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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 / 이병일

 

 

누이야, 혁명을 절규나 침묵으로 해석하지는 말자. 군인들 팔둑에 돋은 힘줄이 도드라진 오월, 죽음을 탁발하는 누이들의 행렬이 길을 메웠다. 그때 나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무릎은 깨져 피가 별처럼 고이고, 군화는 내 머리통을 밟고 지나가는데

 

구름이 해를 가리던 낮에 큰 길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목적없이 와불이 되었다. 돌멩이와 풀은 어둠과 햇빛과 상관없이 어둑어둑해지고 죽음은 살덩어리로 발견되었다. 커튼이 쳐진 방 안의 귀머거리들은 큰 죽음을 모른다. 작은 죽음도 잘 모른다.

 

지평선의 목구멍에 걸린 해는 극락강 수면에 일몰의 저녁을 토해낸다. 알 수 없는 곡소리가 들리고, 구불구불한 강을 따라 노 젖는 시간만이 국화 한 송이를 들고 이름 없는 모덤을 찾아간다. 큰 느티나무 그늘 아래, 작은 팽나무 아래의 새들이 퍼덕거리지 않는다. 군인들은 계속 행군 중이고, 저녁의 낯이 새파랗게 질려간다.

 

그러나 더 이상 밀려가는 벼랑이 없는 나는, 뱀눈 그늘나비와 춤을 빌려와서 꿈을 꾸고 있는 세상이 있다고 믿기로 했다. 내 몸에서 그림자가 엎질러진 날이기도 했고, 꿈을 벗으려고 하면 총 맞은 자리에서 붉은 피가 왈칵 쏟아지는 오월이기도 했다.

 

 

 

 

나무는 나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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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소감]

 

찔레꽃그늘에 앉아서 나를 솎아내고, 앵두나무그늘 접어서 나를 섞어보고, 나는 나를 방정식으로 풀어보듯, 그렇게 하염없이 앉아서 초록이파리가 빽빽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쓰는 시가 허구의 세계지만 그 안에는 허황되고도 아름다운 것들이 숨 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향 진안에 내려가서 부족한 일손을 돕다가 앞 산 넘어온 비를 바로 마중 나가는 뒷산의 그림자와 젖은 빗방울이 발밑의 묵묵한 목숨들을 들어 올리는 것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그 작은 날숨들이 만들어낸 오월의 들녘 속에서 5.18문학상의 수상소식을 들었습니다.

 

작년 시월에 사내아이를 얻었습니다. 가장으로서 아이와 아내에게 좋은 선물 하나 해줄 수 있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아이는 지금 말문을 트기 위해 옹알이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잘 합니다. 어쩌면 저는 지금 시에게 말문을 트기 위해, 시에게 가기 위한 배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호기심을 갖듯이 그런 눈빛으로 사물들에게 사랑의 말을 걸어볼까 합니다.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의 아내 이소연과 아들 이서진과 이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세상의 여리고 작은 사물들의 비애를 꿰뚫어보는, 그런 촉이 예민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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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금년도 5․18문학상에 대한 시 예심자는 다음 사항을 평가 기준으로 삼아 예심을 진행하였다. 먼저 5․18기념재단에서 평가 기준으로 제시한 예술성, 대중성, 독창성, 문학성, 주제의식을 기본적 참고 사항으로 삼되, <5․18문학상>이 기존의 신인문학상과 달리 ‘5월’의 시대정신 구현과, 광주정신의 참다운 재현을 이룩한 작품이어야 하며, 이 때 신인으로서의 언어적 참신성, 신선한 패기, 기존 5월시의 시적 성과를 뛰어넘는, 예술적 수월성을 보여주는 작품을 발굴하고자 했다. 그리하여 응모작 중 5월의 주제의식에 지나치게 함몰되지 않고, 시적 성과를 뛰어넘는 신선한 시적 발상을 보여준 작품을 위주로 예심을 진행하였고, 예심자의 그러한 소망을 담아 본선에 총 28명의 응모작을 올리기로 하였음을 밝힌다.

 

예심통과작

파도 속에 떠도는 섬 외 스펙에게 외 춤추는 병정 외
그래서 나는 빨갱이였나 보오 외 낙화2 외 오월은 외
망월동 연가 외 광주의 눈물 외 광주 외
1980. 5. 18. 외 서로서로 굳게 손잡아 외 맛의 기억 외
오월의 햇살 외 솟대의 꿈을 꾸는 철새 4월 20일 Pm 8:34-혈흔 외
묵상의 늪 외 맹 외 민둥산의 밭 외
어떤 말에 관한 기억 외 비계공을 위한 서시 외 희망의 사막 외
마그마 외 통곡 외 봄동 외
뿌리론 외 염원 외 때는 5월
칸의 나무배트 외    

 

5·18, 벌써 삼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날을 직접 겪은 이들은 나이가 들었다. ‘그날’은 영상물이나 교육이나 그것을 직접 겪은 어른들 이야기를 통해 전해졌을 것이다. 젊은이들에게.

 

오늘 우리는 스물여덟 분의 168편의 시를 심사하여 한 편의 당선작을 가려냈다. <오월>을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작품을 읽으며 느끼는 것은 5·18이 이제는 생생한 기록화가 되기도 어렵지만 먼 풍경화일 수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문제는 5월의 정신이 오늘에 어떻게 살아있는가이다. 투고작은 전체적으로 5월을 과도하게 의식해서 설익고 관념적인 어투의 시를 뽑았다. 시각의 참신성, 수사의 활달성, 삶의 구체성, 역사적 건실성을 구현하려는 시적 진정성이 필요해 보인다. 그런 가운데서도 현실인식의 튼실성, 5월의 구체적 형상성이 뛰어난 작품을 골랐다.

 

- 심사위원 예심 이승철 / 본심 정희성 · 김용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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