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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 / 신성률


길고 큰 구멍이 동심원으로
관자놀이에서 뛰논다
한참을 놀다가
찬물도 씻어 먹는 엄마를
코끝에 몰아놓고는
종아리를 마저 올려세운다
찬물로 찬물을 헹군 엄마는
늘 뜨겁고
저녁은 오늘도 길고 크다
신나게 놀다가 들어왔을 뿐인데
식을 것 없는 상보 아래 저녁은 심심하게 식어가고
엄마는 속이 다 보이도록
자꾸 아까운 찬물을 헹궈낸다
그때마다 길고 큰 구멍은
중심을 잃고 나를 향해 운다
종아리를 올리기 전부터 저녁이 다 내려앉을 때까지
찬물 같은 엄마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면
관자놀이는 제멋대로 뛰놀고 저녁놀처럼 어지럽다
심심한 저녁은 동심원으로 종아리를 말아 올린다
놀면서도 심심해하는 나를 엄마는 잘 알고
나는 파이프와 더 친하다
파이프가 나를 파이프로 만들어주기로 한 걸 
엄마는 모르고
그 길고 큰 저녁의 끝까지 나는 알기 싫지만
모르는 척해도 떠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서
짧고 작은 종아리로 중심을 잡는다
어디 따로 향할 데가 없는 것처럼
심심한 종아리를 따라다니며
놀기에도 아까운 저녁을 마저 헹군다
마치 아무 소리도 흘리지 않는다는 듯이
동심원으로 멀리 뛰노는 저녁의 종아리를
차마 못 보겠다는 듯이
찬물로 뜨겁게 헹궈낸 파이프의 끝이
입에 딱 달라붙어
다 저녁 찬물을 밥을 말아
뚝뚝 떨어지는 딸국질을 건져먹는다





청어 / 신성률


오래전 울며 다녀간 소년이
간밤에 일그러진 얼굴로 다녀갔습니다


가문 돌무더기 산꼭대기에 숨어
돌을 쌓고 억새와 흙을 이겨 오두막을 짓고
아내를 얻고 아이들을 낳고 바람 불어 소년을 잊고
세상이 가까워져 울타리를 높이 치고


추운 밤이었는데 소년이 대낮을 데리고 왔습니다
소년이 들어온 사립문으로 
햇살이 쏟아지고 물이 차오르고 청어 떼가 들어오고
헤엄을 모르는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 헤엄을 치고
아내가 바빠 이리저리 뛰고


아내가 아이들이 소년과 함께 청어를 잡느라
피 묻은 비늘들이 지붕까지 튀어올랐습니다


아주 더 오래전 소년을 보낼 때
소년은 무섭다고 춥고 목이 마르다고 했었습니다


소년이 무서워 옴짝달싹 피할 데 없던 나는
오래 전 소년처럼 피할 데가 없어서
지붕 위로 올라가 몸에 자꾸 돋는 비늘을
핀셋으로 떼어내고 있었는데


첨벙
첨벙


오빠라고 불러 형이라고 불러 다음에 또 올게
……… 그런데 엄마는,





신제품 / 신성률


가게처럼 사내가 낡아 보였다
옛날을 만들어낸 오늘의 상품들이
반짝거리며 가득했다
가게 보느라 오늘날에는
되는 일이 더는 없다고 떠들어대자
그나마 늙을 수 있었던 것도
십오 년씩이나 볼 가게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자가 받아 쳤다
사내의 말대로라면
다 태초에 이루어진 일이거나
옛날에 이룬 일들만으로도 반질반질
가게가 넘쳐나야 마땅했기에
여자는 지려고 들지 않았다
늙지 않고자 해서 사내는 늙었을 것이다
새로 들어온 물건들을 뜯어본 적도 없이
손님들에게만 팔았을 것이다
그러고도 쭈글쭈글하지 않기를 바랄 수는 없는 일이라고
다시 여자가 입을 열었다
늘 들떠 있기 십상인 물건들을
총채로나 만지작거리면서
할인된 오늘을 고스란히 내주었을 것이다
여자도 그렇게 만질 것 같다는 생각 끝에
몸서리치는 여자가 대롱대롱 매달렸다
운 좋으면 사내는 앞으로도
십오 년은 더 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양 볼 탱탱하도록 추파춥스를 물고 있는 여자의
생몰연대는 짐작하기 어려웠으나
늙지 않고자 해서 늙은 사내에게 하는 말들은
영락없이 마누라처럼 보였다
새로 들어올 물건들을 옛날부터 뜯어왔다 해도
다 뜯어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내의 생각 또한
번들번들한 여자와 다를 바 없었지만
술잔에 사탕이 들어갈 리 만무하듯
여자의 어림과 사내의 짐작은 섞일 리 없어보였다
사내처럼 가게가 늙어서
번쩍거리는 오늘이 그득그득했다





가끔은 두꺼비집을 내리고 / 신성률


온몸이 귀 하나를 이기지 못하고 다 귀가 되었다 봄에 울던 귀가 입동이 지나도록 울었고 이상한 소문이 자꾸 들리는 귀가 이상했다 들렸는데 들리지 않았다 머리칼이 잘리고 전신마취를 당했다 뼈에서 고름을 긁어냈다고 했다 다 잘될 거라 했다 귀를 국가가 관리해주었다 다 달 들릴 거라 했다 들리지 않았는데 들렸다


그 뒤로도 온종일 귀는 제 위치를 알려왔다 손톱 밑이나 복사뼈에 머물기도 했고 무릎이나 이마를 짚기도 했지만 더러 몸 밖으로 나갔다오기도 했다


온갖 말들의 은신처가 된 귀가 더러워질 대로 더러워진 그 해는 왕이 곳곳에서 출몰하던 해이기도 했다 집사네 집에 며칠 들렀다고도 했고 집달리가 여럿이라고도 했는데 가끔은 민가의 두꺼비집을 내리고 마술을 부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온몸을 다 들은 귀가 해를 넘기고도 온몸을 다 떠벌리고 다닌다는 말들이 우박처럼 튀어 올랐지만 왕가의 두꺼비집에 물 뿌린 이가 누구인지 끝내 관가에서는 밝혀내지 못했다고 했다


어둠이 귀가 커질 대로 커져서 아무도 함부로 입을 열지 않는다는 소문이 거리마다 흉흉했다 어디고 할 것 없이 귀가 큰 밤이 굴러다녔고 밤새 삐라를 줍는 귀먹은 늙은이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삐라는 건배사처럼 모호한 말을 남긴 채 뿔뿔이 흩어졌고 귀가 큰 밤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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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될 줄 알았다 / 지이산

 

석 달 열흘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꽃 소식 지나가고 눈 덮인 산 바라볼 때까지

차만 우렸다 넉 달쯤 차만 우리면 뭐라도 될 줄 알았다

엽저가 폭설보다 높게 쌓이도록 차만 우렸다

1년이 지나갔다 누구는 미쳤다고 하고, 누구는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누구는 같이 하자고 하고, 누구는

모른 척 했다 그래도 차만 우렸다

 

차를 우려 마시면 찻물이 씻어줄 거라 믿었다

몸 안에 가득 찬 울음이 어디로든 빠져나올 거라 믿었다

꽃도 못 본채 1년하고도 석 달이 지나갔다 감자 꽃 하얗게

피었다는 소식에 다시 찻물 올려놓았다 찻물 끓는 동안

다구를 닦았다 돌돌 말린 찻잎 넣고 물을 부었다

대나무 향이 올라왔다 적벽대전 하루 전 날처럼

차는 마시지 않고 있다 바람만 바라보았다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적셔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품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바라보는 일

차는

마시는 일이 아니라 노는 일

입으로 마시는 일은

가장 나중에 하는 일이라는 것을

하늘에서 뭐라도 뿌리는 날

 

 

 

[당선소감] 

 

"늘 차와 함께 시처럼 살겠다"  지이산

 

 

찻물부터 끓입니다.지독한 폭염 안에서도 차를 우렸으니,당선 소식 받고 기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차를 우립니다.못 된 슬픔과 맞서려고,한 사람 마음 안에 들어가고 싶어 위리안치 스스로 유배시켜 놓고 유배일기 쓴지 5년.1300편 넘는 유배일기는 늘 차와 함께한 시간이었습니다.그러고 보니 1001번 째 쓴 당선작 ‘뭐라도 될 줄 알았다’도 차 우리는 이야기입니다. 

시에서도 드러나듯 차 우리는 시간은 참 좋은 친구입니다.17년 전 어머니 수의 안에 꼬깃 넣어드린 원고지 생각이 납니다.지금은 다 지워졌을 테니 이제 큰 소리로 읽어드려야겠습니다.심사해주신 분이 정현종·이상국 시인이라는 말에 더없이 기뻤습니다.고맙습니다.늘 되뇌었던 다짐으로 시처럼 사는 사람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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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사평]

 

“문인으로서의 첫 발걸음을 뗐으니 앞으로 열성적인 작품활동에 나서겠습니다.”

2018 김유정신인문학상 수상자들이 문학의 계절 가을에 선배 작가 김유정의 혼이 깃든 춘천 실레 마을에서 등단의 기쁨과 다짐을 밝혔다.수상자들은 19일 열린 김유정신인문학상 시상식에서 ‘작가’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들었다.올해 김유정신인문학상에 응모된 작품은 단편소설,시,동화 등 3개부문에서 총 1261점이 접수돼 전국 신인문학상 중 최고수준을 기록했다.부문별로는 소설 293편,시 852편,동화 116편이 등단의 꿈을 품고 접수를 마쳤으나 이 중 단 3편만이 심사위원의 손을 통과해 독자를 만났다.수상자들은 이날 수상소감을 통해 작가라는 무게감을 짊어지고 좋은 글을 쓰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단편소설 부문에 ‘판타스틱 엘라’로 상금 1000만원을 받은 정지윤 씨는 “글을 읽어주시고 뽑아주신 분들에게 감사드린다.앞으로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고 정진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뭐라도 될 줄 알았다’로 시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지이산(본명 지용식)씨는 “1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말이 시인에게도 통하는 것 같다.좋은 심사평을 남겨주신 만큼 큰 그림을 그리는 시를 써나가겠다”고 말했다.

‘딱풀마녀’로 동화부문 수상자로 선정된 신전향씨는 “새로운 시작의 기회를 주신 심사위원분들께 감사드리며 아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김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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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빛나는 밤에 외 4편 / 김새하

 

 

 

 

상트페테르부르크 오래된 서점 풍경만큼 비를 맞고 싱싱한 커피 냄새가 난다 피의 사원으로 가는 길엔 행위예술 중인 까마귀 동전을 물고 눈썹이 긴 여자 바람에 날리는 빠삐용 치마와 네바강을 거닐 때 심장을 짜낸 비트가 출렁거리며 외치는 이름 달을 찾느라 검은 물속의 푸른 눈을 뜨는 백야 차이콥스키 음악은 배 위 바람을 맞고 옛날에 받았던 편지는 아침을 만난 가로등이 된다

 

푸른 밤을 보는 깃발과 검은 밤을 보는 등대는 다리를 보며 잠긴 생각과 하얀 하늘을 걷는다

 

행복을 만드는 사람은 안경을 고쳐 쓰고 내시경을 들여다보는 찢어질 듯 팽팽한 창자다

망치를 때리는 두개골 소리는 흰색과 검은색이 반복되는 얼룩무늬

혼자라고 해놓고 항상 혼자가 아닌 것과 혼자가 아니지만 항상 혼자인 것의 별이 빛나는 밤에*

버킷리스트를 꿈꾸고 침을 삼키다 사레에 걸리는 일은 심심찮게 목젖을 때린다

 

이제 어디가

어디 가긴 출근해야지

팔리지 않는 집과 백야를 보내던 구멍 난 주머니

TV를 켜 논 채 들었던 잠을 깨는 방에 오로라 같은 커튼

정년퇴직을 꿈꾸는 남자가

밤새 돌아간 선풍기에 휴식을 주고

축축한 출근 도장을 찍는다

엘리베이터를 호출합니다 하향 엘리베이터가 도착합니다

여행을 끝내는 것은 잘리지 않는 거리에 셔터를 내리는 것

우린 아직 사랑이구나

 

*고흐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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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반복

 

 

외로움 깊이 재려는 시도

 

바닷가 모래 위 텐트, 잠든 아이들을 위해 통삼겹바베큐를 준비하는 사내 능숙한 칼솜씨와 적절한 소스의 양, 세심한 불 조절, 직업을 짐작하게 한다

호텔 테라스의 햇빛이 어울리는 외모지만 자연 속 사색을 좋아한다며 공기 한 토막 잘라 깔고 누웠다 시선은 선글라스 너머 바다로 향한다 어젯밤 마지막으로 내준 코발트 빛 푸딩이 일렁거린다 해변의 여인 힙업 아래 탱탱한 허벅지 죄책감 없는 사진을 시식, 입맛 다시는 식도를 뜨겁게 내려간다, 물속에서 노는 딸 해변으로 나오면 몇 조각 저며져 무료한 듯 무료하지 않은 시간을 채우는 쉬운 재료로 내정됐다

저녁 메뉴는 감자와 판타체를 곁들인 신선한 양다리, 초고속 요리를 꿈꾼다 접시에 담긴 날 것들 부끄러워 석양을 잡는다 뜨거운 양다리 육즙, 턱을 타고 내린다

 

슬픔이 눈물의 눈물을 닦는 시간을 배우고

다음 슬픔을 기쁘게 기다리는 동안 외로움의 방향을 찾던 나침반, 수행하지 못한 임무와 모래 무덤을 판다 눈 어두운 청개구리의 절망 비가 내린다 흠뻑 내려버려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장래희망

 

 

 

 

욕조의 물은 얕은수로 끌어당긴다

제 몸 식는 줄 모르고

이 몸을 끌어당겨 무얼 하려는지

 

뜨거운 물로 녹여 만든 붉은 푸딩을

백열등 아래 흔들어주길 몰래 바란다

 

조심해야 할 시간이다

 

항상 먼저 다가오는 이별

이미지 없는 그림을 그린다

 

뚝뚝 떨어져 놓인 퍼즐 조각

여백이 채워지면

우리는 무엇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뼛가루에 피를 섞고 채를 친 살을 얹어

천천히를 오랫동안 먹여 키운다면

무엇인가는 우리가 될 수 있다

 

비가 내리고 비를 보며 샤워를 하고

책을 펴고 비를 보고

사랑을 나누고 잠을 잔다

 

꿈속에서 쓴 시를 기억하려

눈꺼풀 안쪽에 새겼더니

눈을 뜨면 올라가 버린다

시인이 웃는다

 

 

 

 

 

 

갈비뼈 소사

 

 

 

 

갈비뼈 한대를 뽑아 빈자리를 내려다보니

다른 갈비뼈가 자라고 있다

손에 든 갈비뼈에서 푸른 소금물이 떨어지고

자라나는 갈비뼈에는 갈매기가 날갯짓을 하고 있다

갈매기를 잡아 날개를 꺾으면 자라나는 갈비뼈는 아프지 않겠지

오락가락하는 숨길은 싸한 맛에 혀를 날름

갈비뼈를 핥아먹으려 들어 손에 든 뼈다귀로 숨길을 막아버린다

숨 쉬지 못하게 틀어막고 갈비뼈가 시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 쥔다

바람이 들락거리지 못하게

천둥이 쾅쾅 두드려보지 못하게

이미 밖으로 나온 갈비뼈는 계속 푸른 바닷물을 흘려도

새 갈비뼈는 그 자리를 지키게

가슴에서 또 삐져나오지 않게

그래서 찬바람을 만나지 않고 부서져 내리지 않게

손에 든 갈비뼈로 쾅쾅쾅 못을 쳐 가슴을 닫는다

바다가 흘러내린다

 

 

 

 

 

 

 

 밧줄

 

 

썩은 밧줄이 있다

더는 배를 부두에 매어둘 수 없는

낡다 못해 썩은 밧줄이다

갈매기 한 마리씩 더 앉는 것에도

숨차게 출렁거린다

보는 사람마다 잘라내라 아우성이다

썩어도 준치라고 큰 배를 잡고 생을 채워온 나를

한 번에 잘라내지는 못하나보다

어제 입은 상처 위에

오늘도 내리치는 칼이 날카롭다

밤이슬 검은 공기에 몸을 늘어뜨린다

이대로 풀어져 바다로 내려가길 기도한다

부둣가에 떠 있는 쓰레기들이 물냉면의 고명처럼 떠 있다

축 늘어진 모습 웃음이 되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침노을이 가고 난 뒤 피부는 뙤악하게 쪼여온다

밤새 아문 상처가 두렵다

내일도 계속될 일을 또 다른 오늘에 맞이한다

썩은 밧줄이 있다

오늘도 잘리기 위해 기다리는 밧줄이다

 

칼을 내려놓고

풀어줄 사람 없는 밧줄

처음 모습이 생각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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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수화 외 4편 / 최지원 

 

 잎이 넓은 나무일수록 잡음에 개의치 않는 무딘 청력을 타고났다

 

 그렇다고 나무의 귀가 아주 무딘 것은 아니다
 몸 밖으로 뻗어 있는 수많은 안테나는
 몇 억 광년 떨어진 별들의 교신까지 스캔 뜬다는 사실을
 나무가 남긴 나이테를 보고서야 알았다

 

 몸 전체가 소리를 기록해 놓은 엘피판이라니

 

 나무에게 읽혀지지 않는 소리란 없었겠다
 낱낱의 사물, 우주의 섭리가 깊이 해독될수록
 셀 수 없는 문을 입에 문 나무
 일 년에 한 번만 어눌한 말을 내뱉었다

 

 수시로 들락날락거리며 마음까지 휘저어대던,
 호들갑 떨던 바람의 수다에 잠시 응대해주던,
 뾰족이 내민 시퍼런 말로 풋내를 풍기는 수화
 타고 오르는 넝쿨의 여린 눈망울들에겐 치명적이라는 것

 

 나무가 수도 없이 반복하던 동의어에도 귀가 어두운 나는
 추락의 끝이 뿌리의 끝을 간지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무들이 자꾸 쏟아낸다, 붉게 익은 말

 

 지나가는 버스 안, 그림자로 스며 든 나무들
 몸속 깊숙이 붉게 읽힌 수화가 번성할 때
 내 귀는 당나귀처럼 삐죽삐죽 돋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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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무의 시간


 

먹선이 비치는 수묵담채화 속으로
급브레이크 자국 남긴 고무

 

돌돌 말아 한참 꾹 쥐고 있어 본들
고무에게는 축소 해석이 없으므로
돌아갈 곳은 구겨질 리 없는 본성이다

 

사방팔방으로 쑤셔 본들 유추 해석에 휘말려들지 않아
한지 위에 찍힌 고무는 늘 긍정적이다

 

웅덩이 투성이 고무에게 웅덩이란 없는 법이다

 

가위에 잘려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므로
여전히 고무이던 고무

 

고무가 만난, 셀 수 없는 깃발들
시도 때도 없이 펄럭임도 고무 안으로 들어오면
눈 내린 풍경처럼 잠잠해진다

 

도대체 고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이 모든 일에 폭설처럼 태연자약한 고무

 

세상에 어떤 고무(鼓舞)적인 일을 만나본들
고무의 깊은 심중을 알 수 있을까

 

해답을 물어보려는 순간
그늘만 먹고 살아 온, 거실 한쪽 구석 고무나무
제 몸속의 미로를 풀어놓은 채 부정의 살점을 뜯어먹고 있다

 

찢기 직전의 한지가 고무를 팽팽하게 잡아당겨 본들
누군가 버리고 간 수묵담채화에게는
확대 해석이 불가능하도록 지상의 모든 길을
눈이 덮었다

 

  

설원의 나무

 

 

위, 아래 좌우가 아슬한 경계에 히말라야시다가 산다

 

설원 꿈꾸다 부드러워진 가시
촘촘히 층을 이루었으나
도심 한가운데 거대한 뿔로 선다는 것은 여간 어지러운 일 아닐 것

 

그러나 나는 이처럼 순한 뿔을 본 적 없다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경계란 시간 밖의 경계라는 것을 아는
히말라야시다

 

위에 누르는 무엇을 치받고 싶을 때
나는 뿔 같은 그늘에 앉아
커피 마시고 불끈 솟는 힘으로 종이컵 구긴다

 

그러나 뾰족한 창날처럼 우뚝 서
누군가를 찌르기 전
소통의 깃발 흔드는 히말라야시다

 

시도 때도 없이 고함치는 자폐의 뿔이기보다
천천히 밀어 올리는 허공의 피 몸 안에 당겨 넣어
힘보다 순리를 앞세우는
당신의 승리에 잔잔한 박수를 보낸다

 

깊고 넓은 지반은 갖진 못했지만
설원의 꿈 단번에 꾸게 하는 착한 뿔이어서
히말라야시다, 나는 네가 좋았다

 

  

뱅크만의 달

 

 

 뱅크만을 지배하는 달은 거울의 방을 가졌다

 

 지구본에도 없는, 내가 명명한 뱅크만엔
 조수간만의 차가 예측 불허였고
 한 달에 한 번 잠깐 밀려오는 밀물마저 급속도로 빠져나갔다
 한 번 빠져나간 썰물은 좀처럼 밀려올 줄 모르기에
 인력으로도 어쩔 수 없었다

 

 썰물의 시간이 길어 말라가는 바닥 위로
 달이 던진 음모의 그물망에서 소금기 품은 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구멍에 숨어 두근거리는 가슴 붙들어 매거나
 간혹 두 눈 치켜들고 동정 살피는 뻘의 족속들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거울의 방 루이14세가 표독한 논리로 숨통 조여 올수록
 백이숙제처럼 완고하던 좌파 망둥어들마저도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오른손 더 높이 받들어‘옳소,옳소’외칠 때
 짱뚱어, 따개비 같은 여린 목숨들은 아예 두 손 치켜들고
 닭장 속의 알만 낳는 폐계라도 되고 싶어졌다

 

 루이14세와 유사한 추종의 무리들과 달의 힘으로 돌고 있는
거울의 방 톱니바퀴
 맞물려 돌아야 환해 질 지상의 음모들

 

 뱅크만 달의 음모가 더 깊어지기 전에
 백이숙제를 위해 고사리 뜯다 손톱 새까매 진 내가
 거울의 방 안에 갇혀 눈물 닦던 소매로
 밀물의 시간을 기다리며
 다시 쓱쓱 거울을 닦고 있다

 

 

 

괄호안의 이야기

 

 

쪼개지 않고도 여름을 통째로 파먹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를 유리성에 유배시켜 놓고
수박 속을 파낸 숟가락 끝에서
차갑게 식어 별똥별이 되어 질 목숨들
목구멍으로 꾸역꾸역 삼키곤 했었다

 

디비디바비디부, 으슥한 묘지의 쐐기풀 찾으러 갔으나
여린 목숨들의 온기가 식어 버린
해질 무렵의 바다, 눈앞에서 지울 수 없었다
중심문장에 부연설명 내리고 맛깔스런 묘사만 곁들여야하는 詩
도대체 쓸 수 없었다

 

디비디바비디부, 벽시계 속 추가 되어 조바심 나게
반복과 기다림 사이를 똑딱똑딱,
신선한 이야기가 아니면
금방 고개 돌리고야마는 갑(甲)들의 식성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뱅글뱅글 상모까지 돌리게 했다
한번쯤
고개라도 끄덕여 주길, 박수까지는 아니라도

 

식어가는 별똥별 위해 느낌표 하나 뜨겁게 찍는 일이란
괄호 밖을 배회할 수밖에 없는 아이러니
오물거리던 슬픔 뱉어내던 곳에서
가을, 철모르는 수박이 넝쿨을 뻗는다

 

디비디바비디부, 내가 나에게 건 마법 속에서
수박의 껍질 안쪽은 점점 비워져갔다
오목한 거기 느낌표 같은 숟가락만
남았다, 덩그러니

 

  

최치원신인문학상 심사평


 읽다보면 언어가 말을 걸어오는 시가 있다는 말, 자신의 얼굴과 목소리와 마음을 보여주면서 팔짱을 껴오는 시가 있다는 말. 보자기를 풀었을 때, 향기롭고 맛깔 나는 시의 선물이 펼쳐져야 심사자들의 눈도 더 밝아지는 거라는 이정록 시인의 기대 섞인 말에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응모작 앞에 앉았다.   
 
 예심(153명)을 거쳐 일곱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왔다. 어향숙의「다락방의 몽상」외 4편, 김수형의「야흐에 찍는 마침표」외 4편, 김수진의「사막의 역사」외 4편, 최지원의 「붉은 수화」 외4편, 한인숙의 「자작나무」 외 4편, 조연재의 「완두콩」외 4편, 이이후의「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 합계 35편의 작품이 그것이다. 이 중에서 심사위원들이 주목해 논의의 대상으로 삼은 응모작은 최지원의 「붉은 수화」외 4편, 한인숙의 「자작나무」외 4편, 이이후의 「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이었다.

 작품마다 긍정적 에너지를 많이 품고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엇비슷한 시문법으로 쓰인 탓에 각 응모자들의 시가 개성적이기 보다는 서로 닮아 보인다는 우려도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점수를 모은 결과 한인숙의「자작나무」외 4편은 자기호흡이 살아 있으나 산문적인 진술이 흠으로 여겨진다는 점이 감점 요인이었다. 이이후의「저물어 가는 목소리가 들렸어」외 4편은 이미저리의 혼란을 극복하고 ‘중심생각’에 초점을 맞췄으면 한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대상과의 거리유지가 적당하고 감각적인 이미지가 돋보인다는 점에서 심사위원들은 기꺼이 최지원 시인의 응모작을 당선작으로 택했다. 물론「붉은 수화」(나무의 나이테를 엘피판 이미지로 보는 등)에서 알 수 있듯 최지원 시인의 시세계가 오직 최지원 시인만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염려도 있다. 그렇긴 하지만, 얼룩으로 소음으로 떠도는 세계의 파편들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몸으로 당겨와 충분히 구체적인 언어로 만들어 내는 감각과 내공이 예사롭지 않다.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지적한 약점을 너끈히 뛰어넘으리라 믿으며 진심으로 축하의 박수를 보낸다.

 

심사위원: 안도현(시인) 이정록(시인) 류인서(시인). 대표집필 류인서

 

 

 

 
출처 : 송림산방
글쓴이 : 김욱진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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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 조성국


이보게, 오늘 우리 가끔 갔었던 운정에 다녀왔네 자네의 포돗빛 기타 소리가 그리웠네 우물 속 메아리는 이미 떠나 가고 없었네


이보게 자네는 늘 춤을 추었네

 

그 시월에 자네는 부산까지 내려갔다가 다 떨어진 신발로 나를 찾아왔네 곯아떨어진 자네 몸 여기저기 뭉개진 포도껍질이 다닥다닥 달라붙은 것을 보았네 나는 못 본 척했네 하필 그때 나는 시험 기간이었네

 

 

그 오월에 내가 있던 부대도 광주에 내려갈 거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 작전상황판을 포도씨처럼 내달렸던 붉은 점들이 자네의 질주 경로일 거라고 생각했네 하필 그때 나는 지하벙커에서 슬리퍼를 신고있엇네

 

그 유월에 자네는 이름 모르는 사람들과 포도송이처럼 빽빽하게 신촌 오거리를 채웠네 향기로운 과즙을 하늘 높이 날리고 있었네 자네 목소리는 인화성이 강했네 하필 그때 나는 빌딩 옥상에서 취재수첩을 들고 있었네

 

이보게 나는 그림자조차 자네 곁에 없었네

 

나는 오늘을, 자네는 내일을 말했네 내가 저녁을 먹는 동안 자네는 새벽을 바라봤네 등이 굽고 무릎 아픈 이제야 자네 춤을 흉내 내보네 한 줄기 추억이 후회의 가지를 무성하게 치는 날엔 벼락처럼 웃기도 하네

 

 

이보게 나는 이제 마중할 일보다 배웅할 일이 많아졌네 어느 날 내 부음이 찾아가면 모르는 척해주게 마음이 씁쓸하면 푸른 힘줄 툭 툭 불거진 자네의 왼팔 한 번 내밀어주게

 

이보게 내 서랍에는 자네가 두고 간 악보가 아직 있네

 

 

음표들이 포도알로 영그는 이 깊은 밤, 자네는 기타를 치게 나는 춤을 춰보겠네 죽은 지도 모르고 몇 시대를 산 자가 변명의 춤을 춰보네 이 벌거벗은 몸짓에다 침을 뱉어주게


이보게,
아프지 말게 자네의 하늘에 먹구름이 남아 있다면 그건 내가 울고 가겠네

 

 

2018 518문학상 신인상 심사총평

 

 

 : 조성국  소설 : 박철수  동화 : 한완식 소문

 

  518기념재단, 한국작가회의, 계간문학들이 공동주최하는 2018 518문학상의 신인상(, 소설, 동화 부문) 심사결과 시부문 조성국 , 소설부문 박철수 , 동화부문 한완식 소문 이 당선작으로 결정됐다.

 

  2018 518문학상 신인상은 2 19()부터 3 31()까지 총50일의 기간 동안 공모를 진행한 결과,  1024, 소설 91, 동화 46편의 작품이 접수됐다. 접수된 작품은 공동주최기관의 의견에 따라 구성된 각 부문(, 소설, 동화) 2인의 심사위원, 6(조성국, 서효인, 이진, 정용준, 이상권, 임지형)의 심사를 통해 각 부문별 한 편의 수상작이 결정됐다.

 

  시 부문은  (조성국)이 선정됐다. 이 작품은 심사 당시 심사위원 (시인 조성국, 서효인)으로부터 “518의 기억을 집단의 기억이나 조직의 기억이 아닌 개인의 기억으로 내밀하게 잘 풀어낸 작품이다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이 개인적인 형상화로 잘 형성되어 오히려 보편성을 획득한 아이러니를 지닌 작품으로서 개성 있는 문체 역시 다른 작품과 차별성을 지닌다는 평가를 받았다. 심사평에서는 의 시어들은 기억함과 잊어버림의 팽팽한 줄타기이다 돌올한 시의 개성으로 계속해서 기억을 더듬게 한다.’고 평가됐다.

 

 

  소설 부문은  (박철수)이 선정됐다. 심사위원(소설가 이진, 정용준) 고시원에서 살며 취업준비에 목매는 청년의 애환을 잘 그려낸 작품이다 주인공의 분투가 젊은이들의 당대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을 뿐더러, 자존감 상실과 회복이라는 두 축을 넘나드는 과정이 정치적 상황에 따라 기념과 배제의 대상으로 그 위상을 넘나들곤 했던 광주 518의 은유처럼 읽히는 측면이 있었다고 평가했다.

 

  동화 부문은 소문 (한완식)이 선정됐다. 심사위원(동화작가 이상권, 임지형) ‘80 5 18일을 기점으로 어린이의 심리를 따라가며 풀어쓴 것이 인상적이었다 실제 죽음을 목도하지 않았음에도 소문만으로 충분히 고통에 처한 주인공의 심리를 잘 표현하고 있다. 고통스러운 그날의 이야기가 어린이의 시각에서 차분하게 풀려나갔다.’고 평가했다.

 

  2018 518문학상 시상식(본상, 신인상)은 오는 5 19(), 19 518민주화운동기록관 대강당에서 진행된다. 각 부문별 당선자에게는 상패와 상금(본상 1천만원, 신인상 시부문 300만원, 소설부문 500만원, 동화부문 300만원)이 수여된다.

 

  한편, 518문학상은 2005년 제정되어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담아내며 새로운 관점으로 이를 계승할 수 있는 작품을 발굴하여 오월문학의 발전과 지속적인 집필환경을 조성하고 있다. 특히 2016년부터는 미등단 신인작가를 대상으로 하는 기존 518문학상 신인상(, 소설, 동화 공모)외에도 기성작가의 발간저서를 선정하여 역량 있는 작가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기 위한 518문학상 본상을 제정운영하고 있다.

[출처] 2018년 5.18문학상 신인상 시 당선작-조성국의 <춤>|작성자 박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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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작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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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바닥분수 / 김백형

 

광화문 광장 한복판 혹등고래 한 마리가 누워 있다

대리석 따개비를 붙이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다

폭염에 숨어 있던 시민들 고래를 구경하러 모여들었다

저것 봐봐 오대양 물을 잔뜩 채우고 있나봐

타들어가는 허공에 죽쭉 물줄기를 쏘고 있잖아

신이 난 아이들은 고래 등을 뛰어다니고

철퍽철퍽 물장구를 칠 동안

16차선 도로는 굽이치며 흘러간다

펄펄 끓는 태양 벗지 못한 갑옷 속에서

 세상 굽어보던 이순신 장군은

살 것 같다 살 것 같다 숨통을 트고

바다로 떠나지 못한 광화문 통째로 실어

출항을 준비한다

컨테이너 빌딩들 선적할 동안

티셔츠 젖은 연인들 포옹을 하고

넥타이 푼 아빠들은 구두를 벗어놓고

애엄마 웃음 따라 물 만난 고기들을 쫓는데

허공도 무지개를 걸어놓고 발라당 누워

어스름 땅거미를 기다린다

산호초 같은 남산 위로 물밀어올리는 밤바다

교차로 횡단보도를 정어리 떼처럼 건너는 회사원들

광화문은 그제야 물고기를 말려놓고

와이파이 데이터를 켜 세상 얘기에 귀 기울인다

정말? 눈 번쩍 뜨일 때마다 해파리 섬광처럼 별이 뜨고

쯧쯧 어떡하니, 머리가 한 짐 될 때 가로등이 부표처럼 둥둥 뜨고

그 사이 혹등고래 한 마리

지난한 오늘 하루를 유유히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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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골목 / 박한

 

 

골목은 왜 이리 얌전한지

자꾸만 쓰다듬고 싶어요

숨을 쉬는데

신호를 기다릴 필요가 없어요

손가락 마디를 보면

내가 헤맸던 길목을 알 수 있죠

매일 걸어 다녀도

달이 지는 법은 배울 수가 없어요

사실 골목은 지붕들이 기르는 것이라서

부르는 이름들이 달라요

고장 난 컴퓨터였다가

산지 직송 고등어였다가

김숙자 씨였다가

지현이 엄마였다가

가끔은 현석아 놀자가 돼요

왜 골목이

밤이면 군데군데 멍이 드는지

술 취해 돌아오는 일용직

김기석씨를 보면 알죠

그래도 골목은 도망치지 않습니다

쫓기는 사람들이

모두 골목으로 숨어드는지는

좁아야만 이해하는 습성

나도 쫓아오는 생활을 따돌리고

골목에서 뒷발로만 서 봅니다

창밖에선 내가 걸어가고 있고요

멀리 돌아갈 수 없는

직선이 없는 지도는

여기에서 발명 되었습니다

깨우지 마세요

난폭하진 않지만 겁이 많은 사람들이

불빛을 말고 숨어버릴지도 몰라요

쫑긋 세운 옥상들이 바람을 듣고 있습니다

 

 

 

당선소감

 

흘러가는 강 위로 눈이 다 내렸습니다. 두 손을 빼지 못했던 날들이 많이 허물어 진 것 같습니다. 서성인 옥상에서 다 자라지 못한 시들로 새집을 만들었습니다. 스스로 서기엔 둥지가 조금 더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마다 골목을 걸었습니다. 문 앞 눈을 치우는 순한 사람들과 혼자서 비어있는 의자들, 오래도록 누추한 우편물까지 부축해준 모든 것들에 고마웠습니다. 이제 골목을 빠져 나와 더운 무릎을 펴 볼까 합니다.

 

먼저 많이 부족한 제 시를 선택해 주신 유종호 선생님과 오탁번 시인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한 명의 시인은 하나의 정부라고 자긍심을 심어 주신 이영진 선생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언제나 시로 깊은 감동과 부족함을 일깨워 주는 김일영 시인, 허은실 시인, 정노윤 시인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립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사랑하는 그녀, 그리고 함께 수학해온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사평] 참신한 시적 상상력

 

올해에도 전국에서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지용신인문학상의 등용문을 두드렸다. 이처럼 등단을 꿈꾸는 예비 시인들의 열의는 해가 갈수록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이 시대가 주는 불확실성과 모호성은 원형적인 시창작의 욕망을 자극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 현대시사의 금자탑을 쌓아올린 지용도 시인이 살았던 시대가 주는 불안과 절망에서 일탈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으로 시 창작을 했을 것이다.

 

순한 골목’(박한)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순한 골목은 사물을 보는 따듯한 시선이 동심의 눈을 통하여 알맞게 시화되어 있다. 마치 골목대장 노릇하는 아이처럼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자아와 세계를 연결하는 솜씨가 놀랍다. 사물과 사물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를 참신한 상상력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작품은 풍차의 집’(박선희), ‘모래시계’(김동연), ‘먼 산’(김정식), ‘다비’(박소미)등 이었다. ‘풍차의 집모래시계’, ‘먼 산은 시적 구성과 심상의 전개가 믿을만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나 그냥 무난할 뿐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다비는 마지막까지 당선작과 우열을 가리기가 어려울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시적 구성이 주제와 이완되는 부분이 눈에 띄어 아쉬웠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전 대한민국예술원 회장, 오탁번 시인·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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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류하는 소문 / 박순희

 

봄밤은 무리 지어 피는 것을 좋아합니다

무리는 많은 말발굽들이 있고

나는 그 중에 한 개를 뽑아 구두에 매달았습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한낮이 지나갑니다

낮 동안 소리 없는 말들은

엄지에서 태어나고 죽어갑니다

 

천 리를 간다는 말엔

흥겨운 안장이 있습니다

 

난 무엇인가를 부르다 깨어나기도 하는데 간혹 후생이나 전생의 처지를 몸 안에서 겪는다는 생각입니다 낮게 젖은 꿈이 발굽을 타고 땅속으로 스며드는 아침, 밤새 돌아다녔던 몸이 말합니다 어제는 낯선 심장을 만나 아프지 않게 울었습니다 소문은 무리 지어 달리는 생물입니다 문 안의 일이나 문 밖의 일이란 당신이 던진 말발굽 하나가 단초입니다 사람들의 말로 지쳐가는 귀는 워워 말을 쓰다듬는 것이 해답입니다

 

나는 역류하는 존재가 아니라서

심심한 하루를 보냅니다

매일 넘치지 않기 위해서 쪼그려 앉습니다

이야기는 안경을 벗어야 볼 수 있습니다

부질없이 부푼 것 중 하나가 여벌이어

입술이 부릅니다

 

봄밤에 나는 말발굽들을 뽑아 버립니다

주인 없는 말발굽들이 어디론가 질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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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목 4

 

성금숙

 

 

우리가 된 우리는 서로 길들여지고 길들었다

길들여지는 것은 자신과 멀어지는 일이어서

우리의 목은 우리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 속 고독에 대해 입 없는 것처럼 함구하고

침묵으로 누운 우리의 저녁

어긋난 입모양들이 덜그럭거렸다

 

굳게 닫힌 우리 문

바깥 생각을 우리에 심으면

눈이 발생하고 뾰족하게 싹이 났다

반듯한 이마로 뻗는 뿌리들

 

우리의 우리 틈에서 자란 뿔들로 이마가 울퉁불퉁해진 우리는

없으므로 보이지 않는,

우리 문을 두리번거렸다

 

폭풍이 지난 후

고요한 우리 속

 

처음부터 없던 우리에서

처음부터 있던 우리 밖으로

우리에서 멀어질수록 가까워지는 초원으로

우리는 점차 눈길을 돌렸다

멀어져서 희미해진 우리의 우리를 넘는 순간

우리는 벌써 우리의 우리로부터 까마득해졌다

우리의 목은 우리에서 각자에게로 돌아왔다

 

 

 

 

진동하는 침묵

 

 

 

 

 

침묵을 멈추지 않네

 

죽어서 싹이 돋고

꺼진 듯 불씨를 키우고

 

내 입으로 쏜 말이

총알처럼 날아가 날카롭게 박힌

 

당신이라는 문장을 떠올리면

일렬로 날아가던 새들이 흩어지고

공중이 활처럼 휘어졌다 펴지고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네

 

비의 말을 도르르 말아 낙하시키던

마른 연잎은 목을 꺾었네

꽁꽁 언 연못에 돌을 던지며

가까스로 이를 보이며 웃던

당신을 멈춰야 하네

 

당신에게 나는 검은 사람

검은 머리 검은 웃음

천 개의 먹칠한 숫자

 

진동하는 당신의 침묵을 꺼야 하네

 

당신에게 박힌 말을 빼서

거꾸로 내 심장에 박아야 하네

어둠이 더미로 몰려오기 전

당신을 제발, 멈추게 해야 하네

 

 

 

 

 

 

 

 

하얀 생각을 뭉치면

그 겹겹은 어둡습니다

검은 생각들,

 

사람을 둥글게 뭉치면

덩어리가 됩니다

 

깔깔대고 박수를 치고 연대하는

뭉치기 좋은 광장은 사람을

사람은 눈을 뭉칩니다

 

뭉친 덩어리를

굴리고 받고 던지고

던지고 받고 굴리고

덩어리는 오른쪽 왼쪽

골고루 불어납니다

 

역삼각형 얼굴에 찢어진 눈꼬리

사람들이 내게 둥글둥글하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덩어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뭉치느라 늘 어깨통증이 있습니다만,

눈 내리는 광장을 보며 또 눈을 뭉칩니다

불어나기를 멈추지 않아서 나는 떠오릅니다

 

둥둥 떠오른,

 

납작한 그 뒤통수를

처진 눈꺼풀 안쪽에서

나의 슬픈 눈이 지켜봅니다

 


 

 

훔쳐서 쓰다

 

 

 

 

초록이 죽고

초록이 번진

 

풍경을 훔쳤다

 

내막 없는 슬픔처럼 아름답게

서어나무 가슴에 뻥 뚫린 구멍

벌레에 잠식당한

둥근 무늬들

못 자국처럼 몸에 파인

네 흔적을 실크로 가렸다

은폐할수록 그 속에 발이 빠져서

소멸되고 있을 때

 

숲에서 벌레에 먹힌 서어나무 구멍이

이끼를 키우며 사는 것을 보았다

죽음의 생기를

북돋는 숨소리

그 풍경을 훔쳐서

내 몸속에 지녔다

 

훔친 생기를

수시로 나의 표정에 썼다

발칙하게도,

나는 점점 발랄해져가고 있다

 

 

 

 

 

눈물이 핑 돌다

 

 

 

 

시곗바늘이 또박또박 돈다

 

경비원이 멱살을 잡은 잠을 뒤로 돌린다

골목이 담을 넘은 소문을 돌린다

신호등이 사거리를 팽이처럼 팽팽 돌린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는 사람들

왼쪽 얼굴과 오른쪽 얼굴이 포개진다

 

불변의 일상이 나를 돌린다

나는 팔랑개비처럼 팔랑팔랑 돌며

우리 집 구석구석을 돌린다

 

밥값을 계산하다 바닥에 떨어뜨린 동전이 돌다 쓰러진다

돌지 않는 돈을 세다

아스피린을 삼킨 오렌지분식 사장님

 

참도 거짓도 옹호하지 않고

회전문이 돈다

 

도는 것들은 닳아서 반들거리고

도는 것들은 들어왔으면 나가야 해서

내 입구로 들어온 것은 출구를 찾아 몸속을 돈다

 

이다지도 황홀하게 돌아가는 세상

출구가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빨라진다

 

나를 부르는 사람이 없으므로 편안한 날들이 지속된다

채널을 돌리다 개그콘서트를 본다

너무 우스워 눈물이 핑 돈다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소감

 

 

문지방을 넘다

 

 

  잠 못 들고 뒤척이던 여름밤, 노래 소리에 끌려 마당으로 나가면 저수지 건너에서 물에 빠지며 찰람찰람 건너오는 불빛들이 있었다. 그때 나는 어린 마음에 그 불빛의 일원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망설이다가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찾아간 시와의 만남. 내 상상은 단단한 시멘트 같아서 시와의 동침은 방 구석구석에 먼지를 쌓이게 했다. 겁도 없이 그렇게 시작한 시작(詩作)으로 나는 아픈 것보다 더 아픈, 아프지 않은 증세를 행복하게 앓았다.

  오늘 당선소식은 문 밖 어두운 곳에 서 있는 내게 불이 환하게 켜진 방문을 열어준 것은 아닐까! 꽃다발을 안겨주며 문지방을 넘어오라고 어릴 적 마음속에 깊게 음각된 저수지 건너 불빛의 일원이 되라고 허락해준 것은 아닐까! 꽃다발도 축하도 왁자함도 시들겠지만 내 방에 남을 그 향기는 상장처럼 걸어놓고 끝까지 같이 할 것이다. 앞으로 시를 만나는 날이나 만나지 못하는 날이나 눈 마주치는 것들에게 말을 걸고 듣도록 노력할 것이다. 시가 퇴색되지 않도록 낡고 허름한 나의 서랍을 끊임없이 열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또한 주저앉으려 할 때마다 나를 북돋아주고 다독여준 분들과 나와 인연이 된 분들 모두에게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미흡한 시를 선해주신 전기철, 배홍배, 조윤희 선생님 그리고 이 상의 관계자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곧 첫 기일을 맞는 아버지의 영전에 당선의 기쁨과 시를 바칩니다.

 

 

성금숙

충남 부여 출생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이메일 sees1221@hanmail.net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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