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소문 밖 / 김태인
진실
을 알게 되겠지만 지금 광주에선..
80년 오월 아침, 초등 1학년 교실에서 꺼내진 이야기다
광주민주화운동임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서소문 밖
공원을 거닌다, 이교(圯橋)
흙다리 아래 백사장, 형장의 이슬을 딛고 선 노송군락
맑은 핏물 흐르던 만초천은 혈맥이 막힌 지 오래
순교의 피, 거룩한 믿음의 증거를 수혈하는 헌양탑 홀로 섰다
순교자
가 아닐까, 탑에 걸린 얼굴들처럼
누구든 자신의 믿음에 목을 걸 수 있다면
청명을 고집하여 살점 뜯겨진 하늘귀도
눈이 파헤쳐진 백사장도 팔다리 쳐진 소나무도
어머니들
뒹구는 목을 품고 각혈했을
얼굴을 주위든 탑신이 젖는다
슬픈 그림자 드리우지 않는 탑, 만초천이 와류하며
출렁이는 거룩한 진실을 빨아올린다
오솔길
에 꽃샘추위 훅 불어 목을 친 솔방울이 풍덩 빠졌다
순교의 혈통이 실개울에 넘쳐흐른다
하얀 발자국을 찍는다, 투명한 몸속에서 밤이 피처럼 흐르고
핏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걷는 하얀 개울이 있다
오랜 자손처럼 솔방울들 잘 쓸어 놓은,
봄이 오시는 길
짓밟힌 꽃
은 누군가의 아픈 기억에 책갈피를 꽂아둔다
무릎 헤진 오솔길, 숲 그림자 덧대어 기웠다
나무 그림자 동아줄에 묶인 채 촉수를 뻗는다
피를 먹고 자란 붉은 노송, 잘린 양팔에 울컥 솟은
봄바람이 흐르는 피를 흩날린다
흩날리는 곳마다 어머니 품 같은 탑이 솟았다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탑에 얼굴이 자라고
푸른 나무에 목이 자라고
하얀 달은 하늘귀로 흐르고
오솔길은 탑 안으로 흐르고
밤 비둘기, 동아줄을 풀고 날아오른다
* 마태오 복음 5:6
심사평
<시부문>
<예심> 고재종
<예심통과작>
1. 봄날 버스 외 6편
2. 일요일 외 5편
3. 치약의 전설 외 5편
4. 꽃샘추위 외 6편
5. 무간도 외 8편
모두 163명의 845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하릴없는 삼류 사랑타령과 열혈청년 기질의 피 튀기는 구호의 숲에서 건져낸 작품은 20여명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의 수준은 예전보다 기량 면에서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으나 여전히 문제의식 면에선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었다. 그 중 나는 5편을 주목하였는데, 「아내의 자리」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시선이 너무도 진정스러워 작품을 보다가 하마터면 울 뻔했다. 「광주」는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이후 광주를 제대로 그리고 폭넓게 은유화 해내며 큰 감동을 자아냈다. 「점, 구름의 고고학」은 자신의 생은 알지 못하고 "남의 생만 읽을 수 있는 여자" 곧 점치는 여자를 구름의 고고학으로 읽어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고독사」는 "한생의 밑바닥을 토해내는 라마승처럼 아무런 남길 것이 없이" 고독사한 사람을 독사와 매칭시켜 팩트와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수작이었다. 「사이시옷과 사람 인(人)」은 산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며 내는 '파찰음'을 알뜰살뜰 따뜻한 인정의 '접속사'로 이어내는 솜씨가 이미 기성작가 수준이었다. 이 분들은 누구를 뽑아도 괜찮을 수준을 보여주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설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심> 이승철
<예심통과작>
1. 봄날 버스 외 6편
2. 일요일 외 5편
3. 치약의 전설 외 5편
4. 꽃샘추위 외 6편
5. 무간도 외 8편
<5·18>을 형성화한 작품들이 지난해보다 많은 편이어서 좋았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각이 돋보여 심사자의 마음을 흡족케 했다. 시상(詩想)이 상투성, 단조로움을 벗어난 작품을 찾으려고 했다. 문학은‘언어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문제는 사물과 현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통찰력이 남다름과 언어를 상투화 시키지 않되, 세상 속 비의를 발견케 하는 시적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신인'에 걸맞는 패기, 진정성, 세상과의 대결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선정작 5명의 간략한 평은 이렇다. 「봄날 버스 외 6편」은 광주항쟁의 전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형성화하는데 성공했다. 「일요일 외 5편」은 일상의 삶과 현대인의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치약의 전설 외 5편」은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발견의 시각을 갖추고 있다. 「꽃샘추위 외 6편」은 치열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무간도 외 8편」은 다양한 시각과 시적 형식의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본심> 정희성
예심을 통해 올라온 여덟 분의 작품을 일독하고 그중 세 분의 작품 「봄날 버스 외 6편」과 「무간도 외 8편」과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으로 범위를 좁혔다. 명색이 5·18문학상이라면 그 명칭에 걸맞는 주제의식에서 자유롭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시가 반드시 5·18을 소재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5·18에 광주라는 지역명칭을 얹는 것도 5·18을 협소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5·18은 4·19와 같은 것이지 ‘광주사태’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민중들의 열망’이 담겨있는 작품이면 5·18문학상에 값한다고 보았다.
세 분의 작품 가운데 「봄날 버스 외 6편」은 5·18 당시의 참상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강렬한 시적 감동에는 이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도 주제의식이 강하고 감정이 잘 절제된 단정한 시였다. 그러나 ‘주먹밥’이라는 이미지가 주제의식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눈에 거슬렸다.
「무간도 외 8편」은 한편 한편이 짜임새가 있고 참신해 보였다. 그 가운데서 「서소문 밖」에 눈이 간 것은 주제와의 관련성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서소문 밖 순교자 헌양탑 이야기에 주력하면서 그 위에 슬그머니 5·18을 오버랩시키는 수법이 자못 능청스럽다. 이는 5·18을 정면에서 접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형상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시상(詩想)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시적형식의 새로움이 엿보이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통찰력이 남달랐다. “누구든 자신의 믿음에 목을 걸 수 있다면....순교가 아닐까”,“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시행은 천주교 순교자만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본심 심사위원으로서 이 시를 맛있는 시로 보고 당선작으로 추천하며 아직 이름을 모르는 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선정작> 서소문 밖 / 김태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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