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김우섭
나무가 서 있었지
찬비를 맞으며 나무 한 그루 서 있고
나는
그 나무 아래서 우산을 쓴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며
소리죽여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젖은 이파리들이
갑자기 환하게 생기가 돌고
수많은 귀를 열기 시작했지
나무는 귀가 천 개도 넘어
어떤 귀는 노래를 담아 홀로 듣기도 하고
어떤 귀는
비 내리는 소리를 따라 먼 곳까지
흘러가기도 했지
기다리는 사람은 오질 않고
노래도
빗줄기도
나무의 귓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밤새 어두운 길만
소리 없이 반짝거렸지
이른 아침,
골목에는 떨어진 귀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고
나무는
남은 귀를 마저 열어놓은 채
온몸이 비에 젖어있었지
소한과 대한을 지나고
겨울이 끝날 때까지
얼어붙은 귀들이 더 이상은 흔들리지 않을 때까지
나무는 그렇게
침묵의 빛으로 서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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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현반점
그대가
입에 물었던 사탕을 꺼내어 내게 줄 때
창가에 자라던 곰팡이들이
노란 꽃을 피우네
아프지도 않은데 겨울이 다 지났다
다다미방에 앉아 엽차를 마시다
불현듯 나누는 그리움
오호츠크 해에서는 둥그런 편서풍이 불어오고
가슴 속 목록마다
압정처럼 박히는 별빛들
네 생각만으로
계단이 젖고
계단이 뿌리인 집이 젖고
집보다 큰 물방울들이 씨앗을 꺼내 河口로
흘려보낼 때
밤새
마른 귓불이 간질거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눈
밑둥만 남은 보리밭 속에서
조잘대는 씨앗들
기억이나 하려는지
오호츠크 해에서 따뜻한 편서풍이 불어올 때
그때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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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는
집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모든 아픈 것들이 집안으로 들어와
꽃밭을 이루고, 꿈을 꾸듯 아득해 하곤 했다
간혹 그 꽃들의 뿌리가
사내의 잠자리까지 찾아 들어와 힘들게
몇 개의 씨앗을 틔우기도 했다
아침마다 신문이 오고, 그것이
세상과 유일한 만남이었으므로
차가운 마루에 앉아서도, 부엌에서 무언가 끓는 소리를
낼 때도, 창 밖 화단이 바람에 수런거릴 때도
손에서 떼지 못하고
어떤 결별의 후일담을 읽는 듯 했다
가끔,
집밖의 일이 궁금할 때면 기타를 꺼내
오래 전 노래를 불렀다
노래가 불러낸 물소리들이 기타를 적시고
세간을 다 적시고, 어딘가 숨어있던
마른 머리카락들이 둥둥 떠올라 그리운 손길처럼
사내의 어깨에 내려앉곤 했다
잊히지 않을 날들이 첨벙첨벙
가을을 질러오다 뒤뜰 감나무에 붉게 걸리면
빛나는 깃을 가진 새들이 찾아와
너무 늦었다는 듯
위로의 말을 전해줄 것만 같았다
가을이 다 가도록 사내의 집에는
모든 아픈 것들이 뿌리를 내리고, 밤이면
산등성이까지 환하게 별이 떠올랐다
세상의 잃어버린 길과 무성한 소문들이
안개처럼 집 주위를 맴돌고
가느다랗게 새어나오는 창밖의 불빛 따라
몇 개의 꽃들이 날아오르는 것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간혹
아픈 관절을 꺾듯 누군가 눈 밟는 소리가
담 너머까지 들려오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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