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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 김우섭

나무가 서 있었지

찬비를 맞으며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나는
그 나무 아래서 우산을 쓴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소리죽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젖은 이파리들이
갑자기 환하게 생기가 돌고
수많은 귀를 열기 시작했지

나무는 귀가 천 개도 넘어
어떤 귀는 노래를 담아 홀로 듣기도 하고
어떤 귀는
비 내리는 소리를 따라 먼 곳까지
흘러가기도 했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질 않고
노래도
빗줄기도
나무의 귓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밤새 어두운 길만
소리 없이 반짝거렸지

이른 아침,
골목에는 떨어진 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나무는
남은 귀를 마저 열어놓은 채
온몸이 비에 젖어있었지
소한과 대한을 지나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얼어붙은 귀들이 더 이상은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무는 그렇게
침묵의 빛으로 서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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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반점

그대가
입에 물었던 사탕을 꺼내어 내게 줄 때
창가에 자라던 곰팡이들이
노란 꽃을 피우네

아프지도 않은데 겨울이 다 지났다

다다미방에 앉아 엽차를 마시다
불현듯 나누는 그리움
오호츠크 해에서는 둥그런 편서풍이 불어오고
가슴 속 목록마다
압정처럼 박히는 별빛들

네 생각만으로
계단이 젖고
계단이 뿌리인 집이 젖고
집보다 큰 물방울들이 씨앗을 꺼내 河口로
흘려보낼 때

밤새
마른 귓불이 간질거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눈
밑둥만 남은 보리밭 속에서
조잘대는 씨앗들
기억이나 하려는지
오호츠크 해에서 따뜻한 편서풍이 불어올 때

그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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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든 아픈 것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꽃밭을 이루고, 꿈을 꾸듯 아득해 하곤 했다
간혹 그 꽃들의 뿌리가
사내의 잠자리까지 찾아 들어와 힘들게
몇 개의 씨앗을 틔우기도 했다
아침마다 신문이 오고, 그것이
세상과 유일한 만남이었으므로
차가운 마루에 앉아서도, 부엌에서 무언가 끓는 소리를
낼 때도, 창 밖 화단이 바람에 수런거릴 때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어떤 결별의 후일담을 읽는 듯 했다
가끔,
집밖의 일이 궁금할 때면 기타를 꺼내
오래 전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불러낸 물소리들이 기타를 적시고
세간을 다 적시고, 어딘가 숨어있던
마른 머리카락들이 둥둥 떠올라 그리운 손길처럼
사내의 어깨에 내려앉곤 했다
잊히지 않을 날들이 첨벙첨벙
가을을 질러오다 뒤뜰 감나무에 붉게 걸리면
빛나는 깃을 가진 새들이 찾아와
너무 늦었다는 듯
위로의 말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의 집에는
모든 아픈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밤이면
산등성이까지 환하게 별이 떠올랐다
세상의 잃어버린 길과 무성한 소문들이
안개처럼 집 주위를 맴돌고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창밖의 불빛 따라
몇 개의 꽃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간혹
아픈 관절을 꺾듯 누군가 눈 밟는 소리가
담 너머까지 들려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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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의 청년문학가 '시인' 등단 화제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 권수진 시인 데뷔
2011년 08월 08일 (월) 15:08:20 배근영 inforcross@hanmail.net

   
▲ 시인으로 등단한 창원의 청년문학가 권수진씨.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가 출범 1년여 만에 2호 시인이 탄생해 ‘젊은 문학의 새로운 산실’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지리산 문학회와 계간문예지 '천년의 시작'이 공동 주관하는 ‘제6회 최치원 신인문학상’에 청년작가아카데미 1기 수강생인 권수진 씨(34· 2006년 경남대 철학 졸업)의 ‘붉은 모터사이클’ 외 4편의 시가 당선돼 시인으로 데뷔했다.

권 씨는 정진규(현대시학 주간) 시인,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김춘식(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의 심사로 “시적 구상력, 시적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과 탄력에 뛰어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최치원 신인문학상은 오는 27일 지리산 함양 상림에서 시상식에서 있으며, 권 씨에게는 계간 문예지 '천년의 시작'  신인상 당선 자격과 함께 200만원의 창작지원금이 지급된다.

권 씨는 “대학에서 철학을 배울 때도 그랬던 것처럼 시는 나에게 우물처럼 깊은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었는데 청년작가아카데미를 통해 시인의 꿈을 다시 이루게 돼 기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청년작가아카데미는 이재성 시인(25· 국문 4)이 올해 경남신문 신춘문예에 시 당선으로 이미 1호 시인을 배출한 바 있다. 또한 김재길 씨(21·국문 2)는 중앙일보 시조부문 신춘문예 격인 ‘중앙시조백일장’ 3월 수상자로 연말 본선에 진출해 있는 등 활발한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다.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의 젊은 문학인 배출과 관련해 이우걸 경남문학관 관장은 “청년작가아카데미 개강 이후 경남문단이 새로운 활기를 띠고 있다”며 “문청들의 힘찬 도전에서 경남대가 ‘문학이 강한’ 대학의 옛 명성을 되찾고 있어 주목하고 있다”고 밝혔다.

경남대 청년작가아카데미는 지난 해 5월 대학의 시와 소설 등 신인을 발굴하기 위해 창작 강좌를 개설해 현재 동문 시인인 정일근 교수와 소설가 전경린 교수가 학부 및 석·박사과정, 졸업생 등을 대상으로 창작 지도를 하고 있다. <배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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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모터사이클 / 권수진

-체 게바라를 위하여

 

 

낙조가 푸른 운판(雲版)을 피로 두들긴다

죽은 자의 이름처럼 꽃무릇이 피어난다

순간 나를 덮치는 검붉은 코피에 놀라

나는 내가 떠나온 별의 주소를 잃어버렸다

혁명의 끝은 갑자기 밀려오는 해무와도 같은 것

이방인의 패스포트에 추방낙인이 찍히고

방랑하는 꿈의 가방이 늙어갔다

만남에 이유가 있었다면 떠날 때는

흔적 없이 사라져야 한다

그러나 코뮤니즘 강의실 잎 시든 빈자리는

한치 앞도 더듬을 수 없는 깜깜한 통곡의 벽이었다

운명의 룰렛 방아쇠를 당기지 마라

끊임없이 몸을 뒤척이는 행성처럼

나는 최후의 시간을 위해 손가락뼈를

연필처럼 깎아야했다

흑백으로 남은 쓸쓸한 초상 뒤편으로

날개를 접는 냉전의 시대여

나무 화병에서 시들어버린 꽃은

두 번 다시 피어나지 않는다

작별은 예고 없이 보여주는 야윈 등짝과 같은 것

인연이 아닌 그 사람은 끝내

총구 속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었다

이십일 세기에도 혁명은 언제나 미완

분노가 서걱서걱 지나간 마른 사막으로

붉은 모터사이클 한 대 휙 지나간다.

 

 

 

 

철학적인 하루

 

nefing.com

 

 

 

[당선소감]

 

전화로 당선 소식을 받고, 한동안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남의 이야기로만 듣던 결과가 눈앞에 현실로 펼쳐지니 나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볼을 꼬집었다. 꿈은 아니었다. 기쁨도 잠시 갑자기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문득 앞으로는 시가 좋아서 글을 쓰던 시절과 무언가 달라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으로 시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하고 처음 강의실 문을 두드린 그때가 기억난다. 이후로 시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가던 지난 추억들이 주마간산(走馬看山)처럼 스쳐 지나간다. 어두운 동굴 속에서 이데아를 발견한 현자(賢者)와 같이 나는 시라는 또 다른 세상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철학을 배울 때도 그랬던 것처럼 시는 아직도 나에게 우물처럼 깊은 호기심의 대상이자 동시에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다.

 

오늘의 이 기쁨이 있기까지 주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신세를 지고 살아왔다. 시를 쓴다는 말에 묵묵히 나를 응원해주던 가족들과 청년작가아카데미를 사랑으로 이끌어 준 김정대 원장님께 먼저 당선 소식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시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가르쳐 준 정일근 교수님께도 감사드린다. 강의실이나 때로는 술자리에서 시에 관한 서로의 생각을 교류하고 진지하게 토론했던 청년작가아카데미 식구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다. 저에게 문학의 길을 활짝 열어주신 지리산문학회와 천년의시작 출판사 그리고 정진규, 이숭원, 김춘식 심사위원님들께 누가 되지 않는 시인이 되도록 항상 노력해야겠다.

 

 

 

 

시골시인-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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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최치원신인문학상의 올해 본심 진출자는 권수진의 <붉은 모터사이클> 4, 최주연의 <골목> 4, 신혜정의 사람 되기 프로젝트에 사용된 함수(函數) 계산 과정6, 이정행의 폐차의 이력4, 이정희의 백설공주와 일곱 친구들 세상에 세 들다5, 백지연의 얼룩고양이 표백법4편 등 총 여섯 명 33편이었다.

 

투고작의 수준은 모두 등단자의 수준에 필적하는 것으로 상당히 우수한 편이었다. 다만 작품의 수준이 고르지 못한 경우가 간혹 있었고 자신의 작품 세계가 지닌 특징이나 장점을 아직은 잘 파악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특히, 시적 자의식의 측면에서 시적 형식, 어법, 화법 등이 자신의 시적 개성과 어떤 상관성을 지니는가에 대한 고민을 좀 더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는 충고는 투고자 일반에게 모두 해당되는 사항이다.

 

이정희는 화법이 발랄하고 참신하기는 하나 아직 시적 사유의 깊이가 무르익거나 정리되지 않았다. 백지영의 경우도 발상은 참신하지만 시적 상상력의 자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어떤 시가 진정한 감동을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 좀 더 필요하다. 신혜정은 시적 개성의 문제가 단순한 차별화의 문제인가에 대해 생각을 다시 해 보면 좋을 듯하다. 기발한 생각이나 상상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반면 이정행은 안정적인 반면 시의 흡입력이나 참신함이 다소 적다는 느낌을 주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권수진과 최주연 두 사람을 놓고 심사위원 간에 논의를 진행한 결과, 권수진은 시적 탄력과 구성의 탄탄함 면에서, 최주연은 시적 포에지와 서정적 감성의 측면에서 그 가능성이 돋보인다는 평가가 이루어졌다. 두 사람 간에 우열을 가리기는 쉽지 않았지만 심사위원들은 최종적으로 권수진의 시적 구상력, 시적 서사를 이끌어가는 힘과 탄력에 더 많은 점수를 주었다. 최주연의 시적 포에지와 감수성, 언어 감각은 비록 당선자로 선정되지는 못했으나 당선자에 버금가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내고, 아깝게 탈락한 투고자는 좀 더 정진하여 차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 심사위원 정진규(시인, 현대시학 주간) 이숭원(문학평론가, 서울여대 교수) 김춘식(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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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회<창비>신인시인상 당선작 -여섯 윔홀을 위한 시간 외 4편 / 김재근

 

 

여섯 웜홀을 위한 시간

-시간이 벌레처럼 기어다닐 때 당신의 시계는 멈추고

 

 

문을 닫아도 다시 바깥, 찬바람 속 나는 손톱에 달을 키우는 목동,

방목한 별들의 울음을 듣다 잠이 들면 내 몸은 얼었다 녹았다 부서지는 중,

 

숲을 건너온 바람이 눈동자에 번진다. 주머니에서 죽은 새가 운다.

물구나무를 서면 시간이 얼 수도 있다는 생각, 허기가 진다

 

허기가 지면 휘파람 소리는 어둡다

 

아름다운 목수가 잘라 만든 천체; 비가 새는 걸 본다. 관음(觀音)하기,

반복되는 발작으로 말더듬이는 태어나고 개들은 비가와도 흘레를 붙어 즐거워한다.

 

그건 지구 저편 저녁의 일, 중력 때문이라고 그림자가 속삭인다.

그림자의 손을 잡고 내일은 비 오고 내 그림자는 없다.

 

발바닥이 두근댄다. 키가 자라지 않는 꽃은 어느 화병에서 죽어갈까,

바람이 몸 속에 머물다 떠나는 가벼운 여행 같은 느낌.

 

인디언들은 새해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의 손톱을 땅에 묻어준다.

내가 묻은 인형들은 모두모두 안녕한지, 부러진 왼팔을 흔들며 잘 가, 안녕.

 

가시에 찔린 붉은 혀를 쓰다듬고 깨어나기 싫다.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상한 꿈들, 명황성이나 목성 근처, 밤을 통과해 날아온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대가 보여준 지도에는 요일이 없다.

목요일과 화요일이 겹칠 때 그대의 자궁과 자궁을 연결하면 환한 별자리가 될까?

지금도 구름은 무섭고 밤의 냄새는 깜깜.

  

 

 

 

오늘은 중요한 날

 

 

오늘은 중요한 날, 비가 오지.

우산 속으로 아이들은 모여 참새처럼 재잘대지.

어른들은 그저 휘파람을 불거나 애인의 귀에 바람의 숨결을 흘려보내고

도서관에서 빌려온 <그녀의 방>에 그녀는 없지.

재빨리 벗어놓은 꽃무늬 팬티가 세탁기를 빙글빙글 돌며 노랑꽃을 피우지.

 

다시 말해 오늘은 중요한 날

어른들은 키가 더 커지고 목소리는 상냥히 빗물에 젖지.

 

젖은 머리카락을 기울이면 귓속에 고인 음표들이 천천히 흘러나와 죽은 애인을 찾아가지.

 

깜박이는 음표에 맞춰 말라붙은 눈알은 잠들지도 않고 꿈을 꾸지, 차분하게 잘려진 배꼽의 대화,

들은 듯 안 들은 듯 잠들기.

 

다시 말해 오늘은 중요한 날

비가 오고 빗방울만 바쁘게 떠다니지.

 

 

 

 

안드로메다 교실

-당신의 밤이 지루해지는 순간, 당신은 이 글 어딘가 홀로 버려진다

 

 

당신의 조화 같은 얼굴에 물을 뿌려주고 나면 화장대에서 밤의 냄새가 난다.

시간과 각도에 따라 달라지는 얼굴을 거울 안쪽에 매달고 집을 나섰다. 잘 있어,

밤의 그을음아! 피가 익으면 돌아오겠다.

 

창문에 별들이 달라붙어 있다. 유모차를 밀며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늙은 얼굴들.

 

시간이 거꾸로 흐른다. 태어나면서 이미 늙어버린 얼굴들이

틀니에 맞춰 노래하고 부러진 틀니는 어느새 불어난 당신의 젖을 물고 있다.

오늘밤은 침이 끓고 싱싱한 밤의 꽃들이 지하에서 피어난다.

 

더 빨리 꽃들이 피려면 피가 익어야 한다, 고 생각하는 시간은 하루,

당신은 지금 문장의 중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

 

지구에서 채집해온 두개골을 바람과 그늘에서 말리면 좋은 악기가 된다.

두드릴 때마다 생각들은 쏟아져 화음이 된다.

음악, 구멍 뚫린 눈알에서 새어나오는 바람의 음악은 달나라까지 퍼졌다가 쓸쓸히 되돌아온다.

죽은 자의 머리를 두들겨보면 악- 하고 별의 울음이 스친다. 두개골의 음악이다.

 

부러진 틀니가 웃는다.

 

이곳 바다는 물이 없다. 간혹 고래가 달려와서 사람을 물고 모래 속으로 사라진다.

불알을 만지듯 모래를 뒤적이는 당신의 손끝에 별의 꼬리가 만져진다.

지금 반짝이는 별은 모두 우주의 미아가 된 지 오래.

 

나는 안드로메다에서 추방당한 몸, 주말이면 편지가 온다. 어머니,

얘야, 밥은 먹었니? 죽을 보내마. 이곳에서는 비가 오는 날 목욕을 한단다.

사람들은 비가 내리면 모두 밖으로 흘러나오지.

 

너의 애벌레가 밤마다 나방이 되어 날아다닌다.

그건 박쥐에요, 어머니. 거꾸로 매달려 달을 갉아먹고 있잖아요.

달이 사라질지도 모르니 어서 날려 보내세요.

 

국수를 먹다 발견된 음모, 누가 여기까지 와서 빠졌을 까?

사라진 음모를 찾아 주인은 얼마나 헤매고 있을까.

밤새 남은 음모를 헤아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아줌마, 여기 주인 없는 음모 제발 찾아가세요.

 

주전자에 바퀴를 넣고 차를 끓여 마시면 바퀴에 실려 감기가 달아 난다.

무슨 맛일까? 계란을 삶는다.

뜨거운 물에 뒤척이다 껍질째 익어 버린 알.

어미에게 버려진 무정란의 울음이 양은 냄비에서 끓고

 

낙엽을 입고 잠을 잔다.

집을 나온 이래 나는 불면의 나무, 내 몸 구멍구멍 나방이 알을 슬었다.

쿨럭이는 알들의 기침소리에 비늘은 날고 깨어나야 하는데 나는 아직 잠들지도 않는다.

먹일수록 너는 나방이 되어가고

 

너의 눈 안에서 나는 길을 잃는다.

나는 잠들지도 않았는데 너의 흰 날개가 날아와 내 부러진 틀니와 입맞추고.

 

안드로메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물소리가 보인다.

바람이 우주에 풀어놓은 자장가 나의 연인 안드로메다.

밤새 빨간 담뱃불을 그으며 이제 안녕. 나의 어두운 사랑 안드로메다.

 

 

 

 

직선으로 때론 느린 곡선으로

 

 

죽을 거예요. 눈이 오잖아요. 당신의 눈알이 빙빙 휘어져 내려요.

당신은 곡선으로 달아나고 나는 직선으로 당신을 쫓아가요.

 

밤새 눈이 오고 입안에는 당신이 쌓여요.

휘휘 저으며 달려가던 팔다리가 몸속으로 사라져요.

어쩌죠. 눈사람이 되려나 봐요.

 

이러다가 정말 죽을 거예요.

당신이 물이면 나도 물이에요.

찬물이 참물 속으로 들어와 끓고 있어요.

그런데 당신은 왜 이리 차가운가요?

 

버려진 당신의 발자국을 외등 아래서 처음 보았어요.

당신을 찾는 입김이 흘러나와 밤의 그을음이 된 지 오래.

누군가의 그늘에 떨어진 눈알은 살아 움직여요.

 

직선으로 때론 느린 곡선으로, 군무를 추듯,

당신은 날 부르고 내일 목소리는 없어요. 눈이 오잖아요.

  

 

 

 

설전(舌戰)

-나와 당신의 혀는 동면하는 뱀처럼 감기우고

 

 

하필 ㅛㅛㅛ모양으로 끼어 이 지랄!

 

설익은 달에서 떨어져 나온 애인의 혀는 두 개다.

봉분 같은 너의 오물거리는 입술을 열고 입술에 빨대를 꽂아 쪽쪽 단물만 뽑는다.

미안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너에게 혀마저 빌려야겠다

 

눈 앞에 비수 같은 바람이 똬리를 틀고 나를 본다.

몸을 가질 수 없는 바람이야 누구를 붙잡고 늘어져도 상관없지만

국수 같은 머리카락이 방바닥에 떨어져 휘날리는 이즈음, 밤마다 피는 맑아진다.

옷이라도 널어야겠다. 탈수기를 돌다 나온 새끼 고양이 울음이 내 젖을 빤다.

 

불안한 마음이야 없지 않았지만 애당초 이게 아니었다.

말랑한 입술 뒤에 숨긴 뾰족한 송곳니가 너의 무기이듯

기웃거리며 탁발하며 살아온 나의 오랜 연애도 불온.

 

암거미처럼 허공에 매달려 천정과 어두운 바닥을 타고 다니는

아슬아슬한 나의 오랜 연애를 위해.

이제, 장미의 피라도 뽑아야겠다

 

 

시인 약력 *1967년생. 부경대 토목과 졸업.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메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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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 아이 / 주하림

 

 

무릎에 생긴 멍이 어느 날 눈동자가 되었습니다
저녁 식사 도중 엄마의 남자와 작은 목소리로 다툰 날이었고
결혼을 앞둔 남자가 폭염을 만들어낸 날이었습니다
어둠이 원치 않는 곳에서 서서히 눈 뜨는 동안
싸움을 말리던 아버지가 멜빵차림 어린애로 변했고
친구가 나의 미래를 헐뜯다 떠났죠 마을 뒤 작은 언덕을
끝없이 달리고서야 눈의 통증이 시작됐습니다
동네 안과에 찾아가 피가 뚝뚝 흐르는 무릎을 올려놓습니다
입이 세 개인 것보다 낫지 않나요 당신은 치료를 원합니까
눈이 영영 사라지길 비나요 아니면 눈과 무릎이 조화롭게
공생하길 바라나요 이제 막 꿈틀거리는 눈을 붕대로 칭칭 감고
간호사는 그 위에 입술을 그려넣습니다 세 개의 입을 달고,
나는 계절이 지날 때까지 비난 속에 살 것임을 예감했죠
눈이 처음 건넨 말은 불을 꺼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곧
돌멩이와 불길 속에서 살아남은 자신의 일대기를 꺼내놨죠
왜 나의 눈이 세상의 정물을 칭찬하며 우물쭈물 입을 엽니까
한몸이 되려고 울퉁불퉁 시간 위를 견디었다 말하지 못합니까

서로 같은 방향을 보기 위해 멍자국이 새카맣게 쏠린 것이라고

왜 그 결심은 나를 흔들며 무섭게 설득시키지 못합니까
바다 일몰을 보고싶다는 마지막 청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나는 입술 주변에 삐뚤빼뚤 다리를 그려주었죠
얘야, 이십년 넘게 떨어져 있던 한쪽 눈을 찾아가도 되겠니
내 가슴을 벌려달라는 말이었습니다
자궁을 헤치다 천천히 침몰하는 해파리떼, 퉁퉁 붓는 눈꺼풀들

 

 

 

 

데이지

 

 


  봉투를 뜯는다
  이것은
  체코에서 봉춤을 추는 스트리퍼
  네 언니의 이야기이다


2
  그때 휴일은 내게 떠날 차비를 주었지 몇개의 태양을 차례로 물어뜯고 한쪽 얼굴로 울던 날, 공원에서 매일 마주치던 조각상에 대한 우울한 소문, 신앙을 갖기 위해 육교를 걸었지만 죽어가던 나무들은 도시를 떠나길 간청했어 분수 위를 날던 참새들이 꼬르륵 가라앉던 밤


 국경은 위험하고 아름다운 곳이야 대기실 긴 차양 너머 구겨진 이력이 바람과 함께 불어오지 기차표를 잃어버리고 경찰들에게 쫓기다 몸을 던졌어 선로 끝 난 무엇으로 서있던 걸까 비가 그치고 곱슬머리 남자 손에 끌려갈 때 가방을 떨어뜨린 곳, 고향으로 새겼지

 
  늘 같은 지적을 받았어 넘버원 동료에게 머리채를 잡힌 일 함께 이층 침대를 쓴 적도 있는데, 방관을 알았다면 어젯밤에도 공연을 했을 거야 사랑에 빠진 적도 있지만 잇몸이 흠뻑 젖진 않았어 이 나라 사람들과 목소리가 비슷해지려 해 블라우스를 풀면 여전히 어둑어둑한 계단, 잠깐 올려둔 화분 모두 거인병에 걸렸어 꽃이 보고 싶다

 

  도로에 뛰어든 토끼 살점이 구두에 튀었어 괴기스러운 사건을 닦는 동안 진열대 인형들이 평온을 찾아가 나는 언제부터 양동이에 비누거품을 풀어 당신의 얼굴을 지우기 시작한 걸까 사라지지 않는 것들의 귀에 소리 지르고 싶다 하루치 목숨을 풀어놓고 밤을 기다려 그물망에 걸린 새들을 놓아주지 않을 거야 거인병을 고치기 위해 야간열차들이 무너진 계단을 가로질러가 철컹철컹 밤낮 걸어온 그림자가 변장에 능숙해질 때쯤

 

  카를다리 서쪽에서 누군가 날 찾고 있단 소식을 들었어 운 좋으면 노래하는 분수를 만날 것 같아 자물쇠가 툭 풀리면 해가 지지 않는 동쪽, 먼저 도착한 휘파람 소리가 나를 감을 거야

 

 


위험한 고백

 


  프랑스인지 이탈리아인지 그런 영화가 있었어요 지지직 지지직 들려줄게요 잠들지 말아요 먼 나라에 외로운 남자가 살고
있었죠 하루는 혼자 사는 집으로 콜걸을 불렀는데 콜걸이 다음날부터 페이도 받지 않고 매일 찾아오는 거에요 날마다 푸른 핏줄이 도드라진 가슴을 실컷 뛰어다닐 수 있다니 남자는 아주 기뻤어요 전 이쯤에서 핏빛 오줌을 누고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남자는 의심스러웠어요 개연성이 없는 서사의 결말이 대개 그렇잖아요 왜 돈을 받지 않는 걸까 왜 나 같은 새까를 만나는 거지 남자는 추궁했어요 여자 표정이 석고상처럼 딱딱해졌어요 당신밖에 없어요 아냐 너의 숨소리까지 거짓이야 진실을 말해 남자는 다그쳤어요 여자 피부가 붉어졌어요 색깔은 중요치 않아요 살아 숨쉬는 석고상에게 결국 남자는

 

  혼자 살던 방을 나와 여자 손을 끌고 여자네로 갔어요 상냥한 부모님과 동생들, 오리훈제는 부드러웠어요 그러나 남자는 여전히 믿지 못해요 여자의 친구들도 만나고 여자의 방에서 억지로 강요한 적도 있었지만 여자는 끝까지 질문에 완벽하게 대답해주지 않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여자가 사라졌어요 잠들지 말아요 자지 않기로 약속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의 여자들이 자꾸 사라지는 거잖아 남자는 미친듯이 여자를 찾아 다닙니다 여자의 집도 부모도 형제도 사라졌어요 커다란 코르셋밖에 기억나질 않아요 남자는 차를 끌고 오솔길을 달려요 사고가 나고 병원에서 절망에 관한 멋진 대사를 중얼거리죠 그게 생각이 안나요 누가 이 영화의 제목을 맞춘다면 당신과의 비밀도 털어놓겠어요 펄쩍 뛰지 말아요 결말 없이도 우린 가까워질 수 있잖아요 깨워줄게요 우리에게 아침이 오면, 누가 이 영화의 제목을 알려준다면

 

 

 

그림자극

 

 

펄럭이던 검은 새가 눈가에 앉습니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 소녀는 문신을 합니다
어깨를 두 바퀴 헤엄치는 잉어, 발목을 휘감는 장미넝쿨
소녀의 몸은 야행의 습성으로 꿈틀거린답니다
낮에 겪은 너그러운 고통들은 그림자로 피어나지요
추억은 달라요 오른쪽 발목에 그리다가 만 유령거미처럼 살죠
그녀는 이들을 낡은 철제침대에 가두고 그림자극을 합니다
저마다 달콤한 역활을 주었어요 매혹적인 연주가 시작되면
서로의 호흡이 무대에서 뒤엉쿼요 이야기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열아홉에 뗀, 스티커 용이 앙상한 허물을 걸치고 찾아왔어요
끊어진 꼬리를 채워주세요 너덜너덜 바람이 불지 않는데
뜰썩거리는 얇은 막 그와의 꼬리쯤에서 만나고 헤어졌죠
아직도 지점이라는 말은 소녀 귓가를 천둥처럼 울리고
우리 한번쯤 발자국을 바꿔 신어도 좋았을 텐데
날개 한쌍을 감춘 용이 크다란 화염을 토해요
잉어가 어깨에 고인 구름을 불러와 소품을 끄고
그 틈을 타서 반쪽짜리 유령거미가
장미의 가시를 뽑아 몸의 나머지를 완성하고 있어요
눈가에 앉았던 새가 숨겼던 발톱을 세우고 소녀의 몸속을 날아요
모든 역활이 거대한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동안
끝내 야생의 습성을 버리나요? 다음 막을 바늘 끝으로 새겨요
질긴 살갗 위에 쭈글쭈글 다시 태어나는 응룡* 한 마리

 

*중국 전설에 등장하는 황제의 신룡, 용이 천년을 견디면 날개를 얻어 응룡이 된다고 전해진다

 

 

하계훈련

 

  호루라기를 불어요 엄마는 익사 직전, 배영을 배워오랬어요 너는 또래와 달라 다르단 말 속에 피튀기는 전쟁터가 있는데, 홀수 번호인 짝궁이 출발했어요 짝수 번호인 그녀가 출발했고 나는 0이에요 고요하게 무릎을 모으고 호루라기를 불어요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아이가 후발주자로 달려와 내 숲속을 베며 사라져요 푸른 것은 푸른 것끼리만 어울려야지 다르다는 살갗 속에 검은 피 고이는 전쟁터가 있는데, 나는 주둥이가 좁은 물병에 들어가 스코어를 세요 마음속으로만 나비의 허물을 세요 괴물들도 버린 괴물들의 새끼들이 꼬물꼬물 태어나요 물병 속이 꽉 찼는데 세상을 무겁게 돌아다녀요 입술은 목숨을 걸고 수척해져가요 방금 구운 뜨거운 발자국을 해가 하나씩 집어먹어요 저기 봉긋 솟은 무덤을 수건처럼 덮고, 아는 얼굴들이 지나갈 때까지 나는 굳어가요 시간이 갉아먹은 한쪽 다리와 고무튜브를 던져버립니다 혓바닥도 그곳에 두고 왔어요 호루라기가 나를 자기 뱃속에 집어 넣어요 이 콩알만한 게 나는 출발도 안했는데 자꾸 흙먼지에서 구르고 있어요 엄마 대신 저조한 성적을 올릴 거에요 어디서 날아온 만국기가 목에서 흔들리는 금메달을 뒤덮습니다 하늘은 커다란 애드벌룬, 어깨에 생긴 곰보자국을 감춰줄 거에요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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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목 / 백상웅 

   광목으로 옷을 만들어 시집을 왔다는
 어머니의 말, 각목으로 알아듣고는
 나는 옹이가 빠져 구멍이 난 저고리를
 생각했다, 그땐 각목이 귀했을지도 몰라
 옆집 창고에서 빌려왔을지도 몰라
 각목을 절구에 찧어서 질긴 실을 뽑아냈을지도
 몰라, 생각하면서 나무 속을 기어다니는
 딱딱하고 팍팍한 누에 한 마리를 떠올렸다
 각목을 광목으로 바로 알게 된 후에도
 나는 누에가 각목 속에 터널을 뚫는다고
 믿었다, 다리 부러진 의자가 되면서도
 젖은 밭이랑에 박혀 서서히 삭아가면서도
 때리는 놈의 손아귀에 붙잡혀서도
 널따란 천을 짜고 싶어할 각목을 떠올렸다
 어머니 같으면서도 때론 아버지 같은
 각목에 녹슨 못을 박아 바지랑대를 만든다
 물레를 돌리다가 두꺼운 주름을 쿵쿵 접을
 누에, 각목을 길게 뻗어 빨랫줄을 치켜올렸다
 지금 각목은 광목처럼 펄럭이고 싶은 것일까
 말라서 주름진, 이제 쉽게 부러질 것 같은
 각목, 나는 각목으로 광목같이 펼쳐진
 눈 내린 들판을 후려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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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년 동안의 소풍 / 백상웅

   백년 전엔 없던 물렁한 언덕이었어
 나무들이 천막을 치니 꽃그늘이 통째로 빨래하러 가는 거야
 눈곱 떼던 복숭아 꽃망울도 저수지 쪽으로 기어가던 참이야

 벌떼가 꽃송아리를 하늘에 꽁꽁 꿰매어놓아도 꽃잎이 세상에 분홍주름을 자꾸 만드니까,
 흑염소떼가 뿔을 세우고 쇳소리 내며 몰려왔어

 백년 만에 봉봉세탁공장 천막이 세워졌어
 안과 밖이 헷갈리는 투명한 벽을 드나드는 염소떼,
 국적은 다르지만 얼굴이 닮은 그늘이야
 돗자리 위에 앉아 까맣게 수런대고 있어
 소풍 와서 수면을 다림질하고 있는 거야

 붓 같은 수염들의 웃음은 볕에 잘 익은 청동빚깔,
 삼겹살을 굽다가 서툰 젓가락질처럼 웃는 거야
 물에 뜬 능선을 따라 자맥질하는 물오리같이 입을 벌리데
 천막 아래선 복숭아나무와 여권 없는 어린 뿔이 알음알음 말을 놓는 거야
 쨍쨍한 놋쇠근육들도 나무들과 말을 트고 맨발이 되는 거야
 하늘의 얼룩을 불법으로 지우던 흑염소떼,
 주름진 하늘의 귀퉁이를 펼쳐 언덕에 널어놓았어

 펄럭이는 것은 때가 빠진 언덕이야
 살갗 부딪치는 소리가 저수지에 물결을 일으키데
 왜 거뭇거뭇한 사랑은 방울 흔들며 언덕을 넘지 못하지?
 나무껍질 같은 얼굴에 꽃잎이 내려앉아 흑염소떼의 나라는 백년 동안 찾을 길이 없어
 강철손이 보송보송 말라가는 하늘을 주무르고 있는 언덕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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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인을 보았습니다 / 백상웅

  방 한칸의 옆구리를 터서 또다른 방을 만든 집에 세를 들었습니다. 그해 겨울 저는 양철지붕을 밟고 다니는 수상한 거인이 집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도 발자국을 본 적 없지만, 그는 지붕에 엉덩이를 대고 한참 쉬었다 가면서 처마 끝 고드름을 뜯어가곤 하였으니까요. 해가 저물면 가로등마다 성냥불을 그어대던 놈도 거인이었습니다. 저는 소란스러운 불빛 때문에 귀가 불편해서 잠들지 못했습니다. 방은 외로운 기타 같았기에 저는 두칸의 방에서 하루씩 번갈아 묵었습니다. 방이 쓸쓸해지면 목소리가 금방 상할까 봐 걱정했던 까닭입니다. 멀리서 열차소리가 들리면 거인은 귀를 막고 휘파람을 불었습니다. 휘파람소리는 제 심장 속에 서늘한 골짜기를 팠습니다. 거인은 분명 엉덩이가 매우 무거운 놈일 거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이 동네의 담벼락은 하루가 다르게 허물어지고, 대들보가 뽑혀갔으며, 지붕이 움푹 내려앉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거인은 하릴없이 태양을 잡아당겨 어둠을 길어지게 하고, 태양에 얼음을 용접해서 눈발을 자주 마을로 불러들였습니다. 눈송이가 날리면 팽팽한 전깃줄을 튕기며 배고픈 새떼를 쫓아내기도 하였습니다. 거인은 구름을 뒤집어쓰고 어떤 날은 적막한 통장을 들여다보고는 창문에 성에를 가득 채워놓고 갔습니다. 아마도 하늘 가장자리에 묻어둔 쌀독이 텅 비어버린 날이었겠지요. 폭설이었습니다. 거인도 잠을 뒤척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얼어붙은 나뭇가지를 뚝뚝 부러뜨려 이를 쑤실 때, 이미 하늘은 텅 비고 먹구름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거인은 천장을 두드리고 처마를 움켜잡고 지붕을 열어보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두려워서 함박눈처럼 울었습니다. 지붕과 지붕을 잘못 겹쳐 올렸는지, 날이 풀리기도 전에 천장에서 거인의 녹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습니다. 검은 벌레들이 방구석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와 젖은 벽지를 뜯어먹었습니다. 거인은 곰팡이 핀 벽에다 제 그림자를 걸어두고 또 어디에서 저의 낡은 기타소리를 뜯어먹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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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화민박의 평상 / 백상웅

   네모난 짐승이 매화나무 그늘을 등에 업고 기어간다
 부러진 한쪽 다리를 벽돌로 괴고도 절뚝이지 않는다
 발바닥이 젖어 곰팡이가 피었는데 박박 긁지 않고
 마당에 네 개의 발자국을 천천히 찍고 있다
 나도 짐승의 널따란 등에 그늘보다 무겁게 엎드린다
 짐승은 매화나무 그늘을 담벼락 쪽으로 밀어낸다
 틀림없이 한곳에 뿌리내리는 법을 배우지 못해
 나처럼 숲속에서 도망쳐 매화민박에 묵었을 짐승,
 평상이 되는 줄도 모르고 납작 엎드려 단잠에 들었다
 등허리에 문신처럼 박힌 나이테가 성장을 멈춘 것은
 놀러온, 도망친, 연애하는, 슬픈, 엉덩이 때문은 아니다
 숲을 떠난 나무가 뿌리를 찾기 위해 남겨놓은 증거이다
 네모난 짐승이 햇볕을 향해 남몰래 발자국을 뗀다
 네모난 황소 같은 평상이, 평상이 될 것만 같은 나를
 단단히 엎고 숲속으로 돌아갈 것 같은 매화민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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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동나무 아파트 / 백상웅

   우리가 세든 이 아파트는 공교롭게도 계단이 없지만 옥상은 딱딱한 하늘과 이어져 있단다

 이 동네에 정착한 주민들이 처음 한 일은 베란다 가득 꽃밭을 가꾸는 일
 채송화가 자작자작 걸음을 뗐고 해바라기와 능소화가 한 줄기에서 피어났지
 넝쿨이 치렁치렁 아래층 창문을 가리기도 하는 우리의 아파트는 한때 몇 그루의 오동나무였거든

 우리가 건너 동에 걸린 얼굴만 넌지시 바라보는 건 서로를 보살필 수 있는 시간의 전부였기 때문
 느닷없이 등을 돌려 떠나버리는 이들이 없었기에 주민들의 눈두덩은 젖을 일이 없지
 나이테가 박혀 있는 단칸방에선 둥근 뼈가 항아리를 빚어 오동나무 숲에 걸어두었어
 항아리가 식은 달처럼 둥둥 떠서 동강난 세상을 밝히면 우리는 꽃잎을 갉아먹다가 들킨 벌레 같았단다

 오동나무 아파트가 층을 높여가자, 항아리의 배는 고치처럼 볼록하게 불러갔어
 주민들은 뚜껑을 섣불리 열어보려 하지 않았거든
 뼈가 익어가는 계절이 다가오면 아파트에 젖은 날개들이 기어다니고 꽃밭엔 더듬이가 앉아 있을 테니까
 누구나 화로 속에 누워 꿈을 꾸다가 뜨거운 항아리를 안고 아파트에 올라와야 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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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웅 / 1981년생. 2006년 대산대학문학상 시부문 수상. 현재 전주 우석대학교 문창과 재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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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각목」 외 4편을 응모한 백상웅의 시편들은 자연 서정의 세계를 독특하고도 빼어나게 그려낸다. 순수 우리말의 음색과 빛깔을 잘 살린 그의 서정시들은 인간 세계의 갈등과 상처를 식물적인 상상력으로 봉합하고 치유한다. 최첨단 디지털 시대에 이처럼 부드럽고 섬세하고 순연(純然)한 상상력이 여전히 자생하고 있다는 것은 놀랍다. 이 신예의 귀한 등장을 크게 반겨 축하한다.

심사위원 : 김수이(문학평론가), 문태준ㆍ박형준(이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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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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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꽃 / 고은강

1

점자처럼 두둘두둘, 지문으로 만져줄게요
서투른 척 해드릴까요
깨물어드릴까요
도시 냄새, 하얗게 질리겠어요
내일은 당신 아버지와 이 숨막히는 통사를 써볼까 해요
통사는 밤으로 흐르고 우리는 고독하니까
참을 수 없는 불면의 생 어딘가에서 멋지게 뒹굴어봐요
질척거리는 입술, 말라죽을 때까지

당신만 모르죠
우리가 함께 저지른 아름다운 불경죄,
난 선생님 곁에 누워 선생님의 아내를 가졌어요
우리가 낳은 불순한 아이를
당신은 목숨 바쳐 섬기게 될 거예요
그게 평등이랍니다

또,
침 뱉으시게요?

가슴을 까발릴까요
뒤통수에 달린 음부를 보여드릴게요
별로 가진 것도 없는데
침 뱉으시오, 라고
이름을 개명할까봐요
일수쟁이처럼 꼬박꼬박 잘도 처먹는 당신,
연민의 면죄부나 드리게요

확,
미끄러질까요?

절박했었다고 말할까봐요
덜렁덜렁 한쪽 어깨를 다 드러내놓고 더 열심히,
주둥이로 죄짓자고 꼬드길까봐요
내 애증을 지불해서
한 생의 치부를 조용히 덮어줄 수 있다면,
거리에서 제일 잘 팔리는 절망이 되어
여기저기 평등하게 열어줄까봐요
백성 없는 나라의 주인처럼
고독한 수염이나 무럭무럭 길러
그 밀림국의 첫 번째 거짓말로
열망보다 가볍게
사랑한다니까요, 자기


2

나는 밤의 서식자,
당신의 오만한 지붕 위에서
보들레르의 고양이처럼 갸릉갸릉, 울겠어요
당신이 애완동물처럼 기르고 있는 독설의 여인과 함께
티끌처럼 뒹굴겠어요
썩은 비늘을 털며
전염병처럼 이 남자 저 남자 옮아다니겠어요
아이를 낳을 거예요
탄탈로스의 사생아 같은 아이를 낳아 통째로 잡아먹고
또 아이를 낳아 또 잡아먹고,
당신의 비루한 주머니를 털어
내 모반의 냉장고 속 꽉꽉 채우면서,
더럽게 뚱뚱해지겠어요

내 허구의 눈시울이 자꾸 가려워요 파랗게,
꽃잎이 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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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캘리포니아

오늘 밤 당신은 자전거를 버린 아이, 아이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빠

첫사랑의 둥지가 머나먼 기억으로 실족되어 떨어진, 그 남자 그 여자의 뒷이야기가 자막처럼 흘러서 내리는 밤이니까요

불충분한 가난과 설익은 연애 때문에 난 어쩌면 시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몰라요 가끔은 헤프게 첫인상 흘리며 다 닳아빠진 절개로 활활 접속하고 싶은 사정도 있었지만 서정시보다 더 빨리 부패하는 건 없다고 내 안의 박테리아가 딱따구리처럼 쪼아대요 그러니 사랑이여,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이 '시적'인 거리감을 위해, 이혼해드릴까요

오늘 밤 나는, 차라리 혀를 꽉 깨물고 싶었던 첫키스의, 찢어진 청바지의, 노랑브리지의 호텔 캘리포니아

혹시라도 쓸쓸한 그대, 측은측은 어둠으로 젖어드는 이 거리의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뒷문 열면 보이는 당신의 구멍가게처럼 나는 있어요 한 남자의 생에 투숙해 살면서 세상에 도청당하는 여자들이 그물처럼 떠 다니는 황혼의 거리에서 365일 영화는 상영하지요 주홍글자는 불황이 없어요

그러니 그대, 호텔 캘리포니아로 오세요
오늘 밤 당신은 아빠를 버린 엄마, 엄마를 버린 아이, 아이를 버린 자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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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나는 지금 발칸반도 같은 너의 몸을 더듬고 있어
너무 추워 자꾸만 필터를 껴입고 무너져내리는 가슴으로 한풍은 날아들고 나는 장송곡처럼 나부낀다

시청률이 높은 채널을 향해서만 배고픈 부리를 쪼아대는 여기는 북위 37도, 정치면 사회면 고급주의 침 튀기며 하루해가 시끄럽다 하늘 위엔 냉소의 벽에 환조처럼 묶여서 이주민처럼 흘러다니는 구름들, 박제된 새처럼 자유롭고 바람은, 체지방처럼 무겁게 흘러내리는 삶의 이목구비를 지나 삐걱삐걱 이가 뒤틀린 생의 토대 위로 속보처럼 달아나버린다

논문처럼 잘 재단된 생의 어디쯤에서 전복된 나는, 파란불이 아니면 삶을 가로지를 수 없는 내 애증의 강 같은 너를 거룻배로 흘러서 간다 관계는 존재, 존재는 때로 슬픔, 그 슬픔을 딛고 찬란히 일어서는 협곡의 밤들 다 건너면 폐병환자처럼 검고 메마른 호흡의 절벽

나는 지금 입구가 없는 시간의 거리에 서 있어
발칸반도 같은 네 허리토막을 끌어안고 아주 두껍고 예민한 허기가 되어버린, 이 진화의 힘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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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시

가령 우리는
연애시보다 더 간절했지만
정말 꽃이 아름다운 건지
상투적으로 피고 지는 일에
너무 많은 감탄사를 허비해서
서른도 채 되기 전에 주머니가 털린
허무처럼,
뽀개면 줄줄 쏟아졌다
잡음뿐인 턴테이블 위에서
우물쭈물 한쪽 발을 빠뜨린 채
휑하니, 한 소절은 돌아가고 돌아오고
휘파람 부르며 즐겨찾기로
아무튼 사랑했지만
가령, 아무튼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씰크絲 화려한 내 이불 속의 남자들과
연극적으로 부둥켜안고
눈꺼풀에 푸른 성에를 덮은 채
토실토실 부어오른 낭만적 엉덩이를
한껏 흔들어대면서
오기처럼 시야를 벗겨먹던
구불구불 공복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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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문(屍口門)

이 세상과 딱 한번 연애를 하고 그녀는 죽었다 검색창 앞에서 끊임없이 고문당하고 영락없는 지도 속의 사물처럼, 빵빵 플래시 터지는 피사체 안에서 분명하게 사진 찍혀 현재가 죽고 유년이 죽고, 잉태 직전의 그 모든 것들은 얼굴이 벗겨진 채 태반을 떨구며 죽어나갔다. 허묘를 파헤치는 하이에나의 발톱에 수런수런 뜯겨나가는 살점, 살점의 유전자를 타고 그녀의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죽고 오천년의 뼈대가 가루가 되어 까맣게 재를 날린다 기억이 추상으로 날아가버릴 때까지 이건 리얼리즘이야!

랜을 타고 날아다니는 동물적 감각은 데시벨이 끝내주게 높다 자, 오늘은 누구를 화형시킬까 킁킁거리며 시구문을 달리는 초고속의 사회적 떼거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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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강 1971년 대전 출생. 상명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6년 창비신인상 당선.

심사 : 나희덕, 박형준, 김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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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 김성대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날마다 나비의 무늬를 읽으면서

서부음악을 듣습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채식을주로 하는 편이지요

우연히 상추에 붙은 나비 알을 먹고 나선

나도 모르게 뒤꿈치가 들려요

그럴 땐 빠리나서귀포가 생각납니다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어떤 날은 터널이 ㄱ속 이어지기도 하지요

터널 저쪽엔 비가 오기를 바라지만

터널 그리고 터널 뿐이지요

물잠자리의 날개와 독버섯의 얼룩이

눈앞에서 맴돌아요 그럴 땐

아주 먼 옛날 이야기를 듣고 싶어집니다

 

일주일에 한번씩은 책방에 갑니다

거기서 사랑의 묘약을 찾은 적이 있어요

부끄럽게도 마음이 설레었던 거지요

그렇지만 이성의 잠은 괴물을 낳는다는 걸 믿습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박귀들과 부릅뜬 부엉이들이

나의 행운을 뜯어먹으로 달려들 거예요

 

가끔 꿈속에서 운 날 아침은 눈이 맑습니다

그럴 땐 눈 위에다 예쁜나비를 새기고 싶어요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날개가 접혔다 펼쳐지겠지요

판화처럼 나는 삽니다

언제 한번 놀러 안 오시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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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골  / 송진권

 

  고종내미 갸가 큰딸 여우살이 시킬 때 엇송아지 쇠전에 넘기구
정자옥서 술국에 탁배기까정 한잔 걸치고 나올 때는 벌써 하늘
이 잔뜩 으덩그려졌더랴 바람도 없는디 싸래기 눈이 풀풀 날리
기 시작혔는디 구장터 지나면서부터는 날비지 커튼 함박눈이 눈
도 못 뜨게 퍼붓드라는구만

  금매 쇠물재 밑이까지 와서는 눈이 무픞꺼정 차고 술도 얼근히
오르고 날도 어두어져오는디 희한하게 몸이 뭉근히 달아오르는
디 기분이 참 묘하드라네 술도 얼근허겄다 노래 한자락 사래질
꺼정 해가며 갔다네 눈발은 점점 거치고 못뚝 얼음 갈라지는 소
리만 떠르르하니 똑 귀신 우는 거거치 들리드라는구만

  그래 갔다네 시상이 왼통 허연디 가도 가도 거기여 아무리 용을
쓰고 가두 똑 그 자리란 밝고 뺑뺑이를 도는겨 이러단 죽겄다 싶
어 기를 쓰며 가는디두 똑 그 자리란 말여 설상가상으로 또 눈
이 오는디 자꾸만 졸리드랴 한걸음 띠다 꾸벅 이러면 안된다 안
된다 하믄서두 졸았는디

  근디 말여 저수지 한가운디서 누가 자꾸 불러 보니께 웬 여자가
음석을 진수성찬으로 차려놓고 자꾸 불런단 말여 너비아니 육포
에 갖은 실과며 듣도 보지 못한 술냄새꺼정 그래 한걸음씩 들어
갔다네 눈은 퍼붓는다 거기만 눈이 안 오구 훤하드랴 시상에 그
런 여자가 옶겄다 싶이 이쁘게 생긴 여자가 사래질하며 불런께
허발대신 갔다네

  똑 꿈속거치 둥둥 뜬 거거치 싸목싸목 가는디 그 여자 있는 디
다 왔다 싶은디 뒤에서 벼락커튼 소리가 들리거든 종내마 이놈
아 거가 워디라고가냐 돌아본께 죽은 할아버지가 호랭이 커튼 눈
을 부릅뜨고 지팽이를 휘두르며 부르는겨 무춤하고 있응께 지팽
이루다가 등짝을 후려치며 냉큼 못나겄냐 뒤징 줄 모르구 워딜
가는 겨

  얼마나 잤으까 등짝을 뭐가 후려쳐 일어서 본께 당산나무에 쌓
인 눈을 못 이겨 가지가 부르지며 등짝을 친겨 등에 눈이 얼마
나 쌓였는지 시상이 훤한디 눈은 그치고 달이 떴는디 집이 가는
길이 화안하게 열렸거든 울컥 무서운 생각이 들어 똑 주먹 강생
이 거치 집으로 내달렸다는디 종내미 갸가 요새두 당산나무 저
티 가믄서는 절해가며 아이구 할아버지 헌다누만

 

 

 

무수 / 송진권

숱한 세월이 흘렀는디두 어제 일 겉다야
눈이 어둔 우리 고모 시래기 거튼 푸석한 손으로
막걸리 자신 입을 훔치며 무짠지 집어들고
찬찬히 그때를 짚어보시는디
하늘이 무수 대강이에 오른 파랑물 같은 봄날
해토한 움을 열고 우리 고모부 고종남씨 무수를 꺼냈겄다
삼동을 날 동안 무수 하나로 조석을 해댄
억척배기 우리 고모 박딸금씨도 그 저티서
광우리 무수를 담고 있었는디
얼렐레
내남적없이 하 배고픈 봄날에 박딸금씨
기중 못난 무수 하날 골라
쓱쓱 광목치마 말기에 닦아
한입 베물려는디
담배참으로 아지랑이나 쳐다보며 해찰하던
고모부 고종남씨가 여편네 고쟁이 새로 뵈는 무수 거튼
허연 다리통을 보고 만 거라
마음이 동한 고종남씨 싫다는 고모를 끌고
물 마른 봇도랑 새로 들어가
일을 벌이셨다는디
어따야
쉰밥 취급하던 여편넬 그리 장하게 밀고 들어온 적이 없었다는디
갓 날아온 제비년들이
전깃줄에 나리비로 앉아서들
난 다 봤는디
다 봤는디 머
하 입싸게 놀려대고
입 무거운 굴왕신마저도 움 속에서
우멍한 눈을 거멓게 뜨고는 신들신들 웃었다는디
낯 붉어진 박딸금씨
주섬주섬 광우리 무수를 이고
지아비 앞세우고 동네 입새 들어섰는디
삼동네 꽃다지 번지드끼
매초롬한 제비년들 입방아를 찧고 다녀
몇날을 얼굴을 못 들고 댕겼다는디
그 고모부 동란 때 잃고
삼남매 혼자 키워낸
아직 정정한 우리 고모 박딸금씨
아흔에서 둘이 빠지는 미수(米壽)
무수만 보믄 얼굴이 붉어진다고
갓 시물 난 시악시 겉다고
막걸리 대접 부시며
아직도 보얀 다리통 드러내며
희벌쭉 웃으시는 우리 고모 박딸금씨
시상 최고로 맛난 건
겨울 지난 무수 낫으로 썩썩 삐져 먹는 거라고
체머리 흔들며 말씀하시지요
아덜 앞에서 못하는 소리가 없다고
며느리한테 퉁박을 맞으면
애고 무시라
애고 무시라 하시믄서두요






당선작: 송진권 「절골」 외 4편

당선자 약력: 송진권(宋鎭權)
1970년 충북 옥천 출생. 방송대 국문과 졸업. 대전지역 관리역 대전조차장역 근무.

심사위원: 이시영 최정례 박형준 (시인)

본심 진출작: 총 583명의 응모자 중 아래 24명의 작품이 본심에 진출함.

고원효(파주) 「헌책방」 외
권오영(수원) 「그린 공원에 앉아 있는 노인들」 외
김성환(필리핀) 「등꽃을 보듯」 외
김영한(천안) 「판」 외
김윤희(서울) 「화장하는 남자」 외
박민규(인천) 「프루스트 형사와 함께 이 밤을」 외
성향숙(수원) 「노인과 시계」 외
송진권(대전) 「절골」 외
신재호(순천) 「시골場」 외
여은하(서울) 「인도 시편 5」 외
유재혁(서울) 「콜라캔」 외
윤진화(서울) 「일식」 외
이 반(남양주) 「금촌에서의 기억」 외
이세경(천안) 「무덤이 보이는 길」 외
이해존(서울) 「고시원」 외
이호준(서울) 「象徵들」 외
임영옥(춘천) 「수유(授乳)」 외
임재정(남양주) 「즐거운 수리공」 외
장희정(서울) 「옷걸이에 걸린」 외
전 현(시흥) 「은사시나무는 은사시나무의 길을 간다」 외
정재원(대구) 「울 할배 후치-질할 때」 외
주영중(서울) 「고요한 적의」 외
주향호(서울) 「낙수(落穗)」 외
황경민(서울) 「인석이형네 아침풍경」 외


창비신인시인상 심사평

공동당선작을 낼 뻔할 정도로 좋은 시들이 많았다. 영혼의 꽃바구니에서 꺼낸 삶의 마술은 갈수록 우리 시의 침체가 심화되는 현실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는 신인들의 패기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특히 그들이 바라보는 세계는 여러 층으로 나누어져 있어서, 콜라캔으로 대변되는 도시 삶의 비애에서부터 청춘의 열정을 소진하던 80년대의 도시 외곽 풍경을 지나 농촌공동체의 한 끄트머리에 매달린 설화적 공간에 이르기까지 빼곡한 지층으로 이뤄져 있었다. 문제는 이러한 다채로운 지층에서 내밀한 시적 생명성을 바탕으로 사회와 자연 등의 사물과 다리를 놓는 새로운 상상력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번 창비신인시인상 심사는 세 명의 심사위원이 예심과정에서부터 참여하여 세심한 분석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시적 개성을 소중하게 키워나가는 좋은 신인을 여럿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막상 본심 뚜껑을 열어보니 단 한명의 신인을 골라내는 일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시는 시인의 시선과 감정이 잘 녹아 있을 때 설득력을 발휘하는데, 이 양자가 행복한 결합을 이룬 시로 세 심사위원이 선뜻 동의한 신인이 쉽게 결정되지 않았다. 시인의 시선이 뛰어나면 감정의 무게가 부족했고, 이와 반대로 풍부한 감정이 잘 살아 있으면 새로운 시선이 부족했다. 시란 인간의 눈으로 보고 인간의 감정으로 느끼고 인간의 머리로 생각해서 표현하는 장르이기 때문에 작품을 쓴 사람의 사상과 시인의 눈 속에 들어온 형상의 결합이 시를 만드는 가장 큰 요소이다.

본심에서 논의된 신인은 모두 4명이었다. 이 중에서 김윤희의 시는 한국어의 순도높은 서정을 보여주는 안정성이 단연 돋보였으나 돌출된 언어구조가 빚어내는 매력이 부족했다. 또 자신만의 시적 스타일로 언술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권오영의 시는 매력적 시세계에 비해 투고된 시작품이 균질하지 않았다. 특히 권오영의 시를 읽으면서 안타까운 것 중 하나는 공모제에서는 많은 시를 투고하는 것보다 자신의 시라고 해도 정해진 편수에서 시적 개성과 완성도를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스스로 가려뽑을 줄 아는 감식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당선자로 집중 논의된 신인은 송진권과 임재정이었다. 세 심사위원은 침묵과 설득이 번갈아 오가는 과정에서 두 신인을 공동당선자로 결정하자는 의견이 모아지는 듯했다. 그러나 한 심사위원이 끝내 임재정의 시가 당선작으로 하기에는 시적 높이가 그렇게 우수하지 않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냈고, 자연스럽게 당선작은 송진권의 시로 결정되었다.

임재정의 「즐거운 수리공」외 4편은 젊은 세대의 감수성을 랩의 언어의 발랄하게 표현한 새로운 감수성이 인상적이었다. 가령 무거운 소재를 가벼운 어조로 치환하는 독특한 어법은 무덤 파는 포크레인을 ‘정원사’로 노래하는 「내 친구는 정원사」라는 시편에서 빛을 발한다. 포크레인에게서 “황토밭 위를 내닫는 소나기”를 발견하거나 “장지(葬地) 한쪽에 쉴 때면 합장하는 품새가 대찰 큰스님”이라는, 그러니까 가벼움과 무거움이 교차하는 시선의 발굴은 새로운 어조에 의해 흥겨움마저 선사해준다. 하지만 투고된 다른 시편들은 시적 대상을 표현하는 데서 개연성과 시적 깊이가 부족하고 재치에 흐른 단점이 있다.
송진권의 시는 본심에 회부된 통과작 중에서 세 심사위원이 각자 마음에 둔 시에 모두 포함될 만큼 생생한 설화적 풍경이 압권이었다. 그는 시를 만들지 않고 스스로 즐기면서 신명나게 분출한다. 구성지면서 입에 착착 달라붙는 말랑말랑한 언어의 묘미로 빼어나게 살린 충청도 사투리, 거기에 걸맞은 어휘 선택, 가난과 설화의 현실마저 경쾌하게 그려낸 우리 전통의 익살스러운 가락이 일품이다. 그러나「절골」「무수」두 작품이 이러한 높은 시적 성과를 거둔 반면 나머지 투고작은 상대적으로 우려의 심사를 던져준다. 과다하게 사투리로 상황을 설명하면서 지나치게 과거 편향적인 측면은 앞으로 이 신인이 현대 도시의 일상을 그릴 때 얼마큼 고뇌의 흔적을 보여줄지 조금 걱정스럽게 한다. 앞으로 이 신인이 신명의 언어로 시선의 다양성과 감정의 균형을 이룬, 뛰어난 시인으로 거듭나 우리의 이러한 우려를 불식시켜줄 것을 기대한다.
[심사위원: 이시영 최정례 박형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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