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맑음 / 이기호
모시등걸에 찬바람이 일면 수수알도 붉어갔다
텅 빈 들녘은 눈이 해맑고 빈 볏단들은 幕舍처럼 서 있었다
논두렁에선 우렁이들이 둥싯거렸다
상지냇가의 소금쟁이 긴 다리 밑으로 새털구름이 빠져나갈 때
오포소리에 고무신 뒤축이 자꾸 벗겨지고
점심광주리를 머리에 인 어머니와 물주전자 든 나의 그림자가
삽다리를 따라 빠르게 흘렀다
새참이 나간 부엌은 매캐한 연기에 휩싸였다
양재기에 굴 무나물을 볶던 아궁이는
잔뜩 쓸어 넣은 왕겨에 속이 더부룩해졌다
장죽에 불붙이려던 할아버지는 눈이 내어 그대로 돌아 나왔을 터였다
몽당수수비와 부지깽이는 모처럼 火像의 몸을 쉬고 있겠다
들녘에 어둠이 오고 홀연 귀뚜리의 노래 들리고
먼 하늘에서는 별들의 점등이 시작되었다
용수 안으로 밥알이 동동 뜨는 마을에서는 술처럼 시간이 익어
밤이 점점 까매지자 어머니는 우렁이와 양재기를
앞세우고 아버지별을 찾아 은하로 떠났다
문득 낯설어지는 풀벌레소리에 창가로 다가가는 마음
오래 묵은 가을밤이 가라앉고 있었다
내 별이 다 보였다
제16회 지용신인문학상에 이기호(62)씨의 '내일은 맑음'이 당선됐다. (수상작 인터넷 게재)이 씨의 수상작 '내일은 맑음'은 40여 년 전 떠난 고향 충남 광천의 모습이 담겨 있다. 정지용의 시처럼 아름다운 시어 사이로 이씨 고향의 모습이 그려지고 어린시절 시인 자신의 모습도 엿보인다.
"귀뚜라미 소리, 텅 빈 들녘, 매캐한 연기가 여전히 또렷하게 기억나요. 고등학교 때 서울로 이사 와 벌써 40여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고향은 고향이지요."
심사위원인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신경림 시인은 '농촌의 가을 저녁 풍치가 눈에 선하게 다가 온다. 비유나 재담도 은근해서 공감을 자아내고 끝내기 부분의 동화적 상상력도 정감 있어 단연 빛나는 작품이다'고 평가 했다.
이기호씨는 늦깎이 시인이다. 평소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글을 썼던 이씨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시어머니의 죽음이었다. 23년간의 시집살이, 눈물이 마르지 않던 시간이었지만 정작 시어머니의 빈자리는 더 힘이 들었다고 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마음에서 수많은 감정이 솟구쳤어요. 그렇게 밉던 시어머니였고 그렇게 힘든 시절이었는데 몹시도 그립습니다. 제가 시를 쓰고 지금 느끼는 이 행복은 모두 시어머니 덕이에요."
이씨는 제대로 공부를 해보자며 2004년 뒤늦게 숙명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지금은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 수업을 들으며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정지용 시인은 이 씨에게 가장 큰 영감을 주는 시인이다. 이미 대학교에서 '정지용 시 연구'에 대한 논문을 쓰기도 해 정지용 신인문학상 수상의 의미가 더 깊다고.
"제가 가장 존경하는 정지용 시인의 고장에서 그분의 이름으로 만든 상을 받게 돼 영광입니다. 아름다운 시어와 눈앞에 보일 듯 한 이미지가 돋보이는 정지용 선생의 시를 좋아하는데 그분의 뒤를 따라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자인 이기호(67) 시인이 최근 시집 <노년을 위하여>와 수필집 <아름다운 날들>을 발간했다.
5년 전 62세의 나이에 동아일보 지용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시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 이기호 출향인은 “삶이 고단할 때면 마음은 어느새 어린 시절 고향으로 닿곤 한다. 그 유년의 시간들과 그리움의 과정들을 그대로 시로 담았다”고 첫 시집 발간의 소회를 밝혔다.
차분한 관찰과 치밀한 어사 선택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번 시집에는 지용신인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긴 시 <오늘은 맑음>을 비롯해 <광천 독배 옹암포구에서>, <구 장터 냇가>, <고향 들녘에> 등 67편의 시가 담겼다. 특히 ‘가생이’, ‘지랑’, ‘산내끼’ 등 어린 시절 듣고 자란 충청도 사투리들이 고스란히 시가 돼 눈길을 끈다.
62세에 지용신인문학상 수상
이기호 시인은 광천 옹암리 출신으로 2회 천강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2회 중봉조헌문학상 시 부문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현재 숙대문인회 회원, 정형시학 회원, 그레이스 수필 문우회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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