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알츠하이머 / 김혜강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사철 눈이 내린다

온 세상이 하얀 마을에는

기억으로 가던 길들도

눈으로 덮이어

옛날마저

하얀색이다

눈이 소복

쌓이는 마을에서

온 몸으로 그림을

그리시는 어머니

어느 유파에도 속하지 않는

그림을 지우고

지우고 그리신다

 

어머니가 사는 마을에는

하염없이 눈이 내려

바구니에 담을 추억도

색연필 같은 미래도 없어

하얗게 어머니는

수시로

태어난다

 

 

 

 

어머니의 마을에는 눈이 내린다

 

nefing.com

 

 

[당선소감]

 

낯선 전화번호가 뜨며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광고 전화일 것 같아 받지 말까 하다 받았더니 당선을 알리는 전화였습니다. 정말 기뻤습니다. 오래전부터 공정하게 실력을 가리는 공모전에 당선한 시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쉬지 않고 노력하며 도전했지만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좌절과 실망의 해와 달이 수없이 뜨고 졌습니다. 돌이켜보면 그 순간들이 시작(詩作)에 든든한 밑거름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시는 내면에 있는 수많은 자아를 찾아갈 수 있는 길잡이 역할을 해줍니다. 뿐만 아니라 세상과 신비로 가득 찬 우주를, 다양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눈을 조금씩 넓혀주는 마법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조금은 당당하게, 그러나 겸손한 자세로 시작에 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가족들, 그리고 고독하고 아름다운 시의 길을 함께 가는 문우들과 이 기쁨을 함께 하고 싶습니다.

 

끝으로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해 준 동양일보와 옥천문화원, 그리고 옥천군과 심사위원 선생님께 큰절을 올립니다. ‘지용신인문학상이라는 명성에 누가 되지 않게 열심히 쓰겠습니다.

 

 

 

[심사평] 절제된 언어시적 변용 솜씨 알차

 

25회째를 맞는 지용신인문학상에는 올해도 경향 각지에서 300명이 넘는 수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작품을 응모했다. 응모작이 해마다 증가하는 일은 물론 고무적인 일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이 어느새 이토록 역동적인 시인공화국이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시를 너무 안이한 태도로 쓰는 습관이 왜 이렇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가 하는 우려도 숨길 수 없었다.

 

시는 썼다가 다 지우고, 다시 썼다가 또다시 말짱 지우고, 종단에는 백지만 남는, 지우기(delate)만 남아있는, 하얀 공백 위에 피어나는 핏빛 꽃봉오리여야 하거늘, 어쩌자고 이렇게 산만하고 지루하게 무작정 길게만 쓰는 것인가.

 

당선작 알츠하이머’(김혜강)는 아주 단순한 소묘 같지만 그 안에 숨기고 있는 시적 변용의 솜씨는 얄밉도록 알차다. 알츠하이머에 걸린 어머니에 대한 사랑과 안쓰러운 마음을 직설적인 토로와 절규를 통해서가 아니라, 말 못하는 카메라 렌즈를 통하여 당겼다 밀었다 하면서 절제된 언어로 표출해낸 빼어난 작품이다.

 

최종적으로 논의된 , 뿌리경전을 읽는 저녁’ (문순희), ‘김딸막 할머니의 국어시간’ (장현숙), ‘담쟁이’ (김은유)도 알맞은 시적 상상력을 잘 형상화해 흥미로운 시적 구조를 이루고 있지만 너무 인위적으로 가공한 흔적이 보이는 게 흠이었다. 어느 정도 시창작의 방법을 터득한 후에는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개성화하여 독창적인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

 

지용은 한국 현대시사의 서문이요 본문이다. 이토록 장엄한 현대시사의 현장 속으로 달려오는 지용신인문학상응모자들의 시적 성취가 날로 향상되기를 기원한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오탁번 (시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