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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품인생 / 김상현

 

내가 거품이 많다고?

맞아, 내 생각들은 피지(皮脂) 많은 지성이니까

 

그대들의 생각은 신선한가?

종이컵 가득 든 삼겹살 기름 같은 생각들

빨대로 불면 부글부글 거품이 일지

그대들의 거품, 그대들의 생각들

더 높이 더 많이,로 피지를 재배하는 그대들

수명이 연장되니

이제는 더 멀리,로 피지의 이모작을 하는 그대들

거칠고 윤기 없는 생각들, 검은 양복에 내린 하얀 재들

거품이 필요한 거지

 

즐거운 나의 샴푸는

내 머리 위에 수국(水菊) 송이를 피워 올리지

모발 틈틈이 하얗게 서리 맞은 생각들

손가락 쟁기로 갈아엎으면

뽀글뽀글 뽁. 뽁

옹알이 거품마냥 피어오르는 거지

이를테면 돈 냄새 나는 푸석한 생각들

동전크기만큼만 샴푸를 덜면

꽃망울 뽁. 뽁 터지며 피워 오른다는 거지

 

나는 거품의 인생

하루 두 번 생각을 감지

최적의 빛 반사율을 만들어주어

싱그러운 생각이 치렁치렁하지

 

나와 함께 샴푸하는 그대여

어때, 수국으로 피어오르는 느낌, 개운한가?

 

 

 

[당선소감]

 

어제 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형 글이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끝내 무너지고 말아. 아무리 늦게 자도 빨리 눈을 뜨게 돼.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어제 형과 문자를 주고받았다.

형 글이 될 듯 될 듯하다가도 끝내 무너지고 말아. 아무리 늦게 자도 빨리 눈을 뜨게 돼.

잠이 오지 않는다. 오지 않는 나의 잠을

누가 대신 자는가.

남의 꿈은 잠의 평화이고

나의 잠은 잠의 죽음이라고

남의 잠은 잠의 꿈이고

나의 잠은 잠의 현실이라고

 

- 오규원< 남들이 시를 쓸 때> 중

 

시는 정말 어려워. 천재적 재능 따위는 세상에 없어. 다 노력이었다는 군. 그럼에도,그럼에도 이 시점에서는 큰 계기가 필요한데,당선 같은 선물 말이야. 하지만 실패가 이젠 밥과 같아. 아무튼 고마워. 형.

 

그리고 오늘. 두 손바닥에 듬뿍 밀크로션을 덜고는 뺨을 때릴 찰나,대중목욕탕에서 휴대폰이 울렸다. 당선 소식이었다. 요강에 폐결핵의 피를 한 움큼씩 토하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29세의 김유정을 생각해본다. 닭 30마리와 살모사 구렁이 십여 마리를 달여 먹고라도 일어서려 하였던 그 창작열.

 

뜻 깊은 상을 받게 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참으로 간절하게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이 일을 계기로 더 우직하게 나아가겠습니다. 아울러 작가가 꿈인 제가 늦깎이로 이 세계에 뛰어들었을 때 아둔한 필력으로 끼친 폐가 많기에 우석대 문창과 교수님들께 엎드려 절 올립니다. 안도현 교수님,누군가를 바라볼 수 있어 좋습니다.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나의 가족과 문창과 문우들 그리고 <달려라 검정분필> 제자들에게 영광을 돌립니다.

 

 

 

[심사평] 과잉된 언어·복잡한 수사 아쉬워

 

본심에 올라 온 10명 50여 편의 작품 중 김상현씨의 ‘거품 인생’을 당선작으로 하는데 기꺼이 합의 했다. 우리는 동전만한 샴푸 한 방울로 머리를 수국처럼,생각을 구름처럼 일게 할 수도 있다. 인생은 거품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거품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마냥 부풀린다. 그런 상상의 연관성들이 거품처럼, 혹은 샴푸 후의 개운함처럼 다가왔기 때문이다.

 

응모작들이 나름대로의 개성과 고심의 흔적을 가지고 있었으나 대부분 요즘 시의 유행적 폐단에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언어의 과잉이나 수사의 미로를 힘들게 통과하고 나서도 그 뒤에 아무 것도 발견할 수없는,읽기에 머리 아픈 시들의 강한 전염성에서 김유정 신인문학상 공모도 예외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일언이 폐지하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물론 세계의 존재양태나 삶의 양식 또한 과거에 비해 복잡해졌으므로 이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와 표현양식도 달라져야 함은 상식에 속한다. 그러나 읽어서 즐겁고 읽어서 서러운 시의 본령은 변하는 게 아니다. 결국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게 시라면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시를 빼앗는 일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머지 말은 고은 시인의 ‘한 충고’라는 시로 대신했으면 한다.

 

‘시들이/그 이상의 시들을 막는다/시들이/그 이후의 시들을 막는다//시야 시야 파랑시야//시의연혁/시의 패션/시의 권위 백년 가까스로 벗어나//그대의 시 벌벌 떨며 막 태어나 혼자이거라.’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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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민일보와 김유정기념사업회가 공동 주최한 ‘2015 김유정 신인 문학상’소설 부문에 이루다(38·경기 남양주시)씨의 ‘미루나무 등대’ 작품이 당선됐다. 또 시 부문에 김상현(47·전북 익산시)씨의 ‘거품인생’이,동화 부문에는 김나은(35·경기 용인시·본명 김혜정)씨의 ‘나무피리’가 선정됐다.

 

단편소설 ‘미루나무 등대’는 원전마을을 둘러싼 주민들 간의 갈등에 다문화가정의 문제를 녹여낸 작품으로 초등학생 소녀를 내세워 사회문제를 바라보는 눈높이를 낮게 설정해 오히려 어른들의 위악을 부각시킨 점이 높게 평가됐다.

 

시 ‘거품인생’은 “인생은 거품 같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거품은 우리를 꿈꾸게 하고 마냥 부풀린다. 그런 상상의 연관성들이 거품처럼, 샴푸 후의 개운함처럼 다가왔다”는 호평을 받았다.

 

동화 ‘나무피리’는 흔한 소재임에도 상호 배려를 통해 완벽한 소통의 의미를 감동적으로 풀어내 동화가 문학의 한 장르라는 것을 여지없이 증명하는 수작으로 평가됐다.

 

올해 신인 문학상에는 소설 193편,시 555편,동화 88편 등 총 836편의 작품이 응모됐다.

 

소설부문 수상자에게는 국내 단편소설 공모전 중 전국 최고 수준의 상금인 1000만원이 수여되며 시·동화 부문 수상자에게는 각각 300만원의 상금이 전달된다.

 

시상식은 내달 16일 오전 10시 30분 춘천 김유정문학촌에서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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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월주의보 외

 

김지윤

 

 

 

담장 밑에 표정이 떨어져 있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내가 떨어져 있는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추고 바람을 불어넣으니

달입니다

빗자루로 마당을 쓸면 구름도 집을 떠납니다

 

두 손에 물을 묻혀 얼굴을 닦습니다

아침저녁으로 씻어도 닦이지 않는 표정이 있습니다

혀를 입술에 대보지만 나는 맛이 없습니다

나는 내 맛을 알고 싶습니다

 

입을 벌리고 달콤한 생각을 하며 달콤해지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달을 보며 수박이라고 말하면 달에도 줄무늬가 생길까요

눈을 감고 손을 더듬거리며 이건 냉장고 이건 티브이 이건 의자

모서리에 등을 기대앉으면 불안도 지탱하는 힘인 것 같습니다

 

입을 맞춘 달이 언제 저곳까지 차올랐는지

봄이라고 말하는 동안 봄이 오고

지구의 모든 목련나무 꽃들이 달로 한데 모였습니다

높은 곳에서 나를 본다면 어떤 표정으로 보일까요

내가 다시 지붕이나 마당, 골목에 내려앉습니다

 

 

 

물속의 사람들

 

 

네가 바닷속으로 들어가던 날

너와 함께 밥을먹고 커피를 마시던 식탁이나

소란스러운 설겆이가 만든 이 나간 유리그릇들이 떠올랐다

방 안 모든 것들이 저마다 자기 안에 숨을 채우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았지만 다른 집에서 함께 살았구나

 

밥그릇에 꽂아놓은 수저가 그릇을 떠날 때

나는 음식이 묻지 않은 깨끗한 식탁을 생각했다

사후는 주말 식탁에 앉아 홀로 밥을 먹는 세계

너는 정갈한 그릇에 담긴 한 사람 몫의 음식 같았다

 

나는 매일 정수리를 하늘에 부딪치고

바다에 들어간 사람은 저녁을 바다에 풀어 놓는다

창문을 열면 집 안으로 물이 쏟아지고

불리지 않으면 닦이지 않는 것들이 많구나

수면을 향하는 물거품들이 탄산수 같다던 네 말처럼

마음껏 슬퍼한 기억은 청량감이 들기도 했다

 

 

 

정원사의 꿈

 

 

기르던 개를 화분에 묻었어

새싹이 흙을 뚫고 올라와

 

흙을 걷고 죽은 개의 냄새를 맡곤 해

물을 줄 때면 나는 젖은 개의 표정을 알 수 있어

수면제를 먹고 잠든 엄마의 속눈썹이나

손도끼 날에 비친 아빠의 얼굴

어린 강아지의 목을 양팔로 끌어안으면

내 불안은 강아지의 불안으로 넘어가지

 

세상의 모든 정원사들이 모이는 만찬을 꿈꿨어

꽃과 나무들이 가득한 곳에 내가 서 있고

사람들은 술과 음식을 먹으며 침묵해

손수레에 실려 나오는 은색 접시

내가 키운 꽃이 잎을 흔들며 젖고

내가 키운 꽃이 허리 굽혀 울부짖어

 

기른날 보다 오래 물을 주고 있어

화분 밑으로 새는 적토를 치우며

엄마는 잠든지 오래

화분이 다 자라고 나면 함께 묻어드릴께

그러니 죽지 말고 잠들어 계셔요

 

 

 

투명 고양이

 

 

나무 그늘에 검은 고양이 한마리가 눈을 감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고양이에게 없는 사람

나 눈 감고 생각하니 나무 밑엔 그림자만

 

나는 고양이를 보고 있었다고 말할 수 없고

고양이는 기지개를 펴며 내 발끝에 닿는다

복숭아뼈에 얼굴을 비비는 고양이

발목이 지워지며 밤이 온다

 

검은 하늘에 투명한 고양이들이 모여 있다

 

고양이의 시간과 공간은

이곳과 달라서 고양이들은 추억이나 불안

이정표나 일방통행 등의 어떤 표기도 의존하지 않는다 꼬리를 세우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고양이의 도도한 걸음

 

나는 쓰지만 쓰는 건 실체가 없으므로

고양이가 방금 생긴 균열 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빈 거실에 홀로 앉아 저녁을 먹는다고 쓰고

 

점심을 다 먹어치우지 않았다면

밤도 오지 않았을 텐데

골목을 걷는다

 

나는 내 고양이만 본다

 

 

 

오늘의 노동

 

 

버린 쪽지을 찾아 걷는 일

날려 보낸 종이비행기가 구름에 걸려 떨어지지 못하고

같은 계절 위로 다른 비가 끝도 없이 내려 운동화가 젖는 일

회색으로 변한 새 신발을 보며 우울해하는

 

내가 쓰고 버린 말들을 뱃속에 담는 일

폐지를 잔뜩 실은 채 홀로 높은 언덕을 걸어 오르다

덜컹, 날아간 종이보다 먼저 바닥에 주저앉는 일

 

몇년 전 연락이 끊긴 사람에게 계속 엽서를 보내고

마지막으로 만났던 장소를 맴돌고

올려다본 하늘에 휘청, 하루가 통째로 흔들리는 일

 

잠에서 깨지 않는 엄마 곁에 누워 가슴을 만지고

취한 아버지 몰래 날카로운 것들의 끝을 부러뜨리고

한데 모아 입안에 털어 삼키는 일

남몰래 혀를 씹는 버릇 같은 일

 

배 나온 알몸을 거울에 오래 비춰보고

거울 속 어디에 나를 방치하면

내가 잠에서 깨어나 잇몸을 보이며 웃는 일

오늘이 오후로 접혀 버려지는 그런

 

 

김지윤

1985년. 전남 나주 출생.

대진대 국문과 졸업 . kjygosu@naver.com

 

 

심사평

... 중략

  김소현, 김지연,김지윤의 시를 최종심에 올렸다...(중략)

  김지윤을 당선자로 뽑는다. 그의 시는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에 비해 소탈하다. 그래서 천천히 마음을 움직이는 개성을 가졌다. 무엇보다도 기계적으로 학습된 수사에 기대지 않고 문장의 흐름 위에 자신의 정념을 위치시키는 방법론이 인상적이었다. 만약 이것이 반복된 학습의 결과라면 그의 시는 시적 기술을 극복한 사례이며, 반대로 절실한 표현의 효과라면 그의 정서는 자체로 시적인 결을 이룬다고 할만하다. 요컨데 그의 시가 거대하거나 완벽하거나 새롭게 때문에 심사자들이 그의 시를 꼽은 것은 아니다. 시적 전략과 과잉의 포즈가 만연한 시단에 비추어, 그가 보여준 직정과  낮은 어조와 소박한 도달이 좋았다. 당선자는 이 점에 대한 반성과 자부를 함께 가져야 할 것이다.

  독자가 없으면 시는 존재할 수 없다. 시를 두고 벌어지는 수많은 논의 속에서 가끔 잊게 되는 말이다. 심사자들은 첫 독자로서 작품에 감동하기를 원했다. 아쉽게 당선하지 못한 응모자들에게는 격려를,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보낸다

-심사위원 : 김소연 백상웅. 신용목

 

 

 

출처 :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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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불리나의 침대 외 4편 / 지관순

 

오르탕스 부인보다는 부불리나, 그렇게 불러주세요  

무슨 나팔 이름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내 허리에 감겼던 깃발을 기념하는 일이지요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그를 기다리며   

새벽바다로 간 침대를 모른 척하기 좋은 이름이지요  

 

조르바, 아아 나쁜 새끼  

이건 앵무새가 그를 부르는 소리  

그가 꼭 나빠서 그런 건 아니에요  

과부들의 침대가 며칠 결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듯이 
그도 이별하지 않고 떠날 권리가 있죠  

 

 살아간다는 것이 가벼운 먼지처럼 느껴지면   

 함께 낡아온 침대 귀퉁이를 쓰다듬으며 외쳐요  

 아가멤논호여. 이제 출정이다  

 바다로 간 침대는 목숨을 걸고 싸우지만  

 파선되기 직전에야 돌아올 수 있었지요 그러나 

 

떠난다는 건 안전을 확인하러 가는 건 아니고  

산다는 것 또한 별일 없이 살기 위한 건 아니니까요  

밤이면 달은 선인장 같은 내 등과 한쪽만 따뜻한 침대를  

저울에 올려 놓고 조롱했어요  

외로움을 계량하는 바늘이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몰라요  

창피했지만 이젠 그것도 옛일,  

죽음의 입김이 나를 휘발시키려 하네요  

시간은 더 매달려 있고 싶은 과일을 떨어뜨리고   

합의 따위는 없어서 늘 소송에 휘말리지요  

 

내 소원이 뭐냐구요  

그건 별들이 차가운 발을 위로하러 이불 속에 들어왔다가  

내 침대에 두 명이 산다는 것을 알고 놀라 캄캄해지는 일 

 

조르바, 이 나쁘은.  

쉿, 앵무새여 부디 

  

육지가 보이네요  

이제 조금 있으면 정박하겠군요 다행히 난 파선되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이상해요  

멀미가 막 시작됐거든요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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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울음 감별법

 

호로로공장이 가동되기 위하여  

배추흰나비애벌레는 아침 일찍   

꼬물거리는 허리와 솜털을 납품했다
살구나무 꽃은 눈이 닿을 때마다 
옷을 한 겹씩 벗어 흥을 돋우었고

주파수 맞지 않는 라디오는 

좁쌀을 굴리며 리듬 박스를 틀었다

굴뚝에선 연기가 꿀렁꿀렁 흘러나와

하늘로 전단지를 뿌렸다

 

한때 이 공장 연구실에선

신제품을 개발한답시고

노래와 울음을 분리시킨 적이 있었다

입을 벌리고 있다는 점에서,

전선줄이나 나뭇가지 가설무대에 올라갔다는 점에서 

종일 노래만 부른 날 저녁엔

참기름 띄운 노른자를 호로록 넘겼다

온몸을 들썩거린다는 점에서

다 듣고 난 후 사람들이 박수를 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울음만으로 출장 갔던 날 저녁엔

사라지지 않는 애조를 밤새도록 헹궈냈다

 

노래 사이에 낀 울음은 노래처럼 들리고

울음 사이에 낀 노래는 

울음처럼 들리는 결함이 발견됐지만

입맛대로 조절할 수 있다는 장점만 믿고 

시중에 내놓았다가 전량 리콜하기도 했다

한동안 앙코르의 환청에 시달렸다

 

누구는 구조의 문제라고 하고

누구는 기분의 문제라 했다

후일 연구일지 구석에서 낙서를 발견했다

울음인지 노래인지 감별하려는 바보들아

그건 간단하다

밥 먹기 전엔 울음, 밥 먹고 나면 노래!

 


연잎 치마

 

여름 내내 감침질한 항아리치마
줄기가 꺾어지자

치맛단 한 올 한 올 풀어 헤치며

물로 풍덩 뛰어드는데

 

치마 안에 시쳐둔 노을이 쏟아지는 거라

알을 슬고 간 잠자리 체위가 미끄러지는 거라

침 꼴깍 삼키고 있던

쇠물닭 발자국 흩어지는 거라

멋도 모르고 물속이 두 폭 환해지는 거라

 

물살이 비칠거리며 

낡은 숨소리 부축하러 왔다가

개구리 울음소리로 꿰맨 솔기

쩡 갈라놓고 가는 거라

 

물 밖에서 흔들리던 거미줄 하나 

놀라서 끊어지는 거라

대각선으로 버티며 졸던 바람도 툭 끊어져

만국기처럼 펄럭거리는 거라

멀리서 날아가던 쇠목테갈매기

영문도 모르고 중심을 잃는 거라

 

항아리치마 접시치마 되던 날에

 

  

감정 산책


산딸나무 꽃이 접히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양산을 펴지 않았고

파란 하늘이 묽어질까봐 

수돗물을 세게 틀지 않았다 

 

보도블록의 금을 밟으면 어젯밤 꿈이 출렁

중앙선을

툭툭 차며 걸었다 

 

까치발을 해도 까치는 나를 모른 척해서

두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나에게 안녕?

 

내 목덜미가 

햇빛 잘 드는 창이 될 수 있다며

개미들이 줄지어 올라오고 있었다

 

충돌을 피하기 위해

바람은 구름보다 늦게 출발했으나 

내 입 속을 경유해도 되는 지 묻지 않았다

혀가 마를 시간이 필요했다

 

검정색 페인트 냄새가 시간을 불러 모았다

다 마르지 않은 머리카락이 

어둠의 실금으로 몰려가 쭈뼛 서고

젤리로 만든 그늘은 자꾸 벽에서 흘러내렸다

 

물고기가 뜬 눈으로 뒤척이는 동안

나는 하나의 이름도 무거워

산딸나무 꽃 귀마개를 샀다

 

모든 감정을 침대에 넣고 잠갔다 

거미줄에 걸린 잠을 잤다           
           

 


  
뿌리야,     

이름이 잘못 불릴 때 뿔은 발바닥이 간지럽다    

양분을 먹고 산다는 점에서      

늘 곤두서 있다는 점에서 같은 가문이지만      

뿔은 물구나무 서 본 일이 없다  

  

뿔은 감정의 기상청이어서    

흐려질 때마다      

뿌우뿌우 각적을 불어     

눈물을 피신시키고  

   

무릎이 턱을 당겨와 골몰하는 저녁      

사다리를 내려      

지붕의 느낌을 산책시켜 주곤 한다 

    

구름과 밤늦게 어울려 다니다가     

비의 기분도 한 권 읽어보다가      

간혹 황소자리와 맞짱 뜨는 밤      

기진맥진해지는 잠의 시간을 좋아한다  

 

물론 잘못 불려진 이름을 꿈꾸는 밤도 있다     

한 칸씩 밟고 올라오면 뿌리도 뿔이 될 수 있을까     

한 칸씩 내려가면 나도 뿌리가 될 수 있을까 

      

이런 밤에도 접히지 못하는 뿔은
물구나무 선 꿈의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뿌리 닮은 뿔이 태어날 때까지  

 

 


[최치원신인문학상 수상소감]

 

  오후에 장바구니를 메고 걸으면 나를 돌려세우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막 날아오르는 새들, 안색이 바뀌는 하늘, 굳은 몸으로도 바람에 날갯짓을 쉬지 않는 배추흰나비, 그럴수록 엉키는 나무의 잎차례, 암호를 내지르고 사라지는 오토바이, 마치 그것이 내 몸에서 흘러나온 풍경 같아서 나를 들여다봅니다. 도대체 이 풍경들은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납작하고 검은 입술을 가진 보도블록 위의 현자, 껌 자국이 답합니다. 무엇을 보든 그것은 당신 자신이라고. 그들과 대화하던 것들이 시가 되었습니다. 
  제가 쓴 시의 대부분은 장바구니의 마술이고 식재료들의 둔갑술이었습니다.

 

  시적인 것과 시 사이에서 멀미하던 날들을 저는 몽상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그 몽상을 가득 채우던 와인과 바람과 노을을 사랑합니다. 문득 깨어나면 사막이었고 막 부서지려는 파도 위였고 어지러운 부엌이었습니다. 그 몽상을 끓여 식탁에 올렸습니다.
  사람이 밥으로만 살 것이 아니어서 식탁엔 반찬보다 책들이 더 많았습니다. 하지만 책을 집어먹을 만큼 난시는 아니어서 성장기의 아이들은 꾸준히 성장했고 갱년기를 앞둔 남편과 나는 편안한 속도로 늙어갑니다.

 

  중학교 은사님께 보냈던 편지 한 줄로 나의 시는 시작되었습니다. 시의 문을 열어주시고 정신을 새겨주신 이원구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병일 선생님, 선생님께서 살려주신 형용사절 한 줄을 껴안고 뒹굴던 습작의 밤들은 벌써 추억입니다. 선생님의 지도편달과 격려가 없었다면 저는 이 자리에 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큰 감사를 드립니다.
  제게 문학의 요람이 된 도봉도서관, 그곳에서 1년 동안 함께 공부한 문우들, 내 영감을 건드려주는 블로그 친구들, 그리고 귀한 동생 경효에게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아빠의 눈물을 닦고 자랑이 되겠습니다. 엄마, 나 때문에 한 번 크게 웃으셨죠? 사랑합니다. 글쓰기 방해될까봐 일부러 전화도 삼가시는 어머니, 말없이 응시하시고 응원해주시는 아버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다빈아, 엄마의 행운과 기를 받아 올해 좋은 결과 있기를 바란다. 멋있게 잘 자라는 찬빈아, 그리고 굳은 밥 마른반찬 묵묵히 참아주는 성진씨, 사랑합니다.

 

  졸시에 문인수 선생님, 황인숙 선생님, 홍일표 선생님의 콧김과 손길이 스쳤다는 것만으로도 전율이 입니다. 앞으로 더욱 깊고 낮은 눈동자를 가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 시가 어딘가에서 화해의 역할을, 어긋남에서 돌이키는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영광이겠습니다.

 

  오늘은 평화로운 폭염주의보가 있던 날이었습니다.

 

지관순
1968년 충남 서산 출생. 제 32회 마로니에 전국여성백일장 우수상 수상.
제 15회 안산 전국여성 백일장 장원.
이메일 ksvioletta@hanmail.net

 


[최치원신인문학상 심사평]

 

  심사위원들이 신인들에게 먼저 요구하는 것은 참신성이다. 기성 시인들이 수많은 시를 통하여 우려낸 것들이 아닌 자신만의 정공법을 가지고 시를 끌고 나가는 것이다. 자칫 기교를 먼저 배운 신인들이 장식적인 화려한 수사에 멈칫거린다면 앞으로의 행보에 빨간불이 켜진 것이다. 조금 거칠지만 안주하지 않은 자세가 필요하다. 그래야만 이 험난한 시단의 가시밭길을 제대로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예심(163명)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일곱 분의 것이었다. 김이솝의 「대봉」 외 9편, 김태인의 「새둥지를 그리세요」 외 4편, 시한의 「점령에 관하여」 외 4편, 조수일의 「늪은,」 외 4편, 지관순의 「부불리나의 침대」 외 4편, 황현민의 「빨간 거미줄」 외 4편, 허민의 「불안의 덧칠」 외 4편이 그것이다. 그중에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주목하여 논의했던 작품은 「부불리나의 침대」 외 4편, 김이솝의 「대봉」 외 9편이었다.

 

  김이솝의 작품은 전통 서정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일상적인 농경의 소재를 가지고도 충분히 자신의 시세계를 열어가고 있으나 작품 수준의 편차에서 점수를 잃었다. 
  심사위원 모두 흔쾌히 지관순 시인의 응모작을 최치원신인문학상 당선자로 택했다. 수확이 끝난 포도나무 잎사귀 아래서 참으로 탐스럽고 싱싱한 포도송이를 발견한 느낌이랄까. 한눈에 번쩍 들어오는 시편들이었다. 등단 전인 게 맞나 싶게 유유히 언어를 갖고 놀며 탄탄한 서사를 구축하는 능숙함! 경험이든 상상력이든 풍부한 듯 느껴지는 이 새로운 시인이 맛보여주는 유머러스하고 풍부한 수사, 그에 속속 배인 관능과 갈증이 다른 시들에서는 어떻게 펼쳐질까 기대된다. 축하드리고 환영합니다! 
 
심사위원: 문인수(시인), 황인숙(시인), 홍일표(시인) (대표집필 황인숙)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안은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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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련의 오차 (외 4편)

 

최연수

 

 

 

그해, 인구조사는

호흡 가파른 동네를 오르내렸다

 

목련나무 마디 굵은 손이 가리킨 골목

오래거나 갓 핀 송이를 통계 낸 필체가 흐릿한지

가지는 여러 번 센 숫자를 담에 눌러 적었다

 

눈 먼 봉오리들이 발을 헛딛는 높은 지대

샛길은 몰래 짐 가방을 챙겨 내려가고

올라오지 않는 소식을 괄호로 남겨두듯

나무는 숨은 꽃을 암산으로 헤아렸다

 

무료함만 켜놓고 일 나간 집들

익숙한 이름을 들고 다시 골목 칸칸을 두드릴 때면

지붕을 밟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산 번지 빈칸을 채운

고요 한 채와 찢어진 연과 붕붕거리는 꽃의 시종들

눈부신 외출을 마친

인기척 없는 신발을 센 나는 사월 옆에 숫자 2를 적었다

 

마른 젖을 물린 어미개와 마주친 순간 녹슨 고리처럼

표정이 얽혔다 풀어지고

서류철엔 몇 마리 울음이 추가되었다

 

계약직 같은 봄날, 낮과 밤이 다른 오차와 통계

수수료를 떼듯

하얀 방에 들어앉은 목련 촉이 팍, 끊어지고

학점과 맞바꾼 길에선 저걱 저걱 유리 밟는 소리가 났다

 

 

 

고양이캔디

 

  

하품을 뱉는 한낮에

누가 설탕을 뿌려놓았을까

 

누운 그림자를 따라 정오마저 가지런해지면

노란 포도알이 가물가물 닫힌다

수염에 찔린 비린 햇살이 나비모양으로 흩어진다

 

네 다리를 늘어뜨린 나른한 호흡을

쪽쪽 빨아먹는 바닥

볕은 셀로판지처럼 바스락거리고

지붕에서 옥상으로 건너뛰던 아슬한 착지와

골목을 뒤지던 배고픔이 따스한 손에 다 녹는다

 

오물오물

고양이를 아껴먹는 노파

고요한 하품이 주름진 입 속으로 뛰어든다

 

떠도는 울음을 불러 갈치 한 토막을 굽는 동안

발톱은 안으로 휘어졌다

매끄러운 소리를 무릎담요로 덮고 앉으면

말랑하고 끈적끈적해지는 기류

 

쓰다듬을수록 동그래지는 사탕

침침한 눈과 귀로 녹여먹는 뒷맛이 달다

 

  

드므*

 

 

주술이 통하는 곳이 얼굴이라면,

신은 가장 잘 속아 넘어가는 것들로 이목구비를 만들었다

 

어떤 사무친 마음 있는지

물거울 속 또렷한 얼굴이 중얼거리고

내 손가락에 놀란 수피水皮가 재빨리 지문을 찍었다

 

어느 궁에서 본 드므 속엔 밤마다 당황한 불이 있었다

슬며시 다가와 비추는 순간,

말끄러미 올려다봤다는 화마

떠다니는 달에 황급히 얼굴을 벗어 걸어도

푸시시 불은 꺼졌다고 했다

 

얼마나 부끄러웠으면 제 자신을 꺼버려야만 했을까

놀란 걸음이 서둘러 빠져나가고

잠시 고요한 파문이 남았을 것이다

 

불을 다스리는 건 냉수밖에 없지,

가슴을 끈 아버지에게선 여울목 물소리가 났다

그래도 남은 화기가 있는지

약수 한 통 받아들고 오솔길을 내려가셨다

 

그 밤, 냉장고를 열자

낯익은 손이 방금 다녀갔는지 흔들리다 잦아든 갈증

유리컵으로 옮긴

찰랑이는 거울 속엔 여전히 화끈거리는 내가 있었다

 

 

* 넓적하게 생긴 큰 독. 火魔가 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도망을 간다는 주술적 의미.

 

 

 

우산의 시간

 

  

엄마를 따라간 그날, 공장에는 두개의 문이 있었다

 

왼쪽을 열면 정오의 해가,

오른쪽을 열면 구름이 내걸리고

 

심장 쪽을 믿는 엄마가 우측 문을 열자

구름을 숨긴 포자들이 날아들었다

섶다리 밀려온 수상한 기미가 함께 떠다녔다​

 

검은 하늘은 자주 무너졌다

손잡이 망가진 우리 집, 아버지는 사진 속에서만 웃었다 ​

 

꽃무늬 양산을 내던지고 우산공장으로 출근한 엄마

챙 좁은 우산 같은 월급 속으로 뛰어든 우리는

젖은 서로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슬레이트지붕에 대못이 박히는 시간

살이 부러진 여름은 길에 나뒹굴고

구멍 난 하늘이 방 안 양동이 속으로 뛰어내렸다

구름사촌이었던 우리는 퐁, 퐁, 리듬에 맞춰 잠이 들었다

 

정오의 해를 찾아 나선 부도난 양산의 계절

먹구름 몰래 펼쳐든 우리들 웃음에서

녹슨 쇳소리가 났다

 

 

 

프릴의 계절

 

  

음료를 삼키는

건조한 그의 후두가 펌프질을 했다

 

빨대 꽂힌 주스 팩이 홀쭉해졌다

 

꽃들이 모두 뛰어내린 허전한 목

바람이 핥는 꽃대가 불안하다

마지막 꽃냄새를 들이켜는 바람의 양볼이 쏙 들어간다

 

프릴은 허전한 목들이 하루를 사는 방식

꽃잎 무성한 계절,

꽃나무들이 몇 겹 주름 속으로 속내를 감춘다

 

변종된 겹 백일홍이 숨긴 뒤편은 수상쩍고

목도리도마뱀의 프릴은 치명적인 무기다

 

지금은 시린 발을 감춘

늙은 연밥이 거꾸로 매달리는 계절

황혼은 거리의 불빛들을 숲으로 끌어오고

목이 허전한 나뭇가지들이 노을 목도리를 칭칭 감는다

 

움츠린 외투 안주머니에 그의 봄날이 있듯

노란 부리를 감싼

숲속 프릴 속에는 숨겨둔 온기가 있다

 

 

 

최연수

 2015년 《시산맥》, 영주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누에, 섶을 뜨겁게 껴안다』, 평론집『이 시인을 조명한다』.

 

 

            —시산맥 2015년 봄호

출처 :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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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물 밑에서 / 김성일

 

그 할머니는 각서를 썼다고 했다

죽어도 괜찮다고 각서를 썼다고 했다

가족들도 괜찮다고 각서를 썼다고 했다

그래야 아파트 청소부로 취직할 수 있었다고 했다

 

뜨겁던 하늘에서 돌연, 비가 많이 내린 날에

언덕에는 폭포가 생기고

검은 강이 아스팔트를 덮었다

강남 땅에 유난히도 많이 다니던 자동차들은

흙탕물 속에 둥둥

연못의 개구리 마냥 떠다녔다

 

높은 아파트에서 살던 사람들은 피난을 가고

아파트에는 이제 경비 보는 사람들이랑 청소하는 사람들이랑

그 사람들을 감시하는 사람들이랑

그렇게만 남았다고 한다

 

어느 날 그 할머니는

시커멓게 물에 잠긴 지하를 청소하러 내려갔다고 한다

물은 그득하고 사람도 없는데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몰라서 모르는 건지 알아서 모르는 건지도 모른다고 한다

어쨌든 모른다고 한다

검은 물 밑을 청소하던 할머니는

그대로 검은 물 밑에 가라앉았다고 한다

 

땅 위에는 자동차가 둥둥

땅 밑에는 빗자루가 둥둥

그렇게 검은 물이 세상을 나누고 있었다고 한다

 

물이 걷히고 햇볕이 오르고

그제서야 자기 집으로 돌아온 사람들은

검은 물 밑에 무언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고 한다

무언가가 무어인지는

몰라서 모르는 건지 알아서 모르는 건지 몰라도

어쨌든 몰랐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것들을 검은 물 밑에 그냥 두자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어느 날 다른 청소부를 불러다가

물도, 물 속의 모든 것도 쓸어내다 버렸다고 한다

 

그 뒤에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어쨌든 아무도 모른다고 한다

 

 

 

<시 심사평>

아쉽게도 작년에 비해 응모자의 수가 큰 폭으로 줄었다. 성급한 진단을 자제해야 하겠으나 아무래도 세월호 사건의 충격과 비통이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라 짐작된다. 그 충격과 비통은 펜을 들어 무언가를 말해야 한다는 절박감을 높이지만, 동시에, 그 어떤 문장도 쉽게 쓸 수 없게 하는 무력감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지난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분들이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할 수 없다’라는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고투했을까 우리는 짐작해 보았다. 이런 와중에도 몇몇 분들의 작품이 우리의 눈길을 끌었다.

대상에 선정되지 못했으나 심사위원들의 호감을 이끌어낸 분들의 이름을 적는다. <형> 외 5편을 보내준 한교만씨는 구면이었다. 지난해 응모작들 중에서 <살아있는 별>이라는 작품이 높은 평가를 받았었거니와 이 작품과 함께 새로운 작품 몇 편을 함께 보내주었다. 역시나 단단한 완성도를 자랑하는 시들이었다. 그러나 ‘시를 쓰기 위한 시’ 혹은 ‘잘 만들어진 시’라는 인상을 주기도 한다는 점에 대해서 스스로 고민을 해 볼 때가 아닌가 한다. <가면> 외 9편을 보내준 김대성씨나 <파우스트> 외 8편을 보내준 이경자씨의 작품도 인상적이었다. 이미지에 의한 ‘우회’와 솔직한 진술에 힘입는 ‘직진’을 유려하게 병행할 줄 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시를 쓸 줄 아는 분들이다. 그러나 관념이 생경하게 노출되는 장면들이 더러 있어 이를 좀 더 세련되게 통제하면 어땠을까 싶다. <안 한다고는 못한다> 외 8편을 보내준 이수안씨와 <길을 묻다> 외 4편을 보내준 성용구씨의 이름도 적어두고 싶다. 다른 응모자들에 비해 아직은 손길이 거칠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이분들은 진심을 힘 있게 전달할 줄 안다. 기교의 수련이 더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그것이 저 힘 있는 진심을 훼손하지는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대상은 <도토리의 계보>외 4편을 보내준 김성일씨에게 주어졌다. 김성일씨를 당선자로 뽑는 데에는 일찌감치 합의가 이루어졌으나, 다섯 편의 시 중에서 어떤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야 할지를 두고 고심했다. 그만큼 각 시편이 소재 면에서는 다채롭고 완성도 면에서는 대등했다. 역사 속에서 고통 받은 이들, 사회적 죽음에 내몰린 이들에 주목하면서 그와 같은 비극의 이면에 어떤 ‘구조적 원인’이 있는지를 하나의 서사 혹은 우화로 축조해내는 능력이 출중했다. 당선작이 된 <검은 물 밑에서>는 우리시대의 계급격차와 비인간성을 ‘폭우로 인해 검은 물이 들어 차 있는 지하실에서의 비극적 죽음’이라는 강렬한 설정으로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검은 물속에 잠겨 있는 시체가 끝내 외면되고 폐기되는 결말은, 어쩌면 시인의 의도를 초과해서, 세월호의 비극을 환기하는 측면도 있다. 고통스러워도 눈 부릅뜨고 읽어야 할 이 작품을 올해의 당선작으로 천거하는 데 우리는 숙연한 마음으로 합의했다.
 

 

이시영, 나희덕,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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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와 오후 / 임지은

 

둘둘 말아놓은 오후는 옷장 밑으로 굴러 들어간다

꺼내려 할수록 더 깊숙이 처박힌다

개가 인형을 물고 뜯는다는 것은

산책이 필요하다는 신호

나는 움직이고 싶은 생각이 없다

 

시계에서 꺼낸 숫자를 개에게 던져준다

그러자 한 시이면서 세 시인

게으르면서 일곱 시인 개가 다가와 얼굴을 핥는다

개의 혀는 무섭도록 따뜻하고 돌기가 있다

차가운 음료에 맺힌 오후가

개의 콧잔등을 적신다

 

먼지를 뒤집어쓴 개는

손바닥만 한 햇빛을 베고 잠이 든다

나는 숫자가 다 떨어진 시계를 쳐다본다

언제 발끝에 오후가 물들었는지 지워지지 않는다

비누처럼 미끄러운 것이 필요하다

 

한시야, 세 시야, 얼어붙은 일곱 시야

아무리 불러도 시계는 움직이지 않고

검은 개만이 일어나 눈앞에 놓인 오후를 삼켜버린다

오후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털이 나 있다

으르렁 소리를 낸다

순식간에 문밖으로 달아난다

 

개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오후를 보낸다

일 년이 넘도록 개는 돌아오지 않고

낮은 문턱이 있는 방바닥을 쓸어본다

읽을 수 없는 숫자처럼 생긴 털들이 잔뜩 묻어난다

 

나는 털을 뭉쳐 조금 늦은 한 시를 만든다

신발이 벗겨진 세 시를 만든다

옆면이 구겨진 일곱 시를 만든다

처음 보는 시간들로 시계를 가득 채운다

오후가 조금 다른 속도로 흐르기 시작한다

 

그늘을 머리끝까지 덮고 잠이 든다

꿈속으로 검은 개가 찾아온다

개는 꼬리를 흔든다

뜨거운 오줌을 싼다

발끝이 하얗게 물들어서 지워지지 않는다

죽음처럼 축축한 것을 입에 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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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실감 / 임정민

   

캠핑이 극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후원자에게도 시민에게도 역할이 있었다 검은 원피스를 입은 자들은 어느 쪽에 앉습니까 두건을 쓴 자들과는 어떤 언어로 말합니까 묻자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하고만 답했다 임신한 자들이 무전했다 자전거를 끄는 자들이 나중에 트로피를 들 것이오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의 포스터가 붙었다 천막을 가리는 자들은 항상 천막의 반대편을 가리킨 채 서 있었다 아기에게 따뜻한 입김이 있는 것을 알고 밤에 후원자는 아기를 들고서 비를 맞는다 침대를 가져다 놓는 일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가구상들은 죽었고 해부되었다 국적이 있는 자들 또한 해부되었다 그리고 말했다 우리가 해부되는 일은 묘한 회화성을 가진다네 너희만 남은 야영에 파문이 있을 너희만 남은 야영에

 

천막의 안에 불이 켜졌다 동경의 문제가 남았다 천막의 안은 벽과 바닥이 같은 색으로 칠해질 것이라 했다 페인트를 든 자들이 들어온 문으로 나갔다 여전히 동경의 문제가 남았다

천막의 안에서 태어난 여자들이 처녀가 되어서 나올 것이며

힘줄과 살로 움직일 것이 예정되었다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의 포스터처럼

 

관목과 관목 중간에 관목을 심는 자들이 있었는데 백일 된 아이들과 백일에 며칠을 더한 아이들이 그들을 지목했다 그들은 빗속에서 지목당했다 그들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고개를 들고 차분히 말했다 탑과 탑 중간에 탑을 쌓읍시다 후원자가 말했다 우리는 환호 대신에 무엇을 합니까 그들이 말했다 환호 대신에 간격이오 후원자가 말했다 환호 대신에? 그들이 말했다 환호 대신이라면 굴삭기의 동작이오

 

술에 취한 자들은 숨었거나 애초에 없었다 아무도 그들을 경멸하지도 동정하지도 않았지만 처음부터 없었다 캠핑은 여전히

코너이므로

술에 취한 자들을 모두 그리워했다

양손에

찌그러진 자비를 들고

할멈들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자비를 손에 든 할멈들이 모르는 언어로 아름다운지를 묻고 그것을 모두에게 건네며 이미지의 주머니랑 바꿨다

맨 마지막에 검은 원피스 입은 자들만 남았다

굴삭기의 소음 앞에서 공중에 먹구름이 있소……의 포스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실제로 먹구름이 있었다 후원자는 지쳤다 자러 갔다

 

할멈들은 아름다운지 묻지도 않고

검은 원피스 입은 자들을 빼앗았다

그들은 찌그러진 자비를 남기고 떠났다

지팡이가 없었으므로

외국이나 다름없는 야영장을 걸어서 나가진 못했을 것이고

근처에 남았거나

탈 것이 있었다

 

전차의 안이 파멸의 안은 아니지요? 여기에 모인 자비들이 찌그러진 가마솥은 아니지요? 하고 묻는 어디에나 있는 어린 사냥꾼들

 

야영장의 그림자마다 각자의 차양이 있었다 아기를 들고 선 자들과 무거운 물체들 간에 갈등이 있었다 청년들은 물체의 편에 섰다 물체의 편에 서는 일은 환호를 대체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변하기 쉬웠고 단지 지목을 피해 갈 뿐이었다 비가 그치면 재주 있는 자들은 캠핑하지 않는다 비가 그치면 캠핑은 사라진다 포스터를 가리는 자들이 포스터의 귀퉁이가 되었다 비가 그치면 사냥꾼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막의 안과 자리를 바꾼다

 

포박당한 자들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묶인 손을 푸는 동안 처녀들과 농담을 주고받았다

농담을 주고받고 난 다음 청년의 편에 섰다

처음으로 물체의 편에서 생각하기로 했지만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그것이

그들의 쓰임새였다

 

반지를 낀 자들이 미로 속에서 뒷걸음을 쳤다 하나의 반지를 나눠 낀 자들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을 벽돌 이상으로 무거운 자들이라고 불렀다

예외 없는 기다란 울음의 입에 벽돌 이상으로 무거운 입을 맞췄다

미로 속에서 입맞춤이

방향을 모르고 떠다녔다

 

전차의 안으로 흘러 들어간 입맞춤을 전차가 토해 낼 때까지 그랬다

어린 사냥꾼들이 숲을 만들었고

숲에서 야영장이 자랐다 밤에

아기를 들고서 비를 맞는 사람들 앞에 야영장이 자랐다

숲은 물체의 역할이었다

자비를 남기고 간 할멈들은 끝없이 어두운 숲 속에 숨어

주머니를 쪼아 먹고 있었고

입맞춤은 그자들의 입술까지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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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변* / 배정훈

 

 

세죽細竹이 늘어선 마을 어귀

어린 백구가 강동거리며 뛰놀고

주인 모를 고깃배들

붉고 푸른 깃발이 비늘처럼 결을 타고 운다.

수족관마다 산호珊瑚 마냥 쌓인 게들

울긋한 소주 향내와 같이 타는 겨울 바다

더불어 붉어지는 한 세상을 지켜보며

술 취한 어부들

때로는 수줍었고 번잡했던

삶의 그물을 거둔다.

바다야 온전하겠지만

바람 많은 동네에 터 잡고 낚는 세월은 고래처럼

그리 만만한 게 아니라.

부네 손등에는 손금이 놓이고

짓지 않아도 될 쓴 근심이 수의壽衣처럼 짜였더라.

창자처럼 이어진 골목들

일렁이는 불빛들

애 끓는 단장斷腸도 한 시절인데

창을 두드리는 주먹 쥔 해풍海風

부대끼는 댓닙 그 새로

 

바다의 눈시울이 붉다.

 

* 경북 울진군의 한 지방

 

 

 

 

 

[심사평]

 

올해에는 응모작품수도 예년보다 많고 뛰어난 작품도 많이 눈에 띄어 심사자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심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과연 배정훈의 죽변’, ‘’, 이가은의 이명(耳鳴)’ 등의 작품이 발견됨으로써 심사자들의 기대는 어긋나지 않았다.

 

죽변은 자칫 평범한 서경시로 떨어질 소재다. 물론 이 시는 한 아름다운 바닷말을 그린 서경시로 읽어도 시를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맛보게 해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맛은 거기에만 있지 않다. 아름다운 바닷마을 모습을 통하여, 또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일상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기쁨과 슬픔을 보여 준다. 과장된 표현이나 작위적인 비유가 없는 것도 시의 품격을 높인다. 시가 막힘없이 읽히는 것은 그에 걸맞는 리듬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은 소품이지만 어느 한 구석 빈 곳이 없는 말끔한 시다. 어쩌면 시는 이처럼 아무 것도 얘기하는 것이 없으면서 많은 얘기를 할 때 더 좋은 시가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시는 종종 너무 많은 것을 얘기하려다가 시의 맛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다만 이 시가 당선작이 될 때는 신인으로서의 패기가 모자라는 작품이라는 지적을 받을 수는 있다.

 

이명(耳鳴)’은 아주 유니크한 시다. 시형식도 시어들도 신선하다. 요즘 투고시 중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것이 일정한 전제를 앞에 놓고 연역적으로 그것을 풀어가는 것 같은 형식이거나 그 변형인 것들인데 투고시편중 한 편도 그런 것이 없다는 것은 이 투고자가 이른바 시창작강좌의 나쁜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증좌 같아 반갑기도 하다.

내용도 진부한 도덕주의나 속보이는 시민공동체주의 같은 것은 멀리 벗어던지고 있어 신선하다.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아무한테도 구애받지 않고 할말을 다 하는 활달함과 당당함도 마음에 둔다. 당연히 당선작이 될만한 작품이다. 그러나 선자들은 죽변이명(耳鳴)’ 두 작품을 놓고 토의 끝에, ‘이명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죽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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