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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장과의 관계 / 이정화







[심사평] 


부천이라는 단일 지역의 신인문학상 시 부문 공모에 72명이 360편의 작품을 응모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시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높다는 것인데, 작품을 읽어보니 시 쓰기에 대한 기초적인 이해조차 갖추지 못한 초보적인 작품이 많아, 질적이 면에서는 다소 아쉬웠다. 취미로 시를 쓴다고 해도 신인문학상에 응모한다면 식민지시대부터 최근까지 우리 근현대 시문학을 지탱시켜온 주요 시집을 100권 이상은 정독하고(그중의 몇 권은 책이 너덜너덜해지도록 읽고) 창작에 대한 최소한의 개념 정도는 이해하고 수백 번 쓰고 버리는 습작 과정을 거쳐야 하지 않을까. 당선작을 뽑지 못하면 어떡하나 걱정도 되었지만, 어느 정도의 수련을 거치고 시에 대한 열정을 보인 작품들이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마지막까지 논의가 된 작품은 벽장과의 관계」 「봉지들이 터졌다」 「뒷걸음질」 「저녁놀4편이었다. 벽장과의 관계는 벽이나 다름없으면서도 언제든지 여닫을 수 있는 벽장에 대한 관찰과 묘사가 주목할 만했다. 벽이면서도 필요할 때는 장이 되고 감추고 싶은 너저분한 물건들을 던져놓고 문만 닫아놓으면 그만인 편리한 곳이어서 평소에는 방치해 두지만 갈수록 추억의 가치가 커지는 대상에 대한 관찰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기억의 끝”, “먼지 낀 추억”, “오래된 감정과 같이 습작기를 벗어나지 못한 것 같은 상투어가 거슬렸다. 봉지들이 터졌다는 응모작 중에서 가장 패기 넘치고 상상력이 자유로운 시이다. 이 시는 상품 포장이 많아지면서 봉지들이 흔해져서 이제 공해가 될 지경인 현실을 재미있게 꼬집고 있다. 어디서나 터지고 밟히는 봉지들에 대해 쓰고 있지만 그 봉지는 또한 현대인의 모습을 환기시키고 있어서 독자들의 상상력을 즐겁게 자극하고 있다. 함께 투고한 다른 작품들도 읽을 만하기는 했지만, 아직 거칠고 덜 다듬어졌을 뿐만 아니라 곳곳에 장난스러운 구절들이 있어서 선뜻 밀기가 주저되었다. 뒷걸음질콘크리트 사막인 삶의 터전에서 자기 앞에 찍힌 강아지, 개나리, 하루살이 등의 발자국을 보며 자신의 걸음이 뒷걸음질임을 발견하는 반성적인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힘에 조금씩 죽어가는 몸 밖의 자연과 몸 안의 자연에 대한 시적 인식을 보여준 점은 볼만했으나 그 시적 인식은 상투성에서 멀리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저녁놀은 풍경에 매혹되는 순간이 시가 되는 과정을 그리면서 시적 순간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시이다. 풍경화와 시적 순간을 연결하는 상상력은 독특하나 월척을 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짜릿한 손맛에 대해 배가 부르다고 끝내버려서 아쉬웠다. 그 손맛과 짜릿함 속에 들어있는 질문을 상상력으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시가 되는데, 적당히 쓰고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네 편의 작품은 각각 장점과 한계가 뚜렷하게 보여서 심사위원의 동의를 단번에 얻어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네 편중에서 벽장과의 관계가 시적 인식이나 창작 방법에서 가장 착실한 기본기를 갖추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여 당선작으로 결정하였다. 다른 응모자들의 작품이 들쭉날쭉한 반면에 이 응모자의 작품은 고른 수준을 보여준 점도 참고하였다.


심사위원: 박몽구, 김기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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