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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역 / 박재근

 

 

누구는 기차가 아침 여덟시에 떠난다는데,

우리가 탄 기차는 자정에 떠납니다.

부다페스트행 기차는 지금쯤 어디를

덜커덩덜커덩 달리고 있을까요.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는 기차는

지금 막 울란우데역을 통과합니다.

낭만이 연인의 적이라고 말하면

유머일까요, 아니면 실언일까요.

기차는 방랑자만을 태우는 고독한

궤도라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어요.

집시, 세계 집시들이 별자리를 보며

이동하는 시각에 우리가 탄 기차는

청주역을 떠나 우주로 향합니다.

, 보세요. 우주에는 신의 전설이

깃든 은하수가 푸르게 범람합니다.

우리는 두 마리 양이 되어 그까짓

태양은 누구에게 가지라고 함부로

줘 버리고 메에메에…… 울음인지,

대화인지, 함성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우주를 달립니다.

그 사이 지상에서는 함께 떠나지

못한 역마살이 등대로 명멸합니다.

기차가 우주를 가르는 동안 철새가

고단한 날개를 접고 잠을 청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차도 삶은 계란 같은

보름달을 돌아 금성으로 치닫습니다.

들뜬 마음이 고즈넉해지는 순간,

이제 우리는 일상의 흔적을 지웁니다.

, 당신의 기차는 몇 시에 떠납니까.

당신의 가슴속에는 레일이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어깨를 기대고 싶은,

베텔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장 짐을 챙겨 떠나십시오.

기차는 매일 자정에 청주역을 떠납니다.

 

* 오리온자리 알파별로 거인의 어깨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

 

 

 

 

[당선소감] “시는 강퍅한 삶 일으켜 세우는 정체성

 

요 근래 제 일상은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보름째 밤을 새우면서 매우 지쳐 있었는데, 갑자기 당선 소식을 받아서 경황이 없습니다. 어제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 태양이 제 머릿속을 밀고 들어오더니 그것이 밤에도 지지 않아서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중국과 무역중계업을 하다 15년 전부터 삶의 무게를 오롯이 문학에 둔 박재근(50·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씨가 17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로 선정됐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8. 1985년에 군 제대 후, 10년 동안 주류 관련업체 일을 하며 번 돈으로 건강식품 대리점을 시작했고 2000년부터 중국으로 진출했는데 계약서를 잘못 쓰는 바람에 그동안 번 돈을 거의 탕진했다. 이 일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맛보았고, 그 허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하고 싶은 것을 찾던 중에 글과 만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에 매달렸다.

 

시는 저의 정체성입니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삶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어떤 상황과 직면해서 우울하거나 혹은 기쁜 감정이 생성되면 가슴이 우는데, 그때 마치 천둥이 치듯이 시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시는 강퍅한 삶을 일으켜 세우는 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가 그의 정체성이 되기까지 문학은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락을 끊고 좋은 시인들의 시 1만 편을 필사했다. 요즘 시인들이 낭만적이고 사교적으로 시를 만나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처절하게 시와 만나고 있는 그는 이번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할 때에도 우체국으로 가는 순간까지 시어를 고쳤다. 일반인과 시인의 의식이 대동소이하다면 굳이 시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는 그는 이제 살짝 고개를 내민 시와의 혹독한 만남을 평생 이어나갈 생각이다.

 

전북 김제가 고향이고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 박씨의 수상작은 청주역이다. 청주역12세 때 늑막염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머니 고향이 충청도 공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생물학적 버팀목의 부재는 굉장한 외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충청도에 어머니를 상징하는 시 한 편 정도는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청주역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꿈을 이뤘으니 남은 한 가지 드라마작가의 꿈을 좇아 갈 것이라는 박씨. 그는 상금 500만원을 드라마 비디오와 도서 구입비로 모두 사용할 계획이다.

 

“2년 전, ‘방송작가협회교육원에서 드라마작가 초급·중급·고급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연구반을 꾸려 작품 구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시와 소설, 드라마는 장르가 달라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드라마 대사가 시의 응축과 유사해서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향후 2~3년 동안 죽을힘으로 노력해서 시든 드라마든 객관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려놓고 싶습니다.”

 

 

 

 

[심사평] 만화적인 발상의 밝고 환상적인 시

 

청주역’·‘씨앗론’(박정근), ‘막차’·‘보았다’(박영석), ‘꼭 그런 날엔 눈이 오더라’·‘서울의 젊은이’(김수아)가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들이다. 실제로 이 시들은 어떤 것이 당선작으로 뽑혀도 좋을 만큼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청주역은 기차를 타고 청주역을 출발하여 우주를 달린다는 은하철도 구구구 같은 만화적인 발상도 없지 않지만, 밝고 환상적인 시다.

 

과도하게 우울하고 심각해서 오히려 시적 긴장과 진실감을 잃고 있는 점이 최근 우리시의 흠결이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힌다. 가락도 막히지 않고 속도감이 있고, 시어도 단아하면서도 세련되어 있다. “당신의 가슴 속에는 레일이 있습니까/ 베텔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같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질문도 시에 생기를 더하고 있다. ‘씨앗론은 말하자면 여성예찬의 시인데, 자칫하면 평범한 여성예찬의 산문으로 끝날 내용을 시로 끌어올린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두 편 모두 설명이 없는 점도 시의 격을 높이고 있다. 박영석의 막차보았다는 이미지의 효과적인 배열로 시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점,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배경이나 소도구의 활용으로 상징을 극대화하는 기법도 만만치가 않다. 우리 말의 묘미도 자못 터득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꼭 그런 날엔 눈이 오더라’, ‘서울의 젊은이의 김수아의 시들은 요즘 유행하는 다른 시들과는 아주 달라 호감을 준다.

 

특히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치는 사람들모두 나를 외면한 채 가는데/ 그 때 눈에 띄는 것은 하얀 눈같은 일상적인 삶의 한 단면을 포착한 표현은 실감이 난다. 맑고 깨끗하고 잡스럽지 않은 점도 이 분이 앞으로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상의 작품들을 가지고 논의한 끝에 선자들은 청주역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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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7회 지용신인문학상 박재근 <청주역>

 

 

청주역

 

 

누구는 기차가 아침 여덟시에 떠난다는데,

우리가 탄 기차는 자정에 떠납니다.

부다페스트행 기차는 지금쯤 어디를

덜커덩덜커덩 달리고 있을까요.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는 기차는

지금 막 울란우데역을 통과합니다.

낭만이 연인의 적이라고 말하면

유머일까요, 아니면 실언일까요.

기차는 방랑자만을 태우는 고독한

궤도라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어요.

집시, 세계 집시들이 별자리를 보며

이동하는 시각에 우리가 탄 기차는

청주역을 떠나 우주로 향합니다.

아, 보세요. 우주에는 신의 전설이

깃든 은하수가 푸르게 범람합니다.

우리는 두 마리 양이 되어 그까짓

태양은 누구에게 가지라고 함부로

줘 버리고 메에메에…… 울음인지,

대화인지, 함성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우주를 달립니다.

그 사이 지상에서는 함께 떠나지

못한 역마살이 등대로 명멸합니다.

기차가 우주를 가르는 동안 철새가

고단한 날개를 접고 잠을 청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차도 삶은 계란 같은

보름달을 돌아 금성으로 치닫습니다.

들뜬 마음이 고즈넉해지는 순간,

이제 우리는 일상의 흔적을 지웁니다.

참, 당신의 기차는 몇 시에 떠납니까.

당신의 가슴속에는 레일이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어깨를 기대고 싶은,

베텔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장 짐을 챙겨 떠나십시오.

기차는 매일 자정에 청주역을 떠납니다.

 

*베텔기우스: 오리온자리 알파별로 ‘거인의 어깨’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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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인시인상
2001년 제1회 최금진 「사랑에 대한 짤막한 질문」외 4편
2002년 제2회 안주철 「흉측한 길」외 4편
2003년 제3회 김광선 「조리사 일기」외 4편
2004년 제4회 송진권 「절골」 외 4편
2005년 제5회 김성대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외 4편
2006년 제6회 고은강 「푸른 꽃」 외 4편
2007년 제7회 당선작 없음
2008년 제8회 백상웅 「각목」 외 4편
2009년 제9회 주하림 「데이지」 외 4편
2010년 제10회 김재근 「여섯 웜홀을 위한 시간」 외 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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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회 창비신인문학상  (0) 201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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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정충화

 

 

모든 옷걸이는
옷을 위한 몸이다
주인을 대신하는 또 다른 몸
육신의 껍데기를 끌어안고
기꺼이 제 몸을 빌려주는
누군가의 대역代役이다
철 지난 양복을 걸치고
옷장 속 어둠을 거르거나
젖은 셔츠를 입고 빨랫줄에 매달려
햇볕과 바람의 통로를 지키는
수문장이 되기도 하는 것들

세상의 모든 옷걸이는
누군가의 배후다
나 역시
낡고 찌그러져 가는
한낱 옷걸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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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건手巾 / 임은주

 

 

한 맘으로 비를 피했던 복사 벌 기행에서

호박엿 하나 물고 소독차 꽁무니연기 빼 닮은

물안개를 좇은 흔적 있다 한 자락 수건 쓴 적 있다

우산이 되었던 현수막의 긴 주름에서

어머니의 헌 가 만져졌다

빗방울 머금은 꽃,

그 꽃 꼭 쥐고 와서 봉투 흔들어 쏟았다

산 소독을 끝낸 물안개

머리 감싼 하얀 망울들 차창에 슬몃 차려놓을 때

유독 허리 휘도록 김 매는 꽃

쏘-옥 올라온 풀 숲 도라지 망울

오각으로 수건을 접었다

두른 수건 풀어 흔드는 콩 밭이거나 배추고랑 위

파밭만 두고 비탈 산 따라 굽는 허리 바라 본 수건이다

도라지 꽃은

밤을 지샌 비의 젖은 발

등이 휘는 바람 속에서 흙빛이 쏟아진다

자다 깰 때와 다른 잃어버린 보라의 나라

열 마지기 논 걷어가 귀 닫게 하고

흙탕물 걷으며 눈 닫게 한 장맛-비,

오각형으로 펑- 펑- 터지고 있다 도라지 꽃 피고 있다

한 방울 눈물 못 만드는 어머니 울음 되었다 나락 끝에 찔린 눈

나락을 끌어들인 먼 눈의 꽃술 되었다

마다 나무는 뽑히고 국수-집 나온 연기와 물안개 속

벗겨내도 벗겨지지 않는 아린 뿌리 가시 눈으로 닫히었다

마주보다 따라 왔던 큰-물을 닦고 간다

*아우라지 빗백 도라지

 

 

* 아우라지; 송천과 골지천이 만나 아우러져 강을 이루는 곳이라 하여 아우라지라 불리우는 정선 아리랑가사(님을 기다리는 처녀상)의 유래지.

 

                    

 

 <제6회 부천신인문학상 시부문 심사평>

 

부천신인문학상 <시> 부문 심사평

수건手巾 한 장이 주는 상상력의 감동

 

   시인은 시 한편을 쓰기 위해 소재로 채택한 사물의 끝자락까지 만져 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때로는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땀에 찌든 일상의 냄새를 맡기도 한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시인의 손에서 재창조되어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게 된다. 심사를 하면서 느낀 점은 시 쓰는 것을 너무 안이하게 생각하고 개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주변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고 그 반대로 영향을 받고 살아간다, 시 역시 마찬가지다. 스승을 닮기도 하고 동료를 닮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습작기에 안주하지 않고 자기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인에게 심사위원들은 높은 점수를 주게 마련이다.

이번 심사에서 마지막까지 논의의 대상이 된 작품은 <수건>을 포함해서 2편이다. 그중 <나는 반죽이다>는 내면의 흐름을 반죽에 비교하여 노래한 기법은 참신했으나 진부한 시어들이 반복된다는 점이 약간 흠이다.

  <수건>은 시어를 끌고 나가는 힘이 있고 수건을 도라지꽃과 동질화시켜 여러 각도에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내며 나락에 질린 꽃술과 울음 없는 어머니의 눈물로 대비 시켜 삶의 애환을 담담하게 담아내고 있다. '큰-물을 닦고 간다'는 수건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생을 달관하는 모습이 감동적이다. 군데군데 얘써 꾸민 흔적이 흠이지만 수건 한 장에 담아낸 풍부한 상상력과 착상, 그리고 시어의 참신함에 당선작으로 뽑았다.   

   비록 당선작에 들지 못한 시들 중에서도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응모자들이 많이 눈에 띄었음을 부기해 둔다. 부천 신인문학상을 통해 시단을 이끌어 갈 역량 있는 많은 시인들이 배출되기를 기대해 본다.

                                                                                    

심사위원 박영봉 고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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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葬 / 정광주


           세찬 물때 맞아 몸살 앓는 부두에
           이제 돌아와 비로소 젖은 노제 지내는
           참방이는 수면의 저 깊은 한사리. 

           개기일식에 가려진 짙은 어둑살 너머
           침잠의 포구로 잦아드는 새의 그림자가
           부유하는 해면 위 식은 햇살을 비질한다.

           지새고 나도 한 없이 되돌던 지난한 세월 
           월령을 채운 만월에 시월은 한기를 내뿜고 
           풍어의 기쁨 속 뒤척이며 긴 밤 설레던 
           집어등 춤추는 불면의 날이 마감되면 
           집채 넘는 너울에도 고요한 숙면은 왔다.

           생애의 끝에서 파랑주의보는 소멸하고·
           창백한 사각의 창에 갇힌 흑백사진 속 
           굵게 주름져 해맑은 초로의 어부는 웃고
           다가올 미명에 문 여는 선창아래서 
           비린내 배어나는 햇살에 몸을 닦는다.

           푸름의 세월을 한껏 조율하던 바다에서
           망실해 뒤돌아보는 아득한 일월의 저편 
           흐려지는 시야에 만선의 깃폭을 내리고
           이제 삼베로 마름질한 고름을 꼭꼭 여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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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 김명숙

 

 

소리의 집이다
아니, 비워냄의 꽃이다

 

모두 비워내기 위해
제 몸을 진종일 널어 말린
누에고치이다

 

둥, 둥, 둥

 

저문 하늘로
팽팽한 울림이
바람의 등을 타고 올라
하늘을 가른다

 

비우고 비워 비로소 다다른 자리


소리꾼의 득음이다
부처의 깨달음이다

 

어두운 하늘로
자꾸만 파닥거려 날아오르는 소리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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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쟁이 / 문신진

 

7월의 태양이 연못에 빠질 때마다
소금쟁이는 가슴을 비틀고 있었어요
저 영감탱이를 몰아내고 왕이 되리라
민들레 홀씨 눈처럼 내려앉던 어제 오후
신경통에 삐걱거리는 다리를 끌던 영감을
꼴사나운 개부들 틈에 쓸어 넣고 만세를 불렀지

 

물방개 풍뎅이 연꽃위의 무당벌레까지
나의 등극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것 같았어
무덤덤한 버들가지 빼고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에 움츠린 각시들을 모아놓고
허풍을 쳐대며 오만스럽게 그들 주위를 맴돌았지

내가 너희들의 지아비니라
연못에 주저앉은 구름조각을 밟으며
구럼처럼 번성할 내 후손들을 생각했지
아들이 아들을 낳고 손자가 손자를 또 볼 때까지
가로지른 은빛 거미줄 아래
부푼 꿈은 또 하나의 금빛 줄을 포개고 있었지

말잠자리가
나를 부퉁켜안고 하늘을 오르는데
울며 손 흔드는 각시들 꿈속처럼 희미한데도
중얼거렸지, 아들이 아들을 낳고, 손자가 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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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공 황씨 / 금미자

 

우리 동네 길 모퉁이에 두어 평 남짓한 집수리 가게가 있다. 전기, 수도, 도배, 유리, 페인트, 방수, 보일러. 그야말로 만물상이다. 황씨, 동네 사람들은 가게 주인을 이렇게 불렀지만 그의 이력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짐작할 수 있는 것은 사투리로 보아 고향이 경상도 어디쯤이라는 것밖에. 그는 친절하고 부지런하고 인사성 밝고 매일 아침, 거리는 물론 골목까지 청소를 했다. 때로는 아이들 등굣길 교통정리도 했다.

그의 가게는 날로 번창했다. 한 밤중에 전화를 해도 싫은 내색도 하지 않고 득달같이 달려왔다. 하수도가 막힐 때도 보일러가 고장 났을 때도 그가 다녀가면 거짓말처럼 고쳐졌다. 그가 제법 돈을 벌었을 거라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수다쟁이 동네 아줌마들 중에는 황씨를 장가보내야 한다면서 입방아를 찧었지만 그는 씨~익 웃기만 했다.

지난 초겨울 통장네 집으로 황씨의 전화가 걸려 왔다.“통장님 저 황씨에요. 통장님께 죄송한 말씀드리려고요. 사실 저는 돌팔이 수리공이에요. 통장님도 느끼셨을 거예요. 제가 언제 연장도구 한번 제대로 만지기나 했나요.”잠시 조용하더니 목구멍으로 꼴깍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통장님 저는요 건축현장에서 잡부 노릇하던 놈이에요. 더 이상 동네 사람들을 기만할 수가 없어서 가게 문을 닫습니다. 그동안 번 돈은 마누라 암 치료비로 다 썼습니다.”다음날 굳게 닫힌 황씨네 가게 문짝엔 이런 쪽지가 붙어 있었다.


“동네사람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덕분에 마누라가 살았습니다.

  황씨 올림.”

 

 

[심사평] 시인은 인간의 소리를 들을수 있어야....

 

 ‘시는 신화이다.’라는 말은 시의 내용적 정의이다. 시의 내용, 즉 시는 무엇을 표현한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그러니까 시의 내용은 ‘신화’라는 것이다. 그러면 신화는 무엇인가. 신화는 글자 그대로 ‘신들의 이야기’혹은 ‘신과의 대화’이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신화에 쏠리는 관심을 흔들리는 배의 균형 잡기에다 비유했다. 신화적 세계가 대표하는 초 합리와 과학이 대표하는 합리 사이에 형평을 유지하려는 것이 바로 토마스 만의 균형의 이론이다. 다시 말해서 현대인은 신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현대는 아무리 봐도 신들을 위해 떠오를 태양이 없는 시대다. 땅의 시대이며, 육체의 시대이며, 물질의 시대이며, 신이 잠든 시대이다. 신은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다. 이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는 신이 깨어나면 신화의 세계가 열린다. 이것이 바로 시를 창작하는 일이다. 그런데 신화의 의미 중 ‘신들의 이야기’는 서사시와 극시의 내용이며,‘신과의 대화’는 서정시의 내용이다. 그리스 시대에는 시를 신탁(신탁(神託)이라고 해서, 시인은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번에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수리공 황씨’ 외 3편, ‘’산이 잠든 줄 알았어요‘ 외 4편, ’홍시‘ 외 4편, ’허물어지는 씨족 성‘ 외 4편 등 네 분의 작품이다. 사실 네 분의 작품은 수준이 거의 같아서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모두 시를 1,2년 쓴 것이 아니라 꽤 오랜 수련기를 거친 분들로 보였다. 주제의 시적 형상화도 기성 시인에 뒤지지 않았다.

 ‘허물어지는 씨 족성’ 외 4편은 시적 용어가 다양하며, 현대적인 비판의식도 깔려 있으며, 시적 이미지의 형상화도 무난하다. 그러나 너무 과장하고 서두르는 것 같은 표현 때문에 진실성이 전해오지 안는 것이 흠이다.

 ‘홍시’ 외 4편의 작품은 ‘오랜 추억들만 하나둘씩/꺾어내고 있었네’에서 보듯이 너무 아름다운 서정시이다. 시적 문장력도 훌륭하다. 그러나 상식적 관념의 서술이 맘에 걸린다.

 ‘산이 잠든 줄 알았어요’ 외 4편은 거침없는 의인화의 기법과 이미지 전개의 자유분방함이 실험시를 보는듯한 느낌이다. 그러나 비유의 창의성과 신선감의 결여로 시적 감동이 적은 것이 흠이다.

 ‘수리공 황씨’는 산문시다. 그런 만큼 산문적 서술 특징이다. 그리고 산문시의 특성인 이야기(story)가 들어 있다. 문장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갈 때 시적 긴장감이나 표현의 묘미를 맛볼 수는 없다. 그러나 다 읽은 다음에 오늘날과 같은 땅의 시대, 물질의 시대, 신이 잠든 시대에 신의 소리 곧 양심의 소리가 시적 감동으로 전해 옴을 느낀다. 이분의 다른 작품에선 시적 표현의 긴장감과 이미지 형상화의 뛰어남도 알 수 있었다. ‘수리공 황씨’를 심사위원 전원이 만장일치로 당선작으로 결정한 이유이다. 

 

 

[당선소감]

 

 내가 가는 봉사 단체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일을 하다보면 삶에 찌들어 숨쉬기조차 힘든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 이야기들을  시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어떤 분은 왜 그렇게 아프고 고통스런 이야기를 소재로 시를 쓰느냐고 하지만, 그들의 현실에 아름다운 언어로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는 일,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겨울이 춥고 긴만큼 봄에 필 목련이 더 아름답다’고하면 내 어려운 이웃에겐 사치한 일인 것 같아 왠지 미안한 마음입니다.

  뜻밖의 당선 소식에, 생기 잃었던 내 속의 언어들에게 탄력을 주신 심사위원님들과 내 시의 소재가 되어 준 이웃들에게 감사합니다.



프로필 

제 1회 부천 여성백일장 장원

주소 : 부천시 원미구 심곡동 371-1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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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징어 / 이순례

마른 오징어와 푸른 동해 바다를 씹는다.
입안 가득히 바닷물과 목선과 속초 항구가 풍요롭다.
무료와 적막을 위해 마르고 긴 다리들을 준비한 오징어
집어등처럼 반짝이는 한 잔의 소주는
수평선 위에서 검푸른 고독의 냄새를 풍긴다.
쉰 목소리의 바람이 불고
속초항은 출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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