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역 / 박재근
누구는 기차가 아침 여덟시에 떠난다는데,
우리가 탄 기차는 자정에 떠납니다.
부다페스트행 기차는 지금쯤 어디를
덜커덩덜커덩 달리고 있을까요.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는 기차는
지금 막 울란우데역을 통과합니다.
낭만이 연인의 적이라고 말하면
유머일까요, 아니면 실언일까요.
기차는 방랑자만을 태우는 고독한
궤도라는데 그걸 누가 말리겠어요.
집시, 세계 집시들이 별자리를 보며
이동하는 시각에 우리가 탄 기차는
청주역을 떠나 우주로 향합니다.
아, 보세요. 우주에는 신의 전설이
깃든 은하수가 푸르게 범람합니다.
우리는 두 마리 양이 되어 그까짓
태양은 누구에게 가지라고 함부로
줘 버리고 메에메에…… 울음인지,
대화인지, 함성인지, 환호인지 모를
소리를 내지르며 우주를 달립니다.
그 사이 지상에서는 함께 떠나지
못한 역마살이 등대로 명멸합니다.
기차가 우주를 가르는 동안 철새가
고단한 날개를 접고 잠을 청합니다.
그때 우리의 기차도 삶은 계란 같은
보름달을 돌아 금성으로 치닫습니다.
들뜬 마음이 고즈넉해지는 순간,
이제 우리는 일상의 흔적을 지웁니다.
참, 당신의 기차는 몇 시에 떠납니까.
당신의 가슴속에는 레일이 있습니까.
당신에게는 어깨를 기대고 싶은,
베텔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장 짐을 챙겨 떠나십시오.
기차는 매일 자정에 청주역을 떠납니다.
* 오리온자리 알파별로 ‘거인의 어깨’라는 뜻의 아랍어에서 유래.
[당선소감] “시는 강퍅한 삶 일으켜 세우는 정체성”
“요 근래 제 일상은 늘 긴장의 연속입니다. 보름째 밤을 새우면서 매우 지쳐 있었는데, 갑자기 당선 소식을 받아서 경황이 없습니다. 어제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 태양이 제 머릿속을 밀고 들어오더니 그것이 밤에도 지지 않아서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대학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하고 중국과 무역중계업을 하다 15년 전부터 삶의 무게를 오롯이 문학에 둔 박재근(50·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씨가 17회 지용신인문학상 당선자로 선정됐다.
그가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2008년. 1985년에 군 제대 후, 10년 동안 주류 관련업체 일을 하며 번 돈으로 건강식품 대리점을 시작했고 2000년부터 중국으로 진출했는데 계약서를 잘못 쓰는 바람에 그동안 번 돈을 거의 탕진했다. 이 일을 통해 인생의 허무를 맛보았고, 그 허무에 대한 반대급부로 하고 싶은 것을 찾던 중에 글과 만나게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문학에 매달렸다.
“시는 저의 정체성입니다. 시를 보면, 그 사람이 삶을 받아들이는 상태를 알 수 있습니다. 실제로 저는 어떤 상황과 직면해서 우울하거나 혹은 기쁜 감정이 생성되면 가슴이 우는데, 그때 마치 천둥이 치듯이 시가 쏟아집니다. 그래서 시는 강퍅한 삶을 일으켜 세우는 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가 그의 정체성이 되기까지 문학은 쉽게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것들과 연락을 끊고 좋은 시인들의 시 1만 편을 필사했다. 요즘 시인들이 낭만적이고 사교적으로 시를 만나는 것과는 사뭇 다르게 처절하게 시와 만나고 있는 그는 이번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할 때에도 우체국으로 가는 순간까지 시어를 고쳤다. 일반인과 시인의 의식이 대동소이하다면 굳이 시인이라고 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하는 그는 이제 살짝 고개를 내민 시와의 혹독한 만남을 평생 이어나갈 생각이다.
전북 김제가 고향이고 지금은 서울에 살고 있는 박씨의 수상작은 ‘청주역’이다. 시 ‘청주역’은 12세 때 늑막염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기억으로부터 출발한다.
“어머니 고향이 충청도 ‘공주’입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생물학적 버팀목의 부재는 굉장한 외로움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래서 충청도에 어머니를 상징하는 시 한 편 정도는 남겨야 되겠다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청주역’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의 꿈을 이뤘으니 남은 한 가지 드라마작가의 꿈을 좇아 갈 것이라는 박씨. 그는 상금 500만원을 드라마 비디오와 도서 구입비로 모두 사용할 계획이다.
“2년 전, ‘방송작가협회교육원’에서 드라마작가 초급·중급·고급과정을 마치고 현재는 연구반을 꾸려 작품 구상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시와 소설, 드라마는 장르가 달라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지만, 드라마 대사가 시의 응축과 유사해서 굉장한 도움이 됩니다. 향후 2~3년 동안 죽을힘으로 노력해서 시든 드라마든 객관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수준까지 올려놓고 싶습니다.”
[심사평] 만화적인 발상의 밝고 환상적인 시
‘청주역’·‘씨앗론’(박정근), ‘막차’·‘보았다’(박영석), ‘꼭 그런 날엔 눈이 오더라’·‘서울의 젊은이’(김수아)가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들이다. 실제로 이 시들은 어떤 것이 당선작으로 뽑혀도 좋을 만큼 가려내기가 어려웠다. ‘청주역’은 기차를 타고 청주역을 출발하여 우주를 달린다는 은하철도 구구구 같은 만화적인 발상도 없지 않지만, 밝고 환상적인 시다.
과도하게 우울하고 심각해서 오히려 시적 긴장과 진실감을 잃고 있는 점이 최근 우리시의 흠결이기도 해서, 아주 재미있게 읽힌다. 가락도 막히지 않고 속도감이 있고, 시어도 단아하면서도 세련되어 있다. “당신의 가슴 속에는 레일이 있습니까/ …베텔기우스 같은 사람이 있습니까” 같은 평범한 것 같으면서도 평범하지 않은 질문도 시에 생기를 더하고 있다. ‘씨앗론’은 말하자면 여성예찬의 시인데, 자칫하면 평범한 여성예찬의 산문으로 끝날 내용을 시로 끌어올린 솜씨도 보통이 아니다.
두 편 모두 설명이 없는 점도 시의 격을 높이고 있다. 박영석의 ‘막차’와 ‘보았다’는 이미지의 효과적인 배열로 시적 감동을 이끌어내는 점, 상당한 수준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배경이나 소도구의 활용으로 상징을 극대화하는 기법도 만만치가 않다. 우리 말의 묘미도 자못 터득하고 있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꼭 그런 날엔 눈이 오더라’, ‘서울의 젊은이’의 김수아의 시들은 요즘 유행하는 다른 시들과는 아주 달라 호감을 준다.
특히 “지나가는 사람들, 지나치는 사람들”이 “모두 나를 외면한 채 가는데/ 그 때 눈에 띄는 것은 하얀 눈” 같은 일상적인 삶의 한 단면을 포착한 표현은 실감이 난다. 맑고 깨끗하고 잡스럽지 않은 점도 이 분이 앞으로 얼마든지 좋은 시를 쓸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상의 작품들을 가지고 논의한 끝에 선자들은 ‘청주역’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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