임동확)
  5ㆍ18항쟁 30주년을 앞두고 5월 항쟁이 갈 길은 무엇인가에 대한 분분한 이야기가 가능하리라 생각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서사내지 신화의 창조다. 그것들 없이 80년 5월 광주는 여전히 동어반복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며, 무엇보다도 80년 5월은 한낱 역사 속의 한 기억에 불과할 것이다. 5ㆍ18문학작품 공모의 의의는 거기에 있다. 새로운 서사와 신화적 구성 속에서 거듭 생생한 현재로 태어나는‘광주 5월’을 기대하는 것이다.

  최종심에 오른 <로마제국흥망사>, <가마솥원형경기장>, <소나 닭이나>, <블랑코의 잃어버린 코를 찾아서> 등의 작품들은 일단 이러한 기준에 들었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알레고리 수사법은 여전히 세계를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즉 이들의 시들이 결국 80년 5월을 노래한 무수한 작품들처럼 여전히 80년 5월의 문제를 선악 내지 이분법의 차원에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당선작인 <시계>외 투고자의 작품은 우선 그런 알레고리적

 

이분법에서 벗어나 있다. 무엇보다도 한 세기가 지나가는

 

시점(時點)에서 새로운 시계(視界). 다시 말해 한 세기를

 

매듭지으면서 또 다른 세기를 맞이해야할 80년 5월의 문제를

 

‘고장난 시계(時計)’를 통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당선자의 큰 정진을 기원한다.


심사위원 임동확: 한신대 국문과 교수) 

출처 : 5ㆍ18 문학작품 공모 공식 카페
글쓴이 : 미목이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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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가 둥근 이유 / 하기정

 

 

안골 사거리 우회전 공터 지나 높은 오르막 길을

유모차 한 대 오신다

팔월의 햇살 아래 불 지핀 아궁이 속 같은 열기가 아스팔트 위를 어룽거리는데

유모차엔 아기 대신 노끈으로 친친 동여 맨 삼양라면 박스 새우깡 박스 옥시크린 박스

내용물 없는 빈 상자가 삐죽 튀어 나왔다

노파가 유모차에 걸어 놓은 간판처럼

 

아슬아슬 고갯길이 한참이다

지구는 둥글지, 자꾸 걸어 나가면

지구가 둥근 이유는 멀리 수평선 돛단배를 보면 알지

돛단배는 돛부터 보여주다 차츰 배 전체가 드러나지

 

노파의 등과 아스팔트 길이 쌍곡선이다

저 속도로 가다보면 빈 종이상자의 무게만큼

라면 한 박스라도 바꿀 수 있을까

나아간다는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는 일

빈 상자 묶음은 들쑥날쑥, 뒤틀린 판게아처럼

노파의 손은 밀려난 대륙의 끝자락을 잡고 있다

 

지구는 둥글지

굴러도 항상 그 자라 한 바퀴 돌아 나와도 제자리 걸음

바다에 나가 돛의 머리를 보지 않아도 알지, 지구가 둥근 이유를

 

대륙과 대륙이 멀다

닻을 내릴 수 없다

 

 

 

 

 

밤의 귀 낮의 입술

 

nefing.com

 

 

 

[심사평]

 

2010년으로 30주년을 맞는 5.18문학작품의 외연을 어디까지 넓힐 것이냐는 주최자나 응모자나 공통된 고민 중의 하나일 것이다. 폭넓게 5월 정신의 연장이나 확대를 작용시키자면 그 한계가 모호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 어떤 주제이든 과연 5.18과 연관성을 가지며 과연 절실성은 있는가가 항상 심사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각설하고, 경제적 난국 탓인지 유난히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 시들이 많았다. 또한 5.18문제를 직간접적으로 다룬 작품들이 적지 아니 눈에 띄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생경한 구호성 목소리가 섞여있거나 혹은 지나치게 주눅 들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문학)는 허위를 말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허위를 말하는 것조차 허위가 아닌지 되물어야 함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당선작 지구가 둥근 이유는 작품의 완성도와 사회의식이랄까, 현상의 묘사나 고발에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대안을 제시하려는 의지를 높게 샀다. 특히 민중적인 인물들을 내세워 감칠맛 나는 넋두리로 시를 노련하게 이끌어가는 다른 시들과 달라 현대적이고 이지적인 높게 샀다.

 

끝으로 당선은 되지 못했으나 끝까지 고민한 작품은 들창 밖 모시풀, 신기동리 가는 길이었다. 매우 잘 쓴 작품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익숙하다는 느낌이 망설이게 한 것은, 순전히 심사위원의 취향일 수 있는 만큼 다른 지면을 통해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임동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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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으로

송기역

 

 

1도 아닌 0

시작 전의 침묵

처음이면서 끝

무표정

바라볼수록 천의 얼굴

웃고 있어도

울고 있어도

너는 0

 

0은 씨알

0은 볍씨

0은 자궁

0은 웅크린 아기

갓 나온 아이의 주먹손

 

태어나자마자 0이 된 줄 모르는 너는 피부색이 달랐다

직장을 잃자 너는 0이 되었다

총소리 들리는 0의 나라에서 태어난 너

일생을 살아야 한다

0으로

 

0은 뎅겅 남은 모가지

모가지의 부릅뜬 눈

티그리스 강에 뜬 소녀의 시체

너의 0

나의 0

우리들의 0

 

그 자리를 강요당했지만

이제는 선택한,

내팽개칠수록

돌밭길 가시밭길

거침없이 달려가는 수레바퀴

 

너는 지구라는 난소에서 나왔다

그래서 돌고 있다

돌아갔다, 0으로.

 

웃는 모습

함성을 내지르는 모습

주먹

그것은 대지를 바다 위를 구르는 태양

 

간다

바퀴를 굴리며

들어라

굴릴 때마다

 

밀고 끌면서 가는 파도소리를

흘러가는 것은 소리를 남긴다

사랑하는 것은 소리를 낳는다

총성을 지우는 아기 울음소리

대륙을 향해 함성 되어 흘러간다

바람도 우리를 따른다

 

거슬러가는

대륙과 대륙을 건너는 상선들

우리 배때기에 길을 내지만

보라!

길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심해에 잠든 폐선을 너희는 기억해야 하리

폐선 위로 날이 뜬다

새벽이 0을 넘겨주는 시각

패배에 익숙한 얼굴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

나는 묻는다

패배라는 낱말을 만든 자들에게

패배는 누구의 욕망이 만들어낸 사원인가

 

투명하지 않은 것들은

투명하지 않은 무엇이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잠수하리

바다 위에 뜨는

0의 초저녁

손을 놓는 시간

한 손이 다른 손에게 0을 넘겨주는 시각

0은 떠오른다, 높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높다랗게

 

파도 끝에 망루를 세우고

호각을 불어라

나팔을 불어라

 

0000000000000

 

0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0은 문자

㉠㉡㉢㉣㉤㉥㉦㉧㉨㉩㉪㉫㉬㉭

 

0은 숫자

①②③④⑤⑥⑦⑧⑨

 

우리는 문자를 낳았지만

유혹하지 않았다

우리는 숫자를 낳았지만

셈하지 않았다

숫자를 셈하다

0으로 돌아갈 너희들의 땅은

 

무덤

반쪽짜리 0

지구의 섭정자 너희들은 처음부터

반쪽 난 쪽박

쪽박을 깨트려라

터지는 박에서 무수한 박씨를 우리는 본다

망치는 씨앗을 부른다

 

심는다

한반도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가없이 이어지는

0의 행진

0의 길

 

국경선마다

호각을 불어라

나팔을 불어라

마침내 그려낼 우리들의 동그라미

그것은 우리들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온 그리움, 사랑의 소리

 

1이 아닌 0

직선 아닌 곡선

시작 전의 침묵

 

들어라

수레바퀴 소리를

 

0000000000000

 

 

 

 

내 사랑 백양 메리야스

 

 

걸레질하는 여자의 뒷모습이

유프라테스에 일렁이는 늙은 양 같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밀려가다

순한 눈으로 어른거리는 밤하늘을 서성이며 메에에 메에,

메아리도 없는 목청을 밀어내는

 

걸레를 빠는 여자의 옆모습이

강물에 얼굴을 비춰보는 잿빛 양 같다

온통 걸레로 덮여 쭈글쭈글하고 좀 슨,

목책에 갇혀 제자리만 맴돈 걸레의 길

내려앉은 젖퉁으로

물줄기를 쪽쪽 빨아 탱탱해지고 싶어 떠나온 것일까?

 

처든 엉덩이가 지나갈 때마다 세상의 먼지들이 모여든다

쓱싹쓱싹 방바닥으로 마룻바닥으로

지구 끝까지라도 가버릴 것 같은 여자

칠십년대 팔십년대 구십년대로 밀고 온

착용감도 신축성도 떨어진

발밑까지 와 있는

 

언젠가부터 꼬불꼬불한 퍼머로만 맴도는 여자

구멍 숭숭 나 다 떨어진 걸레를 탁탁 털어내는 부끄럼도 없는

 

이젠 더 이상 밀것도 없다는 듯이 드러누운 늙은 양

허기진 어린 양들이 뜯어먹은

메리야스, 축 늘어져 우툴두툴 잇자국 난 젖퉁이를

유프라테스 물줄기에 잇고 한 번 빨아보고 싶은,

 

맵시가 떨어져 던져버린 새끼의 옷을

몇 번을 기우고도 서너 해를 더 입고

행주로 쓰다 걸레로 털갈이하고도 버리지 못했던

팔도 다리도 잃어버린 메리야스

삼중직 순면 특수 보온사로 만들어

삼십 년 추위와 먼지로부터 지켜 준

 

꿰맨 실 툭 끊어버리고 온몸으로 입고

메에에 메에, 가느다랗게 울어보고 싶은

상하의 한 벌을 포개 만든 백양 메리야스

희미하게 남은 상표 속, 옆 얼굴만 보이는

잿빛 양 한 마리

 

 

* 메리야스의 시초는 3세기경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발견된 황갈색 모편물 조각이다.

 

 

 

신용불량자

 

 

던져진 동전은 아무데로나 굴러갔다

악어지갑 속 지폐 귀퉁이는 접혀 있었다

귀가는 늦어졌고

손이 비어갈수록 불량해졌다

그를 발견한 두둑한 손

모가지를 어루만졌다

그는 무책임하고 뻔뻔해졌다

눈동자가 말랐으므로

눈동자가 없어졌으므로

자진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나둘 벗겨질 때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소리 없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팬티마저 벗자

무성한 털과 뾰족한 어금니

딱딱하고 더러운 발바닥 끝에서 발톱이 날카로워졌다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그는,

그것은,

말끔히 지워졌다

얼굴 없는 자

그림자

그에게선 모든 의무가 사라지고

그것에게선 모든 권리가 지워졌다

호모 사케르가 되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신체포기각서 같은 바람이 거리에 불어오곤 했다

 

 

 

바보 전태일 - 인물현대사 3

 

 

나는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업반장이 되었을지도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지금쯤 중년의 가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청계천 다리 위에 서서

네가 노 저어 오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화시장에서 너를 만났다

너는 너였지만,

미싱 옆에서 너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였지만,

공장 안에서 우리가 아니었다

나와 너 사이로 실밥이 거친 욕설을 바삐 나르던 곳,

우리는 작은 공 하나 쏘아 올리지 못하는 난장이였다

그곳은 평화로웠다

 

너는 기차로 열 시간이 넘는 바닷가 마을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올라왔다

수업보다 집안일 밭일을 더 많이 해야 했던 너는

여자 아이였던 너는

찢어진 돛폭을 미싱하며

눈멀고 귀먹은 세상에 심청이처럼 팔려왔다

 

저물어가는 철야근무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海松 솔바람처럼 울던 너는

오른쪽으로, 더 오른쪽으로, 아니 왼쪽으로, 아니라니깐!

드르르르륵, 암초에 부딪힌 너는……

검붉은 수면 위로 잘린 손만 내밀었다

 

너의 삐죽 나온 사랑니에서,

때 묻은 손 위 풀빵 하나에서,

쓰러져 나간 너의 빈 의자 위에서,

거기 남아 있던 핏자국에서,

졸며 졸며 읽던 낡은 가방 속 작은 성서에서

발견했다, 근로기준법

 

뱃고동 소리로 출항을 외치기 위해

청계 지하 개울물 소리 깨우며 나는 돌아왔다

너에게 돌아가기 위해 나는 매년 늘어난 한 해를 지우고

다시 스물둘이 된다

 

한 손 땅을 짚고

한 손은 샛별을 부르는,

근로기준법 한 글자 한 단어 환하게 켜주는 다락방 촛불 되어

등대가 되어

다리는 대지 아래 묻었다

네 출항의 자리는 거기

 

청계천 버들다리를 다 건너지 말고 귀 기울여

개울물 소리 들어라

바보시절 삐뚤빼뚤한 몽당연필 같은

맞춤법 틀린 일기장 같은

말로 다 못해 가져온 손이 듣는, 가슴 너머 심장소리 같은

어디엔가 어디선가 노 젓는 소리

 

그리고 나를 건너 평화시장 골목길을 걸어가 보아라

나는 지금도 그곳에서 너를 기다린다

실밥 먼지 풀풀 날리고 다리를 저는 평화,

기계소리에 갇혀 신음하는 평화가 그곳에 있다

그곳은 지금도 평화롭다

 

도시 기슭까지 차오른 밤이 청계천 개울물을 재촉한다

켜지는 한 줄기 등대 불빛

나는 너를 본다,

너를 비춘다

여공과 이주 노동자와 어제 또는 오늘 또는 내일의 비정규 시민들

작은 공을 들고 머나먼 대륙을 찾아

노 저어 가는, 노 저어가는 난장이들을 본다

네 살던 바닷가까지 흘러들 청계천 개울물

 

발원지는 여기다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남. 무허가 판자촌에 살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음.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물둘의 젊음으로 분신자살. 2005년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옴. “하나의 불꽃이 푸른 물을 흐르게 한다.”(SBS 김승필), “울엄마의 첫사랑, 그에게 바칩니다.”(채송화․김가현), “열사의 시선 끝, 잊지 않겠습니다.”(신혜경․정현욱), “時中!”(이철희), “차별없는 평등역을 향하여! 칙칙폭폭.”(전국철도노동조합 구로열차승무지부)

 

 

운디드니에서 소년은 울었네

 

 

들소 떼가 콧김을 씩씩 내쉬며 놀러와요

미끄럼틀 위에선 헬기 장난감을 든 아이가 외치고 있구요

수류탄, 기관총, 장갑차도 신나게 달려오네요

와와 뿔뿔이 흩어지고 있어요

화단을 벗어나면 안 되죠

여긴 어린이 보호구역이니깐요

그네 위에선 인디언 나라로 가는 휘파람 불어요

해진 옷에 인디언 꼬마는 앉은뱅이 나라의 국기처럼 펄럭여요

왁자지껄한 웃음 위로 내려앉는 것은 우산인가요?

낙하산이군요 후우욱, 입김 불면

민들레 씨앗 되어 날아갈 것 같네요

어? 어디선가 인디언 말발굽소리가…… 타앙. 탕.

깜짝 놀랐잖아요!

꽃잎 아래 씨앗을 감추는 노을 같네요

내일은 교회에 갈 거랍니다

크리스마스 성극에서 어린 양이 되었거든요

저 아저씬 우리 반 미화부장이 예쁜가 봐요

십자선을 잡고 작은 목걸이 하나 오래 매달리기 하고 있어요

인디언 꼬마의 들소이빨 목걸이도 보이네요

걔네 엄만 평화반점에서 그릇을 닦죠

십자선 중앙에, 음, 작은 십자가가 흔들리네요

너무 오래 매달렸나 봐요

조준선 안으로 들어온 들소는 그만……

시소 아래 숨다 BB탄에 맞고 우는 겁쟁이는 내일부턴 왕따랍니다

기병대는 여자애들 응원하는 구름다리까지 쫓아왔어요

장난처럼 웃으면서 쫓아왔어요

쫓겨 가는 부족민들의 시선은 우릴 보고 있나요?

조준선 아래 태양이 헉헉 매달려 있어요

그만 깜깜해져버렸어요

모두 잠든 건가요?

이런, 화단은 엉망이 돼버렸잖아요

다리 꺾인 코스모스는 어디서 꽃 피워야 되죠?

들소바람 불어와요

화약냄새가 사람 냄새를 지우고 있어요

눈보라가 쳐요

떨어진 꽃잎이 소년의 손톱을 지우고 있어요

서쪽을 향해 들소 떼가 지나가요

꿈틀거리는 붉은 눈사람 하나,

부적 보따릴 끌러 신령한 바위조각에 귀를 대고 있네요

들려요? 우리가 와와 소리치고 있거든요

 

놀이터에 혼자 남은 소년의 목에 걸린

하얀 들소이빨이 울고 있어요

출처 : 5ㆍ18 문학작품 공모 공식 카페
글쓴이 : 미목이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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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_DAUM->

동면하지 않는 도마뱀

 

심은섭

 

비상하려던 고층빌딩 숲 속 목각새들, IMF교 종파에

감염되어 넥타이를 풀었다

통장계좌를 타고 들어온 푸른 몸값 몇 장에

아내는 치매 걸린 문풍지였다

방패연처럼 아이들을 하늘 높이 날리려면

허공을 문 도마뱀이 되어야 했다

골목길 하나 보이지 않는 절벽

자폐증을 앓던 도마뱀의 다리는 늘 절름거렸다

벽은 외로운 사람들의 섬, 그래도

절벽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옆구리에 찬 녹 쓴 페인트통과 자루 빠진 붓을 들고

공중으로 달리던 태양이 낮 달을 만날 때까지

나무 한 그루 없는 절벽을 산책했다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는 절벽산책 길에

박달 나무로 짠 동창東窓의 창틀을 끼우고

어둠에 박힌 보석, 가로등을 세우고

눈雪 속에서도 피는 변산바람꽃을 그렸다

혼돈 된 절벽으로 하얀 단색의 골목길이 나고

90° 낮아진 벽의 허리

녹 쓴 통장에서 투구를 눌러쓴 눈칫밥이 빠져나간 자리에

푸른 지폐들이 모여 수근거렸다

지갑은 철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이동했다

절벽으로 산책을 끝낸 페인트 공

동면하지 않은 완벽한 도마뱀이었다

 

 

[심사평] 심사위원 / 고재종(시인)

 

[시는 삶과 세계의 근원적 총체적 속에 그 뿌리를 둔다]

 

먼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옥타비오 파스가 자기의 저서 『활과 리라』의 서두에서 해한 시에 대한 정의를 한번 들어보자.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의 기능은 세상을 변화 시키는 것이며 시적 행위는 본래 혁명적인 것이지만 정신의 수련으로서 내면적 행방의 방법이기도 하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선택 받은 자들의 빵이자 저주 박은 양식이다 시는 격리 시키면서 결합시킨다. 시는 여행에의 초대이자 귀향이다. 시는 들숨과 날숨이며 근육운동이다. 시는 空을 향해 기원이며 無의 대화이다. 시의 양식은 권태와 고뇌와 절망이다. 시는 기도이며 歎願이고 顯現이며 現在이다. 시는 악마를 쫓는 주문이고 맹세이며 마법이다. 시는 무의식의 승화이자 보상이고 응집이다. 시는 계급과 국가, 인종의 역사적 표현이면서 역사를 부정한다 시 속에서 모든 객관적 갈등들이 해소 되고 인간은 마침내 일시적으로 스쳐가는 것 이상의 어떤 것에 대한 의식을 얻는다. 시는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중략>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발가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빔vacio ? 인간의 모든 作爲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 ? 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

 

비상하려던 고층빌딩 숲 속 목각새들, IMF교 종파에

감염되어 넥타이를 풀었다

통장계좌를 타고 들어온 푸른 몸값 몇 장에

아내는 치매 걸린 문풍지였다

방패연처럼 아이들을 하늘 높이 날리려면

허공을 문 도마뱀이 되어야 했다

골목길 하나 보이지 않는 절벽

자폐증을 앓던 도마뱀의 다리는 늘 절름거렸다

벽은 외로운 사람들의 섬, 그래도

절벽을 숭배하지는 않았다

옆구리에 찬 녹 쓴 페인트통과 자루 빠진 붓을 들고

공중으로 달리던 태양이 낮 달을 만날 때까지

나무 한 그루 없는 절벽을 산책 했다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는 절벽산책 길에

박달나무로 짠 동창東窓의 창틀을 끼우고

어둠에 박힌 보석, 가로등을 세우고

눈雪 속에서도 피는 변산바람꽃을 그렸다

혼돈 된 절벽으로 하얀 단색의 골목길이 나고

90° 낮아진 벽의 허리

녹 쓴 통장에서 투구를 눌러쓴 눈칫밥이 빠져나간 자리에

푸른 지폐들이 모여 수군거렸다

지갑은 철기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이동했다

절벽으로 산책을 끝낸 페인트 공

동면하지 않은 완벽한 도마뱀이었다

                                 -심은섭 「동면하지 않는 도마뱀」전문

 

 위 시에는 기지, 반어, 냉소, 조롱 등의 방법적 수용을 통해 삶과 세계를 풍자하는 방법이 있다. 이 풍자의 세계의 속에 들어온 사실적 존재들은 풍자를 구성하는 풍자적 또는 우화적 요소로 변모하여 사실적인 가면을 쓴 관념이 된다.

어제 나는 내 귀에 말뚝을 박고 돌아왔다/오늘 나는 내 눈에 철조망을 치고 붕대를 감아버렸다./내일 나는 내 입에 흙을/ 한 삽 처 넣고 솜으로 막는다”(황지우 「그날그날의 현장 검증」부분).

이 시에서 말뚝’ “철조망’ ‘붕대’ ‘’ ‘이 본래의 의미를 숨기고 있는 풍유이다. 이 구체적인 사물들은 그 이면에 귀막음, 눈가림, 입막음 이라는 관념적 의미의 층을 숨기고 있다. 물론 이 모두는 살아남을 위해라는 변명 위에 행해진 우리들의 비겁함이라는 작가의 질타이다.

심은섭의 詩도 황지우 시의 시적 방법론을 판박이 한 것처럼 풍유가 전개 되어 있다. 심은섭의 시 처음 두 행만을 본래의 층으로 해설해보자. “크게 성공하려던(비상하려던) 대기업(고층빌딩 숲 속)의 반듯하고 기계적인 사원들(목각새들), 아예 사이비 종교처럼 세상을 흥하게도 하고 망하게도 하는 IMF(IMF교 종교에) 걸려 넘어져(감염되어) 화이트 칼라에서(넥타이를) 해고되었다.(풀었다.)” 그래서 그들은 빌딩이나 높은 옹벽에 페인트칠이나 하고 청소하는 생활의 절벽에 선 자가 되었다는 것이 내용이다. 한데 이런 시에서 관념적 의미의 층을 대체하며 표면에 드러나는 구체적 사물들이 서로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으면 실패하기 쉬운데 심은섭은 이를 어느 정도 성공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버마스는 현대사회의 의사소통이 체계적으로 왜곡되어 있다고 말한다. ‘사적 영역은 경제제도에 의해 침해 당하고 공적 영역은 행정제도에 의해 침해 당한다.”(「소통행위이론」) 다시 말해서 사적 의사 소통은 자본축적의 논리에 의해, 공적 의사소통은 관료제에 의해 왜곡되어 있다. 그 결과 심은섭의 시에서도 아내 치매 걸린 문풍지가 되고 남편이 실직을 하고 얻은 직업인 페인트공 절벽으로 산책을 하거나 허공을 문 도마뱀이 된다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주체와 대상은 분열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세계--존재라는 현상학으로 유명한 후설이 말한 생활세계를 산다. 생활세계 속에서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고 의사소통을 한다는 것은 주체와 대상이 자연스럽게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최소한 가능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를 상호주관성이라고 한 모양이다. 주체/대상 혹은 주관/객관의 분리 이전에 인간은 세계를 총체적으로 인식할 줄 안다는 것이다. 하지만 자본과 관료제에 의해 왜곡된 사회에서는, 심은섭 시에서 나타난 것처럼 대상만 의도적으로 풍자되고 거기에 주체의 자연스런 숨결은 참여 되지 않는다. 대상과 주체의 심각한 분열현상인 것이다.

<중략>

하지만 당선작은 오히려 주체와 대상이 분리되어 있는 심은섭의 시가 될 수 밖에 없다. 워낙 냉소적인 우화라서 아무런 전망도 없고 한 점 위로도 주지 않는 詩이지만 일단 이 시는 정직하다. 자본의 논리에 의해 하나의 인간이 어떤 사물이나 미물짐승으로 바뀌는 그 처절한 모습을 이토록 치열하게 응시할 수 있는 저력이라면 앞으로 어떤 절벽 앞에서라도 용기를 잃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중략>

시인이란, 보들레르의 「알바트로스」처럼 본래 창공을 나는 왕자였으나 지상의 뱃사람들에게 생포되어 굴욕과 모욕을 당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소세키의 소설 속의 겐조처럼 그 굴욕을 온몸으로 껴안고 뒹굴며 이 세상에 끝나는 것이란 하나도 없어. 일단 한 번 일어난 건 언제까지나 계속되지. 그저 여러 가지 형태로 모양만 바뀌는 거니까 남도 나도 느끼지 못할 뿐이야.”라고 말하며 인류가 존재하는 한 인간은 계속 태어나고 늙고 죽어가고, 그 생의 과정 속에서 서로 얽히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미워하고 서로 싸우며 살아가는 숙명적 존재이기도 하다는 것을 처절하게 깨닫는 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면 심은섭은 오히려 소세키의 입장을 잘 취한 셈인가.

                                            -심사위원 고재종(시인)-

 

 

[수상소감] - 당선자 심은섭

 

은행나무 골 사거리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그 사람들이 지나간 거리에는 머물러 있는 발자국 하나 없다. 발자국도 떠나는 습성을 가지고 있는 걸까. 그 발자국을 누가 집어 삼켰을까? 내가 찍어 놓고 내가 집어 삼키는 도시의 사람들, 사람이 그리워서일까.

내 발자국을 내가 집어 삼키던 오후, 낯선 침입자가 혈관을 타고 들어오자 휴대폰은 머리채를 흔들어 댄다. 침입자는 당선이라는 메시지가 나를 포박했고, 나의 아메바들은 곧 화석으로 변했다. 그 화석은 기화를 준비하는 축제를 시작했다.하지만 응축된 밤의 거대한 어둠을 맨 손으로 부러뜨리던 금남로의 영혼들이 일제히 함성으로 일어나 나의 살점마다 동침을 꽂는 것 같았다. ‘이 몇 줄의 시구로 침묵하는 영혼들의 눈물을 받아 마실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내 휴대폰 속 혈관을 타고 들어온 침입자를 맨발로 뛰쳐나가 맞이하기로 했다. 그러면서도 「동면하지 않는 도마뱀」을 쓴 초라한 시인 하나가 망월동 성역의 침입자가 되지 않기로 바랐다.

 

그날 그들에게 이 한 편의 詩를  두 손으로 바치며, 문학마당에서 뛰어 놀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해 주신 5.18기념재단에 감사의 말씀을 올리며, 단단한 바위가 되기 위해서는 온갖 풍상을 겪어야 하거늘 아직 고체보다 액체성이 더 강한 제 작품에 수상의 영광을 주신 고재종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린다

또한 시 창작에 눈을 뜨게 해 주신 이언빈 선생님, 오래 전에 밤새워 창작지도해 주신 『시와 세계』발행인 송준영 선생님, 그리고 국제펜클럽 강원지역위원회 박유석 회장님, 항상 격려를 아끼지 않는 김학주 시인과 청송문학회 정민시 회장님과 회원 그리고 강릉지역 모둔 문인 여러분께 감사 드린다.

끝으로 불평불만 없이 지켜봐 주던 아내 권기순과 네 눈물의 씨앗 심재환, 심재엽 늘 고맙게 생각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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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5ㆍ18문학상 공모

 

5ㆍ18기념재단은 5월정신의 외연을 넓히고 5·18의 역사적 의미와 정신을 일깨워줄 수 있는 문학을 기대하며 5ㆍ18문학상을 공모합니다.

 

1. 공모부문 및 분량

ㆍ시 : 5편 이상 10편 이내

ㆍ소설 : 중·단편소설 (200자 원고지 각 80장에서 200장 사이)

동화 : 원고지 50매 이상

2. 공동주관 : 한국작가회의, 계간지 문학들, 5ㆍ18기념재단

3. 주제 : 저항과 희생, 나눈과 자치공동체를 이룬 5ㆍ18정신의 현재적 구현

4. 응모자격 : 기성·신인에 제한을 두지 아니하며 공모에 관심 있는 누구나 응모 가능

5. 상금 : 총 1000만원

소설 당선작 1편 : 400만원

시 당선작 1편 : 300만원

동화 당선작 1편 : 300만원

6. 접수기간 및 방법

기간 : 2011년 4월 1일 ~ 2011년 4월 22일

방법 : 우편 또는 방문 접수(마감일 우편소인까지 유효)

이름(본명), 주소, 연락처, 이메일, 응모분야 필히 기재

7. 접수 및 문의처

보낼 곳 : (우 502-260) 광주광역시 서구 쌍촌동 1268번지 5ㆍ18기념문화센터 1층 5ㆍ18기념재단 5ㆍ18문학상 공모 담당자

전화 : 062-457-0518 / 전송 : 062-456-0519

8. 발표 : 2011년 5월 경 5ㆍ18기념재단 홈페이지(www.518.org) 및 수상자 개별 연락

9. 응모 시 유의사항

미발표 원고여야 함.

원고는 워드프로세스로 작성하여 A4용지로 출력해 제출.

입상작의 2차적 이용권은 5·18 기념재단이 3년간 보유함.

입상작은 이후 5·18기념사업 수행에 활용될 예정임

응모작은 반환하지 않음.

 

※ 5월 정신은 5ㆍ18의 시대적 지리적 범주에 한정되지 않으니 창작시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 5ㆍ18 문학작품 공모 공식 카페
글쓴이 : 정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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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심사평]

 

예심을 거쳐 올라온 열 명의 투고작을 두고 고심을 거듭했으나, 안타깝게도 당선작을 고르지 못했다. 시인이라면 반드시 갖춰야 하는 일정한 수준과, 신인을 맞을 때마다 찾게 되는 참신함을 만족하는 작품을 만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사위원들이 마지막까지 망설였던 작품은 장선희, 최재영, 이일학, 김영경 씨의 작품이었다.

 

장선희 씨는 하나의 풍경을 다른 풍경과 접붙여 읽어내는 데 장기를 갖고 있다. 다만 그렇게 치환된 풍경마저 처음 풍경에서 그리 멀리 가지 못했다는 게 약점이다. 시에서의 변환은 새로운 존재로의 비약이어야지, 단순한 고쳐 쓰기여서는 안 된다.

 

최재영 씨에게는 그런 비약이 있다. 그런데 그 비약을 설명하고 부연하고 또 설명하고 만다. 그건 비약이 시 내부에서 일어난 게 아니라 글쓴이의 상상 속에서만 일어났다는 얘기다.

 

이일학 씨의 작품에는 품격이 있다. 진지하고 성실하다. 유감스럽게도 이 진지함과 성실함이 시를 아주 낡은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세상, 전생, 모정, , 순결같은 어휘가 진지한 고민의 결과였는지를 숙고해주시기 바란다.

 

김영경 씨의 작품은 상대적으로 이런 단점에서 많이 비켜나 있다. 특히 '달동네로 가요'에는 경쾌한 페이소스와 다정한 음악이 공존하고 있어서, 눈길을 붙잡는다. 그런데 응모한 시들의 편차가 너무 심하다. 시적인 상투어에 너무 자주 기대는 점도 불만이다. 상투어들의 잦은 출몰은 고민의 부족을 증거하는 것이다. 고민을 거듭했으나, 성급하게 당선자의 이름을 드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의 성숙을 기다리는 것이 김영경 씨 본인을 위해서도 더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전 수상자들의 면면을 보니, 다들 빼어난 시인들이다. 오늘의 아픈 결정이 이 상의 전통을 더 빛나게 세우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응모해주신 분들께도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올린다.

 

심사위원: 유성호 문학평론가. 정끝별 시인. 권혁웅 시인, 문학평론가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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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포나루* / 박정수

 

 

노을은 흐르는 강의 내력까지 잡아 삼켰다

백년 전

이곳의 흥정물은 소금이었다

굽이굽이 싱거워진 삶의 내력을 돋구는 데엔 소금이 제격이었다

때로 가뭄에 콩 나듯 오지 않는 기다림을 움켜쥔 채

몇몇은 쉽사리 불어나지 않는 강심을 애태우기도 하며

새벽 가까이 포구의 안쪽을 헤매었으리라

梨浦나루

東西간의 교류가 남한강을 묶어놓았던 곳,

상인들의 흥정은 멀리 장호원까지 들릴 듯 끊어지지 않았고

내 가계의 내력도 그곳에서 시작되었음을 저 강은 알리라

 

강은 거울이다

무수히 변화된 일상들을 비추며 희부연 기억 하나도 놓치지 않는,

오랜 세월

침묵의 깊이만 어루만지고 있는 강은 금이 가지 않는 거울이다

할머니의 손맛은 川西理를 낳았고

그 기억의 맛은 강을 따라 서해 어느 비린 항구까지 닿았음을

소금들의 내력은 거슬러 거슬러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든 젖은 강에 손을 디밀면 그때의 흥정소리 지금도 만질 수 있다

 

* 소금이 교역되던 곳

 

 

 

 

봄의 절반

 

nefing.com

 

 

 

[당선소감]

 

폭염은 나의 흔들림을 무채색으로 돌렸다.

 

팔월에 받은 한 통의 전화에 땡볕처럼 숨이 막혀왔습니다. 시 쓰기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받은 전화, 자꾸만 소리가 멀어지듯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이젠 더 이상 불 꺼진 방에서 울지 않아도 되겠지요. 메아리 없는 응모에 쓰인 지난날의 나의 이름들, 지금까지는 시가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시의 힘이 되는 올곧은 선비의 정신으로 시심을 키우겠습니다. “안으로 숨 가쁘게 넘어가는 진공의 채널을 가져라하셨던 박경원 선생님, 감사합니다. 금광저수지에서 쉽게 식어버리는 자판기 커피를 오래도록 비워내며 펼쳐 가던 시심을 언제나 한 발 늦게야 담아내던 모자란 저를 믿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여기까지의 길이 멀었던 것처럼 스치는 얼굴 또한 많습니다. 부족한 문학의 에너지를 충전시켜 주시는 정제한 교수님, 슬픈 일, 기쁜 일, 늘 함께 하는 안성문학회 사랑하는 문우 여러분, 말 없이 뒤에서 지켜준 남편, 세상에 둘도 없는 보석 아들 딸, 칠순이 넘은 부모님……. 모두 눈물입니다. 호흡이 늘어지고 있을 때 파장을 주신 심사위원님께 초심의 자세로 가겠다는 다짐으로 감사의 인사를 대신합니다.

 

삼년 전 세상을 떠나신 사랑하는 어머님, ()한일심 여사께 이 기쁨을 올립니다.

 

 

 

 

[심사평]

 

우리 시단의 새로운 등용문인 최치원 신인문학상에는 65분의 455편의 시가 응모됐다. 이는 양적으로 보아 시 전문문예지 투고 작품의 수준이다. 이들 작품 역시 지리산 문학회에서 예심을 보고 10분의 시가 모두 이름을 가린 채 본심에 회부됐다.

 

소리 미술관’‘김씨와 함께 늙어가는 것1’‘소설을 쓰다’‘눈이 부시다’‘143버스’‘아버지의 시계’‘딸꾹질놀이’‘에스컬레이터’‘강물형무소’‘이포나루가 그 표제작들이다.

 

본심작품 수준 역시 시 전문 문예지 수준에 못지 않았다. 그러난 단 한 분의 신인을 모시는 자리여서 심사위원이 숙독하여 각각 1편씩의 작품을 정하기로 해서 강물형무소이포나루가 최종심에 남았다.

 

강물형무소를 투고한 시편들에는 바다를 배경으로 한 가작(佳作)이 많았다. ‘홍어’‘문상을 다녀오다’‘방파제 은하수등이 그러했다. 특히 홍어의 경우, 만만찮은 입담이 출중했다. 시를 끌고 가는 힘에서 오랫동안 시와 싸워 온 저력을 읽을 수 있었다.

 

이포나루는 단정한 시편들이었다. 꼭 필요한 것만 제 자리에 놓여있는 깔끔함은 군더더기가 없는 서정시의 진경을 보여주었다. 이 역시 오래 씨를 다듬어 온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강물형무소는 보내온 시편에는 옥석이 섞여있었고, ‘이포나루는 어느 한 편 나무랄 작품이 없어 완성도에서 앞선 이포나루를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의 자리에 모셨다.

 

이포나루는 좋은 시들이다. 5편의 작품으로도 시인의 목소리를 다 들을 수 있었다. 문장을 절제할 줄 하는 힘이 시의 힘이 되고 대상을 보는 치밀한 시선이 시의 눈이 되고 있다. 최치원 신인문학상을 문학의 발판으로 삼고 더 높고 더 넓은 시로 나아가길 바란다.

 

당선하신 분에게는 축하의 박수를, 투고하신 많은 분들에게는 다음 기회에 다시 만나는 좋은 인연이 있길 바란다.

 

심사위원 송수권 정일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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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너덜겅이 / 한영숙

 

 

흔한 돌덩이가 비탈에 모여 슬픈 소리를 낸다

 

촌 어미의 딸아이가 묻혀서 애기무당 굿 소리 아득하다

 

는개로 떠돌면서 고깔모자 삼색 옷 걸치고 백무동계곡 오르고 내린다

 

뭇별들 피고 또 슬그머니 진 자리 꼬리치레도롱뇽의 시월이다

 

서어나무 마르고 뒤틀린 잎에도 초하루 아침이 풀린다

 

웅크리며 애 터지던 한 권의 말은 차례대로 입을 다문다

 

누군가 있어 높고 쓸쓸하게 죽어간 길

 

땀 냄새 긴 거름 냄새 싸드락싸드락 밟아 간다

 

 

 

 

얼룩무늬쐐기나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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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작품상] 오븐 / 이혜미

 

여행자 하나 사막을 걷는다

스위치를 켜자 태양이 나른한 오후를 달구고

지친 여행자는 허공을 짊어지고 서서

목적지를 잊은 사람처럼 머뭇거린다

원근법으로 그려진 모래사막 캔버스 위에

물결무늬가 새겨진다

사막은 모래로 그려진 점묘화다

공기조차 모래빛이 스며든 듯한 폭염 속

목마른 발자국으로

오아시스를 찾아 헤맨다

메마른 붓터치로 불어오는 바람이

시든 몸속 한 방울 물기까지

꼭 짜내어 가지고 간다

몇 겹으로 덧칠된 고요 속에서

낙타의 아몬드색 눈과 마주쳤을 때

침묵으로 노래하기 시작하는 사막

문을 열자 세상 밖으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의 파편, 채도 높은 한낮의 구도 속으로

휘몰아친다 바삭하고 담백한 죽음

식탁에 올려놓자 사막 속에서

닭 한 마리 천천히 걸어 나온다

 

 

 

보라의 바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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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시를 포함하는 문학이 제대로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시대에 시에 대한 애정과 열정을 가지고 쓴 응모작품들을 읽고 아직도 문학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시들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생활 속에서 시적 소재를 찾아 그것을 삶 속에 올곧게 자리매김하려는 시정신은 높이 평가해도 좋으리라 파악되었다.

 

<무우> 9(한명숙)은 일상생활 속에서 만나는 여러 사항을 진솔하게 표현해 놓고 있다. 다만 그 시적 표현이 다소 거친 것이 흠이고 보다 치열하게 생활에 임하는 시인의 정신이 돋보이지 않은 점이 아쉬웠다.

 

<오븐> 4(이혜미)은 잘 짜여진 시편들이다. 무엇보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가 돋보였다. 특히 <오븐><저문다는 것>에서 읽을 수 있는 시적 상상력은 높이 살만 하다. 언어를 다루는 솜씨만으로 좋은 시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시적 기교만이 아닌 온 몸으로 시는 써야 한다고 말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당선이 아닌 심사위원 추천 우수작품상으로 <오븐> 4편을 천거한 것은 시를 다루는 솜씨의 아까움이 이후 치열한 시정신을 온몸으로 감당하면서 보다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대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너덜겅이> 4(한영숙)은 시적 소재를 전원에서 찾고 있는 독특함을 보인다. 그냥 지나쳐 버리기 십상인 어줍잖고 평범한 사물들을 삶의 예지와 아우르는 날카로움을 보여주기도 한다. 진부한 것을 새롭게 관찰하고 있는 한영숙의 시들은 좀 엉성하기는 하지만 참신하고 새롭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질박하고 순수한 격조를 지니고 있다고 할 것이다. 1회 최치원 신인문학상 당선작으로 천거하는 까닭이다.

 

심사위원 최동호(시인. 문학평론가. 고려대 교수), 김선학(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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