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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_ 가정(외 4편) / 최지은

 

                                                심사위원 : 이영광 문태준 신미나 박준(이상 시인)

 

가정 (외 4편)

 

   최지은

 

 

 

우리는 말이 없다 낳은 사람은 그럴 수 있지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도

그럴 수 있지 우리는 동생을 나눠 가진 사이니까

그럴 수 있지

 

저녁상 앞에서 생각한다

 

죽은 이를 나누어 가진 사람들이 모두 모이면 한 사람이 완성된다

 

싹이 오른 감자였다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없는 푸른 감자

엄마는 그것으로 된장을 끓이고

우리는 뱃소리를 씹으며 감자를 삼키고

이 비는 계절을 쉽게 끝내려 한다

 

커튼처럼 출렁이는 바닥

주인을 모르는

손톱으로 주웠다

 

나는 몰래 그것을 서랍 안에 넣는다

서랍장 뒤로 넘어가버린 것들을 생각하면서

 

서랍을 열면 사진 속의 동생이 웃고 있다

손을 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다

환한 햇살이 완성되고 있었다

 

우리는 각자의 방으로 흩어진다

 

우리가 눈 감으면

우리를 보러 오는 한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거기 있었다

 

 

 

기록

 

 

 

구름을 그리던 손이 젖는다

 

주먹을 쥐면

구름은 작아질까

비가 올까

 

구름을 보며 코끼리를 생각한 적은 있어도

코끼리를 보며 구름을 떠올린 적은 없지

 

이런 내가

구름을 완성할 수 있을까

 

테두리를 모두 닫아도 되는 걸까

 

열린 선과 선 사이로

 

바람이 불고

빗방울이 고이고

소문이 있고

그 밑에서 하염없이 태어나는 아이들의

아이와 아이와 아이들

 

아무에게도 발견되지 못한 소녀와

소녀의 이마 위로 떨어지는 하나의 빗방울을 생각한다

 

붓을 놓으면

이미 젖은 그림이다

 

창밖에는

검은 물이 가득하다

 

 

 

내가 태어날 때까지

 

 

 

   걷고 있다고 말했다 밤이라고 말했다 그대들은 밤에 어울리는 어둠을 찾았다 눈동자처럼 깊은 어둠이었다고 하자 그대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남자와 그 여자가 있었다 두 사람은 이야기 속에서 걷고 있었다 서로의 부은 손을 잡고 있었다 방 한 칸을 얻으려 했다 깊은 밤을 배경에 두고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가 되려고 걷고 있었다 남자와 여자는 노래를 만들었다 포개진 유리그릇처럼 어울리는 몸이었다 둘은 노래 속에서 다른 몸이 되어 갔다 나는 끝없이 노래를 이야기했다 그대들이 만들어내는 멜로디 안에서 노래는 완성되고 노래 속에서 여자의 몸은 붓고 있었다 나는 이야기 속에서 이야기했다 나를 낳은 사람과 낳은 사람을 낳은 사람들의 이야기 끝을 모르는 이야기 나는 작아지기도 했다 팔과 다리를 집어넣고 기억을 지우고 끝으로 끝으로 뒷걸음질하기도 했다 깊은 밤을 배경에 두고 걷고 있었다 이야기는 나를 환대하며 앞으로 앞으로 다가왔다 이야기 속에서 나는 태어나고 있었다

 

 

 

우리들

 

 

 

   심야버스였다. 내릴 곳을 몇 정거장 앞에 두고, 밝은 빛이 덤벼드는 검은 도로 위에 있었다. 우리들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냉장고에는 내가 오면 나누어 먹으려던 한 소쿠리의 무른 딸기. 잘자리에 과일을 먹어 어쩌니. 우리 중 한 사람이 말하고. 자꾸만 흐르는 과즙. 말없이 과일을 입에 물고서. 우리는 이불과 이불을 덧대어 잠자리를 만든다. 이불을 덧댄 자리에 서로 눕겠다고 조그맣게 같이 웃고. 이제 자야지. 그래 자야지 그만 자야지. 미루고 미루는 잠. 먼저 잠드는 사람이 있고 잠이 들려 하는 사람이 있고. 잠들기 위해 먼 길을 온 사람이 있고. 한 사람은 깨어 있기로 한다. 어금니에 낀 딸기 씨를 혀끝으로 건드리면서 잠은 어떻게 드는 거였더라. 서로의 잠을 위해 잠자는 우리들. 눈뜨면 아직도 어두운 새벽이고. 나를 핥는 검은 개. 몇 해 전 이 방에서 죽은 그 검은 개. 어쩐 일이야 물으면 작고 붉은 혀로 나를 핥으며. 개는 외국어를 말하는 것 같다. 혀는 더 부드러워져서 손은 녹을 것만 같고. 아직 밖은 어두운데. 이불 속에서 몸을 일으키는 한 사람. 나는 본다. 헝클어진 머리. 손을 뻗어 액자를 손에 쥐는 한 사람. 바라보고 있다. 어두운 방안에 누워. 사진 속에 나는 개를 안고서. 웃고 있었다. 여전히 개는 나를 핥고. 이 장면 속에 내가 있었다.

 

 

 

벌레

 

 

 

   이 방의 주인은 아무 때나 이 방의 불을 밝히는 사람이다. 갑자기 환해지고 한꺼번에 어두워지는 이 방에서 자매는 종종 눈이 멀곤 했다.

   자매는 종일 이불 위에서 논다. 언니는 부모됨을 배운다며 달걀을 품고 다니고, 동생은 국어책을 펼치고 앉아 괄호를 그리고 있다. 이 괄호와 저 괄호가 등을 맞대고, 나비처럼. 그 사이를 건너뛰며 놀러 다녔다. 지워지는 비밀들이 생길 때마다 슬픈 소설이 되어갔다.

   사람이 사람을 낳는다니. 신기하지 않아? 여자가 아들을 낳는다니. 두렵지 않아? 나는 태어난 날을 모르고. 엄마의 기일도 모르고. 이런 건 왜 부끄러워지는 걸까? 자매는 마주 앉아 끝말잇기를 한다. 둘만 아는 이름을 불러와 놀려주고 쓰다듬다가 아주 잊어버리고.

   사촌이 다녀간 날이면 동생은 자꾸 목이 마르다고 했다. 물을 마시며 생각나는 것들은 반성문이 되어갔다. 맹물을 마시고도 설탕물처럼 끈적거리는 기억들. 날계란처럼 미끄러지는 시간들. 소녀들의 반성문은 얼마나 더 길어질까.

   물을 다 마시고 나면 아무것도 하고 싶은 것이 없었다. 자매는 오래 목이 말랐다. 물 위에도 집을 짓고 사는 벌레들이 있었다.

   때로 너무 작은 벌레들은 있는 힘껏 손가락을 놀려도 죽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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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은(崔智恩)

1986년생. 세종대 국어국문학신문방송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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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요약

 

   최지은의 시는 사유의 넓이와 감각의 깊이에서 길어 올린 것들로 신산한 생활의 풍경을 담담하게 늘어놓는 진술들이 돋보였다. 시인은 순간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이내 감추는 삶의 불길함들을 곧잘 포착해내는 뛰어난 동체시력을 갖고 있다. 그리고 이것들을 다시 시로 재현해낼 때에는 자신만이 보고 느낀 특수한 미감만을 내세우지 않고 타인의 정서에도 곱게 가닿을 수 있는 보편적 아름다움을 획득해낸다는 점도 큰 장점으로 생각되었다.

 

 

 

                    —《창작과비평》2017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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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물상의 봄 / 어향숙

 

 

어린 날의 보물창고 필순이네 고물상

 

마당에는 꿈을 재던 커다란 저울이 있고, 그 옆 벽에는 깨진 거울이 걸려있어 곧잘 우리의 마음을 들키곤 했다 버려진 뾰족구두에 헐렁한 원피스를 걸치고 절뚝거리며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볕이 잘 드는 모퉁이에 쪼그려 앉아 배는 부르지 않아도 빈 깡통들이 차려주는 밥상을 소리 내어 맛있게 먹었다 가끔 엿을 고던 가마솥을 빡빡 긁어 입천장에 붙이고 그 달콤한 맛에 찐득이는 손으로 자주 솥뚜껑을 열었다

 

양손에 빈병 하나씩 들고 아이들이 코를 훌쩍이며 뛰어왔다 담 밑에서 별꽃들이 눈을 반짝이며 기다려주었다 훌쩍 자란 우리 키 만큼 나팔꽃이 담벼락을 타고 올랐다

 

고철더미에 엉덩이를 걸친 금성흑백 텔레비 위에서 겉표지가 떨어져 나간 순정만화를 읽었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던 캔디와 나의 첫사랑 테리우스를 만났다

 

마당가 민들레꽃은 자꾸 결말을 재촉했다

 

납작 엎드려 우리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가슴이 부풀 때마다 푸른 하늘로 꽃씨를 날려 보냈다 그 꽃씨를 따라 우리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당선소감] “시인·독자 즐길 수 있는 시 쓰고 싶어

 

가끔 시간을 가로질러 어린 날의 필순이네 고물상에 가곤 합니다. 그곳은 지금도 내 상상력의 놀이터입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는데도 늘 생생한 모습으로 있어서 좋습니다. 신나게 놀다 보면 창문으로 새벽이 들어와 옆에 서있을 때가 많습니다. 힘들지만 즐거운 일입니다. 앞으로 시인도, 독자도 함께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심사평]

 

 

 

문학은 대체적으로 인간과 그 삶을 표현하고자 한다.그러나 대부분의 응모작들에게서 사람의 체취와 삶의 진정성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있다 하여도 피상적이거나 어설픈 수사에 불과할 뿐. 이를테면 살아가는 일에 대한 사랑이나 그리움은 보이지 않았다.

 

로댕의 의자는 언어에 대한 단련이 상당했으나 여타 작품들이 그것을 도와주지 못했다.당선작인 고물상의 봄은 어떤 기시감이 느껴지기도 했으나 사물들이 환기시켜주는 삶의 구체성이 돋보였다. 다만 추억과 그리움에만 머문 생각을 좀 더 확장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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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희사이버대학교 문화창조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전공을 졸업한 어향숙(사진, 11학번)씨가 '2016년 김유정 신인문학상'에서 시 부문('고물상의 봄')으로 수상했다.

 

서울 동대문구에서 10여 년 동안 약사로 일해 온 그는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기 이전에도 대한약사회의 '제3회 이가탄 한국약사문학상'과 서울시약사회의 '제1회 한독문학상'에서 수상할 만큼 탁월한 시적 재능을 드러냈다.

 

수상소감으로 그는 "사람들에게 효험을 주는 시를 쓰고 싶다. '생각한 대로 길을 걸어가라'고 북돋아주는 것 같아 무척 기쁘다. 프랑스 철학자이자 시인 가스통 바슐라르가 '시는 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들 자신의 것이다'라고 말한 것처럼 독자와 함께 공감하고, 즐길 수 있는 시를 쓰고 싶다"고 밝혔다.

 

그의 수상작인 '고물상의 봄'이라는 시는 어린 시절 단짝 친구 명숙이네 고물상집을 배경으로 초등학생 때의 추억을 담았다. 미디어문예창작전공을 졸업하기 전까지 어향숙 졸업생은 약 100편의 시를 써놓았다. 그동안 써온 시로 문학상에 도전하기로 마음먹었고, 올해 김유정 신인문학상 수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약사로 일하면서 몸과 마음이 가장 힘들고 지쳤을 때, 시를 쓰게 됐다"며 "시 몸과 마음을 치료하는 약"이라고 말했다.

 

시를 쓰면서 시를 좀 더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약사로 일을 하면서도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공부할 수 있다는 점에서 경희사이버대 대학원 미디어문예창작전공에 입학했다"고 입학한 배경을 밝혔다.

 

미디어문예창작을 전공하고 나서 어씨는 사람과 사물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됐다. 김기택·이봉일·홍용희 교수 등에게서 문학 전반에 관한 깊이 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고, 온·오프라인 세미나 역시 실력을 쌓는데 큰 도움이 됐다.

 

졸업 후에도 전공의 온라인 세미나에 참석해온 그는 교수진의 첨삭 지도를 받으며 '2016년 김유정 신인문학상'을 준비할 수 있었다. 전공 스터디 모임인 '서지', '수다예찬'에서 졸업 후에도 꾸준히 참여해 재학생·졸업생들과 교류하며, 서로 다독이면서 시를 써나갈 수 있었다.

 

좋아하는 작가와 책으로 프랑시스 퐁주의 '테이블', 조광제의 '주름진 작은 몸들로 된 몸', 롤랑 바르트의 '텍스트의 즐거움', 허연의 '오십미터'·'불온한 검은 피'를 꼽은 어씨는 앞으로의 계획으로 "시 창작에 열중할 것이다. 약사들을 위한 글쓰기 강의를 하고 싶다. 기회가 되면 독자들과 시를 나누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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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의 전개 외


윤은성





영원이라는 말을 쓴다 겨울의 도끼라는 말처럼 우연히 여기라고 쓴다 공원이라고 쓴다 누군가를 지나친 기분이 들었으므로


모자를 벗어두고 기타를 치고 있는가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아이의 다리 위로 그대는 날아가려 하는가 발을 버둥 가릴 때 옷깃을 쥐려 하는 손들이 생기고


손목을 내리찍으려고 돌아다니는 도끼


물이 어는 속도로
얼음이 갈라지는 속도로
겨울의 공원이 생기지. 해가 저물도록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사나이여
그대의 곁에서 넘어지고 일어서는 어린 수리공들
우리는 우리의 작업을
언제든 완료할 수 있지,


그저 꽃잎을 떨구면 그저 붉은색

페인트 통을 엎지르면


상점은 짜부라지면서 물건을 토해내지, 상점의 주인처럼 주인의 집주인처럼 이빨들이 썩어가지, 그림자에서는 머리카락이 점점 길어지고 그대의 책장이 넘어가고
또 해가 저물지, 테이블 위의 물컵은 놓아둔 그대로 있는데 무엇이 여기서 더 아름다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의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네, 우는 말들을 내버려두고 그대의 늙은 신부들이 먼 도망을 준비한다


수리공이 모이자
그대에게 주려던 꽃이 굳고
페인트가 빠르게 갈라지기 시작한다




의자 밑에서 듣는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악수하는 두 마리의 코끼리를 본다거나
검은 승용차가 집 앞에 도착한다거나


손을 귀처럼 떨군다 물방울마다 창문이 비친다 투명은 어디에든 차 있는가 창문은 아귀가 맞지 않는 종인가


이런 창밖을 기억한다 볕이 지글거리는, 남자가 걷어찬 푸른 의자 같고 의자의 주인인 노인의 다리 같고, 그녀가 내다 놓은 마른 선인장 같은,
골목을 돌아 나가는 고양이의 얼룩 같은


그런 뺨을 기억한다


그가 지났던 곳에 생긴 그을음을
깨진 접시 위에서 파닥거리는 날생선을
그녀가 문지른 뺨에서 떨어지는 소금을


의자가 다시 접착되는 순서에 상관없이
해약하는 계약들의 종류에 상관없이


하루 중 한 순간은 기대어 손을 편다
벽과 손 사이에 화흔火痕인 두 개의 눈이 있다


갈라지는 손바닥, 두 마리의 코끼리와 그 사이의 코끼리
포트가 끓어오르고 손등 위로 오토바이가 지나간다 휘발유 냄새가 끼쳐오고 사라지는 기나긴 오후
이런 오후로부터 바닥의 청중들은 생기지
어느 벽으로든 튀어 오르고 싶다


점심을 먹고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화흔에 물이 모인다
네 개의 귀 사이에서 얼룩이 잠깐 웃는다




파티션



내가 티스픈으로 계단을 휘젖는다 할지라도
석양이 얼음의 관절을 파고든다 할지라도


얼음의 여름이 가파르고 얼음의 무릎들은 호흡의 간격이고 나는 나의 속도를 늦출 수 없고


시계가 느립니다
1초의 간격은 어디서부터 정지한 석양입니까


기념일에 귀가하지 못하는 자세처럼 등뼈의 관념이 가로등을 닮아가고 분침이 없는 눈동자 안에 눈동자 없는 광장 안에 바람이 불지 않고


시계의 표정은 어디에서 비롯된 전차입니까
얼굴이 궤도에서 노동은 어디서 멈춥니까


                                *


굴곡으로만 이루어진 총탄이라 할자라도
만국기가 흩날리는 액자 속이라 할지라도


화분이 점점 느립니다 어항이 점점 느립니다 팔꿈치를 얹어 놓을 탁자가 느립니다


새파란 사나이와 더 새파란 사나이 사이
유리의 벽을 생각할 때 깨지고 다시 붙는 공기의 속도
이 혈관의 지속을 멈출 수 없고


창이 지나가고 탁자가 삐걱이고 나의 팔꿈치가 기우뚱하고
고개를 내미는 자리와 고개를 집어넣는 자리와


살갗에 늘어붙은 탄피를 끍어내며
서로를 마주 보는 사나이들



윤은성
1987년 전남 해남 출생
중앙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재학 중
2017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당선


-「문학과사회」 2017년 여름호

출처 : 시인회의
글쓴이 : 미소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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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백


이은정




그해, 컬러텔레비젼 시험방송이 있었다. 연예인들이 우리와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컬러로 봄이 오고
있었지만 교실은 흑백에서 흑백의 교과를 배우는 날들이었다


느닫없이 빨간 폭풍이 중계되었다. 방송국이 불타고 흑백의
피가, 붉게 흘러나오던 친구들이 다시 영정 속으로 들어갔다
불행은 흑백이어도 좋았을 걸, 컬러로 만나는 이환한 죽음들
이라니, 불길 속에서 맞서던 검은 연기와 오열하는 흰 연기들,
어떤 진실도 송출되지 않던 컬러텔레비젼 시험 방송기간, 해
가 바뀌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온 나라가 총천연색 봄을 정식
으로 맞이했다


사라진 흑백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드문드문 빈 자리의 교
실에서 언제나처럼 단색으로 앉아 있던 우리들, 목련이 지고
라일락이 피고  사라진 친구들이 빨갛게 불리어지던 다음 해인
가 아니면 그 다음 해였던가 교복 자율화가 되었지만 몇몇 친
구들은 여전히 카루란과 세일러복을 입고 있었다 컬러를 거부
한 이들은 사각의 틀에 갇힌 지도 수십여 년, 눈물조차 훔칠
수 없는 소매 끝엔 사슬에 묶인 무색의 시간들이 줄줄이 감겨
있을 것이다


흑백의 세월을 천연히 갈아입고도 그 봄은 무슨 자백을 강
요한 것인지, 심실의 문은 혈기 짙은 역류를 막기 위해 끊임없
이 적색 신호를 보내는 것이려니, 그때 알았다 우리 몸속엔
컬러의 피가 속속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이은정
강원도 정선 출생. 제6회 독도문예대전 특별상 

출처 : 시인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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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부는 아침 / 강성원

 

 

붉은 바닷가의 집

녹색 커튼을 살며시 열어보는 아침 해

내려다보는 백사장엔 모시조개가 제 살을 비우고

날아오를 듯 흰나비로 앉아 있다

먼 길 가려는 바람은 물너울을 타고 온다

모래톱 위를 종종종 걷는 물떼새

안개는 빨판을 달고 배 한 척 붙들어 놓지를 않는다

 

길을 내려가 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손바닥

잠든 바위를 깨우다 시퍼렇게 멍이 다 들었다

파도는 모래사장에 음표를 새겨두고

도레시 라솔미 오르내린다

바다가 들려주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악

사랑이란 단어를 적어 넣으면

오선지 위에서 저토록 따뜻하게

꽃으로 피는 말이 있을까

 

바다를 향해 걸어가다

, 그만큼의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해안선

메꽃이 피어 호른을 분다

맨 처음 입술을 열 때 첫사랑이 저랬을 것이다

한 잎 수줍은 입술이 파르르 떨다

천천히 입을 오므린다

 

 

 

 

[당선소감 낮은 곳에 눈길 두고 희망 노래하는 시인 되고파

 

오월의 하늘 아래 빛들의 산란이 꽃처럼 눈부신 이 봄날 무뎌진 시상과 각이 흘러내리는 어깨 위에 기꺼이 죽비를 내려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 지용신인문학상 운영위원회 관계자님들 그리고 동양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써오는 동안 이곳저곳 등단이라는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되뇌면서 견뎌왔기에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연이 맺어진 찬·민 두 아들과 아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다시 일어서서 이 길이 내 운명임을 알고 생이 끝나는 날까지 깊어지고 멀리 가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무작정 문학공부를 시작했지만 내 시의 첫 발원지이자 큰 바다라 할 수 있는 젊은 날의 해맥문학동인들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시는 지금의 문우님들께도 시로써 아침 인사를 드립니다.

 

제 시가 이제 막 피어나는 들꽃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의 무게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눈가에 슬픔도 없이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알맞은 시적 변용·언어 묘미 잘 살려

 

해조음 들려오는 한적한 바닷가 정경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솜씨 놀라워

독창적 시적 구성·참신한 이미지 전개

신인작품 범주 뛰어넘는 대단한 성취

 

올해 지용 신인문학상 응모작품을 심사하면서 새삼 정지용 시인이 우리 현대시사에 끼친 상당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시의 위의와 품격을 누구보다 강조한 지용은 갑남을녀가 쓰는 생활어를 빼어난 시적 언어로 재구성하여 당대에는 물론 그후 오늘날까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는 드높은 높이까지 밀어올린 현대시사의 상징적 시인이 되었다. 지용은 청록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모든 시인 지망생에게 하나의 교과서 같은 문법을 제시해주었고 우리 현대시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해 온 것이었다.

 

해마다 방방곡곡에서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하는 수백명의 신인들도 지용시가 지닌 이러한 문학사적 가치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용신인문학상이 흔히 있는 하나의 문화행사를 뛰어넘어서 오늘 이 시점의 문학적 역량을 살피고 우리 현대시의 수준과 안목을 표출해주는 중요한 문학적 이벤트가 된다는 점은 여타의 신인 문학작품 현상모집과는 뚜렷하게 변별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최종적으로 논의 된 작품은 호른 부는 아침’(강성원/여수), ‘나이테’(박성수/광주), ‘소나무 방정식’(오정숙/서울), ‘말수’(신용대/대전) 네 편이었다. 다 나름대로의 개성과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으로 습작의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이 가운데서 강성원의 호른 부는 아침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이 작품은 아주 알맞은 시적 변용과 언어의 묘미를 잘 살린 탁월한 수준이어서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다. 해조음이 들려오는 한적한 바닷가의 한 정경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 떼면서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놀라운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제 살을 비운 모시조개-물너울을 지나 부는 바람-모래톱 위의 물떼새-찰싹찰싹 대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가 그리는 모래사장 위의 오선지와 음표들- 호른을 부는 메꽃’. 이와 같은 독창적인 시적 구성과 참신한 이미지의 전개는 신인작품의 범주를 뛰어넘는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쉽게 당선권에서 밀려났지만 나머지 세 분의 작품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나이테소나무 방정식은 반듯하고 정직하게 시적 진실을 토로해주고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했지만 시적 여운 같은 게 없이 너무 곧이곧대로 시의 주제를 표면에 내세워서 아쉬웠다. ‘말수(唜樹)’는 아주 독특한 상상력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이채로웠다. 제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나무라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시의 주제가 잠언적인 관념 속으로 함몰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들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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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창비신인시인당선작] 한연희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외 4

 

수박이 아닌 것들에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그러니까 얼어붙은 강, 누군가와 마주 잡은 손의 온기, 창문을 꼭꼭 닫아놓고서 누운 밤, 쟁반 가득 쌓인 귤껍질들이 말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여름은 창을 열고 나를 눅눅하게 만들기를 좋아한다 물이끼처럼 자꾸 방 안에 자라는 냄새들이, 귤 알갱이처럼 똑똑 씹히는 말들이 혓바닥에서 미끄러진다 곰이 그 위에 누워 있다

 

동물원 우리에 갇힌 곰이, 수박을 우걱우걱 먹어치우던 곰이 나를 쳐다본다 곰에게서 침 범벅의 수박물이 떨어진다 여기가 동물원이 아니라 내 방이라는 것을 알아갈 때쯤, 나는 혼자 남아 8월을 벗어난다

 

그러니까 수박이 아닌 것들을 좋아한다 차가운 방바닥에 눕는 것을 좋아한다 피가 나도록 긁는 것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것들이 땀띠처럼 늘어난다 그러니까 나는 이 여름을 죽도록 좋아한다

 

햇빛이 끈질기게 커튼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다 잎사귀의 뒷면과 그늘 사이를 벌려놓는다 먹다 남긴 수박껍질에 초파리가 꼬인다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림자를 내쫓는 중이다 쌓인 빨래더미 위에, 식은 밥그릇 위에 고요가 내려앉는다

 

그러나 의지와 상관없이 종아리에 털들이 자라나는 걸,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는 걸, 화분의 상추들이 맹렬하게 죽어가는 걸 여름은 내내 지켜보고 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쏟아지는 말을 주워 담을 수가 없다

 

 

 

 

파프리카로 말하기

 


도마 위에 파프리카 하나가 놓여 있다
일요일이 건네준 파프리카
이상하게 커다란 파프리카
파프리카를 씹어 먹으며 파프리카 파프리카 아프리카
자꾸자꾸 불렀다
뭉툭한 발가락들이 사라질 때까지
새로운 뿔이 생겨날 때까지
이상하고 아름다운 털들이 자라날 때까지 파프리카를 씹었다
달력에 표시한 오늘은 내가 세상에 태어난 날
축하해 축하해 나는 제대로 잊기로 하자
멀리 떠나 집으로 돌아오지 말자
엄마는 고장 난 냉장고 슬리퍼는 히스테릭한 강아지
아빠는 죽은 심장의 태엽장치 아기의 혓바닥을 먹은 나는 눈알을 도려낸 천사
새롭다는 기분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상한 작용을 만들어
폭주족 천사가 되어 영혼을 마구마구 더럽히자
파프리카는 어디서 태어나서 언제 죽어가는 것일까
저렇게 태연한 얼굴로 일요일들을 견딘 것일까
모래밭을 뒤적이다 얼굴을 든 저 개는 짖어본 적이 있을까
평원을 내달리는 치타를 본 적도 없는 내가
달려나간다
천사의 기도가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파프리카를 구하시옵소서

 

 

 


지갑 두고 나왔다

 

 

엄마를 두고 나왔다
집에서 한참을 멀어진 후에야 깨달았다
손안에 들어 있어야 할 엄마 손이 보이질 않았다

 

봄이 온 것 같았는데 꽃이 보이질  않았고
비가 온 것 같았는데 물웅덩이가 고이질 않았다
전봇대와 전봇대 사이를 최대한 느리게 걸으며
엄마와 화분은 얼마나 다른가 하고 생각했다

 

소파에서 식탁으로 침대로 화장실로 화분을 자꾸 옮겨놓았다
시들어버린 엄마를 어떻게든 회복하려고 했지만 화분은 죽고 말았다

 

엄마, 나도 엄마야
엄마가 하기 싫은 엄마야
벤치 같은 데다 흘려놓고 깜빡한 우산처럼 시시해져버린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 않았다
지갑 속에 넣는 걸 깜빡한 동전들이 가방 속에서 짤랑댔다
걸을 때마다 엄마, 엄마 부르는 것 같아
목이 자꾸 말랐다

 

세탁소에 걸린 셔츠들 사이에서 엄마 원피스를 보았다
슈퍼마켓 앞에서 식료품을 고르는 파마머리 엄마를 보았다
철물점에서 모종삽과 퇴비를 사는 엄마 손가락을 보았다

 

그러나 가방 속을 아무리 뒤져도 보이질 않았다
생수 한 병을 사는 나는, 결코 엄마가 아닌 나는

어, 지갑 두고 나왔다


계산대 옆에서 훌쩍 자라난 딸이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엄마는 어디에 가 있는 거야?

 

 

 

 

자주 틀리는  맞춤법

 

 

일기 속에 오늘을 틀리게 써넣었다. 언니는 자주 모서리에 부딪힌다 나는 현명하다 골목은 흔한 배경이다 옆집 개는 죽는다 똥개야 살지 마 언니야 던지지 마 휘갈겨 쓴 문장들을 언니는 몰래 훔쳐 읽었다. 그리고 화를 냈다. 낮은 계단에게나, 새는 물컵에게나, 쭈그려 앉은 개에게나, 길 한복판에서 내게. 너는 왜 늘 네 멋대로니?

 

곧 바뀔 거라고 믿은 빨강은 멈췄다. 행인들이 그냥 건너가버렸다. 언니가 틀렸다. 나는 운이 많은 아이니까. 셋만 세면 언니가 다시 돌아올 거니까. 나는 숫자의 비밀을 알고 있으니까. 사거리에서 언니가 뒤돌아봤다. 내가 알고 있던 언니는 없었다. 언니야 괘찬지마 언니야 도라오지 마 어떡게 어떻해 멈추지 마

 

건너편 간판엔 각종 찌개 팜니다 어름있읍니다 나으 죄를 사하여 주십시오 옳바른 행동교정 이상한 글자들이 좋았다. 내 이야기가 비뚤어질수록 좋았다. 아무도 날 교정하지 못하는 게 좋았다. 정답과 멀어진 내가 좋았다. 틀린 간판은 어디에든 걸려 있고. 언제든 글자를 거꾸로 읽을 수 있으니까. 사라진 언니를 떠올리는 대신 오늘의 날씨를 읽었다.

 

맞춤법은 틀렸어, 기상예보는 틀렸어, 앨리스가 틀렸어, 대통령은 모르지, 언니가 옳았지, 백과사전이 옳았지, 철학자마저 옳았지, 그러니 내가 틀렸어, 뭐가 틀렸는지 몰랐고 아무도 틀리지 않았으니까 옳았어, 틀렸으니까 모르고 모르니까 웃기고, 불가능하게 구름이 툭 떨어져버리고, 꽉 막힌 도로에 싱크홀이 생겼다. 이제 나는 영영 틀린 사람이 되었다.

 

 

 


코 파기의 진수

 


어둠은 때론 어둠을 빨아들인다, 그건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녀와 나는 방과 후 교실에 남아 사물함을 후비고
먼지를 닦아낸다

 

대걸레로 딱정벌레를 세게 짓눌러버린 일, 그건 좋은 징조다
책가방들을 모아 소각장에 집어넣으니 불길이 치솟는다

 

언제 우리는 악마를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코로 숨을 쉬어야 하니까 정성껏 쓸어놔야지 하는 마음
하루에 수십번씩 코를 풀 때마다 어서 코가 사라졌으면 하는 마음
사물함이 열릴 때마다 잿더미로 가득 채워놓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이 사물함에 죽은 새를 넣어둔다
깃털과 발톱들, 피 묻은 팬티와 불길함이 튀어나오자
담임은 사물함을 하나둘 없애버린다
서랍 안에 얼마나 많은 반성문을 채워야 이 세계를 떠날 수 있을까

 

그녀는 우아하게 코딱지를 튕기며 서랍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홀로 책상에 엎드려 코를 열심히 팠지만
친구들의 무관심 속에서 코피만 쏟아내다니

 

그건 좋지 않은 일이다

 

가끔씩 그녀를 찾으러 콧구멍 안으로 들락날락거린다
왜 모든 사물함은 제대로 된 마음과 연결되지 않는 걸까
재채기를 할 때마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손가락 하나가 콧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거나
악마의 예감이 콧속에서 마구 자라나거나
아무리 해도 찾을 수 없던 사물함 열쇠가 나온다거나

 

체육복을 벗을 때마다 맨살 냄새를 맡으면
어쩐지 나를 벌리고 그녀가 기어 나올 것만 같다

 

그건 좀 슬픈 일이다


 

 

 

한영희_1979년 경기 광명 출생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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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회 5.18 문학상 시부문 당선작] 고은희

 

무 싹을 바라보는 견해들

 

 

잘라놓은 반 토막 무에서 싹이 돋아 나왔다.

 

할머니는 처녀 적 사립문 같다고 하고 아버지는 막 빠져나오는 송아지 같다고 하고 나는,

 

혁명 같다고 했다.

 

연속 재배하면 벌레 먹고 풀이 날개를 치면 한없이 나약해져버리는 무. 두더지가 지나간 자리를 싹둑 잘라두었던 것인데, 잘린 쪽은 이미 구름으로 덥혀져 있다. 구름의 본성은 땅으로 스며들고 스며든 본성이 하늘을 닮아간다는 것. 부채 살 같이 퍼진 무의 속을 보면 알 수 있다.

 

무는 흰 구름과 파란 하늘이 함께 들어 있는 채소라서 무를 여러 번 말하면 맵고 지린 맛이 난다.

 

구름에서 속 씨가 웅크리고 있다. 모든 싹은 처음에는 속잎이었다가 속잎이 겉잎이 되는 동안 사립문이 헐리고 철 대문이 달리고 송아지는 개의 값을 뒤집어쓰고 음매음매 컹컹 짖는다. 그 사이,

 

혁명은 손가락질 받았다.

 

무청은 줄줄이 엮여 내걸리고 반 토막 무만 남아 필사적으로 싹을 틔우고 있다. 철 대문에서 싹이 자라고 싹이 노란 송아지가 컹컹 짖는다. 한 개의 무를 할머니는 구름 쪽을 먼저 썰고 나는 파란 하늘 쪽을 먼저 썰자고 한다.

 

매운 입술이 내미는 혁명의 싹,

반쪽 남은 무를 보고도 분분한 의견이 한 집에서 산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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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

 

숫자를 좋아하는 흰 토끼는 편지를 써 오라고 했어
거짓말을 완벽하게 훔친 아이에게 내주는 특별 숙제
말랑말랑한 지우개 똥 연필 끝에 꾹꾹 뭉쳐
사랑하는 선생님, 저희가 잘못했대요.

 

시험지 위로 진눈깨비가 내리는 교실

 

무서운 이야긴 속으로 해야 더 무섭지
칠판이 두 쪽으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모르는 아이가 빳빳한 채로 상장을 받고
종례가 끝나면 답장이 왔어
아니, 너희가 아니라 너지.

 

안으로 접힌 귀 토끼의 가장 단순한 장점
만져보고 싶어 3분의 1로 나뉜 귀
왜 우리들은 밋밋한 귓바퀴를 가졌지?
좀더 수학적으로 생기질 못하고

 

어렴풋이 웃고 나면 어른에 가까워질까?
토끼의 진짜 얼굴은 손목에 새겨놔야겠어
기다리는 미술 시간은 오지 않는데

 

명치를 찌르면 실내화가 미끄러지는 마술
복도 끝과 끝이 어떻게 다른지 설명해봐
부풀어 오른 선생님, 시리도록 하얀,

 

뒷문에서 굴러 나오는 귀 두 짝
청소 도구함에 숨은 눈알
창문에 붙은 천삼백일흔 개의 입 그리고 입

 

나는 토끼를 해부하는 상상을 했을 뿐인데요?
책상 밑에 숨어 지우개 똥만 뭉쳤는데요?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

 


열아홉은 괄호가 포함된 사건이었습니다

 

하나, 바닥에 빨간 울음이 흥건합니다 누군가 날카로운 어젯밤을 소화시키지 못했나 봅니다
둘, 여기서부터 가족들의 방은 멉니다 커다란 구름이 말라가는 거실입니다
셋, 시계의 뒤편이 기억하고 있는 시간을 봅시다 아빠는 오후 아홉 시처럼 생겼습니다
넷, 우리들은 우리들로 남아야 하기에 아직은 식탁에 앉아 실마리를 꼭꼭 씹어 삼킬 뿐입니다

 

벽 너머에서 엄마는 푸르스름 야위어가고 아빠는 배를 까고 누워 노랗게 불어갑니다 시침으로 꿰맨 교복 치마는 나의 알리바이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챘나요? 엄마 아빠가 시계 속으로 분주하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나는 혀가 고부라진 아이 입안 가득한 째깍 소리를 녹여 먹으며 내일의 과목을 생각합니다

 

구름이 눈썹을 찡그리는 날부터
나의 이름이 느리게 증발할 때까지

 

증거가 되지 못한 물방울들은 곧 이름을 잃어버립니다 아직 쓸 만한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아빠는 질문을 씹어 먹습니다 어떻게 하면 흘러내리는 심증을 촛농처럼 굳힐 수 있나요? 시간의 부스러기가 천장에서 쏟아집니다 미제로 남은 우리들이에요 까드득까드득, 마음껏 부서질 수 있는

 

빨간 울음이 바싹 마르는 아침, 귓속에서 알람이 울립니다
아흔아홉번째 이명입니다

 

딱딱한 무지개가 완성되면 깨끗한 얼굴로 학교에 갑니다 오전 일곱 시는 무엇이든 시들게 만들 수 있고 그러나 오후 네 시에는 조금 웃어보아도 괜찮은 것 아홉시의 발소리가 들릴 때마다 뒤꿈치에 쌍무지개를 그려보기도 합니다만 우리들은 조금도 겹쳐지지 않습니다 무지개의 꿍꿍이를 눈치 챘나요? 촉촉한 물방울들이 문 틈새로 탈출합니다 언제 어디서 다른 색깔의 울음이 발견될지 모릅니다

 

무지개가 시간을 읽기 시작할 나이부터
열아홉이 어른들을 타고 멀리 날아갈 때까지

 

 

 

 

 

요절한 여름에게

 


편백나무가 날아오르는 시간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첫 번째 돌에 표시해둔 나를 지나쳐
마치 갈림길에서 힌트라도 쓸 것처럼
척척함과 약속은 잘 어울려
더듬더듬 목구멍 들춰 어둠을 만지듯이

 

나는 오늘 가지색 인사법을 배웠고
카나리아를 내년 귀퉁이에 묻어주었지
철제로 된 새장이 무엇을 책임져?

 

날개 터는 방법을 잊어버렸어 어쩐지
뾰족한 부리는 당신의 피상
나는 오늘 도도한 레몬처럼 거절했고

 

편백나무의 날숨은 뿌리를 놓치는 것
배 속이 잠시 투명해지는 그런 것
내가 따뜻한 흙을 퍼먹는 동안에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새끼손가락을 주머니에 넣고
어제로 통하는 길을 잘 안다는 듯이
그러나 모르는 발바닥처럼
하늘을 지나치게 올려다보며

 

우리는 절벽을 잊어버릴 수 있어

 

똑똑한 버섯들은 어떻게 우는지 들어봐
조금씩 해가 길어지고 땅이 흔들리고
당신은 그대로 숲을 향해 걸어가

 

 

 

 

커밍아웃

 

축축한 비밀 잘 데리고 있거든
일찌감치 날짜가 지난 토마토 들키지 않고
물컹한 표정은 냉장고에 두고
나는 현관문을 확인해야 해
아픈 적 없는 내일을 마중 나가며

 

취한 바람이 호기롭게 골목을 휘돌아 나갈 때
나뭇잎이 되고 싶어 아무 데서나 바스러지는
우리가 서로를 꺼안을 때 흔들리는 그늘
더 낮은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는데

 

아무도 모르는 놀이터에서 치마를 까고 그네를 탔어
미끄럼틀과 시소의 표정
낮지도 높지도 않은 마음을 가지자
혼자라는 단어가 낮설어지면
얼음 땡,
크레파스 냄새 나는 빨주노초 아이들
웃음먼지를 풍기며 뛰어나가고

 

배 속에선 만질 수 없는 부피들이 자란다
누가 우리를 웅크리게 하는 걸까
웃지 않는 병원에 가야겠어
문 닫은 교회에서 기도를 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관에 하루 정도 재울까
창문이 많은 복도에서 자꾸만 더러워질까

 

뉴스는 토마토의 보관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설탕에 푹 절여지고 싶어
사소한 기침이 시작된다
내 컵을 쓰기 전에 혈액형을 알려줄래?

 

옷장에서 알록달록한 비밀이 흘러나와
자라지 않는 발목 아래로, 말을 잊은 양탄자 사이로
기꺼이 불가능한 토마토에게로


 

 

 

뱀의 날씨

 


할머니는 그날 오후 빨래를 개고 있었습니다
삼촌의 파자마 속으로 기어 들어가면서
얼룩은 아들로, 아들은 엄마로 볏겨내는 거라면서
척척한 양말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얼룩은 그늘에서 말려야 하나요?

 

삼촌은 허물을 벗고 삼촌들로 불어납니다
엄마라는 단어에 슬슬 똬리를 트는
독신주의 채식주의 완전무결 무신론자 삼촌들
입속에 불혹이 자라 말을 잊은 삼촌들
특기는 식탁 밑에서 기절하기
마흔답게 혓바닥 날름거리기 또는
잠자는 할머니를 죽은 쥐로 착각하기

 

얼룩은 그늘에서 더 축축해지나요?

 

집 안 가득 비눗물이 차오릅니다
방 세 칸이 조금은 말끔해진 것 같습니다
이제 곧 얼룩의 무늬가 바뀌는 시간일 텐데요
할머니가 좀처럼 탈수되지 않습니다

 

부글부글 거품이 된 집을 내려다봅니다
누가 옥상에 삼촌을 널어놨습니다

 

깊어진 그늘의 손을 잡아봅니다
나를 벗을 준비는 이제 되었습니다

 

 

 

 

 

 

 

 

 


심사 경위

 

올해 신인문학상에서는 심사 방식상의 작은 변화를 꾀했다.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문인들을 초청함으로써 좀더 다양한 문학적 입장과 취향을 심사에 반영하고 나아가 문학과사회 신인상이 견지하려는 문학적 모험의 스펙트럼을 확장하고자 한 것이다. 시 부문에서는 최하연, 이제니 시인, 소설 부문에서는 백민석, 한유주 소설가와 함께 투고작들을 꼼꼼하게 살펴보면서 편집동인들(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은 한국 문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을 패기 넘치는 신예들을 탐색하고자 노력했다

 

▲힘들었고, 부끄러웠고, 이상했다. 6인용 책상 위에 가득 놓은 투고작들을 하나하나 책상 아래 종이 상자로 옮기는 일은 쉽지도, 자랑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았다. 시를 계량화하는 노동이라니, 나는 비로소 빌라도의 심정을 이해했다. 심사에 참여한 소감을 쓰는 지금도, 이 이상한 기분은 가시지 않는다. 시를 쓰기 시작한 뒤로, 시는 나에게 목적이었을까, 수단이었을까, 돌이켜보건대, 아마도, 결국 이도 저도 아니게 될 것이다.(이하 심사평 생략)_최하연(시인)

 

▲시란 무엇인가, 시를 쓴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 앞에서 예심 내내 다소 엄격한 잣대로 작품을 읽어서인지도 모르겠으나 울림을 주는 작품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을 읽으면서도 고민은 마찬가지였다. 응모자들의 이름을 바꾸어 읽는다 해도 그리 다르게 읽히지 않을 정도로 비슷비슷한 시편들, 그야말로 잘 만들어졌다고 여겨지는, 그러나 텅 비어 있는 시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떤 간절함을 가지고 써나갔는가, 자기만의 언어를 어디까지 밀고 나갔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선뜻 손을 들어줄 만한 작품을 찾기 어려웠다.(이하 생략)_이제니(시인)

 

▲총507명이 응모한 올해의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은 양적으로 작년과 유사한 수준을 유지했다.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흥미롭게 여겨졌던 것은 소위 ‘서정시’라고 광범위하게 지칭되는 전통적인 계열의 시들이 해를 거듭할수록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예년의 심사평에서도 유사한 소회를 밝힌 바 있지만, 이러한 현상은 2000년대에 촉발된 다양한 시적 실험의 파장과 영향이 어느새 안정적인 방식으로 시 창작의 현장에 스며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분명한 징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 관계나 모방이라는 단순한 말로 충분히 아우를 수 없을 만큼 이러한 변화의 폭과 깊이는 근본적인 것으로 보인다. 시에 대한 기존의 관습적인 이해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변화는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시에 대한 통념의 파괴가 역설적으로 시에 대한 또 다른 형태의 통념을 낳는 계기가 된 것은 아닌지 냉정하게 되물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그 어느 때보다도 자신의 감정과 생각들을 낯선 감각으로 능란하게 기록하는 응모작들이 많았지만, 응모자들이 구가하고 있는 자유가 시에 대한 치열한 사유를 생략하고 포기한 결과가 아니었는지 의문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험이 매개되지 않은 날 선 언어들을 장황하게 전시하도록 내버려두는 듯한 작품들이 적지 않았으며, 낯설고 특이한 이미지와 단어들을 조합하면 곧바로 시적인 문장을 탄생시킬 수 있다는 아니한 태도 역시 자주 목격되었던 것이다. 1차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18명의 응모자들(강은재, 강혜빈, 김민지, 남다솜, 박경주, 박영, 박하원, 백선율, 베이지, 서호준, 신수형, 양은경, 엄기수, 오경은, 이동호, 이희형, 정송라, 정화연)의 작품들을 좀더 단호가고 꼼꼼하게 검토한 것도 그 때문인데, 그 결과 최종적으로 정솔아(⌜인터뷰이와 인터뷰어의 관계에 대하여⌟외 9편), 베이지(⌜컷⌟외 13편) 백선율(⌜암전⌟외9편), 정화연(⌜유원지⌟외 9편), 강혜빈(⌜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9편)의 작품들을 두고 본격적인 논의를 진행했다.

 

베이지는 본심에 오른 응모자들 가운데 가장 파격적인 작품세계를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기성의 의미를 파산시키고 새로운 의미 생성의 가능성을 집요하게 탐문 하려는 의지로 충전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험적인 의지가 시의 언어를 작위적으로 포박하고 있다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정솔아는 시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조성하는 능력이 범상치 않았으며 시적 긴장이 일어서는 순간을 감각적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다만 시적인 정황과 순간을 연출하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시의 전체적인 구조를 희생시키는 경우를 종종 발견했다. 백선율은 겉으로는 단아하고 미니멀해 보이지만 현실과 꿈의 결계를 청신한 감각을 돋보이게 만드는 능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응모한 시편들만으로는 그이 시가 지닌 스펙트럼의 넒이를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지적되었다. 전반적으로 시들의 색채가 비슷하다는 뜻이다.

 

논의 과정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작품은 정화연과 강헤빈의 시였는데, 두 응모자의 작품들은 마치 그럴 수밖에 없다는 듯 색채가 서로 달랐다. 우선 정화연의 ⌜유원지⌟외 9편에서는 응모자 자신의 체험이 시로서 강력하게 육화되고 있다고 느껴질 만큼 깊은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타인에 의한 폭력과 고통을 소재로 자신의 일상과 육체를 낯설게 되돌아보는 그의 시선은 신선한 감동을 선사하고 있었다. 다만 지나치게 자신의 겸험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신인으로서의 시적 언어의 확장을 가로막는 장벽이 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었다.

 

반면 강혜빈의 ⌜열두 살이 모르는 입꼬리⌟외 9편은 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산개해나가는 동화적인 상상력을 독자를 유혹하듯, 매끄럽고도 유려하게 펼쳐내고 있었다. 시들 사이에는 다소 편차가 있었으나 시적 진술들이 조성하는 리듬감도 매력적이었으며, 여기에 아이 화자 특유의 자유로운 화법이 더해져 ⌜괄호 속에 몸을 집어넣고 옅어지는 발가락을 만지는 중입니다⌟와 같은 감각적인 작품이 탄생할 수 있었던 듯하다. 오랜 습작을 통해 단련된 시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때로는 숙성을 거치지 않은 가능성이야말로 한 시인의 장점을 더욱 만개시키는 창조의 원천이라는 생각 끝에 강혜빈을 당선자로 결정했다.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모든 응모자들에게 응원과 감사의 말을 전한다._『문학과사회』 편집동인 : 강동호, 금정연, 김신식, 이경진, 조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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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플러 / 한진수

 

 

상처입은 찌르레기 지저귀고

별들은 울고 또 서럽게 울고

 

봄이 오면 불어오는 산들내음을 나는 사랑했네

비둘기와 따스한 햇살을, 꽃다발을

그러면 나는 해가 빛나는 호수처럼 너를 사랑해

너는 말없는 포플러 나무처럼 편안하지

 

밤이와 그 자리에 찌르레기 지저귀고

별들은 다시 아프고 서럽게 울고

 

순진했던 나는 믿었네

언젠가 아름다운 별빛은 삶을 구원하리라고

그래서 고요한 봄의 포플러와 같은 너를 사랑했네

 

싱그런 봄바람처럼

싱그런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너를 사랑했네

 

순진하게도 나는 믿었네

별빛이 삶을 구원하리라

내 가슴 속의 노래하던 새가 죽고

악기의 현이 끊어질 때까지

 

 

 

 

사슴 브로치와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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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소감] “사랑과 예술의 아름다움 적은 시독자들에 미스터리로 남았으면

 

소식을 듣고 창밖을 내다보았습니다. 라일락향이 번집니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바람은 모든 나무가 봄 속에 나부끼게 하였고 나는 나의 별빛에게 가장 먼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녀는 축하한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친한 친구 하나가 죽었습니다. 시 쓰는 건 그만두고 취미로 한다니까 계속 써보라고 독려해주던 친구였습니다.

 

전화기 너머 기침은 환풍구에 곰팡이가 슬어서 그렇다면서 지병을 감추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학문적 길잡이가 되어주신 강원대 인류학과 김세건 교수님과 임봉길 교수님께 감사드립니다.

 

부모님께도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심사평] “주제 쉽고 담채화처럼 그려신선·풋풋한 느낌

 

응모작품수가 지난해에 비해 배나 되어 우선 기뻤다. 수가 늘어 반드시 좋은 작품이 뽑히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지용문학상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아졌다는 사실만도 기쁜 일이다. 실제로 좋은 작품도 예년보다는 많았다. 그러나 응모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은 올해에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예컨대 쉽게 읽히지 않는 답답한 시들이 많다는 점이 그 첫째로, 우선 주제가 너무 무거워 시가 주제 밑에 깔려 숨을 못 쉬는 느낌의 시가 많았다. 또 시란 이렇게만 써야한다 라는 고정관념도 심해 보인다. 억지스러운 비유가 많고, 마치 그것을 신선하고 기발한 발상이거나 재담으로 생각하는 듯한 경우도 많았다. 자유롭고 자연스럽고 활달한 발상이 시를 가장 시답게 만든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시 학도들이 또 하나 유의할 점은 시 공부는 비단 시 쓰는 일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좋은 시를 찾아 읽는 일이 더 큰 공부가 될 수도 있으니, 좋은 시를 볼 줄 모르고서는 좋은 시를 쓸 수 없기 때문이다.

 

응모작 중 먼저 눈에 띈 작품은 포플러’(한진수)로서, 우선 신선하고 풋풋해서 시가 살아 있는 느낌이었다. 요즘 신인들이 즐겨 택하는 심각한 포즈에서 멀리 벗어나 가볍고 얼핏 보면 쉬워 보이는 주제의 선택도 시를 크게 살리고 있다. 또 이 시에서 눈여겨 볼 것은 이미지의 어둡고 밝음의 조화로서, 이것이 시에 리듬감을 더하고 있음은 크게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른 봄날의 담채화 같은 쌈박하고 시원한 시다. 우윤미의 계절의 너8편은 아주 재미있게 읽히는 단시들로, 굳이 분류하자면 벌과 같이 작지만 꿀과 침을 다 가지고 있는에피그램 시라 하겠다. 비유도 놀라운 데가 있고 위트도 대단했지만, 한두 편만을 뽑을 수도 없고 모두를 당선작으로 할 수도 없어. 역시 당선작으로는 부적절하게 생각되었다. 한아민의 그게 사랑인 줄 몰랐던 거야는 첫사랑을 노래한 담백한 서정시로 억지도 없고 속도감도 있는 시였지만 무언가 조금 모자란다는 느낌이었다. 좀 더 정리가 되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이상의 시 가운데서 한진수의 포플러를 당선작으로 선택한 것은 그 시가 오늘의 우리 시가 가지고 있는 답답함을 날려 보낼 수 있다는 기대감도 가졌기 때문임을 말해 둔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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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시작 신인상 당선작] 김영호 배지영

 
고공에서 외 4편 김영호


고공에서 

 


황조롱이 한 마리가 바람과 주파수를 맞추는 중 고층건물에 오르면 창문이 자주 흔들려 자꾸만 속삭이는 통유리 진실 창밖으로 펼쳐지는 실외가 아닌 실내

 

조용히 실체와 그림자가 어긋나는 중

 

이것은 어느 봄날의 연애 이것은 한 남자가 두 여자를 사랑하는 얘기 두 여자의 사랑으로 끝나는 얘기

 

사랑은 즐거워 우리는 말이 안 통해하지만 같은 곳에서 비를 맞을 거야 아니라고 하면 아니야, 맞다고 하면 맞아, 나는 순종적인 아내 매일 아침 불륜을 저지르는 손가락

 

그리고 정교하게 칼집 난 구름들만 남았다 구름들은 계속해서 제 몸에 칼집을 내지 부드러운 육질을 위해 빛과 바람이 마음대로 드나드는 칼집이 되지

 

그러나 길이 있어도 가지 않을 거야

 

은유의 맥박이 멈추고 공중의 거대하고 낡은 쇠사슬이 쳐진다 더 이상 날지 못하고 가라앉는 새 구속되는 즐거움 구속되는 턱뼈 고립되고 싶어 높이 서고 싶어

 

수백 개의 섬이 석양에 일그러지며 하나의 선이 되어간다 일제히 내리는 비 땅에서부터 천천히 일어나는 비

 




에너지

 

 

건너편 옥상에서 태양열 집열판이

빛을 끌어모으고 있다

 

창가 옆에서 그는 잠들었다

그의 남색 셔츠가 빛나고 있다

 

조도가 최대에 이르자

교실바닥에 비치는 창문의 힘줄

 

에너지를 모으고 잇어

 

멀리서 누군가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의 눈빛과 말투

생각과 그림자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순간 뒷문이 열리고 거대한 빛과 함께

그가 사라졌다

 

여전히 그는 꿈꾸고 있었다

꿈꾸는 척하고 있었다

밤새도록 교실이 환하게 빛났다

 




아름다운 정원

 

 

아름다운 정원이 있는 마을에

소년에 대해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직 소년이 아끼는 초록 전지 가위와

검고 낡은 장화만이

정원 수풀 사이로 언뜻 보였다고 했다

 

그에 관한한 마을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정말

그의 전지가위는 사정없이 쳐냈기 때문이다

 

정원은 흠잡을 데 없었다

조화로운 색채와 풍부한 조도

자랑거리를 떠나서 마을 사람들은

진정으로 정원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귀 먹은 노인 하나가

정원의 빈 가위질 소리에 뛰쳐나갔다는데.............

 

아무도 그를 보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은 소년을 의심했으나

누구도 소년의 이름을 꺼낼 수 없었다

 

모두의 집에 초록 전지가위와 낡은 장화가 하나씩은 있었기 때문이다

 

며칠이 지나고 마을은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마을

 

마을 사람들은 흠잡을 데 없었다

조화로운 색채와 풍부한 조도

자랑거리를 떠나서 정원은

진정으로 마을 사람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연날리기

 

 

오늘은 연을 띄웠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

 

아 하고 입 벌리면

당신 입속에 가늘게 떨리는 댓가지가 보여

 

우리는 안정된 기류에 들고 싶었다

묘기와 같은

흔들림만 있는

 

서로 경멸하기로 해

영원히 놓아주지 않을게

높이가 필요한 것뿐이니까

 

십이월의 바람이 연의 마음에 둥근 구멍을 내고 있었다

 

더 이상 품어지지 않을 때까지

얼레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실이 풀려나는 만큼

우리는 가까워지는 거야

 

팽팽한 연실 혹은

당신과 나

 

우리는 이제

사랑이라 굳게 믿고 있다


 

 

 

실종

 

 

나무는 천천히 공중으로 가지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밑동이 없었다 그곳으로 바람이 지나가다 멈춰 섰다 여긴 어디지 나는 누구일까

 

한참을 서성이던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고 두터운 외투 속에 감춰두었던 긴 목을 뻗어 올리고 있었다 머리에서 두 개의 뿔이 천천히 자라났다

 

애초부터 느낌은 없었다 예측은 모두 거짓말이 되었다 천체관측학자들은 오늘, 대기권을 향해 전속력으로 상승하는 운석을 목격했으나 발표하지 않았다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과녁

계속해서 생겨나는 물음

 

구름이 걷히자 드러나는 하얗고 거대한 공중의 교각 그 위에 가스통을 실은 트럭 불붙는 트럭 나의 트럭


천체의 어깨가 탈골된 뒤에도 봄은 오고 잎은 자랐다 불 꺼진 동물원에서 기린은 계속해서 잎을 뜯어 먹고 아래에서 나는 물었다

 

무슨 맛입니까?

 






속기 외 4편 배지영


속기 

 


나는 당신을 아주 빠르게 받아 적는다

잘 보이지 않는 모습과

질 들리지 않는 말이 있었지만

이것은 예비의 착상이었기에

모호함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가볍게 넘기며

어떠한 점과 글자들이 지나가고 기록이

너무 빠른 나머지

스케치를 하듯이

당신은 이제 선 하나로 설명이 된다

추상적이다 피카소의 소처럼

나는 당신을 아주 잘 알고 있다고 안도한다

당신은 당신이 아니게 되었지만

전부라고 해도 무방하다

당신은 지긋지긋하게도

거의 모든 곳에서 생겨나고 있다

당신은

나의 신이다


 

 


모닝 베이커리

 

 

당신과 사랑을 나누면 허벅지

안쪽이 붕 뜨는 기분이다

 

달달하게 반죽한 밀가루가

오븐에 부플어 오른 것처럼

 

금방 꺼내어 펄펄 뜨거운 상태도,

아주 식어사 차갑게 바삭바삭

바스라져버리는 상태도 아닌 미적지근한 온도

 

말랑한 겉 부분과

습도 높은 공기로 가득 찬 그곳

고소한 냄새

 

서로의 손이 깍지를 끼면

어린아이의 손과

요리의 끝을 맺는다

 

등줄기에 매달린 당신과

좋은 하루의 작별키스를 한다

아직도 난 그 미적지근한 온도를 유지한 채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한다

 

당신의 품은

따뜻한 집이자 짐이다


 

 

 

꽃자리

 

 

내가 사랑한 건 까마귀였다

할머니는 깨를 볶아 대야에 담았고

고양이는 거기에 똥을 쌌다

신이 일하지 않는 돼지의 긴 코를 잘랐다

오빠는 자르지 않은 연근을 던진다

등 굽은 검은 염소의 호흡이 무너지면

검불은 어김없이 타오른다

입술 색이 같은 여고생들이 떼로 몰려오자

자궁 속에서 밤나무가 자랐다

은하수가 유성의 닻을 애만지고

매미 위에 기름공이가 고깔춤을 추자

가을 햇덧에 서리병아리가 태어났다

씨 없는 처녀 땅은

살꽃 한번 못 피우고

흉터 같은 그늘만 솟아난다

떠돌이 여자의 몸이고 싶다

 

 



과조*

 

 

너는 어쩜 눈이 이렇게 기니

감은 눈 위로

알록달록 색깔을 칠하며

네 성병에 대해 침묵했던 그 시간

자, 봐봐 하고 손거울을 건네자

너는

바닥에 반사된

한 뼘 정도의 빛에

가만히 손을 대어본다

곧 죽을 병아리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이젠 좀 괜찮아진 것 같다는 너

그랬니, 그랬니, 대답하다가

다 담지도 못할 말이 쏟아져

내 살에 도로 붙었다

삶을 놓아버린 사람에게

대화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도대체 뭐가 괜찮은 건데, 라는 말은

배 속에서

산산이 찢어두기로 한다

 


*볕이 적게 비치다

 

 

 


기질

 

 

입을 벌려야 할까 입을 다물어야 할까

시청 입구에 큰 붕어는 하루에도 멏 번씩 고민을 한다

그게 오래된 고민이었다는 것조차 계속 잊는 듯

무엇 하나 뱉지도 삼키지도 않는 입질을 계속했다

 

입을 벌렸다가

입을 다물었다가

혀를 내밀었다가

말아 넣었다가

 

말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게만큼이나 짓눌리는 액체의 부력을

최대한 친화적으로 참아내려

 

붕어는 정확한 발음이라는 걸 하려다 말았다

살아남기 위해서

평생을 불행함에 몰입했다

 

턱의 기억이

사라진지 오래다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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