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여자 외 4편 / 이혜리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의 머리를 쪼개서
한 여자 뛰쳐나온다
갑자기 들이닥친 이별처럼 비가 내리고
계단에 앉아 귓바퀴에 앉은 빗방울을
굴리고 있던 또 다른 여자
벌떡 일어나서 뒷걸음질 친다
창문에서 미끄러지는 빗방울의 진동을
기록하고 있던 어떤 여자
뒷걸음질 치는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그 옆에서 흘러내린 내장에 입김을 불고 있던 여자
뒷문으로 뒷걸음질 친다
그 옆에서 피아노 건반을 쓰다듬고 있던 여자
늘리다 만 음표를 주워서 어깨에 걸치고
외출 준비를 한다
비는 계속해서 내리고
골목길에서 묵은 문장들을 바닥까지
긁어 먹고 있던 여자
뒷글음질을 치는 여자들과 맞닥뜨린다
그때, 버스 정류장에서 목만 굴러다니던 여자
하반신을 내팽개치고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들의 선두에 선다
허공에서 빗방울의 돌기가 경련하는 순간
음표를 어깨에 걸치고 외출하던 여자
뒷걸음질을 치는 여자들 중 한 명을 잡아서
허벅지를 갈라 그 틈 사이에 넣고 박음질한다
갑자기 촉수처럼 곤두선 빗방울
빗방울들이 여자들의 목덜미에 내리꽂힌다
뒷걸음질을 치는 한 여자의 머리를 쪼개서
여자 뛰쳐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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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를 끓이는 시간
기억이 날 듯 말 듯 할 때
나는 버릇같이 고양이를 내놓고
언제 그랬냐는 듯 수거해오지
길고양이 변장술인 거 몰랐지?
골목길에서 등을 쫑긋
곤두세우고 있던 고양이야
한번쯤 줄무늬 그려줄까?
수프 맛은 국자에 달려 있어
국자를 끓이면 고양이 맛
수프에 가득 섞이겠지
전화벨이 잠꼬대처럼 울리고
나는 날로 살이 찐다
점점 휘어가는 국자로
시간을 수프처럼 저을래
냄비에서 김이 오른다
흐릿해진 줄무늬들이
뛰쳐나오겠다는 신호
수프가 알맞게 걸쭉해졌어
고양이 냄새가 온 동네 가득해지면
한 국자 떠 볼까?
달의 뒷면 탐사기
발걸음이 이끌렸다
울컥, 라면가락이 목울대로 솟아오른다
달싹이는 혓바닥을 누르니
물이 들이찬다
버짐처럼 피어오르는 경련에
척추가 휜다
달무리를 내뱉었다
목덜미에서부터 돋아나는 소름
지금나를보고있나요
눈이 마주쳤다
윤곽이 일그러지고
눈코입 뭉개진 당신
나는반쯤엉긴채로당신은반쯤멀어진채로아직한데있어요
가지말아요내가테두리를잘라줄게요
돋음새김된 당신에 가려진
뒤통수에 손가락이 가려다 말고
당신,손가락새흐느끼던머리칼은여전한가요
잠, 잠
오랫동안 잠을 앓았다
벽에 등을 밭기고 모로 눕는다
나는 여기저기로 향하는 시선 속에서 온데간데없다
돌아눕는다 진득하게 들러붙은 낮이 두피를 간질인다
날 것으로 뒷모습을 내려놓고 끊임없이 불안해지는
나는 눈꺼풀 안에서
떨어진다, 무릎 뼈가 움찔 들리고, 나는 떨어진다, 자궁 안에 있는 동생을, 또 떨어지다가, 미안해, 말하다 말고, 끄집어내서 연애를 하다가, 벌써 함몰하고 있는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떨어진다, 앞으로 목덜미에서 오소소 돋아날, 동생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다가, 떨어진다, 서늘하게, 바람이 불고, 나는 달력 속에서, 부풀고 있는 숫자들과 휩쓸리다가, 튕겨져 나간다, 여기야, 여기, 잠긴 목소리에 고개를 드니, 조각조각 나눠진 동생이, 나무에 하나씩 걸려있다, 그때, 뼈만 남은 손이 어디선가 다가와서,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고,
나는 좀처럼 잠잠해질 수 없어서
몸을 일으킨다 시계바늘의 움직임을 끌어내려서
달려 나가려다 말고 다시 돌아눕는다
점점 확장하고 있는 허공에 얼굴을 내민다
눈꺼풀을 끌어당겨서 시선을
천천히 동공에 입힌다
다시 뒤척이며 돌아눕는다
언제든지 찌푸릴 수 있는 이불에
살갗을 베이면서도 나는
동그라미 친 날짜에 들어갈 준비를 한다
나는 오늘도 귓속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귓바퀴에서 흘러내린 시간을 주워 먹는다
펭귄의 야간비행
펭귄들의 비행을 돕느라 나는 밤마다 동네를 돕니다
골목 한 모퉁이에서 펭귄 한 마리
부리까지 덜덜 떨면서 번식합니다
어린 내가 펭귄 옆구리를 기어올라요
날개자국의 봉제 선은 너덜거리죠
펭귄이 내 달팽이관의 속살을 헤집으며 속살거려요
(나는 아빠 발등에 올라서서 엄마를 조금씩 파먹었어요)
내 귀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귀지를 뱉더니
(나는 당신의 시선이 돌아다니는 새벽을 간질이고 싶어요)
갑자기 멀미처럼 펭귄의 귀가 어지럽게 돋아나요
붉게 상기된 귀들이 기지개를 깜박, 깜박 반복적으로 펴요
갑자기 펭귄이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무릎관절이 조금씩 무너져 내리는군요
동네 한 바퀴 다 돌기도 전에 흰 뼈가 튕겨 나와요
펭귄 등가죽에 장착된 나는 잠꼬대를 합니다
펭귄 귀에 점점 야위어 가는 그을음을 채워 넣고 있는데
펭귄 날아올라요
[수상소감]
시를 접한 지 2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시를 모르겠습니다. 숨겨놓아도 때로는 드러내야 하는 문장을 깨닫는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수상소식을 들었을 때, 저는 어디로 갈 것인가를 스스로도 알 수 없었던 기차 안에 놓여 있었습니다. 부족함이 많은 저에게 기회를 주신 여러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께 감사드립니다. 제가 어떤 선택을 해도 더 커져가는 믿음으로 대답해주셨지요. 시와 조금씩 멀어지던 제게 삶이 곧 시라는 깨달음을 주신 여태천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잠을 건너뛰고, 일상의 경계선을 기웃거리던 날들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가 시(詩)로 돌아올 줄 알고 계셨고, 출발선에서 맞아주셨습니다. 두려운 마음에 또다시 시작조차 할 수 없었던 그 길을 함께 해 주셨죠. 시의 길로 인도해주시고 상처와 노는 법을 일러주신 김기택 선생님, 마음으로 시를 보는 법을 가르쳐주신 김사인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앞서가는 눈으로 바라봐주던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또 다른 ‘나’를 재생산하지 말라던 다정함들이 다시 전해져 오네요.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문우들, ‘나’로써 마주할 수 있는 친구들의 얼굴도 이 순간 스쳐 지나갑니다. ‘우리’의 간격을 메우기 위해 단어를 연마한 날들을 뒤로 하고, 늘 다른 의미로 성장하면서 걸어가겠습니다.
[심사평]
제5회 최치원 문학상에는 매우 많은 분들의 응모가 이어졌다. 오랜 시간의 노력이 녹아 있는 작품들을 읽느라, 심사위원들은 즐겁고도 보람 있는 시간을 경험하였다. 이런 열렬한 작품의 질적 향상 현상은 최근 최치원문학상이 각별한 주목을 받고 있다는 유력한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히 이번 응모자들의 시편은, 담론적 집중성을 보이는 경향을 띠지 않고, 저마다의 경험적 구체성을 바탕으로 언어 미학의 완성을 꾀하려는 의욕을 두루 보여주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분들의 작품을 심사위원들은 여러 차례 읽어가면서, 최종적으로 이혜리 씨와 임종관 씨의 작품을 두고 오랜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이혜리 씨를 당선자로 뽑게 되었다.
임종관 씨의 시편은, 신선한 언어 감각과 삶을 바라보는 페이소스가 남달리 결속되어 있는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기억과 감각 속에 사물이나 경험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능력도 좋아 보였다. 특별히 긴 호흡 속에서 시를 구성하는 능력에 신뢰가 갔다. 앞으로 날렵하면서도 진한 페이소스를 담는 쪽으로 좋은 성취를 기대해도 좋을 듯하다.
이혜리 씨의 시편은, 응모작 전체를 관철하는 균질성이 시적 능력을 신뢰하게끔 하였다. 일상 속에서 구체적 삶의 모습을 노래하는 지향이 매우 반가웠다. 그리고 경험적 구체성 속에 심미적 감각을 활달하게 살려 재생하고 배열하는 언어적 힘이 관찰되었다는 점을 부기하고 싶다. 여러 모로 미래적 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당선작으로 뽑기로 하였다. 다양한 소재 선택의 안목과 그 소재에 걸맞은 형상의 방법을 지속적으로 확장해가길 바란다.
이번에 당선되지 않은 분들도 더욱 정진하기를 바라고, 거듭 당선자에게 축하와 격려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 신경림(시인), 유성호(문학평론가), 홍용희(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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