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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의 연대기 외 4

  김경린

 

                                                       

  일요일은 차갑고 고요하다

  마치, 빙하기를 건너는 매머드처럼 그릉그릉 울고 있는 냉동고가 일요일을 횡단하고 있다

 

  제자리에서 일제히 뭉그러진 채로 펼쳐져 있는 시간들

  사과는 몇 등분으로 쪼개 놓을까

 

  창문이 얼고 허공마저 얼어붙었다

  새를 쫓는 바람의 형태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발 손 눈 나 너 우리 각기 다른 모양의 조각들이 문틀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이야기의 양면은 마약같이 내 몸에 스며들고 마취된 감정으로 잠시 잠깐 빙하의 온도는 잊기로 했다 

  

  빙하의 언덕을 넘는 매머드를 사냥하러 가려는 엄마의 칼 가는 소리

  얼음의 식탁 앞에서 우리는 잠깐 얽히고 마주치고 돌아서면 빙하의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일요일이 갔고 또다시 일요일이 왔고 빙하기는 떠날 줄 모르고 갈변된 사과는 말라 비틀어져 있고 일요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빙하의 동굴에 얼음처럼 앉아서 매머드의 울음소리를 어둠이 깊어지도록 듣고 있다

 

 

 

 

 

 

 

 

 

 

 

 

푸른수염

 

 

                                      

식빵처럼 딱딱해지는 구름을 한 겹씩 벗겨낸다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나는 가끔 멋있게 뭉개졌다

 

늘 새장 속에 들어가 앉아 있지만

내가 새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새들에게 손을 내밀자 숲은 더 멀어졌다

 

끼니를 알 수 없는 밥을 먹었다

끝없이 자라나는 계단을 오르는 꿈은 반복되었다

 

깊은 밤,

벽에 기댈 때마다 벽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폭풍은 언제쯤 도착할까

수초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나

 

새장문은 열릴 것이고

아직 날개는 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좋았다

 

멋지게 뭉개지고 아름답게 문드러지는

그러나 잘 죽지 않는 나를

새장 주인은 팔을 휘휘 저으며 날려 보낼 것이다

 

어둠이 내일을 끌고 올 때

이런 예감은 왜 꼭 맞아떨어지는 걸까

 

 

 

 

낯선 뱀 한 마리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뱀, 우리는 언제 한 번 만났던 인연처럼 비명을 지르고 눈을 맞췄다.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았을 때 심장이 간지러워지는

 

 너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낯선 체온으로 가득해지고 하루는 지루하게 길어졌다. 빨갛게 익어가는 열매의 씨앗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한낮의 태양은 이물감처럼 부풀어지고 

 

  혀를 오므리면 투명한 젤리가 된다.

  너는 낮과 밤사이에 놓인 휘파람

  물결모양의 손가락들은 가벼운 농담을 쏟아낸다손끝에서 손끝으로 맞물리는 안부가 불편해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다.

 

  나는 비켜서는 방법을 모르고

  나뭇가지가 새를 흔들면 나뭇잎처럼 떨어져 켜켜이 쌓이는 공중 

  햇빛에 익숙해져 있는 나비를 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계절은 가고 계절이 왔다.

  천천히 움직이는 뱀을 보며 가끔 방에서 길을 잃었다. 가볍게 끊어지는 들숨과 날숨의 뒤척임들. 나무가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와 거기에 있다.

  소름이 돋은 살결로 포옹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도로의 뱀은 먼 풀밭에서 목구멍까지 밀고 들어오는 몇 개의 발자국과 온기를 뱉어내고 있다.  

 

 

 

 

 

 

 

 

잠자는 인형과의 동거

 

   

 

가끔, 인구조사 때

혼자라고 적을 때도 둘이라고 적을 때도 있었다

 

동전을 한 움큼 주웠고

문지방까지 물이 찰방거렸다는 꿈 이야기

죽은 말들이 새어 나왔다

 

잠자는 인형의 눈을 들여다본다

머리맡에는 흰 꽃병이 정직한 자세로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없는 오후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쓰러진다

벽돌을 주워 지탱하고서야 삐딱하게 서 있는

 

애벌레처럼 여름이 꿈틀거렸다

나무들은 기형의 자세를 좋아했고 서로의 마음이 선명해지도록 나뭇잎들은 건강해졌다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침대는 질퍽거렸고

불가피하게 바람과 창문의 대화만 듣는다

 

인형의 손아귀에 잡힌 내 팔목은 차가워지고 투명해진다

여름과 아무 상관없는 입술은

지상에서 못다 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창백해지는 인형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뼛속까지 초록이 되는 여름

 

 

딴짓

 

 

 

 

  어울리지 않지만 결혼식은 좋아해. 극적인 상황에서 나는 어항 속에서 잠을 잤다. 우리의 관계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이별을 위해 부케를 던졌다. 물속 모퉁이를 돌고 돌면 나의 결혼식. 햇빛을 머리에 이면 우리는 두 개의 동그라미가 되었다.

  오늘을 기억해 백 한 번째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벽은 물고기 꽃누르미 향으로 가득해서 자주 물을 뿌려 적셔주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은 공기방울로 엮어진 다리. 나를 툭, 던지면 파장이 일어나겠지.

   천연덕스럽게 호주머니 속에서는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블루마운틴 한 잔이 생각나는 오후. 결혼식은 또 다른 결혼식을 지워가는 일. 눈을 뜨면 시간은 분주해져 갔다. 어울리지 않지만 결혼식은 좋아해.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소감


 

   어떤 말이 어울릴까요? 이런저런 단어를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감사하다는 말 외엔 그 어떠한 말도 대체불가인 것 같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위로하고자 시작되었던 글쓰기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나는 나를 모르겠고.... 내가 더 낯설어졌습니다. 내가 나를 가두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을까요? 잘 알지도 못하는 시의 세계에 갇혀 버린 내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나를 읽고 나를 쓰는 그곳이 축축했던 것 같기도 하고, 칠흑 같은 어둠이 가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빛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저 밑바닥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뒹굴던 나의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전기철 선생님, 배홍배 선생님, 조윤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이 외로웠고 두려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시간들 다 잊고 새롭게 나를 알고 만들어가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좋은 글 쓰겠습니다. 이 상을 만든 정남진과 시산맥에도 감사드립니다.

끊임없이 나를 북돋아주었던 친구들에게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김경린

 

경기 여주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졸업

이메일 profond@hanmail.net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15편의 무기명으로 올라온 응모작들을 전기철 시인, 조윤희 시인과 함께 차례로 읽으며 A B C 점수를 매기고 우수작 4명을 선정한 후 다시 심사하여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장승은의 손에 대한 짐작4, 문은성의 무대 연출자의 권고4, 김경린의 일요일의 연대기4편 그리고 성금숙의 우리의 목7편이 먼저 뽑혔다. 장승은은 언어 속에 내포된 것들이 스스로 파괴되거나 위협당하여 재생성되는 시어들을 배열하는 힘이 한두 편 작품에서 눈에 띄나 그 힘이 지속적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문은성은 신선하고 발랄한 시적 태도와 때로는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충격이 유쾌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가볍고 현란한 기교는 머리끝까지 불태우지만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공허함이 시를 읽고 난 후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은 성금숙과 김경린의 시를 놓고 세 명의 심사자가 숙고한 끝에 두 사람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각각 모던함과 전통성에 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김경린의 시는 잘 읽힌다. 시에 쓰인 소재나 시대와의 상관성, 인간 생활의 반영 등의 시를 보는 시각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응모한 다섯 편의 작품들에 사용된 언어 조건이 시인의 시 세계를 문제 삼을 만한 비판의 환경을 초월하고 있다. 본문을 읽는 내내 시에 대한 몰입과 자주 충돌하는 환각적 성향의 이미지들은 기존의 시에 도전하는 언어의 유희나 낯선 충격이 아닌 명백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작품 일요일의 연대기의 빙하기를 건너 일요일을 횡단하는 매머드를 사냥하기 위해 칼을 가는 엄마, 그리고 바람 속으로 사라지며 그녀와 맞서는 시적 화자가 전후 모순의 대립 항을 이루게 하는 것이나, 환유적 보상의 억압된 공간인 얼음 식탁이 몇 등분된 사과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낯익은 사람들에 의해 완곡하게 와해되는 결말은 시인의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품 푸른 수염늘 새장 속에 들어가 있지만/ 내가 새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새장의 문은 열릴 것이고/ 아직 날개는 돋지 않았다부분과 작품 낯선 뱀 한 마리천천히 움직이는 뱀을 보며 나는 가끔 방에서 길을 잃었다/.../ 소름 돋는 살결로 포옹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에서 보듯 의미적으로 상충되는 인식의 언어로부터 상호 등가의 교묘한 의미론적 변용이 발생하게 하는 언어적 적절성 또한 탁월하다. 이어지는 작품 잠자는 인형과의 동거아무 일도 없는 오후/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쓰러진다와 작품 딴짓이별을 위해 부케를 던지는 나부분 역시 김경린 시인의 배타적인 어휘들이 주는 통일된 언어의 미적 충격을 경험하게 한다.

성금숙의 시는 안정되었다. 전통적인 시의 형식에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관례적인 시의 변별을 무효화시키고 있다는 뜻도 아닌 세련되고 완전한 시의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면서도 어떤 1차적 묘사도 제외한 채 묘사되지 않은 전제들의 여백 속에 숨은 대상들을 묘사한다. 각각의 의미 항들은 서로를 계속 지시하며, 서로의 의미들을 무효화시키면서 3차적 의미를 생성하는 힘을 보여준다. 작품 우리의 목에서 우리와 우리는 동음이의어로 쓰인다. 우리라는 한 단어 속에 주지와 매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시에선 매체에 의해 주지가 현상되는 동기의 부여가 일반적인데 시인은 유추의 근거를 생략하고 있다. 우리의 빛나는 사전적 명시성의 그늘 아래 은폐된 원관념이 직관되는 유머러스한 시적 풍경을 연출하는 독특한 능력을 성금숙 시인은 지녔다. 평범한 일상 소재가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전달의 문제, 즉 시적 수사학의 과제는 이같은 독특한 시적 연출력에 의해 이미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작품 진동하는 침묵당신이란 문장을 떠올리면/ 일렬로 날아가는 새들이 흩어지고/.../ 당신에게 나는 검은 사람/.../ 천개의 먹칠한 숫자에선 확장된 심상 혹은 병치 영역으로 던져지는 언어의 궁극적인 아찔한 속도감을 체험하고, 작품 사람을 뭉치면 덩어리가 됩니다부분과 작품들 훔쳐서 쓰다눈물이 핑 돌다초록이 죽고/ 초록이 번진/ 초록을 훔쳤지부분, “밥값을 계산하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돌다 쓰러진다/ 돌지 않는 돈을 세다 아스피린을 삼킨 오렌지 분식 사장님같은 표현은 어둑한 시의 무대에 첫발을 딛는 시인 스스로에게 깔아주는 찬란한 빛의 그림자를 보는 느낌이다.

   두 분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오래 시단에서 견디는 그래서 자신의 시세계를 갖추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예심 심사위원 : 문정영 강주

본심 심사위원 : 전기철 조윤희 배홍배()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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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회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작품 강주 시인

 

심장과 날씨 4

 

 

창문을 열었어

너의 한쪽 가슴이 보인다

 

어젯밤으로 되돌아 가

 

소설을 읽었다

열심히 해도 아무것도 되지 않는 세상을 열심히 살아내는 주인공의 이야기 계속 숨이 차올랐다 이름을 불렀지만 읽는 자와 읽히는 자의 거리는 멀었다 점점 더 멀어졌다

 

모조리 빼앗기고 하나씩 되찾는 것에 불과한

 

소년이 출구를 던졌다

깨진 출구는 다시 입구가 되었고 소년을 삼켰다 입구와 출구 사이에서 소년은 소년을 벗어나고 있었다

틀림없이 소년이었지만 더 이상 소년이 아닌

어둠보다 빛이 무서웠어

풍경들이 일제히 눈을 뜨고 나를 노려보는 것 같아 어떤 책은 눈이 아니라 손으로 읽어야 하는 거잖아 읽어본 적 있니?

 

젖은 손에 가만히 내 손을 빠뜨린다

 

창문을 열었어

너의 한쪽 가슴이 보인다

 

기울어질 테야

 

하나의 몸속에 또 하나의 심장이 겹쳐 있다

입구는 어떻게 출구가 되는 걸까

 

오늘은 날씨를 극복해야 한다

 

 

 

해피엔딩

 

 

 

주맹증을 알아

 

층계를 내려오면서

뒤돌아보면

 

새하얗게 닦고 있는 손

눈이 내려

 

아름답지 않지 라고 말하면

아름다운 것들이 보이기 시작해

이상한 엘리스야

쉽게 녹는 건 쉽게 더러워져

그늘을 덮어 주겠니

 

결심했어

공을 툭 찼을 때 저절로 멈출 때까지

공을 갖지 않을 거야

층계의 홀수들은 아름답지 않아

짝수를 떠올렸니?

아름다움은 딛는 거야

홀수에 가지런히 발을 벗어 놓고

주맹증을 앓아

 

지금까지 시각적으로 말해서 미안해

 

눈송이 하나의 밝기로

층계를 오르지

 

뒤돌아보면

반쯤 녹은 내가 얼굴을 줍고 있어

 

 

 

 

팬터마임

 

 

 

흐릿한 손금사이에 입김을 불면

,

지금부터 당신에게로 뻗어가는

서사가 뚜렷해진다

 

왼손에서 더 먼 왼손으로 옮겨가는 말들

 

모든 서사를 진동모드로 전환한다면,

 

껍질을 뚫고 나오는 감정을 번역해

점점 말랑해지는 촉각으로 자랄 때까지

 

눈동자에서 꺼낼 수 있는 것들

젖은 날개와 접은 날개

표정을 주목해

얼굴은 흩어졌다가 모이는 광장

 

비둘기로 무엇을 묶을까

 

무대를 장악해

클라이맥스의 순간

폭설로 고립된 너를 찾아갈게

떼 지어 날아가는 까마귀의 자막쯤 놓쳐도 괜찮아

 

모퉁이를 돌면

그 다음 모퉁이가 궁금해진다

엇갈린 매듭을 풀기 위해

절벽이 필요하다

거기에 매달아 놓은 심장이 두근거린 적 있어

 

손바닥을 비벼

왼손과 오른손을 섞으면

마술처럼 사라지는 왼손과 헤어지는 왼손

 

손뼉이 날아오르는 비둘기처럼

 

 

 

바뀌는 순간

 

 

 

표정만 떼어낸다면 더 많은 거짓말을 만들 수 있지 눈밭에 두고 온 너의 표정을 찾으러 간 적 있어 녹아버린 후에 천천히 오는 것들

 

눈송이를 핥아먹으면 한 층씩 계단이 사라지지 이층에서 옥상까지 닿는 기분이 들지 네가 접어 보낸 봄비와 너의 이마는 결국 읽지 못했다 나는 너의 푸른 발등에서 고드름이 자라는 소리를 들었지 너의 기호와 나의 기질은 계절이 달랐을 뿐

 

네 몸에 손을 댔을 때 손가락들이 내려가던 이유

 

반드시 지는 게임이다 무기를 내려놓거나 총 대신 연필로 과녁을 만들거나

 

너의 말들은 손가락 끝에 달려 있다 손가락은 첼로의 감정 같은 것 자신을 보관하는 방식 새끼손가락에 나는 자꾸 밑줄을 긋는다 미리 떼어낸 달력 같아서

 

첫사랑의 장르는 환타지보다 르느와르

 

비밀은 아주 매력적인 캔버스지 작은 속삭임에도 별이 돋아난다 너를 엿듣는 기분은 반짝반짝 압축파일을 열면 반복적인 세계가 열리지 아무것도 안 보이면 전부 본 거야

 

창문을 달면 볼 수 있는 풍경은 오로지 나,

 

였다.

 

 

 

스위치

 

 

 

 탯줄을 잘랐을 때 반짝 세상을 옮겨가는 이야기 새의 부리가 꽃잎을 쪼았을 때 꽃은 위장에 불과하죠 새끼들의 주둥이와 어미새의 부리 사이에서 스위치가 꺼졌다 켜졌다 새는 반복되죠 빌딩은 하나이면서 여러 개의 눈을 깜박이죠 할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어요 엘리베이터에서 누른 숫자들은 연속으로 절뚝거려요 버튼으로 요약된 높이는 깊이를 간과하죠 달콤한 거짓말들이 몸의 당도를 높이고 있어요 순간 귀가 솔깃해요 진화와 퇴화가 동시에 진화하죠 썩은 이빨 사이로 자꾸만 죽은 감정들이 되살아나요 통증이야말로 생생한 동영상이죠 흑백사진 속의 트렁크가 입을 벌려요 추월할 수 없는 과거들이 쏟아지죠 웅덩이에서 수많은 발자국들이 시곗바늘을 옮겨요 감시카메라는 여전히 작동중이군요 동작들은 경건하고 눈빛들은 사나워지죠 눈빛에 베인 사건들이 기침을 토해내요 기침을 받아 적은 신문지는 전염병처럼 병실을 옮기고 있어요 병실을 구분하는 일이 최선이죠 난 새벽에 출발한 전류 나의 클라이맥스는 깜깜한 밤이에요

 

스위치를 켜면 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세계의 첫,

 

 

출처 : 시 산 맥
글쓴이 : 시산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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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문학동네〉신인상 시 당선작_ 이방인(외4편) / 장혜령

                                                          심사위원 : 김경주, 김민정, 이원 (시인)

 

이방인 (외 4편)

 

   장혜령

 

 

   

빛은 잘 들어옵니까

 

이상하지.

세입자가 관리인에게, 그리고

우리가 죄수에게 묻는 질문이 동일하다는 것은

 

불 꺼진 독방의 내부는

누군가 두고 간

불펜 잉크처럼 캄캄하다는 거,

의도 없이도 흐른다는 거

 

처음 타본 비행기와

어깨가 기울어진 한 남자의 뒷모습

 

그의 휘파람을

존경한다고 교도소장은 말했다

크고 두터운 손으로, 아버지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래, 바람은 불어옵니까

 

진주식당의 여자는 국수 대신

빨래를 솥에 넣었고

 

예수기도회의 붉은 자전거 옆에는

북경반점 오토바이가

 

모든 질문에

전학생의 시점으로

생각했지

 

경도와 위도 선상에서

초조해질 때마다

별들 사이에 있다는 건, 더 확고해졌으니까

 

동료의 이름이 적힌 쪽지를

삼키는 연습을 하는

수배자처럼

 

배후가 없는 비밀이 몸속을 떠돌고

깡통 속엔

씹다 뱉은 성냥들이

붉게 차오르곤 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더 말할 것은 없습니까

 

들판 같은 책상 위로

캥거루 한 마리가 뛰어간다

 

빛은 잘 들어옵니까

바람은 불어옵니까

 

이상하지,가

둘 수 없는 것의 안부를 묻는 일

 

어디선가

새들의 농담이 들리고

 

그의 배후를 바라본 것은, 저 나무가 유일하다

 

 

 

눈의 손들

 

 

 

   내가 스물셋이었을 때, 남자는 서른둘이었다. 발을 심하게 다쳐 더 이상 걸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느꼈을 때, 그 사람을 만났다. 남자는 무릎을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걷지 않는다 해서 고통이 멈추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루에 몇 번씩 주사기로 내 발에서 물을 빼내는 일을 도와주었다. 우리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느 날 흩날리는 길 위에서 그는 내게 유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에겐 일본인 아내를 둔 아일랜드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여자는 딸을 낳고, 아이에게 유키雪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아이는 이듬해, 병으로 죽었다.

 

   마치 눈처럼 사라졌어.

  그에게, 유키는 Snow와는 다른 단어였다. 그는 Snow를 눈으로, 유키라는 단어를 죽음과 아름다움 사이의 것으로 기억했다.

 

   부부는 유키가 죽은 몇 년 뒤, 아이를 가졌다. 아이는 유키와 같은 딸이었다. 딸이 자라서, 소녀가 되고도 그들은 유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소녀는 아빠를 따라 한 달에 한 번은 배를 타고 런던에 갔다. 역사시간에 가보지 못한 섬나라에 대해 배울 수 있었지만, 여전히 자기 몸의 나머지 반을 이루는 그곳이 궁금했다. 일주일에 한 번 일본어 세터에 갔다. 그곳에서 히라가나平假名를 읽었다. 일본어 교본 맨 앞에는 글자를 외우기 쉽도록 글자 하나마다, 그 음으로 시작되는 단어와 사진을 넣어둔 페이지들이 있었다.

 

   유키는 유ゆ로 시작하는 첫 단어였다. 사진은 눈의 고장이라 하는 니가타 현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진 옆에 붙어 있는 작은 별 표시를 따라 뒷장을 펼치면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설국』을 쓴 곳’이라고 적혀 있었다.

                                                     *

   백 년 전, 눈의 고장으로 가는 기차 안이었다. 한 여자가 병든 애인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쓸어 넘겨주었다. 낮고 지극한 시선이 눈과 같았다. 건너편 좌석에 앉아, 차창에 비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는 여행자가 있었다. 남자는 기차에서 내린 뒤에도 눈을 닮은 그 여자를 생각했다. 그는 눈을 닮은 여자를 생각하며 그의 여자를 만났다.

 

   여자의 등은 눈처럼 희었다. 남자는 다다미 바닥에 웅크린 여자의 목덜미를 보았다. 새벽녘에 여자의 붉어진 이유가 부끄러움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단단하게 뭉친 눈의 따뜻함에 대해 생각했다. 백지白紙라는 흰 손의 손등을, 뒤집어도 손등뿐인 흰 꽃잎의 배면을 생각했다.

                                                      *

   일본 사람들은 생각하다思う라는 단어로 사고하는 것과 느끼는 것 양쪽 모두를 표현했다. 그들에게는 이성으로 사물을 탐구하는 일과 가만히 아름다움을 감각하는 일이 다르지 않았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불태웠고 가장 좋은 때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유키의 아빠는 일본 문화의 모순과 미의 개념에 관한 책을 썼다고 한다. 책을 쓰던 사월에 유키가 죽었다. 슬픔 속에서도 그의 머릿속에는 서문 마지막에 들어갈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꽃잎처럼 져간 사랑하는 딸을 보내며, 라고만 썼다. 그는, 딸을 보내는 마지막 순간까지 일본 사람의 방식으로 죽음을 ‘생각’했다.

 

   꿈에서 그는 딸을 보았다. 꿈속의 계절은 겨울이었다. 겨울바람 때문에 딸의 손등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또 다른 꿈속에서 그는 꽃잎이라는 글씨가 담긴 술잔을 들고 있었다. 아내도 없이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꽃잎’이란 글자를 건져낼 때 몸에서 종소리를 들었다.

                                                        *

   눈의 고장으로 가는 사람들은 어디서나 쉽게 마주칠 수 있다.

   명동으로 가는 4호선 전철 안, 엄마가 무릎을 베고 누운 어린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는 오래전 그것을 본 적이 있다는 생각을 한다. 잠든 아이의 얼굴 위로 투명한 흰빛이 떠올랐다.

 

 

 

 

 

 

   어젯밤 꿈속에서 있었던 일이다. 나는 시를 읽고 있었는데 그것의 마지막 행에는 ‘답설무흔踏雪無痕’이라 적혀 있었다. ‘그대는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그대는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내 문학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내게 시 안으로 들어가라 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전나무 가지 위에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어디선가 새를 불러들이는 사내의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가지에서 후드득 눈이 쏟아졌고 새가 날아올랐다. 시의 첫 연이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고 선생은 말이 없었다. 나는 머지않아 나 자신이 두 번째 연의 첫 행임을 알았다.

 

   한 여자의 곁이었다

   여자는 새였다

   나의 왼편에 있었다

 

   여자의 날개를 뜯어

   어린 새들에게 먹였다

 

   나는 얼굴을 붉히며 나를 읽었다. 새의 흰 날개가 하늘을 채웠고 거대한 수정 하나가 끝없이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새를 향해 손을 뻗었다. 나는 소년이었고, 새는 속삭임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위가 항아리 속처럼 어두워져갔다.

 

   낯선 여인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었다. 여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을 발하는 꽃 아래 있었다. 그녀는 겹겹의 문門에 대해, 입구를 열면 다시 새로운 입구가 열리는 꽃의 내부에 대해 말했다. “새의 날개를 닮은, 고요히 물결치는 백白의 입구로 들어가라.” 그녀가 말했다. “그것이 너의 내부다. 너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은 희었고 내 앞에서 슬픔처럼 부드럽게 벌어지며 열렸다. 나는 걸었다. 빛의 계조階調를 따라 어두운 흰빛에서 밝은 흰빛으로, 점점 더 밝은 흰빛으로. 이마 위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내 문학선생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없이 눈길을 가는가, 지워지기 위해 걸어가는가’ 선생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선생은 내리는 눈 속에 서 있었다.

 

   눈을 떴을 때, 흰 작약 한 송이가 머리맡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물결의 말

 

 

 

그것은

물고기의 아가미 또는

지난밤에 깎은 사과 껍질

 

안쪽에서 만져진다

 

두꺼운 외투를 열어 보이는 것은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오래 생각했다

겨울에도 철 지난 얇은 옷을 고집하는

가난하고 또 우아한, 어떤 취향에 관해

 

그들이 오래된 만큼

내 생각도 오래도록 이어졌고

 

빌려온 책을 읽을 때마다

 

누군가 몸속에 잠깐 불을 켰다

여긴 누구였을까

 

물결처럼 밀려왔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잠든다

떨어진 모과처럼 여기저기 뒹굴며

 

같은 의미에서, 나는 이제 거의 존재하지 않지만

 

겨울, 청어와 모래, 작은 북과 캐스터네츠, 빗방울과 앵두와……

 

길을 잃을 때는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것의 목록을 적는다

 

실패가 거듭될 때,

매일 입술에서 닳아 없어지는

이름들처럼

걷잡을 수 없이 얇아질 때

그래서, 살고 있는 그것을 만질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사랑한다는 것,

흔들리는 한

모두 같은 물속일 거야

 

물결의 말이다

 

 

 

폴림니아 성시*

 

 

 

기억합니까

처음 페달을 밟고

혼자 앞으로 나가던 순간을

 

얼마나 더 가야 하나요

대답은 없고

룸미러에 매달려 흔들리던

작은 성상聖像

 

어머니에게로

누군가의 팔에 안겨

최초의 울음을 터뜨리기 위해

 

그는 달리고 있습니다

열대어의 알처럼

산란하며 어깨에 내려앉던 오후의 빛

아이들의 함성

펄럭이는

 

사이프러스를 닮은

연기 속으로 들어설 때

 

타오르는 불을 바라보며

시간은 모든 서명을 지워버렸지요

 

어디에서 왔습니까

나는 도처에서 왔습니다 심야버스에서, 매일의 식탁에서

핀으로 나비의 날개를

고정하던, 빈 교실의 작은 책상으로부터

 

옮겨가기 위해

살았습니까

아니요 나는 결코…… 아무도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했어요

 

어둠 속, 성호를 그으며

무릎을 꿇을 수밖에

손과 발을 묶어달라고 간청하는

꽃다발의

무력한 자세로

제각기 기도할 때

 

더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

 

흰 새는

날아오르고 있었지요

거대한 그물에 갇힌 형제들을

끌어가듯

한없이 느린 속도로

 

세계가

조금 전진한 것 같았습니다

 

 

————

* 차학경, 『딕테』

 

 

 

--------------------

장혜령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영화과(연출 전공)를 졸업했다.

팟캐스트〈네시이십분 라디오〉를 제작해왔다.

〈EBS 지식채널 e〉작가. ‘소셜리스트’ 리뷰어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동네》2017년 가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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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 김정진

 

꿈에서 나는 꽃을 물고 잠들어 있었습니다. 주변은 온통 제 몸을 날리는 것들로 가득하고 나도 중력을 거부한 이름들과 나란히 떠다니고 싶어집니다. 벼락을 맞은 나무의 키가 줄어드는 것을 보고 나도 돌이켜 살고 싶어 죽은 나무 구멍에 머리를 들이밀고 숨을 쉬어본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 삶을 뒤집은 건 내가 아니라 나무였고 나는 아직도 그 안에서 나던 향기를 생각하는 중입니다. 홀로 남은 나무마저 어느 순간 몸을 날리게 될까봐 나는 꽃이 떨어진 자리마다 우표를 붙여주었습니다. 말 못할 슬픔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들이 식물로 다시 태어난다는데 또 다시 아프게 죽은 식물들은 무엇으로 태어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내 안에 여전히라고 부를 만한 방이 남아 있다면 죽은 나무 산 나무 그 방 안에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휘파람새는 꽃을 따려 손을 내미는 소년의 손가락을 물고 날아갑니다. 손가락을 잃은 소년은 자신의 손가락보다 새였던 꽃을 더 그리워하다 마침내는 제 손을 꽃피우고 나무가 된다고 합니다. 얼마 전 늙은 코끼리 한 마리가 나무 밑에 몸을 뉘었고 코끼리는 시든 식물의 빛깔로 말라갔습니다. 나무는 코끼리를 먹어치우고 다시 걸음마를 연습하는 중입니다. 손가락을 문 새가 있어 휘파람으로 부르려는데 입을 틀어막는 섬뜩함에 놀라 잠에서 깨어보니 내가 물고 있는 꽃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낙엽들이 살을 베며 지나가고 이제 민들레를 불던 내 입에서도 향기가 납니다.

 

 

 

 

 

 

 

 

미러링

 

왼손잡이던 사람이 오른손잡이가 된 후에도

남아 있는 왼손의 흔적처럼

 

내가 싫어하던 여름은

네가 좋아하던 여름

이를테면

 

내가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이라면

너는 해가 진 후의 하늘

 

저녁일까 새벽일까

왼손 오른손 셈을 하다 밝아지거나 어두워지던 구름들

옛사람들은 이것을 병아리 감별사처럼 구별했겠지

 

한 번도 왼손으로 써 본적 없는 사람이

왼손을 먼저 내밀기 시작했다면

그에겐 이제 오른손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게 될까

 

왼손만으로 내 목을 조르며

숨이 넘어가기 전 치솟는 쾌감에 한 번은

반쯤 사는 기분을 느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하늘 높은 줄 모른 채

올려다보던 여름의 수심

정오와 자정 중 어느 것이 더 깊어?

해가 뜨기 전의 하늘과 해가 진 후의 하늘처럼 날아가는 외눈박이새의 활공

 

네가 밤이 되어갈 무렵 나는 새벽이 되다가

무분별도 하루이틀이라고 밤을 지새고도 두 눈에 비춰보던 양손

중앙정원을 반대 방향으로 걷는 두 사람이

중간에서 만나는 그 지점

 

서로 지나가던 순간이 있었다

해가 뜨기 전의 하늘은 세어본 적이 있는 마주침이고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

 

어제 벽에 붙어 있던 거미가 오늘도 그대로 있다

자신이 거미가 된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어제는 만났지만 오늘은 만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너에게 그거는 그거고

이거는 이거라는 것을 이해시키는 것에 실패한다

 

구석이 점점 어두워져도 거미는 좀처럼 움직이지 않고

거미가 되기 전의 삶을 떠올려보는 것일까 그와 삶을

바꿔치기한 무엇은 먼저 자욱한 실내에 엉거주춤 서 있을까

한 번을 바뀌지 않아도 적응하기 어려운 몸

네가 되어보는 상상을 하고 알코올이 되는 상상을 한다

 

오늘 자전거를 끌고 천변을 지나간 사람이 내일은 나타나지 않는다

 

어떻게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인데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줄이 내내 우리의 뒤로 늘어뜨려지고 잠시

뒤처진 사람의 발이 앞서간 사람의 것에 걸린다

그가 일으킨 바람이 사그라지기도 전

다른 바람이 와서 그것을 지우듯이

 

어제 벽에 붙어 있던 거미가 오늘은 안 보인다

그런 믿음을 갖는다

 

너의 그때가 나에겐 지금

거미줄에 걸린 나방이 더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날지 못하는 것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죽음을 예감하고 수많은 지금이 걸어온다

 

 

 

 

 

 

 

 

논픽션

 

중간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남자라는 걸

소설의 중간까지 일고서야 알았다

일생이 절반에 이르기까지 여자였던 남자는

책장이 넘어가듯 단순하게 생을 바꿔버리는데

남자가 된 여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가사 없는 노래를 불러준다

 

새벽은 금세 저물어 첫차는 다가오고

 

그가 된 그녀는 그란 사람 말도 없이 떠나버렸다

파쇄기에 갈려버린 마음을 안고 금 하나를 넘지 못해 애만 태우다가

한 곡도 다 못 맺고서 동면을 간다

그녀였던 그는 그녀가 간 줄 모르고 이불을 개다

그날 아침 창밖으로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다

 

쌓이기만 하고 녹지 않는 눈이었다

 

다시 펼쳐보아도 이불 속에 그녀는 없고

돌아갔어도 덮어쓰기 된 생이 끈 간 데 없어 여자였던 남자는

원래 남자였던 남자로 그녀를 영영 잃어버리고 말았던 것

모두가 떠났고 모두가 남겨진 소설에서

종종 그는 그녀를 떠올렸고 중간의 중간까지 읽은 소설의 주인공이

그인 줄로만 알았건만

덮고 나면 그마저도 흐릿해지는 오리무중의 폭설

감감한 마음을 만져보다가 네가 머리에 쌓인 것을 털며 들어온다

 

먼 사람들은 모두 잘 지내지 않으냐

 

 

 

 

 

 

 

 

 

목성

 

미안하지만 미안할 수 없는

무중력 속의 죄책감

목성에 살았더라면

지구를 두 개는 넣을 수 있는 눈을 갖고서

배가 아니라 섬 하나쯤 가라앉더라도

그럴 수 있어 그럴 수 있다

 

발음은 무뎌지고 역사는 두꺼워지겠지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진다는 것

항상 벽에 기대어 길어지는 덩굴의 생존

기우는 해만큼 그림자 속 잎사귀는 점점 뾰족해진다

꼿꼿이 선 실어증 환자가 끝에

......해, 라는 말을 툭 떨어뜨릴 때

 

종소리가 사소해지는 것이 들립니까 더 사소해지고 사소해질 때까지

작고 작은 종이를 접는다

작아지고 작아져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보이지 않는 종이를 손바닥 위에 얹으면

보인다 하늘 끝으로 날려보낸 수백 개의 연

뜨거운 물에 찬물을 조금씩 섞어 미지근한 물을 만들듯이

방 속의 방 속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 겨우 실감할 수 있는

무중력의 포근한 질감이 있다

어떤 죄를 지어야 무거워질 수 있을까 무엇을 더

해야 무툭해질 수 있나

 

네게 산 위에 뜬 목성을 알려주며

더 이상의 후회를 없애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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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 홍지호


버리고 싶은 것이 있어서 버리기 위해서 쓴다

쓰게 되면 버릴 것들이 생기니까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는 사랑해서 너를 썼나

너를 쓰고 사랑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나

나의 사랑하는 자여

나에게는 언제나 순서가 문제였지만

순서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오늘의 안식은 어제의 기념

계절은 바뀔 것이나

기념은 계속될 것이다

어제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날이므로

어제를 쓰기 위해

오늘은 계속 버려질 것이므로


사랑의 창조자여

내가 일요일과 월요일 중 어느 쪽이 한 주의 시작인가에 대해 골몰할 때

오늘은 지나가고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올 것처럼

오늘이 온다


가끔 너는

버리기 위해 너를 썼냐고 물을 수 있다

그건 내가 너를 쓴 의도와 다른 것이지만

너는 그럴 수 있고

너는 물을 수 있지만 나는

대답해 줄 수 없다


나를 창조한 나의 피조물이여

나의 사랑하는 비문이여

너를 내가 썼다


내가 너를 썼다고 쓸 수도 있다 그럼에도

내 사랑하는 자여

문장에는

순서보다 중요한 것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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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상] 줄타기 따방* / 손석호

   

매달린 세상의 등산 법

내려가는 등산이 있다

 

바람의 이파리 털어 운세 점치며

발목 묶인 새처럼 스스로 묶인다

내려다보면 자궁 밖 같아서

탯줄처럼 놓지 못하고

종일 휘파람새 흉내 내며 부르는

군데군데 울음 매듭진 트로트풍 노래

밧줄에 꼬인다

허공 딛고 빌딩 안 들여다보며

층층이 스치는 밟지 못한 유년의 계단들

초침처럼 발 뛸 때

어디선가 만났던 사람

닦다가 가볍게 노크하면 창 열어줄 것만 같아서

장력의 만만찮음 견디며 유리벽에 스스로를 그리는 동안

어느새 노을 뒤따라와 누구인지 알지 못하게 덧칠한다

지상은 잠시 시간을 놓는 산장

꽁꽁 묶인 하루 풀어놓고

다시 내려가야 닿을 수 있는 정상

닦아도 닦이지 않는 얼룩으로 눕는다

밤새 노래해도 메아리 없는 반지하 방에서

날아오를 내일의 높이 가늠하며

태엽 감는다

산정 팽팽하게 압축되고 있다.

  

* 줄타기 따방 : 고층빌딩 유리창 청소 일을 연고 없이 혼자서 하는 사람을 칭함

  

  

   

  

  

[금상] 비단벌레 / 박복화

  

맑은 유리창 너머

남자가 잰 손놀림으로 뜨거운 아버지를

비질을 하는 동안

시간은 침묵으로 충혈되고

희뿌연 재 사이로

살아있는 희망처럼 웅그리고 있는

검푸른 비단벌레 한 마리.

  

태워도 태워도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것도 있는가

이 악물고 살아온 여든의 생

흔들릴 때마다 붙잡고 버텼을 기둥

아버지의 몸에서 아버지의 일부가 되어

마지막 숨소리까지 받아냈을 저것

  

남자가 조심스레 건네는

치아보철물,

유물처럼 남았는데

일생 층층이 반짝이는 집을 지으시던 흙손

정작 당신은 낮은 지붕, 욕심 없는 담장

그럴싸한 장식 하나 없으시더니

마침내 먼지처럼 가벼워진 육신은

고요한 항아리 속에 누이시고

  

부끄럽지 않은 가을

푸른 하늘을 가벼이 날아가는 아버지

금록색 날개 환하게 펼치며

이승에서 전설로 오래오래 살아계실

내 가슴속 비단벌레

  

  



  

[은상] / 안명숙

  

망치로 맞으며 내 자리를 만드는 것은

평생 벽에 갇혀 사는 일처럼 아린 일이다

  

더 이상 바닥이고 싶지 않은 것들, 버릴 수 없는 것들,

갇히고 싶지 않은 것들,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붙들어 보여주는 것이 내 일이라면 일인 것을,

주인공이 되지 못함에 아파하고 내 어리석은 열등의 나날.

  

더 이상 바닥이고 싶지 않은 것들, 버릴 수 없는 것들,

기억하고 싶은 것들 보여주고 걸어두고 머물게 하라

그게 내 일이지 않은가?

  

모두 다 나를 떠났을 때

우두커니 내가 벽에 못 박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무거운 액자를 들고 있을 때, 똑딱거리는 시계를 받치고 있을 때,

허름한 바지를 들고 있을 때의 추억 때문이다

  

흘러가는 시간에 반비례로 내가 아직 못 박혀

사는 것은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아니다

  

아름다운 그림이, 허름한 윗도리가, 흘러가는 시간이,

머물고, 쉬고, 즐기게 했던 내 꿈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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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상] 비닐봉지 / 나동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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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 중앙분리대에 비닐봉지 갇혀 있다.

속도의 물결이 일으킨 소용돌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가시에 찔리고 돌부리에 긁힌 상처들 위로 선명한

간밤의 트럭 바퀴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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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은 속도는 구멍이 촘촘한 그물이 되어

빠져나갈 틈 하나 보이지 않건만

잠시 느슨해진 속도의 틈으로

조심스레 한쪽 발을 들이밀어 보는 봉지

먼지처럼 더 이상 고통 없는 순간을 고대하다가도

속도에 부딪혀 나뒹굴던 간밤의 기억 되살아나

얼른 발을 거둬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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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 공기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관절이 꺽이고 예민한 살갗이 또 벗겨졌다.

쇳기 어린 속도의 냄새

회오리바람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쿵쾅거리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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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하나 없는 얼굴로 떠오르는

형형색색의 풍선들처럼

한 점 검은 풍선으로 하늘을 누비고 싶었던 오랜 바람 하나,

새로 태어난 강철 바람에 꼬깃꼬깃 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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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아침 / 양가을

 

열일곱 살에 마음을 죽인 아이가 있었다

거꾸로 손에 쥔 칼로

마음이란 데를 어디든 찾아서 망설임 없이 찔렀더랬다

그녀가 마음일 곳이라 생각한 데는

통증 없이 통증이 오는 곳

내가, 벌레 아닌 이유가 있을까, 그리 생각하면서

머리 가슴 배를 여린 손으로 어른처럼 쑤셨더랬다

 

숨죽인 아이는 죽은 듯 잠을 잤고 잠만 잤지

그녀는 꿈에서도 죽어만 갔고

죽어가는 자길 보며 깨어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더랬다

 

우울하게도 참담한 건 기어코 아침이 왔다는 신호들

아침엔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아침엔 올 수가 없다고

미지근한 햇살이나 덜그덕거리는 분주함이나

굳은 몸을 일으키는 동작 같은 것들은

밤새 축적한 통증을 아이 몸에 꽁꽁 동여맸단다

아이야 오늘도 살아야지 하고, 그랬다 했다

 

아이는 밤새 죽인 마음을 머리 가슴 배에 아무렇게나 붙이고

구역질나는 아침을 집어삼키고

사람 같은 걸 겨우 형상하고서

어제와 어제처럼 걸었다

 

그렇게

이럴 수는 없다고 이럴 수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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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파 / 성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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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과의 관계 / 이정화







[심사평] 


부천이라는 단일 지역의 신인문학상 시 부문 공모에 72명이 360편의 작품을 응모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시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것인데, 작품을 읽어보니 시 쓰기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갖추지 못한 초보적인 작품이 많아, 질적이 면에서는 다소 아쉬웠다. 취미로 시를 쓴다고 해도 신인문학상에 응모한다면 식민지시대부터 최근까지 우리 근현대 시문학을 지탱시켜온 주요 시집을 100권 이상은 정독하고(그중의 몇 권은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창작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 정도는 이해하고 수백 번 쓰고 버리는 습작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당선작을 뽑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어느 정도의 수련을 거치고 시에 대한 열정을 보인 작품들이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가 된 작품은 벽장과의 관계」 「봉지들이 터졌다」 「뒷걸음질」 「저녁놀4편이었다. 벽장과의 관계는 벽이나 다름없으면서도 언제든지 여닫을 수 있는 벽장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주목할 만했다. 벽이면서도 필요할 때는 장이 되고 감추고 싶은 너저분한 물건들을 던져놓고 문만 닫아놓으면 그만인 편리한 곳이어서 평소에는 방치해 두지만 갈수록 추억의 가치가 커지는 대상에 대한 관찰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기억의 끝”, “먼지 낀 추억”, “오래된 감정과 같이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상투어가 거슬렸다. 봉지들이 터졌다는 응모작 중에서 가장 패기 넘치고 상상력이 자유로운 시이다. 이 시는 상품 포장이 많아지면서 봉지들이 흔해져서 이제 공해가 될 지경인 현실을 재미있게 꼬집고 있다. 어디서나 터지고 밟히는 봉지들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 봉지는 또한 현대인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있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고 있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읽을 만하기는 했지만, 아직 거칠고 덜 다듬어졌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장난스러운 구절들이 있어서 선뜻 밀기가 주저되었다. 뒷걸음질콘크리트 사막인 삶의 터전에서 자기 앞에 찍힌 강아지, 개나리, 하루살이 등의 발자국을 보며 자신의 걸음이 뒷걸음질임을 발견하는 반성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힘에 조금씩 죽어가는 몸 밖의 자연과 몸 안의 자연에 대한 시적 인식을 보여준 점은 볼만했으나 그 시적 인식은 상투성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저녁놀은 풍경에 매혹되는 순간이 시가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시적 순간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시이다. 풍경화와 시적 순간을 연결하는 상상력은 독특하나 월척을 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짜릿한 손맛에 대해 배가 부르다고 끝내버려서 아쉬웠다. 그 손맛과 짜릿함 속에 들어있는 질문을 상상력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시가 되는데, 적당히 쓰고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네 편의 작품은 각각 장점과 한계가 뚜렷하게 보여서 심사위원의 동의를 단번에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 편중에서 벽장과의 관계가 시적 인식이나 창작 방법에서 가장 착실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이 들쭉날쭉한 반면에 이 응모자의 작품은 고른 수준을 보여준 점도 참고하였다.


심사위원: 박몽구,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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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의 둥지 / 안광숙

 

땅속 깊은 곳까지 봄을 심은 건 누구일까

산책 나온 달이 갓 출산한 감자꽃에 머물다 가는 밤

하얀 스위치 같은 저 꽃잎을 켜서 줄기를 타고 내려가면

알 밴 감자들이 세들어 살고 있을거야

땅속 환하게 어둠을 불 밝히며

도란도란 뿌리내린 새끼감자들이 있을거야

둥근 알들끼리 툭, 하고 어깨를 부딪혀도

상처가 나지 않아 마데카솔이 필요없는 땅속 마을

날카로운 아카시아 뿌리가 신경줄기를 건드려도

거참, 너털웃음 한번 웃고 나면

맛나게 풀리고마는 순박한 이들의 터,

저 깊은 땅 밑에도

흙으로 막걸리를 빚어 미소를 틔워주는 지렁이가 있고

짠눈물과 더 고소하게 퍼져가는 사랑이 자라난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서 있는 땅이 꼬물거린다

땅속의 소식을 알려주듯

갈라진 뒷굽을 타고 전신으로 퍼져 올라오는

따스한 이야기가 사는 마을

장난치던 바람이 뿌리혹박테리아를 빠져나오는 밤,

아직 동화가 살아 있는 지하 마을에는

통통하게 살찐 봄이 감자를 키우고 있을거야

발고랑속, 빼곡한 어미들이

포슬포슬 알전구를 켜고 아이들의 구겨진 단잠을 다려 펴주겠지

새끼달이 강물 속에 태어난 지 한참 지난 오늘

노랗게 여물어가는 아랫마을,

온통 깜깜해서 더 눈부시게 익어간다

 

 

[당선소감] “가슴 속 구멍에 차곡차곡 시 쌓아”

 

저녁밥을 지으면서 친정엄마를 떠올렸다. 털곰팡이균의 침범으로 한쪽 눈을 도려내고 다시 유아기로 넘어오신 엄마. 얼굴에 작은 우물 하나 품고 사시는 당신.

 

그때부터 내 가슴에도 동그란 구멍하나 생겼다. 무언가를 채우려고 할수록 자꾸만 깊어지는 구멍, 허기진 그곳에 시들을 차곡차곡 쟁여 놓았다. 엄마에게 도착하는 내 언어는 언제나 핑계들로 가득했다. 이제 그 변명들을 한소쿠리 담아 엄마의 식탁에 올려 드리고 싶다. 부족한 시를 뽑아주신 정현종, 이상국 심사위원께 감사드린다. 낮은 자세로 열심히 쓰겠다. 뼈를 열고 활짝 쏟아부어 가르쳐주신 박종현 스승님, 시우님들에게도 감사드린다. 어머니 김삼순여사, 친정식구들, 남편 이용석, 착한곰 이영준, 예쁜딸 이지안. 부족한 한 여자를 보듬어주어 감사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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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긴 호흡 살아있는 행간의 숨결 탁월”

 

본심에 올라온 작품 중 유영삼의 ‘그믐’, 김정희의 ‘수국’, 김도형의 ‘수목장’ 그리고 안광숙의 ‘감자의 둥지’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그중 ‘그믐’과 ‘수국’은 전통 서정시의 향기를 지니고 있었으나 본인들의 여타 작품과의 결이 달랐고 ‘수목장’은 시의 폭이 협소했다. 이에 따라 비교적 긴 호흡과 행간의 숨결이 살아있는 ‘감자의 둥지’를 당선작으로 뽑았다. 

 

시는 언어로 쓰여지지만 언어가 전부는 아니다. 당연히 언어의 배후인 사유와 지적 자산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응모작품 대부분이 지닌 사유의 불구성과 자기도취적 요설, 그리고 언어 곡예는 요즘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지닌 공통적 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많은 언어를 동원했음에도 작품들이 관념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력의 문제다. 그것은 정신이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확대하면 우리 사는 세상이 건강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중문화적 교양이나 감수성 정도로 시가 된다고 믿는 것은 우리 서정시에 대한 일종의 폭력일 수 있는 것이다. 오랫동안 시를 쓰는 사람들도 문학이 심각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살기도 힘든데 엄숙함은 우리를 부담스럽게 한다. 그렇다고 문학이 삶을 가볍고 유희적으로 바라봐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축하와 함께 시인을 꿈꾸는 이들의 고투에 박수를 보낸다.

 

- 심사위원 정현종·이상국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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