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의 아이 외 4편 / 이은희
아버지는 내게 바다를 보여주셨다
지나는 사람들의 손마다 우산이 들린,
비는 그러나 내리지 않는 흐린 날
반주飯酒와 함께하는 아버지의 저녁식사
꽤 오래전 아이가 살아 돌아와 상에 앉는다
아이는 하현달에 홀려 말을 잃었다
아버지는 허연 밥을 아이에게 내놓은 채
술잔만 기울였고
달도 차츰 기울어갔다
나는 밥과 삼킨 고등어 살 점 속
가시를 빼내지 못한 채
밥알만 뭉텅뭉텅 삼켰다
아버지는 내게
눈 속에서 한없이 일렁이는
드높은 파고에도
넘치지 않는 고요한 바다를 보여주셨다
맛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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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금귤 나무다
그가 가져온 후 누구도 열매하나 따지 않았고
며칠 째 형광등을 잊은 거실, 금귤을 매단 채 적막하다
저 열매를 따야 향이 나고 꽃이 핀다고 했다
텅 빈 내 집의 낮은 낯설다
그가 누워있던 서관병동 천백구호의 이불에서 나는 냄새보다도,
소파에 누워 시간을 잡았다
두툼한 겨울 커튼이 아직 달려있는 거실은
어둡다 라면 하나 없는 어느 휴일
얼려 놓은 밥을 녹이고 쉬어 무른 김치를 볶는다
잠시 열린 냉장고 틈으로 그 안에 고였던 새우젓 냄새가 쉴 새 없이 퍼진다
오래된 냄비는 밥알을 태우기 한창이다
메마른 참기름병 버리고 고추장맛 볶음밥을 씹는다
나무 그림자가 나의 식사에 손을 뻗는다
커튼을 간질이며 아는 체 하는데
금귤을 땄다, 그의 향이 난다
꽃은 필 것이다
신설동
한 여자가 전동휠체어를 출입문에 바짝 붙였다 공익근무원과 실랑이가 일었다 이렇게 타지 않으면 집에 못 간다는 경험자, 몇 분쯤 전동휠체어의 바퀴가 반 걸쳐진 상태로 전철은 출발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짜증 섞인 몸짓으로 더 구겨져 공간을 마련했고 여자는 정돈되지 않은 머리를 매만지며 모른 체 했다 신설동역에서 열차는 출발했다
그 여자는 갑자기 소리치기 시작했다 열차가 덜컥 멈추며,
여러분, 제가 말 안하려야 안할 수 없어 한 말씀 올려요 아 이건 비밀이지만 꼭 밝혀야겠단 말입니다 제가 원래 대한의 건강한 물론 몸은 조금 불편했지만 정신은 말짱했단 말이요 그런데 갑자기 납치를 해서 나를 낫게 해준다고 우선 나으려면 베풀어야 한다했지요, 난 가진 게 없는 여자라 신장을 떼어주었어요 그런데 제 신장을 받은 사람은 도무지 고맙지 않나봅니다 여직 소식이 없어요 나는 내 몸의 일부를 나눴으니 가족 같은데 말이요 어쨌거나 처음엔 종교의 힘인 양 말하더니, 과학의 힘을 써서 제 머리를 점점 조종했어요 말이 될까 싶지요? 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소리, 그것을 이용했어요 자꾸 나를 멋대로 조종하고 반항하면 약을 뿌려요 보이지 않게요 그럼 마취되고 다시 머릿속을 조종하는 실험을 계속해요 처음에는 제가 몸이 불편하므로 제게만 한다 했지요 그러나 이제는 당신들도, 그리고 권력자들에게도 그렇게 한다고 해요 그래서 아무리 잘난 사람도 나쁜 짓을 하지 않으면 그 조직에 있을 수 없어요 실험에 통하지 않는 자는 조직에서 내몰라고 조종된 권력자에게 말해요 그러니 세상이 이렇고 전쟁이 나는 겁니다 전쟁이
중간에 시끄럽다며 짜증내는 사람마다, 꼬박꼬박 미안하지만 15초, 혹은 10초만 더 말하겠다는 양해를 구하는 그 여자에게, 실은 말을 잘라 더욱 미안하지만 지금 나라가 시끄러우니 다음 주에 다시 이야기하자는 노년의 남자로 인해 사람들은 다닥다닥 붙어 크게 웃었다
전철은 앞차와의 간격을 위해 잠시, 그러나 그녀가 실랑이를 벌이던 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서 있었다 승객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 죄송한, 그러나 벌써 몇 년 째 바뀌진 않는 시간이었다
맹그로브 나무
한밤중 TV 속
맹그로브 나무는 새끼를 낳았다
우리네처럼 자길 닮은 나무 밑동을 나뭇잎 위로 불쑥
세상에 내어 놓는다
그러고는 물속으로 밀어낸다, 지 새끼를
바람이 부는가 맹그로브 가지가 흔들렸다
물결의 물결 속으로 빠져든 새끼 나무 밑동은 정신이 없었다
나뭇잎에 매달려도 보았는데 하릴없이 미끄러져
아득했다, 어미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어릴 적 엄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았다
몰래 방문을 열고 들여다본 당신의 얼굴에는
낯선 그러나 낯익은 주름뿐이었다
자전거
여기에서 안녕하면 저쪽으로 안녕 전해주는
우편배달부, 개울 건너 마을에 편지 전하러 간다
자전거 바퀴가 구른다
페달은 힘차게 내딛는 발 맞받아치며 솟는다
올라오는 페달에 다시 내딛는,
발과 페달 힘겨루기 하는 동안
바퀴 온 몸으로 구른다
깔린 자갈 틈에 몸을 찍힌다
양쪽으로 주고받는 마음에
발을 굴렀던, 아버지
이제는 베란다에 놓여 있는
아버지의 자전거 잠들어 있다
낡은 바퀴 사뿐 굴러
구름 밟고 아버지께 안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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