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우리詩문학상』신인상 상반기 당선작(1)】
「잔혹한 일상」외 4편 │ 박승출
잔혹한 일상| 박승출
전생에 나는 길 위를 떠도는 자가 아니었을까. 모서리 반듯하게 정돈
된 삶보다 정처 없이 흐트러진 일상에 더 마음이 가니 아마 나는 전생에
길 위에서 죽은 얼굴 환한 귀신이 아니었을까. 단 한 번도 똑 같은 길
위를 걸어가 본 적이 없는 바람에 날리는 바람처럼 가벼운 무게를 갖고
태어난 영혼이 아니었을까. 길 위에 서면 더없이 평온하게 밀려오는 탁
트인 숨결, 태양을 삼키며 등지며 붉은 노을을 향해 영원을 걷는 사막
의 캐러밴은 아니었을까. 죽어 은하수 너머 아예 먼먼 밤하늘로 날아가
박혀 우주를 돌며 자유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자들의 쉼 없는 이정표가
된 푸른 별자리의 하나는 아니었을까.
어제 갔던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이제 시큰둥한 가로수들은 나를 보고
도 더는 말을 걸어오지 않는다. 돌아서 가도 거리의 모퉁이들은 더 이
상 비밀스런 궁금증을 품지 않고, 늘어나는 내 몸무게를 쉽게 감지하는
보도블록들의 딱딱한 오와 열이 현기증을 일으킨다. 누군가가 땅바닥에
떨어뜨린 책이 바람에 같은 페이지를 미친 듯이 계속 펄럭이고 있는 거
리, 느끼는 시선도 없이 상가 유리창 안에서는 어제의 드라마가 홀로
재방영된다. 왕성한 식욕으로 길을 먹고 길을 뱉어내는 사거리는 언제
나 체증으로 막혀 있고, 오늘도 어제처럼 허락 없이는 건널 수 없는 횡
단보도, 나는 포로처럼 서서 단지 두 마디의 말로만 깜빡이는 푸르고
붉은 신호등의 무뚝뚝한 점멸을 무작정 기다린다. 어제 갔던 그 길을
따라 걷는다. 나와 똑같이 생긴 이상한 사람들이 나와 똑같이 무덤덤한
이상한 표정으로 말도 없이 나와 눈빛을 주고받는
숨 막히게 잠잠한 이 일상을 훌러덩 말아 먹고 싶다
후생에서 내 전생은 이제 비밀이고 싶다
안개의 도시
기어이 앞이 보이지 않았다
바람은 안개를 몰고 와선 거리마다 풀어 놓았고
해가 뜬 한낮에도 안개는 걷히지 않았다
간혹 이마를 부딪는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거리를 어색하게 떠돌았고
곁을 스쳐도 서로 알아보지 못했다 어디선가
분리 수거되지 못한 간밤의 식욕들이
썩어가며 가로수 밑에서 냄새를 피워 올렸고
온다던 약속시간이 지나도 버스는 오지 않았다
항거할 수도 없는 시간 속에서, 멀리
형체 잃은 차량의 불빛들이 놓여진 다리도 없이
어디로도 나아가지 못한 채 강물 위
허공 속을 달리고 있었고
건너가고 있는지 건너오고 있는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들러붙는 습기 찬 물방울의 끈적임을 떨궈내기 위해
가로수들이 몸을 둥글게 움츠리며 잎을 부르르 떨었고
어둠을 온몸에 바른 채 터널을 막 빠져나온
자동차들이 어리둥절한 시선을 도로 위에 뿌리며
딱성냥처럼 길을 그으며 급정거하기도 했다
안개는 사람들을 하나씩 가두면서 지우고, 도시는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자꾸 더
안개를 피워 올리고 있었고
안개 위로 우뚝 솟은 옥상 위의 거대한
전광판만이 이 모든 안개 속을
유유히 내려다보며 희미한 무슨 말인가를
쉴 새 없이 빠르게 뱉어내고 있었다
밤풍경
유리창마다 검은 노을이 드리우고
거리에는 어제보다 더 일찍 밤이 찾아왔다
도시가 차려 놓은 거리의 목록들이 일렁일 때마다
허공 어디쯤에서 역한 냄새가 스며나왔고
사람들의 표정이 어딘가를 향해 일그러졌다
그때 밤의 문이 미친 듯이 펄럭이고
스펀지처럼 어둠을 빨아들였다
마약처럼 어둠에 흠뻑 젖은 불빛들이 걸어 놓은
입간판을 향해 다시 구두코들이 뛰어들고 뛰어나가고
검은 도화지 위에 채색된 밤의 불빛들
블록마다 신세계가 그려졌다
세상은 자꾸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은밀히 숨어들거나, 낙엽처럼 구르는 낙오의
뒷골목에서 굽은 등을 한껏 움츠리며
쓸쓸히 사라지기도 했다
바닥을 핥으며 달려와 교차로에 우뚝 선 차량들이
먼 곳의 불빛과 불멸의 신호를 주고받으며
레이저 광선을 쏘아대며 다시 질주를 준비하고 있었고
횡단보도 붉은 신호등이 보초처럼 단호하게
밤의 경계를 지키고 있었다
또다시 어디선가 형체도 없는 바람이 불어와선
쓸쓸히 지상을 구르는 불빛의 잔해를 쓸고
어딘가로 불어갔고
발 밑 고요를 안고 사는 사람들은 작고 차가웠다
절망이 웃으면서 내게로 걸어왔다
시간의 화석
지구의 오래된 뼈마디를 들여다본다
붓끝이 더듬고 지날 때마다
묻혀 있던 시간의 흔적들이 조금씩 쏟아진다
사라진 꽃의 향기가 상상을 자극하고
잃어버린 대륙이 만개한 들판을 펼쳐 놓는다
수천만 년 된 딱딱한 바람의 화석이 공중으로 흩어진다
산맥이 솟을 때 넘지 못하고 지층 깊이 갇혀버린
비를 쏟아내지 못한 구름의 불운과
행성 사이를 건너와선 숲에 닿지 못하고
단단하게 굳어버린 햇빛화석이 뜨겁게 녹아내린다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 놓은 듯
생의 비명이 다른 생 위에서 절규하고
다시 흙의 계단을 거슬러 오르면
한순간 어둠이 내린 끝없는 시간을 지나
어느 초라한 생명 하나가 흐린 눈을 굴리며
초원 위로 조심스런 첫발을 내딛는다 그렇게
멸종과 출몰의 끝없는 반복이 켜켜이 쌓인 언덕에서
두근거리며 지축은 거대한 분열을 계속하고
기는 것들과 달리는 것들과 나는 것들의
한데 어울린 놀라운 무덤,
시간과 시간 사이에 끼인 두터운 먼지 후후 불어내며
영겁의 시간의 조각들을 눈으로 따라가면
퍼즐처럼 떨어져나간 시간의 아귀가 채워지는
땅속 깊이 꼭꼭 봉인되었던
오래된 싱싱한 비밀들이 흙의 껍질을 물고 일어선다
가로등 우울
가로등 불빛이 우울했네. 어둠을 껴입은 밤의 족속들 길을 당기며 어
디론가 급히 몰려간 후 거리에 홀로 남아 흐느끼고 있었네. 밤의 문은
쉬이 닫히지 않았네. 아무렇게나 구겨지며 넘겨지는 페이지처럼 거리를
끌고 형체 없는 바람들이 몰려다니고 있었네. 손과 손이 닿지 않는 빛
의 사각지대마다 부푸는 어둠, 꺼지지 않는 무심한 상가 불빛들은 담을
찾아 밤하늘을 향해 무언가를 끝없이 타전하고 있었네.
이문동 산 1번지 산동네에서 시작된 불빛이 어둠을 적시며 아래로 아
래로 이끌리듯 내려올 때, 그때 불빛 닿지 않는 어두운 골목길에선 비
명도 없이 밤이 살해되고 있었네. 어둠의 한 끝을 지키던 초병들이 그
만 두려움에 질끈 눈을 감는 바닥에는 입이 틀어 막힌 작은 비닐봉지가
밤의 어둠속 저 편으로 천천히 유기되고 있었네. 야경이 펼쳐놓는 풍경
한 자락에 취한 구름들이 자정이 지나도 끝나지 않는 도시의 밤하늘을
유유히 흐르고 있었네.
세상의 모든 가로등,
세상의 모든 어둠 다 환하게 밝힐 수 없다고 깨진 가로등 불빛 아래
어둠이 고이네
【당선 소감】
허무를 위해 쓰는 나의 시
박 승 출
늦게 시작한 공부에 밤새는 줄 모르고 산다.
현자는 시간을 유용하게 쓰는 사람이라는데 나는 얼마나 시간을 낭비하
며 살아왔는가. 내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생각하면 마음이 급
해진다.
이룬 것도 이루어야 할 것도 다 한 줌 바람 같은 궁극적인 세상이지만 그
허무를 위해서 시를 쓴다.
시의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