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으로
송기역
1도 아닌 0
시작 전의 침묵
처음이면서 끝
무표정
바라볼수록 천의 얼굴
웃고 있어도
울고 있어도
너는 0
0은 씨알
0은 볍씨
0은 자궁
0은 웅크린 아기
갓 나온 아이의 주먹손
태어나자마자 0이 된 줄 모르는 너는 피부색이 달랐다
직장을 잃자 너는 0이 되었다
총소리 들리는 0의 나라에서 태어난 너
일생을 살아야 한다
0으로
0은 뎅겅 남은 모가지
모가지의 부릅뜬 눈
티그리스 강에 뜬 소녀의 시체
너의 0
나의 0
우리들의 0
그 자리를 강요당했지만
이제는 선택한,
내팽개칠수록
돌밭길 가시밭길
거침없이 달려가는 수레바퀴
너는 지구라는 난소에서 나왔다
그래서 돌고 있다
돌아갔다, 0으로.
웃는 모습
함성을 내지르는 모습
주먹
그것은 대지를 바다 위를 구르는 태양
간다
바퀴를 굴리며
들어라
굴릴 때마다
밀고 끌면서 가는 파도소리를
흘러가는 것은 소리를 남긴다
사랑하는 것은 소리를 낳는다
총성을 지우는 아기 울음소리
대륙을 향해 함성 되어 흘러간다
바람도 우리를 따른다
거슬러가는
대륙과 대륙을 건너는 상선들
우리 배때기에 길을 내지만
보라!
길은 금세 사라지고 만다
심해에 잠든 폐선을 너희는 기억해야 하리
폐선 위로 날이 뜬다
새벽이 0을 넘겨주는 시각
패배에 익숙한 얼굴들이
도로를 점령하고 있다
나는 묻는다
패배라는 낱말을 만든 자들에게
패배는 누구의 욕망이 만들어낸 사원인가
투명하지 않은 것들은
투명하지 않은 무엇이 필요한 것들은
모두 잠수하리
바다 위에 뜨는
0의 초저녁
손을 놓는 시간
한 손이 다른 손에게 0을 넘겨주는 시각
0은 떠오른다, 높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높다랗게
파도 끝에 망루를 세우고
호각을 불어라
나팔을 불어라
0000000000000
0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다
0은 문자
㉠㉡㉢㉣㉤㉥㉦㉧㉨㉩㉪㉫㉬㉭
0은 숫자
①②③④⑤⑥⑦⑧⑨
우리는 문자를 낳았지만
유혹하지 않았다
우리는 숫자를 낳았지만
셈하지 않았다
숫자를 셈하다
0으로 돌아갈 너희들의 땅은
무덤
반쪽짜리 0
지구의 섭정자 너희들은 처음부터
반쪽 난 쪽박
쪽박을 깨트려라
터지는 박에서 무수한 박씨를 우리는 본다
망치는 씨앗을 부른다
심는다
한반도에서
중동에서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에서
가없이 이어지는
0의 행진
0의 길
국경선마다
호각을 불어라
나팔을 불어라
마침내 그려낼 우리들의 동그라미
그것은 우리들의 눈동자에서 흘러나온 그리움, 사랑의 소리
1이 아닌 0
직선 아닌 곡선
시작 전의 침묵
들어라
수레바퀴 소리를
0000000000000
내 사랑 백양 메리야스
걸레질하는 여자의 뒷모습이
유프라테스에 일렁이는 늙은 양 같다
물살을 따라 어딘가로 밀려가다
순한 눈으로 어른거리는 밤하늘을 서성이며 메에에 메에,
메아리도 없는 목청을 밀어내는
걸레를 빠는 여자의 옆모습이
강물에 얼굴을 비춰보는 잿빛 양 같다
온통 걸레로 덮여 쭈글쭈글하고 좀 슨,
목책에 갇혀 제자리만 맴돈 걸레의 길
내려앉은 젖퉁으로
물줄기를 쪽쪽 빨아 탱탱해지고 싶어 떠나온 것일까?
처든 엉덩이가 지나갈 때마다 세상의 먼지들이 모여든다
쓱싹쓱싹 방바닥으로 마룻바닥으로
지구 끝까지라도 가버릴 것 같은 여자
칠십년대 팔십년대 구십년대로 밀고 온
착용감도 신축성도 떨어진
발밑까지 와 있는
언젠가부터 꼬불꼬불한 퍼머로만 맴도는 여자
구멍 숭숭 나 다 떨어진 걸레를 탁탁 털어내는 부끄럼도 없는
이젠 더 이상 밀것도 없다는 듯이 드러누운 늙은 양
허기진 어린 양들이 뜯어먹은
메리야스, 축 늘어져 우툴두툴 잇자국 난 젖퉁이를
유프라테스 물줄기에 잇고 한 번 빨아보고 싶은,
맵시가 떨어져 던져버린 새끼의 옷을
몇 번을 기우고도 서너 해를 더 입고
행주로 쓰다 걸레로 털갈이하고도 버리지 못했던
팔도 다리도 잃어버린 메리야스
삼중직 순면 특수 보온사로 만들어
삼십 년 추위와 먼지로부터 지켜 준
꿰맨 실 툭 끊어버리고 온몸으로 입고
메에에 메에, 가느다랗게 울어보고 싶은
상하의 한 벌을 포개 만든 백양 메리야스
희미하게 남은 상표 속, 옆 얼굴만 보이는
잿빛 양 한 마리
* 메리야스의 시초는 3세기경 유프라테스 강변에서 발견된 황갈색 모편물 조각이다.
신용불량자
던져진 동전은 아무데로나 굴러갔다
악어지갑 속 지폐 귀퉁이는 접혀 있었다
귀가는 늦어졌고
손이 비어갈수록 불량해졌다
그를 발견한 두둑한 손
모가지를 어루만졌다
그는 무책임하고 뻔뻔해졌다
눈동자가 말랐으므로
눈동자가 없어졌으므로
자진해서 옷을 벗기 시작했다
하나둘 벗겨질 때마다
친구들도, 가족들도
소리 없이, 갑작스레 사라졌다
팬티마저 벗자
무성한 털과 뾰족한 어금니
딱딱하고 더러운 발바닥 끝에서 발톱이 날카로워졌다
주민등록이 말소되고
그는,
그것은,
말끔히 지워졌다
얼굴 없는 자
그림자
그에게선 모든 의무가 사라지고
그것에게선 모든 권리가 지워졌다
호모 사케르가 되었다
그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신체포기각서 같은 바람이 거리에 불어오곤 했다
바보 전태일 - 인물현대사 3
나는 다르게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작업반장이 되었을지도
소설가가 되었을지도
지금쯤 중년의 가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청계천 다리 위에 서서
네가 노 저어 오는 소리를 듣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평화시장에서 너를 만났다
너는 너였지만,
미싱 옆에서 너가 아니었다
우리는 우리였지만,
공장 안에서 우리가 아니었다
나와 너 사이로 실밥이 거친 욕설을 바삐 나르던 곳,
우리는 작은 공 하나 쏘아 올리지 못하는 난장이였다
그곳은 평화로웠다
너는 기차로 열 시간이 넘는 바닷가 마을에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올라왔다
수업보다 집안일 밭일을 더 많이 해야 했던 너는
여자 아이였던 너는
찢어진 돛폭을 미싱하며
눈멀고 귀먹은 세상에 심청이처럼 팔려왔다
저물어가는 철야근무의 수평선을 바라보며
海松 솔바람처럼 울던 너는
오른쪽으로, 더 오른쪽으로, 아니 왼쪽으로, 아니라니깐!
드르르르륵, 암초에 부딪힌 너는……
검붉은 수면 위로 잘린 손만 내밀었다
너의 삐죽 나온 사랑니에서,
때 묻은 손 위 풀빵 하나에서,
쓰러져 나간 너의 빈 의자 위에서,
거기 남아 있던 핏자국에서,
졸며 졸며 읽던 낡은 가방 속 작은 성서에서
발견했다, 근로기준법
뱃고동 소리로 출항을 외치기 위해
청계 지하 개울물 소리 깨우며 나는 돌아왔다
너에게 돌아가기 위해 나는 매년 늘어난 한 해를 지우고
다시 스물둘이 된다
한 손 땅을 짚고
한 손은 샛별을 부르는,
근로기준법 한 글자 한 단어 환하게 켜주는 다락방 촛불 되어
등대가 되어
다리는 대지 아래 묻었다
네 출항의 자리는 거기
청계천 버들다리를 다 건너지 말고 귀 기울여
개울물 소리 들어라
바보시절 삐뚤빼뚤한 몽당연필 같은
맞춤법 틀린 일기장 같은
말로 다 못해 가져온 손이 듣는, 가슴 너머 심장소리 같은
어디엔가 어디선가 노 젓는 소리
그리고 나를 건너 평화시장 골목길을 걸어가 보아라
나는 지금도 그곳에서 너를 기다린다
실밥 먼지 풀풀 날리고 다리를 저는 평화,
기계소리에 갇혀 신음하는 평화가 그곳에 있다
그곳은 지금도 평화롭다
도시 기슭까지 차오른 밤이 청계천 개울물을 재촉한다
켜지는 한 줄기 등대 불빛
나는 너를 본다,
너를 비춘다
여공과 이주 노동자와 어제 또는 오늘 또는 내일의 비정규 시민들
작은 공을 들고 머나먼 대륙을 찾아
노 저어 가는, 노 저어가는 난장이들을 본다
네 살던 바닷가까지 흘러들 청계천 개울물
발원지는 여기다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이소선의 아들로 태어남. 무허가 판자촌에 살며 평화시장에서 재단사로 일했음.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스물둘의 젊음으로 분신자살. 2005년 평화시장에 다시 돌아옴. “하나의 불꽃이 푸른 물을 흐르게 한다.”(SBS 김승필), “울엄마의 첫사랑, 그에게 바칩니다.”(채송화․김가현), “열사의 시선 끝, 잊지 않겠습니다.”(신혜경․정현욱), “時中!”(이철희), “차별없는 평등역을 향하여! 칙칙폭폭.”(전국철도노동조합 구로열차승무지부)
운디드니에서 소년은 울었네
들소 떼가 콧김을 씩씩 내쉬며 놀러와요
미끄럼틀 위에선 헬기 장난감을 든 아이가 외치고 있구요
수류탄, 기관총, 장갑차도 신나게 달려오네요
와와 뿔뿔이 흩어지고 있어요
화단을 벗어나면 안 되죠
여긴 어린이 보호구역이니깐요
그네 위에선 인디언 나라로 가는 휘파람 불어요
해진 옷에 인디언 꼬마는 앉은뱅이 나라의 국기처럼 펄럭여요
왁자지껄한 웃음 위로 내려앉는 것은 우산인가요?
낙하산이군요 후우욱, 입김 불면
민들레 씨앗 되어 날아갈 것 같네요
어? 어디선가 인디언 말발굽소리가…… 타앙. 탕.
깜짝 놀랐잖아요!
꽃잎 아래 씨앗을 감추는 노을 같네요
내일은 교회에 갈 거랍니다
크리스마스 성극에서 어린 양이 되었거든요
저 아저씬 우리 반 미화부장이 예쁜가 봐요
십자선을 잡고 작은 목걸이 하나 오래 매달리기 하고 있어요
인디언 꼬마의 들소이빨 목걸이도 보이네요
걔네 엄만 평화반점에서 그릇을 닦죠
십자선 중앙에, 음, 작은 십자가가 흔들리네요
너무 오래 매달렸나 봐요
조준선 안으로 들어온 들소는 그만……
시소 아래 숨다 BB탄에 맞고 우는 겁쟁이는 내일부턴 왕따랍니다
기병대는 여자애들 응원하는 구름다리까지 쫓아왔어요
장난처럼 웃으면서 쫓아왔어요
쫓겨 가는 부족민들의 시선은 우릴 보고 있나요?
조준선 아래 태양이 헉헉 매달려 있어요
그만 깜깜해져버렸어요
모두 잠든 건가요?
이런, 화단은 엉망이 돼버렸잖아요
다리 꺾인 코스모스는 어디서 꽃 피워야 되죠?
들소바람 불어와요
화약냄새가 사람 냄새를 지우고 있어요
눈보라가 쳐요
떨어진 꽃잎이 소년의 손톱을 지우고 있어요
서쪽을 향해 들소 떼가 지나가요
꿈틀거리는 붉은 눈사람 하나,
부적 보따릴 끌러 신령한 바위조각에 귀를 대고 있네요
들려요? 우리가 와와 소리치고 있거든요
놀이터에 혼자 남은 소년의 목에 걸린
하얀 들소이빨이 울고 있어요
'문예지 신인상 > 5.18신인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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