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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개질을 해요 / 강나무

 

당신의 목소리는 코바늘 8호가 적당해요

가볍게 날리는 분홍의 기억 한 뭉치를 골랐어요

보풀처럼 번지는 무심함을 당겨 한 코에 한 번씩 입김을 불어 넣어요

일정한 텐션을 유지하려고 수시로 미간의 주름을 살피죠

오늘 본 영화처럼 촘촘했다가 느슨해지는 건 좋은 결말이 안 나요

뒤꿈치를 들던 첫 입맞춤처럼 한 단 한 단 키가 늘어나요

짧은뜨기는 기둥코 하나를 세워서 더디지만 튼튼하고

한길긴뜨기는 기둥코가 두 개라서 빠르지만 힘이 없어요

여러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마음을 정하는 일은 정말 어려워요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

실밥처럼 눈이 내리면 자꾸 옆을 보게 돼요

여름에는 얇은 꿈으로 성글게 잠을 떠서 뒤척이는 세상을 덮어줘요

낮에 꺼내지 못한 색색의 이야기들로 여러 개의 별을 뜨며 밤을 견디죠

별들을 이어붙이며 멀리서 혼자 깜박거리는 당신을 생각해요

한 단을 마무리하는 빼뜨기는 문장의 마침표에요

숨을 몇 번 쉬었는지 강약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뱉어버린 고백 같아요

마음이 식으면 미련 없이 줄을 풀지요

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

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

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

비구름 속에 숨은 하늘색 실을 뽑아 네트가방을 떠요

숭숭 뚫린 구멍들 속으로 팔딱거리는 물고기들을 잡았다가 놓아준다고 상상해요

빠져나가는 물고기 지느러미에 당신의 기억을 달아놓아요

가방 손잡이는 웃고 있는 나의 입을 닮았죠

 

[당선소감]

 

낯선 곳이었습니다. 얼마간 걷다가 만나는 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귀가할 생각이었습니다. 워낙 길치인지라 평소에 길을 잃고 헤맨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날도 방향을 잃은 체 도로 옆 나무와 들풀들이 우거진 긴 흙길에서 무작정 걸음을 옮기고 있었습니다.

일부러 길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두근거림과 두려움이 공존하던 시공간에서 당선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받았습니다. 더할 나위 없이 뭉클한 각본 같아 너무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시로 밥을 하고 국을 끓이고 시로 꿈을 꾸고 시로 울기도 한 긴 시간들이 떠올랐습니다. 걷다가 만난 작은 나무의 열매를 터뜨려 보랏빛으로 물든 손바닥을 들여다보았습니다.

처음 걷는 길과 처음 본 열매의 흔적 그리고 첫 당선 소식, 한 번도 본 적 없는 빛나고 선명한 길 위에 제가 서 있었습니다.

시와는 이제 서로 알아가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이보다 즐거운 일이 또 있을까요? 이 즐거운 일에 김유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동행할 일이 사실 너무 두렵습니다 하지만 이 또한 얼마나 벅차고 행복한 운명인가요?

멀기만 한 시의 길에 무지개를 선물해 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이경림 선생님, 감사합니다. 선생님의 가르침을 빼곡히 적은 노트를 들여다보면서 방향을 잃을 때마다 이정표로 삼아 여기까지 왔습니다.

박지웅 선생님, 그 감사함을 말로 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당부하신 말씀처럼 초심 잃지 않고 제 시를 마음껏 쓰겠습니다.

늘 든든한 후원자 병도 씨 그리고 륭, 존재만으로도 힘이 되었던 가족과 친구들, 사랑하는 인천 새얼문학회 문우들과 오래오래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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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심사위원 이상국, 고형렬

 

본심에서 거론된 작품은 「재림」 「새들은 빈집에 와서 죽는다」 「옥상 언니들」 「뜨개질을 해요」 등이다.

오브제와 발상, 형식과 목소리가 각각 다른 열여덟 편에서 「뜨개질을 해요」를 흔쾌히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은 일상 속에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이미지들 중에 자기 것에 눈을 맞춰서 알아내고 그것을 마음의 거울에 비춰 ‘네트가방’과 같은 한 편의 아름다운 시를 뜨개질했다.

기억할 만한 현재적 의미와 더 나아가서는 시적 미래의 약속까지 제시한, 예컨대 “몇 번의 이별을 겪고 나면 어느새 겨울에 당도하죠/(중략)/나는 처음과 달리 꼬불꼬불 엉켜 있어요/다시 시작해야 하지만 괜찮아요/사슬뜨기의 콧수를 세다 보면 다른 생각이 안 나요”의 시행들은 간결한 치유와 위안의 힘을 가졌다.

얼굴 앞에서 움직이는 코바늘의 침묵과 시인의 내면 응시가 부딪치는 길항의 울림이 빛났으며 시적이라 할 만한 것의 어떤 조화를 빚어냈다. 청유형과 고백체 화법의 「뜨개질을 해요」는 말이 끊어진 팬데믹 속에 갇힌 마스크 시대가 발견한 성찰과 인내의 기쁨이자 이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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