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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줄타기 따방* / 손석호

   

매달린 세상의 등산 법

내려가는 등산이 있다

 

바람의 이파리 털어 운세 점치며

발목 묶인 새처럼 스스로 묶인다

내려다보면 자궁 밖 같아서

탯줄처럼 놓지 못하고

종일 휘파람새 흉내 내며 부르는

군데군데 울음 매듭진 트로트풍 노래

밧줄에 꼬인다

허공 딛고 빌딩 안 들여다보며

층층이 스치는 밟지 못한 유년의 계단들

초침처럼 발 뛸 때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

닦다가 가볍게 노크하면 창 열어줄 것만 같아서

장력의 만만찮음 견디며 유리벽에 스스로를 그리는 동안

어느새 노을 뒤따라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덧칠한다

지상은 잠시 시간을 놓는 산장

꽁꽁 묶인 하루 풀어놓고

다시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정상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으로 눕는다

밤새 노래해도 메아리 없는 반지하 방에서

날아오를 내일의 높이 가늠하며

태엽 감는다

산정 팽팽하게 압축되고 있다.

  

* 줄타기 따방 : 고층빌딩 유리창 청소 일을 연고 없이 혼자서 하는 사람을 칭함

  

  

   

  

  

[금상] 비단벌레 / 박복화

  

맑은 유리창 너머

남자가 잰 손놀림으로 뜨거운 아버지를

비질을 하는 동안

시간은 침묵으로 충혈되고

희뿌연 재 사이로

살아있는 희망처럼 웅그리고 있는

검푸른 비단벌레 한 마리.

  

태워도 태워도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것도 있는가

이 악물고 살아온 여든의 생

흔들릴 때마다 붙잡고 버텼을 기둥

아버지의 몸에서 아버지의 일부가 되어

마지막 숨소리까지 받아냈을 저것

  

남자가 조심스레 건네는

치아보철물,

유물처럼 남았는데

일생 층층이 반짝이는 집을 지으시던 흙손

정작 당신은 낮은 지붕, 욕심 없는 담장

그럴싸한 장식 하나 없으시더니

마침내 먼지처럼 가벼워진 육신은

고요한 항아리 속에 누이시고

  

부끄럽지 않은 가을

푸른 하늘을 가벼이 날아가는 아버지

금록색 날개 환하게 펼치며

이승에서 전설로 오래오래 살아계실

내 가슴속 비단벌레

  

  



  

[은상] / 안명숙

  

망치로 맞으며 내 자리를 만드는 것은

평생 벽에 갇혀 사는 일처럼 아린 일이다

  

더 이상 바닥이고 싶지 않은 것들, 버릴 수 없는 것들,

갇히고 싶지 않은 것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붙들어 보여주는 것이 내 일이라면 일인 것을,

주인공이 되지 못함에 아파하고 내 어리석은 열등의 나날.

  

더 이상 바닥이고 싶지 않은 것들, 버릴 수 없는 것들,

기억하고 싶은 것들 보여주고 걸어두고 머물게 하라

그게 내 일이지 않은가?

  

모두 다 나를 떠났을 때

우두커니 내가 벽에 못 박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거운 액자를 들고 있을 때, 똑딱거리는 시계를 받치고 있을 때,

허름한 바지를 들고 있을 때의 추억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반비례로 내가 아직 못 박혀

사는 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아름다운 그림이, 허름한 윗도리가, 흘러가는 시간이,

머물고, 쉬고, 즐기게 했던 내 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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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비닐봉지 / 나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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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비닐봉지 갇혀 있다.

속도의 물결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긁힌 상처들 위로 선명한

간밤의 트럭 바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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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속도는 구멍이 촘촘한 그물이 되어

빠져나갈 틈 하나 보이지 않건만

잠시 느슨해진 속도의 틈으로

조심스레 한쪽 발을 들이밀어 보는 봉지

먼지처럼 더 이상 고통 없는 순간을 고대하다가도

속도에 부딪혀 나뒹굴던 간밤의 기억 되살아나

얼른 발을 거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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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공기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관절이 꺽이고 예민한 살갗이 또 벗겨졌다.

쇳기 어린 속도의 냄새

회오리바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쿵쾅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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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하나 없는 얼굴로 떠오르는

형형색색의 풍선들처럼

한 점 검은 풍선으로 하늘을 누비고 싶었던 오랜 바람 하나,

새로 태어난 강철 바람에 꼬깃꼬깃 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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