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른 부는 아침 / 강성원
붉은 바닷가의 집
녹색 커튼을 살며시 열어보는 아침 해
내려다보는 백사장엔 모시조개가 제 살을 비우고
날아오를 듯 흰나비로 앉아 있다
먼 길 가려는 바람은 물너울을 타고 온다
모래톱 위를 종종종 걷는 물떼새
안개는 빨판을 달고 배 한 척 붙들어 놓지를 않는다
길을 내려가 보면 바다가 보여주는 손바닥
잠든 바위를 깨우다 시퍼렇게 멍이 다 들었다
파도는 모래사장에 음표를 새겨두고
도레시 라솔미 오르내린다
바다가 들려주는 고요하고 부드러운 음악
사랑이란 단어를 적어 넣으면
오선지 위에서 저토록 따뜻하게
꽃으로 피는 말이 있을까
바다를 향해 걸어가다
딱, 그만큼의 거리에서 발걸음을 멈춘 해안선
메꽃이 피어 호른을 분다
맨 처음 입술을 열 때 첫사랑이 저랬을 것이다
한 잎 수줍은 입술이 파르르 떨다
천천히 입을 오므린다
[당선소감 “낮은 곳에 눈길 두고 희망 노래하는 시인 되고파”
오월의 하늘 아래 빛들의 산란이 꽃처럼 눈부신 이 봄날 무뎌진 시상과 각이 흘러내리는 어깨 위에 기꺼이 죽비를 내려주신 두 분 심사위원님과 지용신인문학상 운영위원회 관계자님들 그리고 동양일보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시를 써오는 동안 이곳저곳 등단이라는 유혹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만 아닌 것은 아니라고 되뇌면서 견뎌왔기에 오늘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인연이 맺어진 찬·민 두 아들과 아내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하면서 다시 일어서서 이 길이 내 운명임을 알고 생이 끝나는 날까지 깊어지고 멀리 가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무작정 문학공부를 시작했지만 내 시의 첫 발원지이자 큰 바다라 할 수 있는 젊은 날의 해맥문학동인들 그리고 저를 기억해 주시는 지금의 문우님들께도 시로써 아침 인사를 드립니다.
제 시가 이제 막 피어나는 들꽃에 맺힌 이슬 한 방울의 무게였으면 좋겠습니다. 누군가의 눈가에 슬픔도 없이 그렁그렁 맺히는 눈물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사평] 알맞은 시적 변용·언어 묘미 잘 살려
해조음 들려오는 한적한 바닷가 정경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솜씨 놀라워
독창적 시적 구성·참신한 이미지 전개
신인작품 범주 뛰어넘는 대단한 성취
올해 지용 신인문학상 응모작품을 심사하면서 새삼 정지용 시인이 우리 현대시사에 끼친 상당한 영향력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시의 위의와 품격을 누구보다 강조한 지용은 갑남을녀가 쓰는 생활어를 빼어난 시적 언어로 재구성하여 당대에는 물론 그후 오늘날까지 아무도 따라가지 못하는 드높은 높이까지 밀어올린 현대시사의 상징적 시인이 되었다. 지용은 청록파에서부터 시작하여 오늘날까지 모든 시인 지망생에게 하나의 교과서 같은 문법을 제시해주었고 우리 현대시가 지향해 나가야 할 방향을 지시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해 온 것이었다.
해마다 방방곡곡에서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하는 수백명의 신인들도 지용시가 지닌 이러한 문학사적 가치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용신인문학상’이 흔히 있는 하나의 문화행사를 뛰어넘어서 오늘 이 시점의 문학적 역량을 살피고 우리 현대시의 수준과 안목을 표출해주는 중요한 문학적 이벤트가 된다는 점은 여타의 신인 문학작품 현상모집과는 뚜렷하게 변별되는 특징이라고 하겠다.
최종적으로 논의 된 작품은 ‘호른 부는 아침’(강성원/여수), ‘나이테’(박성수/광주), ‘소나무 방정식’(오정숙/서울), ‘말수’(신용대/대전) 네 편이었다. 다 나름대로의 개성과 시적 성취를 이루어내고 있는 것으로 습작의 일반적인 수준을 뛰어넘는 좋은 작품들이었다.
이 가운데서 강성원의 ‘호른 부는 아침’을 당선작으로 정했다. 이 작품은 아주 알맞은 시적 변용과 언어의 묘미를 잘 살린 탁월한 수준이어서 심사위원들을 놀라게 했다. 해조음이 들려오는 한적한 바닷가의 한 정경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치미 떼면서 한순간에 포착해내는 놀라운 솜씨는 가히 일품이었다. ‘제 살을 비운 모시조개-물너울을 지나 부는 바람-모래톱 위의 물떼새-찰싹찰싹 대며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가 그리는 모래사장 위의 오선지와 음표들- 호른을 부는 메꽃’. 이와 같은 독창적인 시적 구성과 참신한 이미지의 전개는 신인작품의 범주를 뛰어넘는 대단한 성취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쉽게 당선권에서 밀려났지만 나머지 세 분의 작품도 상당한 수준이었다.
‘나이테’와 ‘소나무 방정식’은 반듯하고 정직하게 시적 진실을 토로해주고 있어서 가슴을 뭉클하게 했지만 시적 여운 같은 게 없이 너무 곧이곧대로 시의 주제를 표면에 내세워서 아쉬웠다. ‘말수(唜樹)’는 아주 독특한 상상력으로 구성된 작품으로 이채로웠다. 제목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한 나무라는 뜻으로 이해되지만 시의 주제가 잠언적인 관념 속으로 함몰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들었다.
지용신인문학상에 응모한 ‘아직 태어나지 않은 시인’들에게 뜨거운 격려를 보낸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오탁번 고려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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