諺簡文 / 안채영
죽음의 꼬리처럼 지하의 시간은 길고 길었습니다.
열두 매듭으로 정한 거처는 다 삭아서, 한 번쯤은 돌아누울까도 생각했습니다
이 몸은 뱃속의 아이를 무덤으로 정한 바 있고
아이는 어미의 마지막 안간힘을 먹고서야 조용해졌습니다.
둘 중 누가 무덤이란 말입니까
세상, 돌아누워보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땅은 등이 되기도 하고 천장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달래지 않으니 아이도 울지 않았습니다. 꽃가루로 참 오랜 세월 요기를 대신했고 얼레빗 한 자루로 여염의 자세를 잃지 않으려 했습니다. 누운 마음이라도 일으켜 뱃속의 태아를 뛰어놀게도 하고 싶은 날들, 다만 가물, 기억이라면 기억일 별빛이 그리웠습니다. 이곳엔 그 흔한 窓이나 무너진 천장도 없으니 안락하기로는 별 탈이 없겠습니다만 어느 윤달조차도 놀러오지 않습니다.
그동안 나는 몇 겹의 무덤이었습니다
태중에 닮은 人形을 넣는 서양 小品이 있다지요
서로 무덤이 되어 다행인 세월입니다
병인윤시월 함께 넣어진 슬픔엔 공기도 소진하였고 검은 머리엔 흰 세월이 간간히 섞여 있습니다. 같이 넣은 언문의 글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없답니다.
살던 곳, 낯익어야 할 테지만 모두 캄캄한 초면일 뿐 낯익은 一家가 모여 있는 친정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습니다.
襲衣에 적힌 날짜도 희미한데
아아, 어느 무덤으로 돌아가야 합니까.
태중의 아이와 이 몸, 어느 쪽이 무덤이란 말입니까.
*파평윤씨 모자미라: 병인윤시월 난산으로 아이와 함께 사망. 언문으로 쓰여진 편지가 나왔으나 훼손으로 판독불가.
穀雨 무렵
고로쇠수액봉투에 지난밤이 고여 불룩하다
야생차밭에 참새들이 앉았다 날아간 뒤 낮은 허공엔 새들의 푸른 혀가 가득하다
떫지 않은 고백이 있을까
씨앗에 비가 내린다는 절기, 움트는 것들이 어디 먼 곳의 기억뿐이겠는가
뜨거웠다 식혔다를 반복해 덖어도
자꾸만 바깥으로 튕겨 나오던 돌돌 말려진 혓바닥
제대로 한 번 우려내 보지 못한 관계들은 다 푸르스름하여
달아오른 헛것의 그늘에도 들지 못한다.
곡우 무렵 새들이 떠난 자리마다
새의 혀들이 와글와글 끓고 있다
지나간 절기에 뱉었던 말들이 촘촘 돋아나 있는 차밭
黃經에도 들지 못한 절기가 있다
마른 잎으로 견디는 시간쯤이야
더운물 한 그릇 만나 펴진다지만
잎의 뒷면에 들었던 遠行엔 쫑긋 세운 귀가 없다
나무들의 수혈이 끝나는 곳
푸르스름한 소실점들이 길고 멀다
혀를 갖지 못한 말들이 땅속에서 우려지고 있는 시간
천천히 비워지고 있는 겨울 산에
물 끓는 소리가 졸졸 난다
늦은 발자국소리 같은 잎이 톡톡 피는 야생 차밭, 그늘진 적요에 문하나 틔워 놓으라는 시린 당부.
도마뱀
퇴화된 뒷다리가 앞 다리를 따라가고 있다
가만히 보니 앞다리에는 돌기처럼 바퀴가 달려 있다
새로운 진화다.
차양 안으로 오일장의 정오가 그늘로 진열되고 있다
모두 꼭지를 뚝, 하고 떠난 것들
제 살던 곳에서 떨어진 것들만이 진열돼 있다
잘려진 뒷다리가 성한 앞다리를 먹여 살리는 일
누군가 돌을 던지듯 쨍그랑 소리와
작은 그늘 같은 푸른 지폐 몇 장이 바구니 안에 들어있다
그 누구도 저 고무 주부 안의 끊겨진 꼬리를 확인한 이는 없다.
뜨거운 순대를 지나고 취객의 기울어진 트림을 지나고 옥수수찜통을 지나고
버려진 말들만 바닥에 뒹굴고 있다
앞가슴에 비늘이 있다는 듯
고무판에는 긁힌 비늘무늬가 가득하다
길의 입구를 당겨 천천히 기어가는 도마뱀
사람들 많아 빨리 도망가지도 못한다.
냉혈동물인 도마뱀
땀이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면
이곳에 완전히 적응한 것 같다.
쨍그랑 소리가 짧은 끈처럼 끊어지고 있다
찬송가를 참 잘 부르는 어느 신이 도마뱀의 모습으로 기어가고 있다
파장의 오일장은 다시 오일 후면 돋아 날 것이고
잘려진 꼬리는 도마뱀을 오래 먹여 살릴 것이다
툰드라 산 19번지
툰드라의 나무들 사이에서 태어난 뿔각사슴은
뿌리를 머리에 이고 다닌다지요
가지보다는 아직 뿌리에 가까워서
바람이라도 불라치면 딱딱 소리를 내면서 뿔들이 흔들리고
그 어느 방향도 믿지 못하는 습성의 나무들은
양쪽의 세상을 동시에 더듬는 지도들 몰래 만들고 있는,
아주 어린 바람들은 나뭇가지 맨 끝에서 사는데 가끔 먼 곳까지 뻗어갔다 돌아온 자리는 작은 새순이 그 자릴 차지하곤 한다지요
몇 개의 갈래가 생기고
저가 키운 무게를 저 머리위에 얹고 다니는 머리채 같은 산 19번지
뿌리를 숨기고 유영하는 툰드라의 나무는
짧은 손의 풀들이 땅을 움켜잡고 있지요
몇몇의 선교사들이 지도를 따라 다녀가고
길은 악착같이 갈래를 만들어 어지러운 고원에 집들을 돋아나게 했고
일 년에 네 번의 각기 다른 계절의 공터를 만들어
푸성귀를 키우지요
그 풀을 뜯어 먹고 있는 머리가 무거운 짐승들은
늘 불안해서 무거운 머리 위 지도를 벗어버리고 싶지요
이곳의 주소는 산인데
나무 한 그루 없고
이제 지구상에서 철거될 곳은 이 툰드라 밖에 없다는 소문만 앞 다투지요
아무리 갈래를 만들어도
제 머리를 벋어나지 못하는 뿔
뾰족한 끝을 가졌다 해도 그 끝은 늘 끊어져 있어
허공에서 막힌 길들이 제 몸으로 천천히 귀가하는 툰드라 산 19번지 비탈길
상상처럼 불들이 켜지는.
실뜨기
그려놓은 물뱀의 꼬리는 방금 숲에 가려졌다
달은 골목을 지날 때면 으레 회벽을 따라 걷는다
아이 둘이 같은 자세로 오래 놀고 있고
뱀이 숨은 검은 숲이 일렁거린다.
이 회벽에게도 오늘 밤엔 뿌리가 조금 길어졌을 것이다
실뜨기를 하던 아이들이 돌아간 낮에는
납작한 보름달이 숨어 있었다
저 滿月은 언제부터 실뜨기놀이를 배웠을까
기우뚱 기운 바깥이 활활 타오를 때까지
혼자서 걷는 검은 지구의 외출
바람은 실태를 잡고
滿月의 뿌리는 벽을 타고 자란다.
흰 달에 검은 실금이 생겼다
오늘 밤, 은하계좌에 신생의 별을 저축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누에고치 속 같은 봄 나무들
천천히 매듭을 끌러 바람을 펼쳐놓고 있다
직립보행의 자막들이 머릿속을 빠르게 지나가고
엉켜 있던 지난 가을 앙상한 가지들의 모양이 생각나지 않는다.
벽을 비워놓았다고 답장을 보냈다
물뱀의 혀가 몇 갈래로 휘어지며 사라진다
툭, 바람의 계보가 끊어지고
모두 숨어버린 벽에 아이들이 물뱀의 실태를 잡고 있다
민들레씨앗이 안보이게 터지고 있다
木足
나무의 관절에서 파릇파릇 바람이 튀어 나온다
어느 날 불쑥, 사내의 걸음에 소리가 생겼다. 木이 자란 한 쪽의 걸음은 나뭇가지들이 내는 바람소리 같았다. 멀리까지 같다 돌아오는 나무의 소리 들은 술에 취해 있기도 했다.
관절의 입구까지 올라 온 소리들이
후드득 떨어지고 있었다.
오래전 관절염으로 가지하나를 자른 뭉툭한 지점에 새 가지가 자랐다. 걸음을 데리고 다닌다는 사내의 농담이 지금도 기억난다. 사내의 걸음에는 늘 잎 스치는 소리가 났었다.
구름이 幻痛처럼 밟히기도 하고
벌레가 스멀스멀 숨어 살기도 했다
어쩌면 몸은 너무 무거운 한 그루 나무였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木足을 벗어 나무에 기대어 놓고 쉬는 동안 푸른 새 잎이 돋아나는 것을 본 것도 같다. 내가 아는 유일한 걸어 다니는 나무였던 木足. 계절이 없었던 나무는 마지막까지 혼자였다. 한 며칠 물에 담가놓으면 새 싹이 돋아날 것 같았던 다리 한 짝이 오랫동안 다락에서 바짝 마르고 있었다.
몸이 떠나자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그 후 어느 閏月 閏日에
흰 연기가 되었다.
궁륭
오래된 느티나무 그늘에는 깊은 궁륭이 있다
잎들의 걸음이 스스스 빨라지면
소리들은 떠나고 빈 몸만 허공에 오래 걸쳐진다.
그늘에 앉아 쉬는 이들을 잡고 가끔 놓아주지 않는 궁륭
이 그늘의 이불을 덮은 사람은
오래 잠자는 나뭇가지가 된다
원래 이 궁륭은 딱따구리가 건축해 놓은 것
지난여름에는 원앙이 금실을 깔아놓고 갔다
한낮에도 갈 곳이 없는 둥그런 어둠이 밤까지 웅크리고 있기도 했다
늘 안쪽으로만 불러오는 공터의 배
이맘때쯤이면 그늘도 텅텅 비어서
검은 뼈대들이 잘그락, 마른 소리로 살을 보태고 있을 뿐이다
그늘에도 문이 있어 열고 닫는 계절이 가면
활짝 열려진 노인들이 수다의 입구를 닫고
제 그늘을 걷어 사라진다
이때 쯤엔 마을도 조용해서 문을 닫고 房의 그늘에서나 누워 있을 것이다
아직 마을엔 여럿의 궁륭들이
느릿느릿한 길들을 잊어버리고 있다
느티나무 몸 안의 깊숙한 외부
깊숙한 외부여서 문도 없다
문 없는 곳들은 대게 추위가 웅크리고 있다
움푹 들어간 혹이 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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