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의 둥지 / 안광숙
땅속 깊은 곳까지 봄을 심은 건 누구일까
산책 나온 달이 갓 출산한 감자꽃에 머물다 가는 밤
하얀 스위치 같은 저 꽃잎을 켜서 줄기를 타고 내려가면
알 밴 감자들이 세들어 살고 있을거야
땅속 환하게 어둠을 불 밝히며
도란도란 뿌리내린 새끼감자들이 있을거야
둥근 알들끼리 툭, 하고 어깨를 부딪혀도
상처가 나지 않아 마데카솔이 필요없는 땅속 마을
날카로운 아카시아 뿌리가 신경줄기를 건드려도
거참, 너털웃음 한번 웃고 나면
맛나게 풀리고마는 순박한 이들의 터,
저 깊은 땅 밑에도
흙으로 막걸리를 빚어 미소를 틔워주는 지렁이가 있고
짠눈물과 더 고소하게 퍼져가는 사랑이 자라난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서 있는 땅이 꼬물거린다
땅속의 소식을 알려주듯
갈라진 뒷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올라오는
따스한 이야기가 사는 마을
장난치던 바람이 뿌리혹박테리아를 빠져나오는 밤,
아직 동화가 살아 있는 지하 마을에는
통통하게 살찐 봄이 감자를 키우고 있을거야
발고랑속, 빼곡한 어미들이
포슬포슬 알전구를 켜고 아이들의 구겨진 단잠을 다려 펴주겠지
새끼달이 강물 속에 태어난 지 한참 지난 오늘밤
노랗게 여물어가는 아랫마을,
온통 깜깜해서 더 눈부시게 익어간다
[당선소감] “가슴 속 구멍에 차곡차곡 시 쌓아”
저녁밥을 지으면서 친정엄마를 떠올렸다. 털곰팡이균의 침범으로 한쪽 눈을 도려내고 다시 유아기로 넘어오신 엄마. 얼굴에 작은 우물 하나 품고 사시는 당신.
그때부터 내 가슴에도 동그란 구멍하나 생겼다. 무언가를 채우려고 할수록 자꾸만 깊어지는 구멍, 허기진 그곳에 시들을 차곡차곡 쟁여 놓았다. 엄마에게 도착하는 내 언어는 언제나 핑계들로 가득했다. 이제 그 변명들을 한소쿠리 담아 엄마의 식탁에 올려 드리고 싶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정현종, 이상국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낮은 자세로 열심히 쓰겠다. 뼈를 열고 활짝 쏟아부어 가르쳐주신 박종현 스승님, 시우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어머니 김삼순여사, 친정식구들, 남편 이용석, 착한곰 이영준, 예쁜딸 이지안. 부족한 한 여자를 보듬어주어 감사인사를 전한다.
- 애드픽 제휴 광고이며, 소정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습니다.
[심사평] “긴 호흡 살아있는 행간의 숨결 탁월”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 유영삼의 ‘그믐’, 김정희의 ‘수국’, 김도형의 ‘수목장’ 그리고 안광숙의 ‘감자의 둥지’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 ‘그믐’과 ‘수국’은 전통 서정시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으나 본인들의 여타 작품과의 결이 달랐고 ‘수목장’은 시의 폭이 협소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긴 호흡과 행간의 숨결이 살아있는 ‘감자의 둥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는 언어로 쓰여지지만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당연히 언어의 배후인 사유와 지적 자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응모작품 대부분이 지닌 사유의 불구성과 자기도취적 요설, 그리고 언어 곡예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 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언어를 동원했음에도 작품들이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력의 문제다. 그것은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확대하면 우리 사는 세상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적 교양이나 감수성 정도로 시가 된다고 믿는 것은 우리 서정시에 대한 일종의 폭력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시를 쓰는 사람들도 문학이 심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살기도 힘든데 엄숙함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문학이 삶을 가볍고 유희적으로 바라봐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축하와 함께 시인을 꿈꾸는 이들의 고투에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문예지 신인상 > 김유정신인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 당선자 없음 (0) | 2020.02.23 |
---|---|
2018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 지이산 (0) | 2018.10.16 |
2016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 어향숙 (0) | 2017.09.07 |
2015년 김유정 신인 문학상 / 김상현 (0) | 2015.09.23 |
2014년 김유정 신인문학상 / 최윤정 (0) | 2014.10.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