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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원경(桃源境) / 김경철

  전생에 한 번 와 봤음직한 어느
  후미진 뒷골목, 오래 전 잃어버린
  집 주소지를 찾은 듯 멈추어 서서
  오래전 잊고 있었던 복사꽃 향기를
  훅 하니 맡는다

  오늘은 운이 좋아 이곳을 찾아왔다지만
  내일은 운이 나빠 이곳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담에 어린 꽃문양이 손 사이로 지나간다 안방의 벽에서부터 흘러왔을, 뿌리내린 자잘한 금들의 냄새가 훅하니 다가온다 어딘가로 건너가고 있을 저 자잘한 금들, 안을 열면 고스란히 귀뚜라미의 젖은 눈썹들이 쌓여 있을 법한, 햇살에 감긴 눈꺼풀에 한 세상이 어린다. 혼몽한 꿈결에서나 본 듯한 시절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다 빗물이 소복이 고인 장독대며 말라버린 우물에 철렁 떨어진 불빛들이 고스란히 하늘로 올라갈 때까지 내 눈의 일부가 저 불빛 속에서 자랐다 만져질 듯 만져지지 않는 한 사람을 찾기 위해 복사꽃 환하게 핀 집 안을 남몰래 살펴보게 되는 것이다 졸다가 지나가버린 한 생처럼 오래 전 이곳에 묵었던 바람에 타고 있는 저 향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주문
- 절벽에 찍혀 있는 새 

  입을 열자, 산철쭉에 앉은 붉은 점모사 나비가 파르르 떠는 스님의 눈가에 스쳐 날아간다. 거북의 등껍질 속 갑골문자를 읽는 듯한 저 주문은 서쪽으로 지는 저녁해를 달았다. 목구멍 너머 발끝에 걸린 왕오천축국으로 가는 말문(末文)은 아니었을까? 목구멍 속, 울대에 매달린 붉은 꼬리 원숭이가 목젖에 범벅이 되어 있다. 끄아악 끄악 입으로 넘어오려는 저 포유류는 주문의 근원은 아니었을까? 사람은 누구나 제 목소리를 닮은 짐승 하나씩 키운다. 햇살 한줌과 터럭에 걸린 이슬을 모아 한 끼를 때운 듯한 가랑잎 위에 맺힌 다시래기 소리처럼 저 주문은 쓸쓸한 화전의 열기는 아닐까? 스님의 콧잔등에 어린 땀방울은 열을 마친 염주알로 둥글게 하나씩 떨어지고 있다. 허공에서의 삶을 다 마친 거미의 속눈썹이 땅 그늘에 맺혀 있다. 박제된 벌레들의 날개 소리 속에서 불고 있는 주문의 열은 스님의 눈을 해동시킨다. 눈알에 절벽에 새가 찍혀진 것처럼 금이 간다.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

혹,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졌다면
택시미터기 안에 뛰고 있는 저 말은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이
내달렸을 것이다 초목과 유목민이 사는
몽골 어디쯤, 흙 속에 움트는 씨앗처럼
몽골 고원지대를 소원했을 것이다
나침반처럼 자장 끝을 매섭게 노려보는
저 말, 말 등잔이 몽골알타이에서
고비알타이로 이어진 산맥처럼 씰룩이며
울란바토르의 젖줄, 툴강이 생각난 듯,
처음 켜는 시동처럼, 온 몸을 부르르 떤다
과열된 엔진처럼 부동액을 끌어올리며
전생에 한 번 스쳐온 듯한 그 길, 그 고원,
그 광야를 떠올리면서
수백 억 년에 걸쳐 묻어두었던
원유를 뽑아 올리면서 화염처럼 뜨겁게
심장을 달군다 신호도 없고 경계도 없는
그 광야로 택시미터기 안에서 뛰고 있는 저 말은
한없이 뛰어간다 마침내 택시 그림자가
택시를 박차고 달려나간다 도로 너머 광야가 펼쳐진 듯
택시 한 대가 눈동자 속 터널을 빠져나간다


 



천 개의 고원

심장에 닿기 위해 내 안의 말은
사방팔방 몇 십 리, 몇 천 킬로미터라도
상관없다는 듯 내달려간다 히말라야
산하에서 내려다본 무수한 하천 너머
푸른 대지를 녹이는 한낮의 햇살처럼
작고 따사로운 풀잎에게 눈인사하는
내 안의 말은, 산양의 피를 마시는 저
저녁의 목책까지 훌쩍 뛰어 넘어간다
동음이의어로 가득한 일상의 목울음까지
내 안의 말은 새롭게 되새김질한다
산과 바다를 향해 절벽이 끌어안는
포말까지, 버티고 서서 우는 내 안의 말은
잠시 말울음으로 흩어진 갈매기떼를
정렬시키고 다시 비상한다 내 안의 말은
심장 너머를 본다 천 개의 고원, 천 개의
하천이 모이는 이 바다에서 내 안의 말은
말갈기로 이글거리는 태양을 본다
내 안의 고동이 저기 저 천 개의 고원까지
둥둥둥 울려 퍼지는 뱃고동으로 전해진다
하루를 천년처럼 충전하는 하루살이처럼
내 안의 말은 잠깐 동안 반짝인다, 눈빛을


 



  시집가는 날

  가을에는 붉은 단풍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시집간다. 자기 가문을 떠나 다른 가문으로 이동하는 바람의 가마를 탄다. 허나 눈물짓지 아니하는 단풍이 없고 뒤돌아 손 흔드는 쓸쓸함이 베이지 않은 나뭇잎이 없다. 부정의 부정을 손 흔드는 단풍이여, 가을이여. 나 시집간다.
  황금 들판을 지나 남으로 남으로 이동하는 새떼들에게 한 편의 시를 띄워 보낸다. 허구처럼 쓸쓸한 날, 지나온 생이 그렇다. 저 논에 무르익어 가는 벼들은 왜 고개 숙일까. 밑동이 베이는 아픔을 삭이기 위함인가. 나 빈 논처럼 쩍쩍 갈라지는 겨울 지나 봄을 맞는 새색시 같다. 허나 시집이란 나 아닌 다른 사람의 텃밭을 가꾸다, 꽃 지고 속내 오므리는 열매처럼 단 하나의 씨앗을 뱉어내는 것. 붉은 저고리 하나 푸는 밤. 하늘은 높고 쓸쓸한지 이내 손톱을 깨문다. 철렁, 우물에 떨어진 두레박처럼, 다시는 길어 올리지 못할 마음 하나 깊고 깊다. 문풍지 너머 벌레들의 울음이 밤송이처럼 까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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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관하여 외 3편 / 김자흔

광화문 사거리 공중전화부스 안에서 나는 당신에게 꽝꽝꽝 내 마음을 찍어대고, 올 듯 말 듯 당신은 여전히 오리무중이고, 나는 기다림이 무서워 펄떡거리는 내 심장을 꺼내 길바닥에 펼쳐놓고, 여긴 뜨거운 무덤 속이에요 수증기가 자욱이 깔려 있죠 낮은 목소리로 내가 웅얼거릴 때 당신은 이제 막 졸린 눈곱을 떼내며 느릿느릿 내 심장을 곁눈질하고, 당신에게 나는 이렇게 자신이 없는가 생각할 때 공사판 기계가 파르릉 소릴 내지르고 내 젖은 눈썹 위로 푸른 낮달이 흐르고, 숨을 곳을 더듬거리다 나는 기어이 공중전화기 속으로 몸을 숨기고, 오만한 당신이 느리게 나타났을 때 나는 내 작은 몸을 돌돌 말아 구멍 속에 더 깊이 숨겨놓고, 늘 그랬듯이 당신은 눈 한번 꿈쩍없이 뜨거운 입김 하나로 아주 쉽게 숨은 날 찾아내고, 엉뚱하게도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오직 이것뿐이라서 날 좀 안아 줘요!

당신의 심장 속에 무례하게 날 가두어 버리는
당신은 당신은




목내이

한 구의 살아 있는 미이라를 보았다
인공위성이 찍어보낸 화성의 분화구처럼
숭숭 삶들이 빠져나간 육신의 구멍,
가만히 들여다보면
구멍 뚫린 분화구에 물 흐르던 흔적이 보인다
지금 미이라는 협곡의 물줄기 찾아 헤매는가
숨소리 가랑가랑 잦아들고 있다
활시위를 당겨도 될 만큼
열두 쌍의 늑골을 차례로 누이고
미이라가 앙상한 무릎 뼈를 곧추 세운다
짧은 빛살 분화구 속으로
푸스스 떨어져내리는 살비듬들,
마른 입술이 하얗게 타들어간다
드디어 물꼬를 찾아낸 걸까
힘겨운 손짓으로 미이라가 교신을 보낸다
바쁜 길 어떻게 왔냐고,
송출한 무전을 감지하는 순간
흉부가 거칠게 들썩인다
이마에 가 닿은 손길 황급히 거두며
재빨리 무선 송출을 차단시킨다
분화구를 적시는 뜨거운
눈물!

폐암 구멍에 링거줄 하나 꽂지 못한
한 구의 미이라,
그 미이라가 더듬더듬 협곡의 물꼬를 찾아 헤매고 있다





초조(初潮)

엄마는 샘물 속에 똬리를 틀고 앉았다
나는 방안에서 기어 나와 엄마를 불렀다
엄마, 목이 말라요
얘야, 저 복사꽃이 빨갛게 터져 나와야 한단다
엄마는 샘물가에 있는 복사꽃나무를 가리켰다
엄마, 내 몸에도 열꽃이 번지고 있는 걸요
나는 샘물 앞에 엎드려 힘들게 목을 축였다
샘물 돌 틈 사이로 알 밴 가재가 들락거렸다
엄마, 저 알 밴 가재가 먹고 싶어요
무슨 부정 탈 말을……
엄마가 끙, 일어나 되돌아 앉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복사꽃이 톡톡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엄마, 속이 자꾸 메슥거려요
나는 웩웩 게움질을 해댔다
이젠 때가 되었구나
엄마가 똬리를 풀어 탁탁 물결을 치자
알 밴 가재가 빨간 새끼들을 쏟아냈다
새끼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엄마를 한 입에 삼켜버렸다
나는 까무룩 정신을 놓아버렸다
아랫도리로 뜨거운 열꽃이 마구 터져나왔다




아버지의 우화

아버지 똥간에 빠져
온 집안을 인분 냄새로 진동시켰다
똥간에 빠져 목숨이 위태로웠던 날을
전부 잊은 듯,
아버지 술버릇은 여전히 고약해 툭하면
똥간으로 기어들었다
여름내 바글대던 구더기,
오글오글 아버지 목을 타고 올라왔지만
끝내 돋지 않는 아버지의
겨드랑이 날개,
아버지는 똥파리도 되지 못했다
겨우 앞다리 비비는 소리로 낮게 웅얼거릴 뿐이었다
똥간에서 허우적대던 아버지를
윗방에 누이고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웠다
친구가 사립문에 와서 나를 불렀다
친구는 별 내색이 없었다
고구마광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아버지 겨드랑이에 조금씩 날개 돋는 것이 보였다
섣달 그믐이 지고 있었다


 



[심사평]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

시집을 읽어내는 독자들은 줄어들지만 시를 쓰는 사람들은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이번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에는 홍보가 미흡했는데도 불구하고 1백여 명의 시 천여 편이 응모되었다.
일정 수준에 오른 작품들은 크게 보아 자연 서정 계열의 시들과 환상성을 흡수한 시들로 나눠서 살펴볼 수 있었다. 현실이 반서정적이라서 그런지 자연에 대한 열망을 극대화하여 표현하는 시들이 많았다. 대개 현재의 자연과 기억 속의 자연을 오가며 본질적 삶을 탐구하는 경향이라 할 수 있는데, 모티프나 화제의 참신성이 부족하고 과도한 감정이입을 발견하게 되는 아쉬움이 있었다. 또한 시 밑자락에서 송가(頌歌) 풍의 배음(背音)이 흘러나오거나, 시 전면에 교훈적 메시지 등이 노출되어 쉽게 자연과 합일될 수 없는 복잡다단한 현실을 투영하는 미적 새로움이 부족했다. 한편, 어두운 내면 풍경을 보여주는 환상시들도 눈에 띄었다. 환상적인 조형기법을 이용하여 황폐한 내면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시들이라고 할 수 있는데, 대개 현재와 미래에 비전을 열어줄 치열함 대신 개인적인 내면의 비극성 앞에서 좌초하는 경향이 많았다.
시는 무언가가 끊임없이 밀고 올라오는 것이다. 시적 대상과 내면의 관계가 분리되지 않고 혼융되면서 육체와 영혼을 함께 표현하는 것이다. 본심 심사는 이런 관점에서 시읽기를 꼼꼼히 하였다.
본심에서 집중 거론된 신인은 세 명이었다. 김산옥의 「앵무새 재우기」외 9편, 문채영의「바닥은 흐른다」외 9편, 그리고 김자흔의 「사랑에 관하여」외 9편이 경합하였다.
김산옥의 시들은 대상에 대한 꼼꼼한 묘사를 통해 이미지의 결합을 시도한 점이 좋았으나, 시인이 의도하는 바가 불투명하고 소품에 그친 경향이 있다. 물론 시는 그 자체의 이미지만으로도 충분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미지는 그 안에 숨겨진 다채로운 의미가 언제든 격발될 수 있는 힘을 지니고 있어야 될 것이다.
문채영의 시들은 김자흔의 시들과 함께 끝까지 선자들을 고심케 하였다. 둘 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자연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자신만의 시적 스타일을 견지하고 있다.
문채영의 시들은 이번 신인상에 응모된 투고작 중에서 가장 안정감이 돋보인다. 표현도 오랜 사유 끝에 나온 것들이라 끝까지 시적 긴장감을 유지하고 있다. 「바닥은 흐른다」, 「어느 노인의 목욕」 같은 시는 완성도나 이미지를 결합하는 능력에 있어 빼어난 솜씨를 보여준다. 가령 「어느 노인의 목욕」은 관계는 관계이면서 관계가 아닌, 헛껍데기의 인간 관계에 대한 비유이다. 치매 노인과 간병인 여자와의 관계는 개인과 개인, 개인과 사회가 서로 유용한 경제 수단으로 관계를 맺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만, 자연 서정에 흐른 시편들에서 보이는 안정감이 다소 상투성으로 흐른 측면이 있다.
김자흔의 시편들은 문채영에 비해 안정감은 다소 부족하다. 「사랑에 관하여」, 「목내이」, 「초조(初潮)」, 「아버지의 우화」등이 다채로운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비교적 자신의 감정과 현실을 통어하였으나, 다른 시편들은 그 이미지들이 응축되지 못하고 풀어지는 것이 단점이다. 그러나 감정이 분출되는 대로 내뱉는 것 같으면서도 표현하는 방식이 새롭고 시적 패기가 있다. 예를 들어 폐암 환자의 숭숭 뚫린 구멍에서 생명의 물길을 발견하려는 「목내이」나,「초조(初潮)」의 ‘샘물 돌 틈 사이 알 밴 가재’와 ‘복사꽃’의 대립은 그로테스크하면서도 선명한 이미지를 보여준다. 결국 이번 심사는 분출하는 이미지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오랜 고심 결과 김자흔의 시를 당선작으로 내밀게 되었다.  
아깝게 탈락된 문채영에게는 격려를, 김자흔에게는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 안도현(우석대 문창과교수․시인), 박형준(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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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생각 / 김용삼

喪家에 다녀온 후 녹초가 되어
문간방에 누워 있었습니다 네 살 먹은
딸 아이 문밖에 서서 우는데
문을 열어주기가 싫었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서럽게 부르며 문을 두드립니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다 문득
작은 방이 무덤이라 생각되었습니다
언젠가 마지막 옷으로 갈아입게 되는 날이면
무덤 밖에 서서 지금처럼 아이는
대답 없는 나를 부르며 눈물 뿌리겠지요
그때에는 일어나 달랠 수도 없겠지요

관뚜껑 같은 문을 열어
우는 아이 품 속에 꼭 안아 봅니다

 

 

 

 

 

 

 

우물

그날 아침
서너 명의 인부를 따라 감나무 밭으로 갔습니다.
마른 삭정이처럼 굳어 가는 할머니의 몸을 안마하던
내 손에는 어느새 삽이 들려 있었습니다.

구덩이에서 뻘건 흙을 퍼 올리다
물기 번져 오르는 바닥을 보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언젠가부터
우물을 파고 있었던 것입니다.

남에게 한 번도 싫은 소릴 하지 않았다는 할머니,
흰 줄에 매달려 두레박처럼
우물 속으로 깊이 내려졌습니다.
후두둑 흙이 떨어질 때마다 흐느낌들이
그 봄을 출렁출렁 적셨습니다.

고향집 감나무 밭에 생겨난 우물은
가뭄을 타도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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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키드 마크 / 나동하    

 

타이어의 진한 울음이 길바닥에 찍혀 있다.

한껏 입 벌린 타이어의 순한 눈망울이 얼비치는 울음은

작정이라도 한 듯

중앙분리대를 향해 길고 곧게 뻗어 있다.

울음의 끝자락이 살짝 비틀린 걸로 보아 타이어는

속도의 고삐에 숨통이 막혀

한참을 컥컥거렸을 것이다.

짧은 반항을 감행하기까지

지문이 닳도록 달린 타이어는

자잘한 살점이 묻은 울음 한 바가지

길바닥에 엎지르고

뒤이어 쏟아지는 눈물을 질끈

삼켰을 것이다.

폭죽 같은 비명소리

하늘로 치솟는 순간

밤하늘이 잠시 환해지며

고요히 떨어지던 별빛들도

덩달아 비틀거렸을 것이다.

몸속 가득한 울음소리

길바닥에 모조리 토해낸 타이어는

또 어디로 고분고분 끌려갔을까?

위로하듯 지나가는 타이어들이

뒤늦게 한 번씩 상처를 어루만져보지만

한번 터진 울음은 조금도 다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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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손의 장어 / 최윤정

 

 

우주의 하루를 살았다

 

하늘은 가장자리가 부서져 내렸지만 둥긂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를 생각하는데 오전을 보내고

 

구름 귀퉁이를 기어가다 미끄러진 지렁이를 잡아먹는 동안

 

느루 내리는 비처럼 은사시나무의 오후가 지나갔다

 

고함치듯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무지막지하게 지붕을 덮어버린 꽃잎이나 잠깐

 

흘러들어온 냄새에 온 정신이 홀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시간의 다른 얼굴이라면 나는 잠시 시간을 사랑했던 것

 

나의 하루는 길어서 이미 사라진 시간의 꽁무니 뒤로

 

수만 마리의 새가 부리를 비비며 날아갔다

 

나뭇잎 한 장이 만든 그늘 아래 고개를 묻고

 

어쩐지 경건한 마음으로 어제를 떠올리는 건

 

기도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손대신 온몸을 모은다

 

찰나에도 떴다 지는 별과 무시로 바뀌는 바람의 온도

 

둥글고 긴 허공을 이해하는 동안 귀돌에 새겨진 시간들

 

새가 떠난 나뭇가지처럼, 나뭇가지 그림자를 부풀리며 지는 해처럼

 

돌아보면 침묵같이 아득한 하루를 살았다

 

 

 

 

*닐손의 장어=1859년 당시 8살이었던 사무엘 닐손이 우물에 던진 후, 20148월 죽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 155년 이상을 살았다는 뱀장어.

 

 

 

 

 

 

 

[당선소감] “손 놓고 싶던 순간 여러번 오갔다

 

나무 아래 앉아 숲을 보려 한 시간이 길었다. 나무를 떠나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숲은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내게 시는 숲과 같다. 아직 제대로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추측하고 상상해서 숲을 그릴 뿐이다.

 

누군가는 사물을 오래 바라보면 그 사물이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사물과 대화 하려 노력했지만 내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사물은 언제나 묵묵부답이므로 그저 사물에 나를 기대놓고 그것이 되어보려 노력할 뿐이다.

 

가끔은 내가 쓴 시들이 거짓말 같아서 손 놓고 싶은 순간들이 여러 번 오갔다. 열등의 시간이 머릿속의 욕심도 어깨에 든 힘도 내려놓게 했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내가 쓴 시들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아직 숲을 보기 위해 갈 길이 먼 내게 심사위원께서 올려주신 짐 하나를 달게 지고 가겠다. 심사위원님과 김유정신인문학상 관계자께 감사드린다.

 

머리 맞대고 시 이야기만으로도 행복했던 비상 식구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늘 내 곁을 지켜주는 가족에게 오래도록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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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다운 감각·참신성 결여 아쉬워

 

예심을 통해 넘어 온 작품은 정연희 외 12명이었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삶의 내면이나 이와 유사한 일상의 풍경에 대하여 성찰의 시각과 열정을 보여 준 반면 사회성의 반영이나 다소 무거운 주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랄까 새로운 삶을 발견하려는 노력보다는 관념의 고착이나 작품에 대한 안전성이 더 고려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표현의 난삽함과 모호성 등을 우정 피해 가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거개의 작품들이 지나치게 길고 산문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요즘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거나 복잡다단한 삶을 몇 행의 시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이유들로 시가 운명적으로 운문의 영역이라는 게 무색해 보이기도 했다.

 

한미정 이지성 김순희 최윤정 등이 끝까지 남았으나 작품의 완성도나 사유의 깊이 등으로 보아 최윤정의 닐손의 장어가 낙점을 받았다. 당선작 외에도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이 그를 받쳐주는 것이 든든한 이유이기도 했다.

 

최윤정은 155년 이상을 우물 속에서 살았다는 장어를 통하여 거대한 시간 속에 매몰된 존재를 받아들이고 투시하는 사유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가 인식하고 소비하는 공간성의 구체화가 그것인데 그것은 시간에 대한 우주적 느낌과 시각, 좀 더 크게 말한다면 무한한 시간의 공간 속에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를 유장한 우주적 흐름에 합류하게 하는 스케일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언어 사용과 수사적인 면에서 신인다운 감각이나 참신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당선자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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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외 4편 / 권수찬

 

 

책을 펼친 지는 오래되었다

기록은 닳고 닳아 지루한 자막으로 새어나간다

머릿속이 붉어진 오후,

구석에는 당신이 비스듬한 자세로 흘러내리려 한다

그림자는 한 뼘씩 줄어들고

빈 고시원은 햇살에 부푼 빵처럼 지루하다

 

치자 잎이 창으로부터 쏟아지는 마른 향기

등 뒤에는 죽은 서가의 눈들이

햇발처럼 쏘아본다

자신을 들키고 있다니,

당신은 그 페이지에서 영원히 멈출지도 모른다

기록은 숨이 막혀

고시원 외벽과 비슷하다

 

간신히 화장실 구석에 끼여

담배를 물고 있는 당신은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을 언제부터 했는가

가방에는 지로용지가 구겨져 있다

금요일엔 일용직 근무를 서고

쪽창 밖을 바라보는 당신은

갈수록 욕실 안 거북이를 닮아간다

건너야 할 문마다 단단하다

책은 3페이지도 못 넘어가고

책 속의 깐깐한 주인을 언제 만날 셈인가

 

당신은 이제 묻는다

'삶도 없이 스스로 묶이다니'

고시원 옆문으로 빠져나가는 당신은

습성이 단단함보다 더 치열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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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입구

 

 

풀들이 허공으로 긁혀 있다 자국 나지 않은 흙들이 갈라져 있고 안개가 먼저 마중 나와 있다 어머니를 지층에 두고 오던 날부터 나의 계절은 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찾아가는 길은 차가운 입구를 데우는 일이다 동공이 마를 때까지 말라서 비어버린 어머니의 물집을 터뜨리러 가는 중이다

 

사진 속에는 어머니가 아주까리처럼 심어져 있다 네모난 목재 그늘은 어머니를 딱딱하게 받쳐주고 있다 그날 이버지는 마루 창에 두터운 썬팅지를 붙였으며 포도나무는 다시 어두워지고 말았다

 

난초 잎이 시든 저녁일수록 어머니의 관절은 다시 비틀어지기 시작했다 콘크리트 계단을 무생물처럼 내려가던 아버지, 한동안 감감했다, 어머니의 위태위태한 박음질에서 터져나오는 통증은 절기를 맞은 듯 꺽꺽거렸다

 

벽은 단단해도 악취를 풍긴다는 걸 회색구멍을 통해 알게 되었다 바람은 회색과 가까워지고 겨울의 속도를 조금씩 늘려가고 있다 벽은 굽어질수록 폐허의 냄새로 흘러들어 어머니가 어깨를 기대어도 다정한 온기가 되지 않았다

 

그해 포도나무는 어머니와 함께 싹을 틔우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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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강

 

 

날개를 더듬으며 죽은 새의 새벽 강은 길다

이미 상처의 흔적은 바래졌으며

푸른 공기는 바닥으로 흩어진다

 

저만치 자전거를 굴리고 가는 당신

간간히 스쳐 보내는 전봇대

길 위로 당신의 하얀 미소가 출렁인다

원반 같은 하늘은 머리 위에서 맴돌고

안개 속으로 들어가는 이들은

옆구리에 아리송한 자루를 하나씩 매단 채

깊은 물속처럼 걷는다

 

기억에도 없는 길을 더듬는다

과녁을 좇아가던 그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적 없다

종이꽃 하나 접어 희미해진 행렬에 끼워 넣는다

아련한 향기를 지우러 가는 중이다

텅 빈, 저 문드러진 눈빛을 누가 다독여줄까

 

서늘하게 죽은 바람 하나가

끝내 깊어지는 강변에는

서로의 안부가 몸부림친다

희뿌연 지붕 위로 구름의 일가족이 지나가고

나는 시간의 표면에 흘러나오는

새벽의 울음소리를 듣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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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깨우다

 

 

얼마나 많은 기류의 씨앗들이 이리 저리 흘러 다니며

성자의 반열에 오르고 싶어 했을까

그 영혼들이 가여워

침묵은 긴 시간으로 흐르는 걸 거야

새가 담장과 부딪히는 순간

누군가 한 세계를 깨뜨리기 위한 수고로움을 생각하지

소리 없는 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나

허공은 바람이 표정이었다는 듯 구름도 빨라지지

작은 연못에는 잎의 말들이 둥둥 떠다니고

언젠가 내 안의 진입로에

그 하나의 빛과 하나의 어둠을 나눌 수 있는

나만의 동심원을 갖고 싶었지

날개가 치솟는 정반대로의 방향인

낮은 파닥거림을 좇아

갈망은 거역할 수 없는 또 다른 부호였음을,

멀리 송전탑 아래로 안개가 밀려나오고

시원(始原)의 바람을 타고 기우는 새

숲은 은빛을 빛내기 위해 순결의 기호를 장식하지

새들이 날개를 벗는 순간

깨어나기를 소망하지

해질녘 꽃들이 니얼니얼 춤출 때

갈잎은 물의 향기를 길어 올리지

알 속에서 웅크리다 부화된 새

신성의 부리들은 부드러운 바람을 모으고

새로운 정념을 일으켜 세워

마지막으로 깊은 눈빛을 그려 넣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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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굽는 여자

 

 

밖은 서늘한 바다이다

여자가 문을 나서자 물고기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갈라진 음들이 물살로 퍼져나가는 시간

여자가 그물 옷에 묻은 저녁을 털어낸다

 

지상 이층에 담긴 이력은

은빛 창 말라붙은 비린내가 전부이다

부엌에서는 고등어가 팔딱거린다

고등어의 눈은 굽어진 창을 바라본다

여자가 비린내를 끼운다

 

물 위로 흐르는 뉴스의 화보에는

바람의 흔적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여자는 바다 깊은 곳에

유난히 흔들리는 오늘 밤의 달을 그물질한다

창의 화분마다 시퍼런 달빛을 심고

바다의 풍습을 달삭거린다

여자가 엷은 입술로 주문을 외울 때마다

망원경에 씹힌 바다는 더욱 깊어진다

 

여자의 푸념은 곧 줄을 당기기 시작한다

때로는 팽팽하게 때로는 느슨하게

그물 자락 바다 한가운데에 펼쳐 놓는다

달빛에 고등어를 굽는 여자의 하루가 말라간다

여자의 눈빛이 고등어 눈빛을 닮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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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안정된 언어감각으로 풀어낸 아름다운 생의 구체성

  

『문학의 오늘』 제2회 신인문학상 부문에는 실로 많은 분들이 응모해주셨다. 200명 가까운 응모자 숫자에 비추어볼 때 그야말로 매우 커다란 활황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두루 알다시피, 우리 시대가 이른바 도구적 이성의 영역이 날로 커져만 가고 있고 그 반대편에 존재하는 미학적이고도 비판적인 이성은 그 활력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이러한 반응과 열도는 매우 소중한 것이 아닐 수 없겠다. 더불어 우리는 ‘시적인 것’의 예외적 고투를 통해 새로운 미적 비전을 상상하는 것이 여전히 아름다운 저항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생각한다. 이를 증명일도 하듯, 매체적 위상이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문학의 오늘』에 그 어느 때보다 가작들이 많이 투고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흐뭇한 일이라 할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끝까지 눈길을 두었던 다섯 분의 작품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특장을 드러내면서 오랜 시간의 습작 경험과 안정된 구성 능력을 두루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가나다순으로 이름을 밝히면 권수찬, 김주혜, 윤명식, 이재근, 한인숙 씨의 시편들이었다. 모두 당선자로 뽑혀도 손색이 없어 보였다. 최근 유행하는 담론에 대한 무의식적 추수를 단호하게 거절하고, 스스로의 구체적 경험과 표현에만 집중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 매우 고무적으로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개성과 완결성의 황금분할을 통해 우리 시의 미래를 개척해가려는 젊은 언어들의 긍정적 면모라고 생각되었다.

 

이 가운데 심사위원들은 권수찬씨의 작품들이 비교적 균질적인 데다가 탁월한 언어조직력을 갖추고 있어서, 당선작으로 뽑히는 것이 합당하다고 의견을 모았다. 다른 분들에 대해서는 응모작의 균질성과 언어의 밀도를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하였다. 당선자는 다섯 편 모두 안정된 언어감각과 삶을 바라보는 페이소스가 남달리 결속되어 있는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다양한 이야기narrative를 선보이는 능력도 모두 좋아보였다. 「단단함을 빠져나가다」 외 4편의 작품은 한 편 한 편의 완성도가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았고, 그 안에 우리 시대의 한복판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힘겹고도 아름다운 생의 구체성이 잘 나타나고 있어서 특별히 반가웠다. 시의 이미지를 구사하는 능력도 탄탄한 훈련과정을 짐작케 하였다.

 

우리는 앞으로 이 시인이 이러한 속성을 좀 강렬하게 언표하여,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성찰의 계기를 부여함은 물론 자신의 현재형을 구성하고 있는 타자들의 다양한 경험을 선명하게 부조해가기를 바란다. 또한 기억을 매개로 할 때, 그것을 자신의 현재 상황이나 감각과 결속하여 생생한 현재형의 언어로 되살아나게 하는데 특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이 또한 적극 발전시켜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그밖에도 구체성 있는 언어를 통해 자신만의 언어적 성채를 구축하는 경우가 많이 발견되었다. 다음 기회에 더욱 풍성하고도 빛나는 성과가 있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응모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드린다.

 

심사위원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유성호(문학평론가, 대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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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장樹木葬 / 안영선

 


꿈꾸는 후생後生이 나무 밑으로 스며들었지
푸석한 잔디가 밑동을 덮는 동안
단풍나무의 풋풋한 기억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어
그늘을 늘이던 모난 가지는 툭툭 잘려나갔어
오래 묵은 옹이는 환부의 딱지처럼 단단해졌지
뿌리 깊은 생장점은
번식의 촉수처럼 유골의 온기를 쫓고,
촉촉하던 물관은 모세혈관을 만들겠지
나이테는 표찰에 적힌 나이를 헤아렸어
나무의 눈이 동물성으로 반짝이기 시작했지
수십 수백의 영혼이 수군거리는 저곳,
한때는 물길과 바람이 관장하는 초식의 영토였어
뿌리와 가지와 그늘로 영역을 표시하던 수목,
유골의 따뜻한 체온은
나무의 이면에서 부활을 꿈꿨지
나무는 죽음의 영역을 넓혔고
유골에 덮힌 나무는 공중에 붉은 표식을 남겼지

 

 

 

 

춘몽은 더 독한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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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진정성 있는 삶을 담아내고 싶습니다.”

   

더위에 지친 오후, 낯선 전화에 넋이 나갔습니다. 전화 한 통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랐습니다. 순간 텅 빈 하늘을 잠시나마 훨훨 날아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내 어깨 위에서 무거운 멍에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것이 의 무게이겠지요?

 

늘 멀게만 느껴졌던 시의 길. 때로는 그 끈을 슬쩍 놓기도 했었고, 다른 길을 찾아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나 유년의 꿈을 접지 않은 것이 새로운 세상을 열었습니다. 버거운 시의 무게가 즐거운 일상 속에서 공존 공생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언제나 부족한 제게 시안을 열어주신 김윤배 선생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며, 힘없이 돌아설 때마다 위로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김종경, 박후기 시인, 등단의 꿈을 이루도록 묵묵히 기다려준 용인문학회의 사랑하는 문우들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끝으로 부족한 작품을 끝까지 읽어주시고 문단의 길을 펼쳐 주신 유성호, 이경철 심사위원님과 귀한 지면을 열어주신 문학의 오늘에도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진정성 있는 삶을 담아낼 수 있는 시를 쓰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살아 있는 문학여행 답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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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계간 문학의 오늘 신인상 공모 시 부문에는 모두 178명의 신인 지망생들이 응모작을 보내 왔다. 문단 내외에서 가지는 이러한 커다란 관심은 계간 문학의 오늘이 가지는 매체적 위상을 알려주는 의미 있는 지표라고 생각한다. 첫 신인상 모집에 이렇게 많이 투고해 주신 모든 분께 깊이 감사드린다. 투고된 작품들을 거듭 읽으면서 심사위원들은 개성적 어법과 향상 그리고 주제 의식에서 남다른 성취를 보인 시편들에 깊이 주목하였고, 더불어 작품의 완결성과 주제의 진정성을 주요한 기준으로 삼아 안영선 씨의 작품들을 대상으로 결정하게 되었다.

 

안영선 씨의 작품들은 감각의 구체성과 진정성이 남다른 밀도와 언어를 동반하며 펼쳐진 가편들이었다. 가령 수목장의 경우, 후생의 꿈과 지상의 기억이 나무를 둘러싸고 결속하면서 펼쳐내는 표식이 매우 구체적인 상상력의 그물을 보여주었다고 판단하였다. 갯벌의 경우에는 생태적 사유와 인생론적 고백을 선명한 바다 심상으로 구체화하였고, 더덕북어 」 「벽을 오르다」 「만월 등에서도 삶의 신산함과 자연 사물들이 겪어내는 시간들에 대한 치밀하고도 개성적인 관찰과 유비를 보여주었다고 판단된다. 안영선 씨의 강점은 지나온 시간의 진정성을 일방적인 회감의 시법에 싣지 않고, 사물의 구체성과 감각의 다층성으로 우회하고 간접화하는 형상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심사위원들은 배귀선 씨의 작품들을 우수상으로 뽑기로 합의하였다. 대상에 오르지는 않았으나 개성적인 사유와 감각이 우수상으로서 가지는 격려의 몫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하였다. 특별히 종이 십자가에 나타난 공동체적 감각과 시간의 흐름에 대한 사유는 만만찮은 시간 동안의 관찰과 적실한 유비, 그리고 낱낱 어휘의 적절성을 두루 보여주었다. 그리고 다른 작품에서도 방언을 비롯한 말의 구체적 활용 가능성에 대한 역량 등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생각된다.

 

이분들의 시편은 저마다 고유한 경험을 자산으로 삼으면서, 오랜 습작의 시간을 깊숙이 품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특정 유행 담론을 추구하지 않고 스스로의 경험적 구체성에 정성을 들이고 있어 매우 긍정적으로 다가왔다. 거듭 대상과 우수상 결정을 축하드리며, 신인다운 개성과 시인으로서의 지속 가능성을 보여준 안영선 씨와 배귀선 씨의 시편이 더욱 깊은 진경으로 나아가기를 크게 기대해마지 않는다.                       

 

심사위원 : 이경철(시인, 문학평론가), 유성호(문학평론가, 대표 집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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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회 창비 신인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장마의 딸

 장마는 당신

 참 예쁜 당신의 이름

 

 

내가 낳았을 리 없는 장마의 딸,

너만 오면 예보에도 없던 장마가 시작이 돼.

이불이 마르질 않잖니.

축축한 불행 위에서 자는 건 이제 지겹구나.

 

흥건한 웅덩이를 보고 질색하는 나의 마미,

이 배꼽이 당신과 닮았는데 무슨 말씀을 하시나.

 

장마는 내 의도가 아니에요.

 

내 말은 듣지도 않는 나의 마미,

()을 하자면 나는 건조하게 살고 싶었습니다.

태생이 질척질척이지만 배꼽은 잊고

쩍쩍 갈라진 틈으로 살고 싶었어요.

발밑 사탕처럼

 

반짝,

밟히다

깨지고

부서져

알록달록한 설탕가루로 날아가는

 

그런 건조함을 매일 상상했습니다.

 

(오늘은 얼굴이 내일은 이름이

나의 마미, 마침내 당신은 처녀로 돌아가는 거에요.)

 

장맛비가 요란한 오늘, 우리

주니어의 역사를 새로 쓸까요?

 

이십년 전 번개가 내 배로 옮겨 붙던

그날을 기억해요.

 

 

 

 

어항 속 지느러미는 여덟 금붕어는 하나

 

 

의 상자,

 

  당, , , , , , 뻐금뻐금 태어나 딱딱하게 얼어붙은 말들, 남편의 엉덩에 말 줄임표가 돼 따라붙는다. 새삼스럽게, 남편은 엉덩이를 살짝 피해버리지. 비빌은 뱀의 혀처럼 가만있질 못하죠. 결말을 앞둔 여배우처럼 의미심장하게, 무너지는 와이프, 엄마, 엄마, 엄마, 표정을 짓지 마세요. 꼭 살아 있는 사람 흉내 내듯. 찬 붓을 가슴에 대는 아들. 옆집 미시의 가슴을 똑같이 그린다. 엄마와 옆집 누나를 바꿔놓는 게 내 소원이에요. 뻐끔, 혓바닥을 내뱉는 순간 삽입되는 흰 夢, 저 긴 담배, 너는 담배 피우는 꼴도 네 아빠를 꼭 닮아가. (오래된 대본대로 뺨을 후려갈기곤) 엄마는 서럽게, 운다. 귀머거리 노인네는 지네, 지네, 디스크에 그렇게 좋다는데, 지네 타령을 한다. 머리칼에 물드는 하양의 꽁무늬를 잡으며.

  막다른 빙벽,

  금붕어의 체위는 지느러미 뒤의 지느러미.

 

  氷의 경계 위로 튀어오르는

  튤립 같은 금붕어의 입술

 

  금붕어의 여덟 번째 체위

 

   

 

 

쌍둥이

 

 

누나,

내 뒤통수엔 검은 새가 살아.

  눈 한번 깜박이지 않는

  긴 부리의 비밀이 살아.

  새는 나는 곳마다 검은 웅덩이,

  긴 부리가 만든 시커먼 멍들.

  , 속내를 흘리고 다니나봐.

  저기서 시적된 빗속에

  내 비빌이 쏟아지면 어쩌지. 비실비실 오줌처럼.

  누나,

  이 비행은

  새의 본능일까, 내 것일까,

  헷갈려.

  (창밖 가득 쏟아지는 새들과 함께 너, 떨어지며 지껄인다.

  이동네는무서워육교가가까워추락이가까워

  날낳은게엄마일까누나일까엄마가누나일까누나는처녀였을까

  머리가 드디어 땅에 닿을 때, 너 웃는다.)

  그리고 누나,

  그거 알어?

  엄마가 돌아왔어

 

 

 

 

 

쌍둥이

 

 

,

나는 유령인가보다.

내 말에 대꾸 한번 하질 않잖니.

팔차선 도로 한가운데의 팔자라더니,

십팔평 아파트 한가운데에서 메아리를 기다리는 꼴이야, 매일.

나물도 먹어라

(질긴 시금치나물)

내일은 뭘 해줄까.

......

실뱀 같은 화를 내는 우리 엄마

십팔평짜리 소꿉놀이를 한다.

지폐보다 영수증이 많은 날 바람은

적자적자적자, 불고

우리의 엄마는

너네까지 이러면 내 인생 모조리 핏빛 적자잖니, 하고

밥상을 엎는다.

칼이 어디 있더라, 찾는 사이

뒤통수에 구멍을 키우는 동생이 소리도 없이

내가 그랬지? 엄마가 돌아왔다고

웃는다.

   

 

 

 

  유전자 순환선

 

 

  태몽

 

  복숭아였지. 분명 하얗고 탐스러운 복숭아를 크게 한 입 베어물었는데 이상하게 비린내가 나지 뭐야. 다시 보니 그건, 엉덩이였어! 뒤록뒤록 살이 찐 돼지의 엉덩이, 히프! 넌 태어나기 전부터 내게, 오류였어.

 

  태초의 애인들

 

  차라리 뺨을 때려. 넣어달란 말 좀 하지 마. 불행을 생산할까봐 그래. 네 유전자를 못 믿느냐고? 난 내 유전를 맹신해. 자신있어? 자신 있어, 그래, 어디 들어와봐. 태초를 다시 시작하는 거야.

 

  모녀

 

  넌 내 마지막 자위야.

  당신은 내 어쩔 수 없는 자해고.

 

 *

 

  파란 잔디를 가로질러 뛰어오는 꼬마

  한 손엔 바닐라아이스크림이 질질.

  분홍색 치마가 뒤집힌다.

  애 다리가 너무 뚱뚱해, 생각하는 찰나

  꼬마가 내 소매를 잡아끈다.

 

  뭘 보고만 있어. 솜사탕이나 사오시지, 이 엄마야.

 

 

 

손유미 _ 1991년 인천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하과 재학. 2012년 제11회 대산대학문학상 희곡부문에 <달무리> 당선.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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