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프 / 신성률
길고 큰 구멍이 동심원으로
관자놀이에서 뛰논다
한참을 놀다가
찬물도 씻어 먹는 엄마를
코끝에 몰아놓고는
종아리를 마저 올려세운다
찬물로 찬물을 헹군 엄마는
늘 뜨겁고
저녁은 오늘도 길고 크다
신나게 놀다가 들어왔을 뿐인데
식을 것 없는 상보 아래 저녁은 심심하게 식어가고
엄마는 속이 다 보이도록
자꾸 아까운 찬물을 헹궈낸다
그때마다 길고 큰 구멍은
중심을 잃고 나를 향해 운다
종아리를 올리기 전부터 저녁이 다 내려앉을 때까지
찬물 같은 엄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면
관자놀이는 제멋대로 뛰놀고 저녁놀처럼 어지럽다
심심한 저녁은 동심원으로 종아리를 말아 올린다
놀면서도 심심해하는 나를 엄마는 잘 알고
나는 파이프와 더 친하다
파이프가 나를 파이프로 만들어주기로 한 걸
엄마는 모르고
그 길고 큰 저녁의 끝까지 나는 알기 싫지만
모르는 척해도 떠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
짧고 작은 종아리로 중심을 잡는다
어디 따로 향할 데가 없는 것처럼
심심한 종아리를 따라다니며
놀기에도 아까운 저녁을 마저 헹군다
마치 아무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는 듯이
동심원으로 멀리 뛰노는 저녁의 종아리를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찬물로 뜨겁게 헹궈낸 파이프의 끝이
입에 딱 달라붙어
다 저녁 찬물을 밥을 말아
뚝뚝 떨어지는 딸국질을 건져먹는다
청어 / 신성률
오래전 울며 다녀간 소년이
간밤에 일그러진 얼굴로 다녀갔습니다
가문 돌무더기 산꼭대기에 숨어
돌을 쌓고 억새와 흙을 이겨 오두막을 짓고
아내를 얻고 아이들을 낳고 바람 불어 소년을 잊고
세상이 가까워져 울타리를 높이 치고
추운 밤이었는데 소년이 대낮을 데리고 왔습니다
소년이 들어온 사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물이 차오르고 청어 떼가 들어오고
헤엄을 모르는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헤엄을 치고
아내가 바빠 이리저리 뛰고
아내가 아이들이 소년과 함께 청어를 잡느라
피 묻은 비늘들이 지붕까지 튀어올랐습니다
아주 더 오래전 소년을 보낼 때
소년은 무섭다고 춥고 목이 마르다고 했었습니다
소년이 무서워 옴짝달싹 피할 데 없던 나는
오래 전 소년처럼 피할 데가 없어서
지붕 위로 올라가 몸에 자꾸 돋는 비늘을
핀셋으로 떼어내고 있었는데
첨벙
첨벙
오빠라고 불러 형이라고 불러 다음에 또 올게
……… 그런데 엄마는,
신제품 / 신성률
가게처럼 사내가 낡아 보였다
옛날을 만들어낸 오늘의 상품들이
반짝거리며 가득했다
가게 보느라 오늘날에는
되는 일이 더는 없다고 떠들어대자
그나마 늙을 수 있었던 것도
십오 년씩이나 볼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자가 받아 쳤다
사내의 말대로라면
다 태초에 이루어진 일이거나
옛날에 이룬 일들만으로도 반질반질
가게가 넘쳐나야 마땅했기에
여자는 지려고 들지 않았다
늙지 않고자 해서 사내는 늙었을 것이다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뜯어본 적도 없이
손님들에게만 팔았을 것이다
그러고도 쭈글쭈글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다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늘 들떠 있기 십상인 물건들을
총채로나 만지작거리면서
할인된 오늘을 고스란히 내주었을 것이다
여자도 그렇게 만질 것 같다는 생각 끝에
몸서리치는 여자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운 좋으면 사내는 앞으로도
십오 년은 더 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양 볼 탱탱하도록 추파춥스를 물고 있는 여자의
생몰연대는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늙지 않고자 해서 늙은 사내에게 하는 말들은
영락없이 마누라처럼 보였다
새로 들어올 물건들을 옛날부터 뜯어왔다 해도
다 뜯어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내의 생각 또한
번들번들한 여자와 다를 바 없었지만
술잔에 사탕이 들어갈 리 만무하듯
여자의 어림과 사내의 짐작은 섞일 리 없어보였다
사내처럼 가게가 늙어서
번쩍거리는 오늘이 그득그득했다
가끔은 두꺼비집을 내리고 / 신성률
온몸이 귀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다 귀가 되었다 봄에 울던 귀가 입동이 지나도록 울었고 이상한 소문이 자꾸 들리는 귀가 이상했다 들렸는데 들리지 않았다 머리칼이 잘리고 전신마취를 당했다 뼈에서 고름을 긁어냈다고 했다 다 잘될 거라 했다 귀를 국가가 관리해주었다 다 달 들릴 거라 했다 들리지 않았는데 들렸다
그 뒤로도 온종일 귀는 제 위치를 알려왔다 손톱 밑이나 복사뼈에 머물기도 했고 무릎이나 이마를 짚기도 했지만 더러 몸 밖으로 나갔다오기도 했다
온갖 말들의 은신처가 된 귀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그 해는 왕이 곳곳에서 출몰하던 해이기도 했다 집사네 집에 며칠 들렀다고도 했고 집달리가 여럿이라고도 했는데 가끔은 민가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마술을 부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온몸을 다 들은 귀가 해를 넘기고도 온몸을 다 떠벌리고 다닌다는 말들이 우박처럼 튀어 올랐지만 왕가의 두꺼비집에 물 뿌린 이가 누구인지 끝내 관가에서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다
어둠이 귀가 커질 대로 커져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는 소문이 거리마다 흉흉했다 어디고 할 것 없이 귀가 큰 밤이 굴러다녔고 밤새 삐라를 줍는 귀먹은 늙은이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삐라는 건배사처럼 모호한 말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귀가 큰 밤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문예지 신인상 > 오장환신인문학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9회 오장환신인문학상 / 정민식 (0) | 2020.11.03 |
---|---|
제8회 오장환신인문학상 / 이신율리 (0) | 2020.03.16 |
제6회 오장환신인문학상 당선작 (0) | 2018.07.15 |
제5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작 (0) | 2017.10.27 |
제4회 오장환 신인문학상 당선작 (0) | 2016.01.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