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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를 알아가다 / 서귀옥

 

 

얼마나 천천히

몸을 대보는 지요 아스팔트 위에서

겉돌았던 생을 자책하듯 틈새기 찾으며

보도블록들이 공중에 쏟아지지 않게 꽉 붙들고

누가 몰래 이 별의 불룩한 자루 속을 뒤지나

누가 자꾸 이 별의 아픈 데를 헤집나 알아내겠다는 듯

민들레를 펼쳐놓고 안테나 뽑고 있네요

빗물에 둥둥 뜬 노란 암호를 풀면서

웅덩이로 풍선을 불면서

자전거바퀴에 감긴 빗방울 체인을 휙휙 채면서

스며들기 좋은 데를 기웃거리네요

이 별의 마디마디 흠집이 저리 깊었나, 다 읽히고 마네요

저러다 밟히면 어쩌나 싶어도 흙투성이로 뒹굴고 차이는 일들이

이 바닥을 알아가는 일이라는데요

진창에 바람 불어넣어 씨앗을 터뜨리기도 하고

꼬챙이 휘두르며 꽃밭을 들쑤시다가 부러지기도 하는데요

하긴 차갑게 스며들지 않고서

어떻게 이 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겠어요

태양이 높이 튀어 올랐다 내려오는 사이

뜨겁던 꽃이 식어버리고

버드나무에 앉은 매미 울음소리가 홀쭉해지고

차갑게 얼어붙은 처마의 톱니 날 풀리는 것들이 모두

별의 깊은 데에 몸 대보는 일이지요

흙빛을 닮아가기 위해 몸속 거친 끈 하나

풀어놓는 일이지요

 

 

 

 

 

[수상소감] “이제 할 일은 독창성·신선함 찾기”

 

  한 사내를 사랑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다. 영화를 본 날부터 나는 키팅과 시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사내를 보듯 대놓고 시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봐라, 그것이 틀리고 바보스러울지라도 시도를 해봐라!”라며 책상 위에 올라서는 그를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 마음의 여유 정도 부리듯 습작을 해왔던 나는 마치 대낮 길거리에서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죽고 못 사는 애인 삼아 시를 좇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시에 걷어차일 때마다 ‘내 삶의 목적을 한층 보람되게 하려고…’라며 수치를 무릅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치고받고 밀고 당기는 동안 나도 시도 얼룩덜룩해졌다. 분명한 것은 시도 아주 멀리 달아나지 않고 내 옆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겪은 것들이 고스란히 스며들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말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손을 뻗었더니 비로소 시의 감촉이 만져졌다. 거친 내 발뒤꿈치의 질감과 비슷했다. 어쩌면 나는 시를 따라다닌답시고 내 그림자를 좇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눈 먼 집착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져 결여된 독창성이나 신선함을 찾는 일, 사랑도 좀 세련되게 하는 일이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 감사드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을 터, 이제 그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찾아 그 존재만의 옷을 해 입히겠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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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다운 기발한 발상·기법 아쉬워

 

  예선을 거친 10명의 응모작 50여 편은 두 심사위원에게 우송되어 각기 심사를 했다. 그 결과 응모자 3명 내외의 작품이 각자 선정되었고, 9월 23일(월요일) 김유정문학촌에서 만나, 각자가 선정한 작품을 중심으로 토의를 거쳐 합의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두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작품은 서귀옥씨의 4편, 장모란씨의 3편, 이향숙씨와 최주현씨의 작품이 각기 2편씩이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4편의 작품이 선정된 서귀옥씨가 당선신인으로 결정되었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최우수작으로 <지렁이를 알아가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응모자들의 작품 50여 편은 대체로 고른 수준의 작품이라는 의견이었으나, 체험적 설득력이 약한 듯, 서술과 기교에서도 지나친 감추기로 내용의 연결과 시적 승화가 허약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4명의 작품들은 내공의 깊이가 헤아려지고, 소통의 보편성이 무난한 수작으로 평가되었지만, 참신성이나 기발함에서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예술작품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비슷함이어서, “비슷하면 가짜다”라고 공인되었는데, 응모작품들의 발상 및 주제가 엇비슷했고, 심지어는 제목이 동일한 경우도 있었다. 왠지 기성시인들이 수도 없이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을 별 감동 없이 재활용한 듯, 단지 무난한 수준에 이른 듯한 느낌도 떨칠 수 없었다.

  신인다운 기발한 발상이나 기법을 신인에게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 신작과 신인다움이라서 많이 아쉬웠다. 더욱이 같은 응모자의 작품들끼리도 서로 엇비슷한 시상과 전개과정이어서 작품별로 나타나주어야 하는 그 작품 나름의 독자성 유일함 등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적지 않은 아쉬움에도, 소통에 결정적인 약점이 되는 지나친 감추기가 아닌, 즉 너무 감추지 않으면서도, 참신하다고 평가되는 서귀옥씨의 <지렁이를 알아가다>,‘물수제비를 뜨다’,‘빈자리’,‘웅덩이’,‘풀’ 등의 작품은 그 중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었다. 장모란씨의 ‘신장개업’과 ‘쌍화점’, 최주현씨의 ‘소금쟁이, 날아오르다’,‘선지국’과, 이향숙씨의 ‘허공에 머물다’,‘별을 달다’도 발상의 신선함과 점증점강의 기교도 돋보였음을 밝히고 싶다.

  서귀옥씨의 <지렁이를 알아가다> 역시 서술 상 다소 복잡한 느낌이었다. 시는 언어 경제학적이라는 특성과,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면 강조점이 희석되고 만다는 사실도 잊지 않기 바라면서, 우리문단에 우뚝한 시인으로 대성하기 바란다. 당선신인으로 선정됨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정현종·유안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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