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연대기 외 4편
김경린
일요일은 차갑고 고요하다
마치, 빙하기를 건너는 매머드처럼 그릉그릉 울고 있는 냉동고가 일요일을 횡단하고 있다
제자리에서 일제히 뭉그러진 채로 펼쳐져 있는 시간들
사과는 몇 등분으로 쪼개 놓을까
창문이 얼고 허공마저 얼어붙었다
새를 쫓는 바람의 형태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겨났다
발 손 눈 나 너 우리 각기 다른 모양의 조각들이 문틀에 수북하게 쌓여 있다
텔레비전에서 낯익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이야기의 양면은 마약같이 내 몸에 스며들고 마취된 감정으로 잠시 잠깐 빙하의 온도는 잊기로 했다
빙하의 언덕을 넘는 매머드를 사냥하러 가려는 엄마의 칼 가는 소리
얼음의 식탁 앞에서 우리는 잠깐 얽히고 마주치고 돌아서면 빙하의 바람 속으로 사라졌다
일요일이 갔고 또다시 일요일이 왔고 빙하기는 떠날 줄 모르고 갈변된 사과는 말라 비틀어져 있고 일요일은 아직 오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빙하의 동굴에 얼음처럼 앉아서 매머드의 울음소리를 어둠이 깊어지도록 듣고 있다
푸른수염
식빵처럼 딱딱해지는 구름을 한 겹씩 벗겨낸다
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나는 가끔 멋있게 뭉개졌다
늘 새장 속에 들어가 앉아 있지만
내가 새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새들에게 손을 내밀자 숲은 더 멀어졌다
끼니를 알 수 없는 밥을 먹었다
끝없이 자라나는 계단을 오르는 꿈은 반복되었다
깊은 밤,
벽에 기댈 때마다 벽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폭풍은 언제쯤 도착할까
수초는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야 하나
새장문은 열릴 것이고
아직 날개는 돋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좋았다
멋지게 뭉개지고 아름답게 문드러지는
그러나 잘 죽지 않는 나를
새장 주인은 팔을 휘휘 저으며 날려 보낼 것이다
어둠이 내일을 끌고 올 때,
이런 예감은 왜 꼭 맞아떨어지는 걸까
낯선 뱀 한 마리
도로를 가로질러가는 뱀, 우리는 언제 한 번 만났던 인연처럼 비명을 지르고 눈을 맞췄다.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았을 때 심장이 간지러워지는
너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낯선 체온으로 가득해지고 하루는 지루하게 길어졌다. 빨갛게 익어가는 열매의 씨앗들이 삐걱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한낮의 태양은 이물감처럼 부풀어지고
혀를 오므리면 투명한 젤리가 된다.
너는 낮과 밤사이에 놓인 휘파람
물결모양의 손가락들은 가벼운 농담을 쏟아낸다. 손끝에서 손끝으로 맞물리는 안부가 불편해 오랫동안 노래를 불렀다.
나는 비켜서는 방법을 모르고
나뭇가지가 새를 흔들면 나뭇잎처럼 떨어져 켜켜이 쌓이는 공중
햇빛에 익숙해져 있는 나비를 본다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계절은 가고 계절이 왔다.
천천히 움직이는 뱀을 보며 가끔 방에서 길을 잃었다. 가볍게 끊어지는 들숨과 날숨의 뒤척임들. 나무가 기울어지는 방향으로 나는 점점 익숙해져 갔다.
우리는 아직도 여기와 거기에 있다.
소름이 돋은 살결로 포옹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
도로의 뱀은 먼 풀밭에서 목구멍까지 밀고 들어오는 몇 개의 발자국과 온기를 뱉어내고 있다.
잠자는 인형과의 동거
가끔, 인구조사 때
혼자라고 적을 때도 둘이라고 적을 때도 있었다
동전을 한 움큼 주웠고
문지방까지 물이 찰방거렸다는 꿈 이야기
죽은 말들이 새어 나왔다
잠자는 인형의 눈을 들여다본다
머리맡에는 흰 꽃병이 정직한 자세로 놓여 있다
아무 일도 없는 오후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쓰러진다
벽돌을 주워 지탱하고서야 삐딱하게 서 있는
애벌레처럼 여름이 꿈틀거렸다
나무들은 기형의 자세를 좋아했고 서로의 마음이 선명해지도록 나뭇잎들은 건강해졌다
소통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침대는 질퍽거렸고
불가피하게 바람과 창문의 대화만 듣는다
인형의 손아귀에 잡힌 내 팔목은 차가워지고 투명해진다
여름과 아무 상관없는 입술은
지상에서 못다 한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창백해지는 인형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뼛속까지 초록이 되는 여름
딴짓
어울리지 않지만 결혼식은 좋아해. 극적인 상황에서 나는 어항 속에서 잠을 잤다. 우리의 관계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난다. 이별을 위해 부케를 던졌다. 물속 모퉁이를 돌고 돌면 나의 결혼식. 햇빛을 머리에 이면 우리는 두 개의 동그라미가 되었다.
오늘을 기억해 백 한 번째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벽은 물고기 꽃누르미 향으로 가득해서 자주 물을 뿌려 적셔주었다. 결혼식장으로 가는 길은 공기방울로 엮어진 다리. 나를 툭, 던지면 파장이 일어나겠지.
천연덕스럽게 호주머니 속에서는 울음이 쏟아져 나올 것이고 블루마운틴 한 잔이 생각나는 오후. 결혼식은 또 다른 결혼식을 지워가는 일. 눈을 뜨면 시간은 분주해져 갔다. 어울리지 않지만 결혼식은 좋아해.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수상 소감
어떤 말이 어울릴까요? 이런저런 단어를 생각해 봐도 딱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습니다. 단순하게 감사하다는 말 외엔 그 어떠한 말도 대체불가인 것 같습니다. 나 스스로 나를 위로하고자 시작되었던 글쓰기는 점점 시간이 갈수록 나는 나를 모르겠고.... 내가 더 낯설어졌습니다. 내가 나를 가두는 것이 이렇게 쉬운 일이었을까요? 잘 알지도 못하는 시의 세계에 갇혀 버린 내가 안쓰럽기도 했습니다. 나를 읽고 나를 쓰는 그곳이 축축했던 것 같기도 하고, 칠흑 같은 어둠이 가끔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빛은 늘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나와는 상관없다는 듯이....
저 밑바닥 축축하고 어두운 곳에서 고개 한번 들지 못하고 뒹굴던 나의 손을 잡아주신 심사위원 전기철 선생님, 배홍배 선생님, 조윤희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많이 외로웠고 두려웠던 시간들이었습니다. 이 시간들 다 잊고 새롭게 나를 알고 만들어가라는 뜻으로 알고 열심히 좋은 글 쓰겠습니다. 이 상을 만든 정남진과 시산맥에도 감사드립니다.
끊임없이 나를 북돋아주었던 친구들에게도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 전합니다.
김경린
경기 여주출생
서울디지털대학교졸업
정남진신인시문학상 심사평
예심에서 올라온 15편의 무기명으로 올라온 응모작들을 전기철 시인, 조윤희 시인과 함께 차례로 읽으며 A B C 점수를 매기고 우수작 4명을 선정한 후 다시 심사하여 최종 수상자를 선정하기로 하였다. 장승은의 「손에 대한 짐작」 외 4편, 문은성의 「무대 연출자의 권고」 외 4편, 김경린의 「일요일의 연대기」 외 4편 그리고 성금숙의 「우리의 목」 외 7편이 먼저 뽑혔다. 장승은은 언어 속에 내포된 것들이 스스로 파괴되거나 위협당하여 재생성되는 시어들을 배열하는 힘이 한두 편 작품에서 눈에 띄나 그 힘이 지속적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문은성은 신선하고 발랄한 시적 태도와 때로는 눈을 번쩍 뜨게 하는 충격이 유쾌한 당혹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가볍고 현란한 기교는 머리끝까지 불태우지만 이내 허공으로 사라져버리는 공허함이 시를 읽고 난 후 찾아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남은 성금숙과 김경린의 시를 놓고 세 명의 심사자가 숙고한 끝에 두 사람을 공동 수상자로 선정하기로 합의했다. 각각 모던함과 전통성에 있어 우열을 가리기 힘들 만큼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이다.
김경린의 시는 잘 읽힌다. 시에 쓰인 소재나 시대와의 상관성, 인간 생활의 반영 등의 시를 보는 시각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응모한 다섯 편의 작품들에 사용된 언어 조건이 시인의 시 세계를 문제 삼을 만한 비판의 환경을 초월하고 있다. 본문을 읽는 내내 시에 대한 몰입과 자주 충돌하는 환각적 성향의 이미지들은 기존의 시에 도전하는 언어의 유희나 낯선 충격이 아닌 명백한 쾌감으로 다가온다. 작품 「일요일의 연대기」의 빙하기를 건너 일요일을 횡단하는 매머드를 사냥하기 위해 칼을 가는 엄마, 그리고 바람 속으로 사라지며 그녀와 맞서는 시적 화자가 전후 모순의 대립 항을 이루게 하는 것이나, 환유적 보상의 억압된 공간인 얼음 식탁이 몇 등분된 사과와 텔레비전에 나오는 낯익은 사람들에 의해 완곡하게 와해되는 결말은 시인의 놀라운 솜씨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작품 「푸른 수염」의 “늘 새장 속에 들어가 있지만/ 내가 새라는 것을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새장의 문은 열릴 것이고/ 아직 날개는 돋지 않았다” 부분과 작품 「낯선 뱀 한 마리」의 “천천히 움직이는 뱀을 보며 나는 가끔 방에서 길을 잃었다/.../ 소름 돋는 살결로 포옹하는 방법을 찾고 있는 중이다”에서 보듯 의미적으로 상충되는 인식의 언어로부터 상호 등가의 교묘한 의미론적 변용이 발생하게 하는 언어적 적절성 또한 탁월하다. 이어지는 작품 「잠자는 인형과의 동거」의 “아무 일도 없는 오후/ 빨래 건조대가 바람에 쓰러진다”와 작품 「딴짓」의 “이별을 위해 부케를 던지는 나” 부분 역시 김경린 시인의 배타적인 어휘들이 주는 통일된 언어의 미적 충격을 경험하게 한다.
성금숙의 시는 안정되었다. 전통적인 시의 형식에 충실하게 봉사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 관례적인 시의 변별을 무효화시키고 있다는 뜻도 아닌 세련되고 완전한 시의 정의를 보여주고 있다는 말이다. 감각적 경험에 의존하면서도 어떤 1차적 묘사도 제외한 채 묘사되지 않은 전제들의 여백 속에 숨은 대상들을 묘사한다. 각각의 의미 항들은 서로를 계속 지시하며, 서로의 의미들을 무효화시키면서 3차적 의미를 생성하는 힘을 보여준다. 작품 「우리의 목」에서 우리와 우리는 동음이의어로 쓰인다. 우리라는 한 단어 속에 주지와 매체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대체로 시에선 매체에 의해 주지가 현상되는 동기의 부여가 일반적인데 시인은 유추의 근거를 생략하고 있다. 우리의 빛나는 사전적 명시성의 그늘 아래 은폐된 원관념이 직관되는 유머러스한 시적 풍경을 연출하는 독특한 능력을 성금숙 시인은 지녔다. 평범한 일상 소재가 독자에게 주는 심리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전달의 문제, 즉 시적 수사학의 과제는 이같은 독특한 시적 연출력에 의해 이미 해결되고도 남음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 같다. 작품 「진동하는 침묵」의 “당신이란 문장을 떠올리면/ 일렬로 날아가는 새들이 흩어지고/.../ 당신에게 나는 검은 사람/.../ 천개의 먹칠한 숫자”에선 확장된 심상 혹은 병치 영역으로 던져지는 언어의 궁극적인 아찔한 속도감을 체험하고, 작품 「눈」의 “사람을 뭉치면 덩어리가 됩니다” 부분과 작품들 「훔쳐서 쓰다」와 「눈물이 핑 돌다」의 “초록이 죽고/ 초록이 번진/ 초록을 훔쳤지” 부분, “밥값을 계산하다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돌다 쓰러진다/ 돌지 않는 돈을 세다 아스피린을 삼킨 오렌지 분식 사장님” 같은 표현은 어둑한 시의 무대에 첫발을 딛는 시인 스스로에게 깔아주는 찬란한 빛의 그림자를 보는 느낌이다.
두 분에게 축하의 말을 전하며 오래 시단에서 견디는 그래서 자신의 시세계를 갖추는 시인이 되기를 바란다.
예심 심사위원 : 문정영 강주
본심 심사위원 : 전기철 조윤희 배홍배(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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