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_DAUM->
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굳이 방사선 연대측정법에 따른
지구 연대기 도표가 아니어도
겹겹의 지층을 이룬
반지하의 어둠 속에 묻혀 있으면
고생대 양치식물이 원시림을 구축한다
만약에 침묵의 석탄기 숲이 없었다면
빙하기보다 더 혹독한 오늘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적당한 가열과 가압작용을 받아 생성된
흑갈색 가연성 암석이 이 밤을 덥히고 있지만
퇴적된 날들에 매몰된 일가족은
뿔뿔이 흩어져 광맥을 찾고 있다
꿈은 쉽게 채굴되지 않고
허기는 단속반처럼 기세등등한데
돌아누울 틈조차 없는 일가족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칼잠은 더욱더 날을 번득이며
무허가의 밤하늘에 무수히 칼금을 긋는다
어린 아들의 칭얼거림에도
지각변동을 일으키는 일가족의 잠은
문틈으로 스며드는 연탄가스를 적당량 흡입하자
고요한 식물의 꿈이 되어
갱도보다 깊은 서로의 속을 헤아리며
겨울눈을 틔우려고 단단히 오므리고 있다
내 생에 탄광촌
도대체 수직 갱도는 주민들 가슴에
얼마나 깊이 뿌리를 박고 있었던 걸까
미소만 빼고 모든 게 시커먼 탄광촌,
하얗다는 것만으로 이적 표현물이 되는 그곳에서
흰 눈마저도 귀순용사처럼 새까맣게 쏟아져 내렸다
탄가루가 날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막장에서
아버지들이 산업역군과 사투를 벌이고 있을 때
땅벌 같은 아이들은 저마다 탄맥을 찾아 수직 하강했다
세상의 모든 레일은
오직 탄광으로 향할 거라고 믿던 아이들은
일찌감치 캄캄함에 익숙해졌다
갱도는 38선처럼 철통같았기에 자주 무너졌다
그때마다 아이들은 들킨 것처럼 숨죽여야 했고
아버지를 잃어버린 아이는 속죄양이 되어
탄광촌을 떠나야 했다 마을에 남겨진 아이들은
떠난 아이에 대한 기억을 탄 더미에 파묻곤
시커멓게 흐르는 시냇물에 손을 씻었다
폐광 이후, 사람들은 흑백의 기억을 지우고
총천연색 삼차원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 누구도 무너진 갱도에서 구출되지 못했다
아직도 나는 후미진 골목에서 연탄재를 만나면
들킨 것 같아 함부로 걷어찬다.
자위적 발포
몽정을 할까봐 쉽게 잠들지 못하고
대청마루에서 뒤척이다가
잠결에 귓속말로 들었다
엄마와 이모는 머리를 맞대고
봄밤의 정적을 깨물며 속삭였다
총성은 들리지 않았지만
어김없이 탄알은 서늘한 등짝에 박혔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삼키며
구멍 숭숭 뚫린 밤하늘을 끌어당겨
하얗게 질린 얼굴을 덮었다
꿈속에서 엄마는 내 시신을 찾아 헤매 다녔다
끝끝내 들키지 않으려고 했지만
눈물보다 진한 정액을 왈칵 쏟아내고 말았다
희멀건 정액으로 얼룩진 팬티를
옷장 깊숙이 감췄으나
자꾸 발기하는 사타구니가 나를 불안하게 했다
끊임없이 나를 검열해야 했고
문득문득 불심검문에 걸려들었다
불순하게 발기하는 날들,
잔혹한 폭력을 상상하며 자위행위를 했다
자위적 발포인 양 정액을 쏟아내고
백기를 펄럭이듯 화장지로 훔치면
움츠러든 사타구니는 시무룩했지만
사정권에서 벗어난 것처럼 안심이었다
비릿한 생을 발칙하게 창밖에 내다 건
꽃들이 한꺼번에 떨어져 내렸다.
딱지치기
쉽게 접혀지지 않는 날들이었다
통일달리기처럼 지루하게 반복되는 시간을
억지로 구겨 손바닥으로 꾹꾹 누를 때마다
바드득 어금니를 갈며 밤이 찾아왔다
아버지는 밥상을 뒤집어엎는 일로 하루를 마감했다
나는 국물을 뒤집어쓴 채
달력에 남아 있는 날들을 몰래 들춰봤다
그렇게 한 달이 가고 재빨리 뜯어낸 달력이
딱지가 되어 빳빳하게 날을 세우면
나는 치기배처럼 후미진 골목으로 숨어들었다
세상은 거대한 정화조였다
그래도 걸러지지 않는 불순물 같은 아이들은
쉽게 엉켜 정치판모양 딱지치기를 했다
도대체 무엇을 뒤집어엎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나가떨어지기 일쑤였고
허망하게 뜯겨나간 일기장은
배설의 흔적을 지웠다
위인전 책 표지를 뜯어 딱지로 접으며
내일을 기약해 보려 했지만
쌀자루까지 탐욕의 눈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보도블록으로 일으켜 세운 세상
밤이 깊도록 사내는 보도블록을 깔고 있다
그의 길은 해체된 지 오래,
낮에 엉망이 된 보도블록을 파헤칠 때 사내는
제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것 같은 아픔에
완강하게 버텨온 어깨를 허물 수밖에 없었다
들쭉날쭉한 보도블록은 행인들의 발을 잡아채기도 하고
밟을라치면 지뢰처럼 행인에게 물폭탄을 퍼붓기 일쑤,
조각조각 흩어진 날들을 짜 맞추는 사내의 손놀림은
꼼꼼하고 세심하다 조각과 조각 사이에
끈끈한 온정을 덧바르고 한 치의 틈도 허용치 않는다
그는 길과 불화했던 걸음걸음을 되밟는다
보도블록을 땅바닥에 있는 힘껏 내동댕이쳐서
그 잔해로 벌였던 투쟁의 날들,
이제 그는 자신이 허공에 내던져야 했던
젊은 날의 고뇌와 열정의 부스러기를 모아
걸음과 길의 합일점에 찾고 있다
사내의 어깨 위에서 밤하늘이 자꾸 칭얼거린다
누군가에겐 보도블록이 빛이 된다는 걸 알기에
그는 한 조각도 소홀함이 없이 모자이크한다
사내의 긴 궤적을 쫓아
별똥별이 급하게 밑줄을 그었다
5ㆍ18기념재단 문학작품공모심사위원회
심사위원 박두규
심사위원 김성범
심사위원 이화경
* 심사평*
ㆍ시 부 문 심사평 : 심사위원 박두규
5·18문학작품 공모심사는 5·18정신의 문학적 형상화라는 전제에서 시작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 5·18정신의 문학적 형상화는 단순히 5·18 항쟁 당시의 시대정신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닌 5·18정신의 본질에 대한 현재적 인식과 실천이 녹아 있는 삶의 궤적에 대한 형상화 작업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역사 속의 한 시대정신이 이후 역사 속에서 당대의 국가나 개인에게 어떤 문제의식으로 작동해야 하는가의 고민 속에서 시가 쓰여 졌기를 바라며 심사를 했습니다.
구체적인 심사는 먼저 기본적으로 문학적 기량이 일정한 수준에 이르렀는가를 염두에 두고 읽으며 55편 중 29편을 선별했고 그 선별된 작품들을 5·18정신의 본질에 대한 현재적 인식과 문학적 형상화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으며 14편을 뽑았고 3번째 읽을 때는 감동이 있는가와 작품의 완결성 정도에 중심을 두고 5편(「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 「이 시대 언어를 찾아서 외」,「와플카페 외」, 「나의 양심 외」,「바람을 읽다 외」)을 골라냈습니다. 그리고 당선작으로 내놓을 수 있는 작품으로 마지막 2편(「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와플카페 외」)을 골랐습니다.
두 편 중 「와플카페 외」는 시어의 구사가 탁월하고 자유로운 상상력이 돋보이는 좋은 시였으나 시상의 전개가 좀 산만하고 시의 구성과 내용의 집중도가 미흡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반 지하식물의 겨울눈 외」는 모두 5편으로 화려하고 잘생긴 시는 아니지만 튼튼한 현실인식을 토대로 내용의 집중도가 높았으며 감동이 있었습니다. 당선작으로 내기에는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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