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닐손의 장어 / 최윤정

 

 

우주의 하루를 살았다

 

하늘은 가장자리가 부서져 내렸지만 둥긂을 포기하지 않았다

 

바람은 어디서 불어오는가,를 생각하는데 오전을 보내고

 

구름 귀퉁이를 기어가다 미끄러진 지렁이를 잡아먹는 동안

 

느루 내리는 비처럼 은사시나무의 오후가 지나갔다

 

고함치듯 뛰어다니는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

 

무지막지하게 지붕을 덮어버린 꽃잎이나 잠깐

 

흘러들어온 냄새에 온 정신이 홀리기도 했지만

 

그것이 시간의 다른 얼굴이라면 나는 잠시 시간을 사랑했던 것

 

나의 하루는 길어서 이미 사라진 시간의 꽁무니 뒤로

 

수만 마리의 새가 부리를 비비며 날아갔다

 

나뭇잎 한 장이 만든 그늘 아래 고개를 묻고

 

어쩐지 경건한 마음으로 어제를 떠올리는 건

 

기도 없이는 할 수 없는 일, 손대신 온몸을 모은다

 

찰나에도 떴다 지는 별과 무시로 바뀌는 바람의 온도

 

둥글고 긴 허공을 이해하는 동안 귀돌에 새겨진 시간들

 

새가 떠난 나뭇가지처럼, 나뭇가지 그림자를 부풀리며 지는 해처럼

 

돌아보면 침묵같이 아득한 하루를 살았다

 

 

 

 

*닐손의 장어=1859년 당시 8살이었던 사무엘 닐손이 우물에 던진 후, 20148월 죽은 것이 발견될 때까지 155년 이상을 살았다는 뱀장어.

 

 

 

 

 

 

 

[당선소감] “손 놓고 싶던 순간 여러번 오갔다

 

나무 아래 앉아 숲을 보려 한 시간이 길었다. 나무를 떠나 한참을 걸었다고 생각했지만, 돌아보면 아직도 숲은 제 모습을 다 보여주지 않는다. 내게 시는 숲과 같다. 아직 제대로 본 적 없으므로 그저 추측하고 상상해서 숲을 그릴 뿐이다.

 

누군가는 사물을 오래 바라보면 그 사물이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사물과 대화 하려 노력했지만 내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내게 사물은 언제나 묵묵부답이므로 그저 사물에 나를 기대놓고 그것이 되어보려 노력할 뿐이다.

 

가끔은 내가 쓴 시들이 거짓말 같아서 손 놓고 싶은 순간들이 여러 번 오갔다. 열등의 시간이 머릿속의 욕심도 어깨에 든 힘도 내려놓게 했다.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지만 여전히 내가 쓴 시들을 돌아보면 부끄러울 뿐이다.

 

아직 숲을 보기 위해 갈 길이 먼 내게 심사위원께서 올려주신 짐 하나를 달게 지고 가겠다. 심사위원님과 김유정신인문학상 관계자께 감사드린다.

 

머리 맞대고 시 이야기만으로도 행복했던 비상 식구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늘 내 곁을 지켜주는 가족에게 오래도록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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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다운 감각·참신성 결여 아쉬워

 

예심을 통해 넘어 온 작품은 정연희 외 12명이었다.

 

대부분의 응모작이 삶의 내면이나 이와 유사한 일상의 풍경에 대하여 성찰의 시각과 열정을 보여 준 반면 사회성의 반영이나 다소 무거운 주제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탐구랄까 새로운 삶을 발견하려는 노력보다는 관념의 고착이나 작품에 대한 안전성이 더 고려된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표현의 난삽함과 모호성 등을 우정 피해 가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한편 거개의 작품들이 지나치게 길고 산문적인 경향을 보이고 있어서 요즘 세상에 대하여 할 말이 많다거나 복잡다단한 삶을 몇 행의 시로 감당하기 어렵다는 걸 여실히 증명하기도 했지만 그러한 이유들로 시가 운명적으로 운문의 영역이라는 게 무색해 보이기도 했다.

 

한미정 이지성 김순희 최윤정 등이 끝까지 남았으나 작품의 완성도나 사유의 깊이 등으로 보아 최윤정의 닐손의 장어가 낙점을 받았다. 당선작 외에도 또 다른 그의 작품들이 그를 받쳐주는 것이 든든한 이유이기도 했다.

 

최윤정은 155년 이상을 우물 속에서 살았다는 장어를 통하여 거대한 시간 속에 매몰된 존재를 받아들이고 투시하는 사유의 공간을 보여준다. 그가 인식하고 소비하는 공간성의 구체화가 그것인데 그것은 시간에 대한 우주적 느낌과 시각, 좀 더 크게 말한다면 무한한 시간의 공간 속에 유한한 인간의 시간을 대비시키면서 우리를 유장한 우주적 흐름에 합류하게 하는 스케일을 보여주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언어 사용과 수사적인 면에서 신인다운 감각이나 참신성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당선자에게 앞으로 남은 숙제이기도 할 것이다.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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