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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사막 / 도복희


  여자의 몸에 더듬이가 자라기 시작했다 밤이 익어갈수록 손톱을 물어뜯는 횟수가 빨라졌다 그가 벗어놓고 간 와이셔츠와 빠진 몇 가닥 머리카락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언젠가부터 낯선 냄새가 여자의 몸에 붉은 발진을 일으켰고 시간이 지나면서 냄새의 농도는 차츰 진해지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그 남자만 바라보고 왔기에 손동작 하나하나 읽히지 않는 것이 없는 여자에게 냄새의 징후는 불길했다 그것은 편서풍이 불 때 느껴지는 묘한 기분으로 가만있어도 멀미를 일으켰다 여자의 밤이 길어지고 발진의 부작용으로 온몸을 벅벅 긁어댈수록 길게 뻗어가는 더듬이는, 닫힌 현관문을 빠져나가 그가 품고 있는 흔적을 찾아다녔다 몸 한쪽에서 길어진 더듬이가 낯익은 냄새를 찾아 나선 동안 그녀의 발이 검은 집을 기웃거렸다 키우던 난화분들이 배배 말라가며 뱉어내는 신음이 베란다 가득 쌓여가는 집, 생장점을 저당 잡힌 여자가 더듬이로 버티는 집에서 밤마다 목쉰 소리가 웅얼웅얼 창틀을 새나갔다 악어가죽 소파에 앉아 있는 등에 악어 한 마리 아가리를 쩌억 벌리고 있다 끝도 없이 중얼거리는 입 바삭하게 말라가는 말들이 악어의 목구멍 속으로 연신 뛰어 들어가는 저녁, 그녀의 사막에는 돌개바람 뿌리가 쭉쭉 뻗어가고 있었다




지느러미의 본능


폭우 끌어당긴 가문비나무 한 그루

날비린내를 풍긴다

일시에 펄럭거리는 바람의 결 따라

비릿한 냄새 창문 넘을 적마다

구석구석 돋아나는 비늘,

오만 년 전 잃어버린

꼬리지느러미 주변부가 근질거린다

지느러미가 양귀비꽃처럼 돋아나면

수중 곳곳 드나들 수 있겠다


수초 사이사이 피라미들

불빛 쪽으로 고개 드는 새벽녘

쏘가리가 쏘아 올리는 파문이

상형문자로 뜨고

두 발 얻으면서 사라진 꼬리가

가슴에서 자라는 나는

물에서 퇴화된 종족

천년을 뛰어넘어 전해진 수면 위

네가 보낸 글자를 해독하느라

양팔 벌린 자세로 종일 서 있다


금강 물길 뒤집어질 때마다

빗길 뚫고 달려가 강둑에 서는 것은

지느러미 본능 탓

돌아가고픈 숨죽인 기대가

황토빛으로 뒤집어져 흐르기 때문

나무가 품고 있던 물고기 떼

먹장구름 따라 우루루 몰려가는 곳으로

꼬리지느러미 힘차게 방향을 튼다






낭만적 우울에 대한 처방전


동방마트에서 사온 햇소금 한 수저와

당신을 밀어내고 남은 공허 한 줌을 섞어

세상에서 제일 심심한 오븐에 구워내면

씹지 않아도 넘어가는 쿠키 다섯 개쯤 된다

그것을 적당히 갈라 때마다 끼니로 대체하면

그런대로 평온한 하루를 보낼 수 있다

간간 바람과 햇살을 공복에 복용하는 것으로

경미한 우울증을 넘기기도 한다


소스리바람으로 제조한 것보다는

골 바닥에서 산마루로 불어 올라간 것을

이용하는 편이 재발 방지에 도움이 된다

햇살의 양은 조절이 필수적이다

절대적으로 과부하 상태를 막아야 한다

포플러 잎새에서 정제된 빛이 최상의 조건

주로 이른 아침 갓 따낸 태양을 활용하는 편이 바람직하다


부작용으로 심한 알러지 증상을 보일 수 잇으니

먹장구름이나 안개를 주의할 것

비상시를 위해 비타민제와 수면안대를 준비할 것

호흡곤란이 올 경우를 대비해 소나무에서 추출한

산소통을 항상 가까이 비치해 둘 것

쿠키의 장기 섭취는 혈압의 수치를 떨어뜨려

삶에 대한 의욕을 제거할 수 있으니 조심할 것


이상을 실연을 시련으로 받아들인

낭만적 우울에 대한 민간요법으로

체질에 따라 속성으로 치유되기도 하나

간혹 평생을 복용하고도 개선되지 않는 특이 체질이 있다




허물을 벗다

파란 양철대문 옆 삐딱하게 자리 잡은 등받이 나무 의자

구름을 앉히고 바람을 품던 몸 반질반질 닳아 있다

이른 저녁밥을 물리고 앉은 노인의 눈이

어둠 안으로 파묻히는 골목을 바라본다

되풀이해 온 여느 날처럼

새 떼 한 무리 하늘을 끌고 가는 동안

한낮 폭염에 지쳐버린 바람이 맨발 위에 머문다

투두둑 떨어져 내리는 웃음소리

간간 들려오는 담장 안

농익어서 스스로 떨어지는 까만 분꽃씨

뜸들어가는 밥 냄새를 잊을 수 있을까

그의 등이 의자 깊숙이 파묻히고

상수리나무가 먹빛을 뒤집어쓴다

능소화 툭툭 떨어져 있는 그늘에

능구렁이 한 마리 허물 벗어두고

달의 입구로 미끄러져 간다

그의 발에서 흘러내린 뒷굽 닳은 신발 한 짝

이슬 맞으며 대문 밖에 놓여 있다


 



그늘의 냄새


그네를 타고 있었죠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서

높이 날아올랐죠

바람이 손톱을 세우고 귓불 할퀴어도

통증이 되살아나지 않았죠

구르지 않아도 하늘로 올라가는 텅 빈 운동장

그네 위 둥실 떠오르던 몸이

한순간 땅바닥에 곤두박질쳤죠

박살난 뼈마디가 살을 뚫고 나왔는데

하나도 울지 않았죠

늘 혼자이던 그림자 안

그 애가 목매단 닭들에게 모이 던져주며

상처를 부풀리고 있었죠

자살한 엄마의 그늘 아래서

자라지 못하는 그 애 마른 눈물 바라볼 때도

심장 박동 수는 일정하게 간격을 맞추고 있었죠

검은 집 담벼락이 담쟁이덩굴 무덤이 되고

겨우내 끊이지 않는 곡소리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갔죠

흉물이 되어버린 그 집 내력에

두 귀 닫아버린 사람들

아침과 저녁이 딱딱하게 흘러가고 있었죠

아무것도 아파하지 않으려고

겨울이 지나갈 때 검은 나무 감은 눈마다

뾰족한 이파리

마디마디 장전하고 있었죠

쉿, 조심하세요

당신 가슴에 탄피가 박힐지도 몰라요





도복희 시인 약력 

*1966년 부여 출생.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9년 계간 《시와정신》 등단.

*2010년 천강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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