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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시작신인상 당선작] 최원 차성환

 

마른 잠 외 4/ 최원

 

 

천년 묵은 뱀은 팔다리가 생기고 귀가 자라고

사람처럼 말도 한다는데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목줄기에 차곡차곡 빛이 쌓인다

한 손에 잡고 있는 푸른 술병

항온동물로서 여름 햇살을 온전히 받으며

생의 일부가 삭제되는 중이다

 

뱀은 밟는 것이 아니다

뱀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뱀은 발을 구르고 주문을 외우며 몰아내야 하는

멸시의 동물이 아니다

뱀은 그냥 뱀이어서 살다 보면 돌돌 말릴 일도 있으므로

머리와 꼬리가 맞닿은 잠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잠의 머리맡에서

한낮이 발효되는 것이다

 

한때 우리에게는 궁극이라 불리는

아름답게 독기 서린 꼬리가 있었고

태양의 밀어를 해석하는 귀가 있었고

나무의 그림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늙은 유두 같은 꼬리를 물고

꾸는 꿈은 무르다

쉽게 부스러지는 꿈의 밖에서

오후의 느린 햇살이 어깨를 누른다

누구에게나 일몰이 올 것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인파 속으로 흘러드는 그의 뒤에서

하루가 짧은 얼굴을 풀어 놓는다

 

 

 

앵두나무 맞은편

 

 

연탄 화로 둘레에 세 중노인 매일 앉아 있다

골목길 건너 담장 밖으로

앵두가 빨갛게 익었다

 

페인트 벗겨진 담벼락마다

재개발 공고문이 너덜거리는 이 동네에서

꽃이 피기 전부터 열매가 익을 때까지

한 무리 새처럼

그들은 같은 얘기만 한다

달궈진 석쇠 위에 알밤 몇 개

어제는 찬성 둘 반대 하나

오늘은 찬성 하나 반대 둘

그런 걸 변심이라 하는데 내 맘 나도 모르겠다며

자진처럼 벌주를 마시는 걸 변명이라 하는데

찬반의 주장들이 귀 떨어진 밤처럼 피식피식 익어 갈 때

안주가 익기를 기다리는 그들은

때론 아군으로 때론 적군으로

변심과 변명을 데워진 혈액처럼 순환시킨다

 

떨어진 앵두를 주워 술잔에 담근다 그런 게 있다

술잔에 빠지면 커 보이는 앵두처럼

붉고 둥근 것은 달콤할 것이라는 오래된 인식처럼

식어 가는 화로 위에 부풀어 오르는 저녁

잔이 채워졌다 비워졌다 한다

앵두가 커 보였다 작아 보였다 한다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없는

붉고 둥글고 말랑거리는 것이

술잔 속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한다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

 

우리는 회현동의 오래된 삼류 호텔 술집에 함께 있었다 명신과 나는 술을 나르고 미주는 술을 따랐다 아진은 미주의 옆자리에서 사내들에게 쉽게 가슴을 꺼내 보이던 여자 미주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화장한 검은 눈이 도도한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사내는 없을 것이므로 미주가 지나칠 때 이는 바람 앞에서 명신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명신은 언제부턴가 미주의 앞에서 말을 쉽게 잊었다 미주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여자였으므로 취한 메뚜기처럼 룸을 옮겨 다니곤 했는데, 그러다 사내들에게 들키곤 했는데, 명신은 미주 대신 따귀를 맞았고 미주는 호텔 룸 키를 들고 사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술집에서 명신은 마른 화초처럼 취했다 어릴수록 흔한 일에 분노했고 명신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막 전역한 명신은 눈이 붉은 사내 미주와 아진을 꼬드겨 질척하게 놀아 볼까 반쪽짜리 농을 치던 나를 노려볼 때도 복학할 때까지만이라고 더듬더듬 말할 때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들은 미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룻밤 사랑하고 한동안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곤 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명신은 지하철 기관사가 됐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의 끝인 어느 아침 출근길 미주를 본 것이다 내가 열차에서 내리고 반대 방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모이고 해 뜰 무렵 헤어지던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원숙한 여인은 미주였을 것이다 찌익찌익 옷상자에 박스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먼지처럼 매캐하던 회현동의 지하철역이었으므로 미주여야 했다 명신 또한 그 시각 뜨거운 바람을 몰고 들어오던 열차의 운전석에서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아직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어둠 속을 달리던 명신에게 인파 속에서도 그 시절의 사랑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의무였을 것이다 그날 거기에 미주가 있었고 내가 미주를 봤으며 명신도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시간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명신의 붉은 눈은 미주를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나와 아진, 그리고 낡은 술집에서의 한때를 기억해 냈어야 한다 그 시절의 표정으로 문 닫는 것을 잠깐 잊어도 좋았을 것이나 명신은 미주를 향한 욕망 혹은 채우지 못한 욕정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열차를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운행은 순조로울 것이고 명신은 조금은 들뜬 그러나 중년의 목소리로 차내 방송을 했을 것이다 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 열차는 당고개를 출발하여 오이도까지 가는 열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방송을 중년의 명신은 했을 것이다 지하를 벗어나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는 태양빛 가득한 지상을 언덕을 지나 평지로 때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흰 구름의 동쪽에서 노을 짙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랄 법한 생을 빗댄 방송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쁜 출근길 말 없는 사람들이 생은 어찌 됐건 해피엔딩이라고 믿으며 출근 도장을 찍을 것이고 하루를 또다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듯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이유이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가볍게 쥔 주먹에서 사연의 모래가 유행가처럼 흘러내려 세상은 뿌연 삶의 색이다

 

 

 

안개의 긴 이름

 

 

마흔 살에도 한 편의 시 같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인구의 절반은 여자 나는 애인도 없고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으므로 바닥을 친 인간 어쩌면 지금이 바닥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럽던 날 꽃을 꺾어 팽개치던 날 시와 연애 중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고백하던 그날

집으로 돌아와 2연과 3연 사이 의미와 무의미가 혼재된 나의 문장들 사이에 검은 털이 무성한 음부를 그려 넣었습니다 내 모든 시들은 416

쎈타를 까! 쎈타를!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 화면은 흑백)

펜 끝에서 태어난 나의 애인 방바닥과 침대에 널려 있는 애인들 매일매일이 피곤한 아침입니다 몸에 달라붙어 바스락거리는 애인들 끈적거리는 애인들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외치던 호시절의 구호처럼 모든 힘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까마득한 날들을 등지고 앉아 발톱을 자릅니다 내 몸의 끝과 끝에서만 자라나는 단단한 것들 사사십육 사사십육

이제껏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요 일기를 쓰다가 새로운 형식의 곱셈을 생각하는데 복서의 눈이 찢어지고 던져진 흰 수건 울컥, 눈물이 나옵니다 나는 이토록 흰 수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밟히고 구겨진 나의 애인들은 철없는 아이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세상의 절반은 육지 절반은 바다

살을 파고든 발톱을 자른 자리에서 몇 방울 피가 났습니다 등을 구부리고 발가락에 호호 입김을 불어 줍니다 발이 따뜻해지고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오늘 밤 자고 나면 나는 이제 절뚝거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지는 않겠지만 발가락을 주무르며 아름다울수록 긴 이름을 지어 주는 시대를 생각합니다

 

 

 

밤의 패턴

 

 

도시가 어둠 속에서 소화되고 있다

물러지고 흐려지고 뒤죽박죽

섞이고 있다

 

가로등은 멀리 있으므로 있으나 마나

각자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서로를 향해

걷는 모양새다

 

당신의 얼굴이나 나의 얼굴이

검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모든 결정은 동공의 권역에서 이뤄진다

 

당신과 나의 얼굴에 하나씩

선명하게 빛나는 점, 약속도 없이

담배를 물고 있으므로 우연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주먹을 휘두른다

우리는, 힘겹게 휘두르며 생각한다

도무지 맞지를 않아

사실,

우리는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으로,

흑점으로부터 붉은 불꽃의 눈동자에게로

다가왔으므로 필연이다

침과 침이 섞이고 피와 피가 섞인다

 

까닥까닥 흔들리는 전등 아래

흐트러진 머리를 등지고 앉아

국수를 말아 먹는다

 

 

당선 소감

 

결론은 그렇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건가. 기억의 잿간을 뒤적이다 눅눅해진 한 줌의 당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지금 문득 꺼냈다는 건 한동안 파묻혀 있었다는 것.

 

그 시절 우리는 행복과 고통과 원죄들을 함께 생산하고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진눈깨비 내리던, 내겐 무참함이 더해지던 이른 봄의 어느 날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 무참함이 이 뜬금없는 길을 향한 첫 걸음이었음을 비로소 시인합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름 꿀피부를 자랑하던 내 얼굴에는 기미가 내려앉았고, 당신에 대한 그리움 혹은 증오를 시로 승화시키려 애쓰는 흔한 과오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 턱없이 모자란 나의 능력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잘 살고 계시죠? 그렇다면 더 잘 사세요.’ 제법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떤 미사여구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여 너무 가늘어서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라도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선이 있다면 오늘부로 SWITCH OFF.

 

이 귀중한 기회를 저에게 주신 계간 <시작> 채상우 발행인님과 김춘식, 이형권, 유성호, 홍용희, 임지연, 이찬, 이현승 심사 위원님들께 진심으로 허리와 머리를 함께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육십억 지구인을 감동시킬 한 편의 시보다 이 당선 소감이 더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긴 시간 이끌어 주신 시사랑 목요반 선생님들 그리고 박정석, 김승일 두 팀장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의 등단 소식을 듣고 엉엉 울어 버리신 이복수 여사님, 끈질기게 나를 시인이라 불러 주신 임병두 형님, 석봉 형, 흥식 형, 기덕, 절친 수정, 성기, 재근, 류경, 재희, 3임 씨 또 누구지? 암튼 사랑합니다.

 

현재 혼미한 정신 상태로 인하여 앞서 열거하지 못한, 내 휴대전화기에 입력되어 있는, 저를 응원해 준 수많은 친구들 고마워요. 사실 진부한 표현이기도 하고 부끄러워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여러분은 나의 일생이라는 시의 가장 힘 있는 한 행 한 행입니다.

 

서일대학 문예창작과 동기들과 선후배님들, 많이 늦었습니다. 그사이 학과 통합이란 이름으로 타과인 듯 타과 아닌 타과 같은 학과가 된다고 하던데 이제 저는 등단 턱으로 소주 한잔 사 줄 후배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방도 없음으로.

 

마지막으로

 

탕아였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닐 그런 저를 시인으로 만들어 놓으신 장석원 교수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고맙습니다라는 말밖에 없는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최원

1974년 충남 안면도 출생. 서일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저서로 <버선발로 디딘 누룩>(공저)이 있음

 

 

 

 

 

 

붉은 방 외 4/ 차성환

   

 

트럭에 실린 토마토가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개들은 혓바닥을 토해 내며 뒤를 쫓고

트로트에 맞춰 들썩이는 토마토

토마토가 왔어요 맛 좋고 싱싱한 토마토

확성기에 들어간 토마토가 온 동네를 구르며 깨우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멈춘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아가리를 쳐들고 있다

집과 집이 바짝 맞닿은 크레바스의 깊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곰팡이 핀 얼굴로 기어 나오고

아줌마들이 넝쿨 같은 손가락을 뻗는다

한 손 한 손 건네받은 토마토를

가슴팍에 묻어 조금씩 베어 문다

아이들은 토마토 힘줄을 물고 빨고

개들은 바닥에 터진 토마토를 할짝거린다

이곳에는 누구나 다 기울어져 산다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기댄 판자촌

깨진 유리창 너머,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생이 붉은 방을 켜고

채 익지 않은 밤을 기다린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토마토

그림자를 널어놓은 빨랫줄 위로

발갛게 무른 달이 떠오르고 있다

 

 

 

모래 여자

  

 

오지 않는다 모레 온다고 했던 모래 여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건만 떠나자마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잘라 버렸다 모래밥을 안쳐 놓고 오지에 가서 오지 않는 여자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아닌 모레 온다고 한 여자 잘린 손가락에 대마초가 피고 냄새를 맡은 경찰이 철문을 두들긴다 방구석에 놓인 관 뚜껑이 열리고 삼베옷을 입은 아버지가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대마 잎을 염소처럼 뜯어 먹고 나는 염소젖을 쓰다듬으며 음마음마 소리내 운다 모레에 오지 않을 것 같고 와도 안 될 것 같은 여자 귓가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도시는 황사로 가득한데 치맛자락을 붙잡은 내게 모레에 올게 모래를 흩뿌리며 사라진 여자 뻑뻑한 눈알을 긁어 대는 나를 두고 모레 온다며 떠난 여자 모래를 씹으며 모레를 세면 손가락들이 모래로 떨어지고 방 안에 나 대신 모래 한 푸대 부려 놓고 달아난 여자 대마 꽃처럼 푸슬푸슬한 붉은 입술로 도망간 모래, 모레, 모래 여자

 

 

 

검은 구두

 

 

발을 집어넣다가 물컹한 쥐를 밟은 후로는 팬티도 뒤집어서 털어 입는다 가끔씩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고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뽑혀 나오는 검은 구두, 뒤꿈치가 까지고 새끼발톱이 뭉개져 피 칠갑을 하며 내 발을 길들인 검은 구두 봄날의 잔디를 깔창에 깔고 뽀송한 구름을 구겨 넣고 습기 제거 해충 박멸의 구호를 외치던 그해 여름 아스팔트 위로 천 개의 구두가 달려오는 장마가 지나가고 가을이 와도 구두 속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나는 비를 피해 숨어 다닌다 내 발은 불어 터져 구두를 벗을 수 없는데 미칠 듯이 가려운 발등을 뒷굽으로 찍어 댄다 점액질을 흘리며 나를 끌고 다니는 검은 구두, 간신히 구둣방을 찾아 발을 내밀자 이 구두는 당신 발이라니까 의사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밑창을 뜯어 보지만 우라지게 튼튼한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숲의 제철소를 찾아가 용접가위로 검은 구두를 뜯는다 울컥울컥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오는 검은 구두 손바닥만 한 날개를 편 바퀴벌레 떼가 날아오르고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을 꽉 막아 죽은 쥐가 물 위로 떠오른다 나는 소스라치게 검은 구두를 집어 던지고,  

 

다시 까맣게 때가 타기 시작한 새 구두를 신은 맨발이 흰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다

 

 

 

Ah! Monde

 

 

이빨 사이에서 와그작 부서진다 툭 툭 터진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사람들이 숨는다 아몬드 4년 전 떠나간 애인한테서 전화가 온다 수화기가 없이 벨만 울린다 아몬드 오래전 죽은 아버지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안방으로 들고 간 밥상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으신다 아몬드 햇빛이 아이스크림 위에 아몬드처럼 부서진다 나는 놀이공원에 혼자 눅눅해진 콘에 담겨 흘러내린다 아몬드 육개장에 얼굴을 파묻고 퍼먹는다 떨어지는 눈물에 국물이 줄지 않는다 아몬드 어머니의 주름치마를 잡은 손 안에 계속 주름이 접혀 들어온다 나사 하나가 손에 들려 있다 아몬드 석가모니 그림자 서린 수자타 마을의 강을 건넌다 발목이 물에 흘려 떠내려간다 아몬드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항상 이불 속에서 질식사 직전에 빠져나온다 아몬드 가슴 위에 포개 놓은 손이 박쥐가 돼서 파닥거린다 방 안을 날아다닌다 아몬드 머리가 달아난 검은 지네가 입속에서 기어 나온다 와그작 와그작 아몬드 사이에서 이빨이 부서진다

 

 

 

모시모시

 

 

흰 벽지에 검은 못이 박혀 있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간 못의 뿌리가 자란다 검은 실 줄기가 밤새 퍼져 나가 베개 위에 긴 머리카락을 펼쳐 놓는다 못에 걸어 둔 시계가 시간을 잃고 초침이 경련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못의 뿌리가 기어간다 장롱에서 그물에 감긴 아기가 끌려 나온다 벽의 모서리에서 시멘트 가루가 조금씩 떨어진다 바짝 마른 동공을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모세혈관이 움켜쥐고 있다 몸에 있는 점들이 천장에 달려가 별자리처럼 박힌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검은 못의 촉수, 살갗이 곤두선다 점이 있던 자리에 핏물이 맺힌다 서랍 속 장도리를 꺼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내려친다 시계를 부순다 이놈의 못이 이놈의 못이 장도리의 쇠발톱에 못을 걸어 뽑는다 끌려 나오는 검은 뿌리 헐떡거리는 못을 뿌리째 씹어 먹는다 못이 빠진 구멍에 터진 수도 배관이 검붉은 피를 쏟아 낸다 방 안에 핏물이 고인다 나는 축축한 웅덩이 한가운데서 깨어난다

 

 

 

당선 소감

 

대관람차 안에서 등단 소식이 담긴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 꿈이었기에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대관람차는 상층부를 향해 반원을 그리며 떠오르고 다시 나머지 반을 찾아 내려옵니다. 지상에 발을 딛고 내려왔을 때 각오가 생겼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시보다 더 나은 시를 쓰겠습니다. 아직 쓰지 않은 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겠습니다.

 

등단을 하면 제게 처음 시를 가르쳐 주신 김혜순 선생님께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해 죄송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저를 독려해 주시고 일깨워 주시는 서울과기대의 최승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사적 표현에 매달리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가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 가슴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한양시창작단의 문우들과 강동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함께 참 지지고 볶고 많이 했습니다. 같이했기에 시가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내내 즐거울 것입니다.

 

유성호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곁에서 시를 읽고 배우면서 저를 돌아보고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시를 열심히 살아내겠습니다.

 

끝으로 <시작> 편집 위원님들과 채상우 발행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성환

197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중.

 

 

 

 

심사평

 

이번 2015년도 제13회 시작신인상 시 부문에 응모한 신인들과 시편들은 모두 140, 990편이었다. 투고된 몇몇 시편들은 한국시의 변화된 지형과 예술적 짜임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흐뭇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응모작들은 기실 단 한 편만으로도 자격 미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우리 심사 위원들은 990편의 작품들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어야 할 응모작들을 어렵지 않게 선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토론을 벌인 신인들은 다섯 명이었고, 몇 차례의 재독 과정을 통해 두 신인의 당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임희정의 응모작들은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이미지 조각술이 눈길을 끌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의 차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일상적 차원의 개연성을 멀찌감치 벗어나, 귀기와 전율스런 육체의 이미지들을 예술적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미학적 용기의 차원에서도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저 세련된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용기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만의 예술적 사유와 일관성의 구도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심사 위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미소의 응모작들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 활용이 돋보였다. 인도 등지의 힌두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제식을 소재로 삼은 목을 펴는 사람이라든지, 디지털 문화에 따른 전자 쓰레기를 제제로 삼아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 <쓰레기 섬 창조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또한 육체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감각의 구체적 질감과 기억의 문제를 결부시킨 <길 위에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의 고뇌를 알레고리 구조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지면 없는 추락>이나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한 <영정 앞에서> 같은 작품들은 이 신인의 시작법과 전체적인 시풍이 자연스럽게 엇물리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언어의 숙련도와 예술적 세공술의 차원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불균형한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또한 제 기술적 장점들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프레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구성력의 차원에서 적지 않은 약점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편들 전체를 마치 숨결처럼 제 몸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과 구성력의 확보를 주문하고 싶다.

 

박민서의 응모작들은 이른바 몸의 세계를 제 예술적 상상력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편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장점들을 고스란히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끈적거리는 질감으로 휘감겨 오는 점액질의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이미지 조각술이나, 비유법의 정통적인 기술과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숙련도의 차원에서 후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조악한 수준의 발상과 사유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후 보다 많은 예술적 연마의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이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과 시각이었다. 단편적인 시적 기법과 부분적인 세공술의 숙련도를 넘어서, 한 편의 시 작품 전체를 일관된 예술적 짜임새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곧 각각의 시편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시어의 음영과 예술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구성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차성환의 응모작들은 우리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에서 심사 위원들 대다수를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특히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소묘하면서 그 뒷면의 침묵의 공간에서 어떤 감성의 음영을 소리 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숙련도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물론 응모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세공의 완성도와 마름질의 밀도의 차원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노출시켰기에, 당선 여부를 두고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토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저 관찰력의 집요함과 언어들 사이로 휘감긴 끈덕진 질감의 내면성을 신뢰하기로 했고, 결국 당선자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보다 빼어난 시편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최원의 시편들은 오랜 시적 수련을 거친 자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정제된 언어의 밀도 높은 짜임새와 더불어, 상이한 여러 소재들을 제 몸의 리듬감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예술적 일관성의 구도를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응모작들 모두가 빠짐없이 고른 수준과 예술적 세공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둔 토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차원에서 매번 벌어지는 착시와 오인과 왜곡의 현상들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색으로 소묘한 <앵두나무 맞은편>이나, 일상 세계의 소소한 인연들이 시간의 깊이를 가로지르며 일구어 내는 저 운명과 우연의 현란한 엇갈림을 밀착 인화의 기법으로 그려 낸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는 이 신인의 만만찮은 재능과 수련의 과정을 충실하게 예증해 준다. 또한 우리 삶 곳곳에 깃든 저 황폐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잔인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모두 어렵지 않게 만장일치로 당선을 결정했다.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한국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대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이현승 임지연 이찬()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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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와 바게트 / 리호

 

 

네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찾아

그러면 스스로 나는 법을 깨닫게 될 거야

나는 조나단, 더 이상 빵부스러기에 연연하지 않는

적도의 펭귄5

 

 

흔해빠진 스트라이프 팬티는 사양할래

더 이상 그녀의 젖가슴이 떠오르지 않거든

쇄골과 골반 안쪽에는 맹수들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검은 눈동자 문신을 그려놓았어

 

유명한 빵집 앞에서 22분을 기다려 바게트를 샀지

비스듬히 칼집 넣은 중간 중간에 오후를 채워 넣었어

빠삐용의 죄수복에도 붉은 칼집이 들어간 것을 아나?

찢긴 나비의 날개 조각들이 채워져 있던 걸로 기억해

 

낯선 이들의 침입을 막으려 부적처럼 세워놓은

검은색 기타 옆에 바게트빵을 기대놓았어

여섯 개의 현에 매달린 그녀가 가는 잠에서 깨어나 한입 물었지

후두둑 오후가 쏟아져 내리더니 이내 나비가 된 그녀가 웃고 있네

 

더 이상 스테레오타입의 섹스는 사양할래

가슴에 노란 빠삐용 문신을 새긴 그녀의 심장은

오른쪽에 있거든

 

 

 

기타와 바게트

 

nefing.com

 

 

올해 '3회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리호(45··서울시 강동구)시인이 문단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쳐 주목받고 있다.

 

리 시인은 지난 9월 충북 보은군과 실천문학사에서 주관한 오장환 신인문학상에 '기타와 바게트'란 제목의 시로 응모해 당선했다.

 

송찬호 시인을 비롯한 심사위원들은 그녀의 작품 전반에 깔린 패기 넘치는 목소리를 높이 샀다.

 

당선작인 '기타와 바게트'에 관해 "에피그램의 제시부터 언어 선택에 이르기까지 파격적인 형식의 구사가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파편적으로 배치된 듯한 이미지 간의 화학적 결합을 통한 시의 축조도 신인상에 걸맞은 목소리를 만드는 데 기여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안정적인 기교와 목소리를 담은 작품들과 조금 거칠지만 패기 넘치는 리호씨의 작품을 놓고 고민하다가 결국 성장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수상자로 선택했다"고 심사위원들은 밝혔다. 그만큼 리 시인에게 성장 가능성을 찾을 수 있었다는 얘기다.

 

그는 동국대학교 문화예술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뒤 <M2-9>우주시 동인으로 활동하는 시인이다.

 

리 시인은 "12년간 한 우물을 판 결과 이런 영예를 안게 되었다. 두고두고 사람 살리는 좋은 시를 쓰는 것으로 감사한 마음을 갚겠다. 앞으로 문단에 한 획을 긋는 좋은 시인으로 남기를 소망한다"고 당차게 수상소감을 밝혔다.

 

리 시인은 올해 '3회 오장환 신인문학상'을 수상한 뒤 '3회 이해조문학상''1회 하늘사랑문학상' 등을 잇달아 수상하며 기성문단에 뛰어들 채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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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부문 당선자

 

김상우 「데면데면」 외 5편
김희정 「전국보일러설비협회 지침」 외 7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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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기원  / 민경란

 

이것은 노아의 방주 이래 물의 연대기를 기록한 서

음감이 뛰어난 거인 하나 구름의 전신에 폭우의 음보를 그려 넣었다 한다

 

팔을 들어 폭풍의 도입부를 연주하자

지상의 모든 물줄기들이 자제력을 잃고 넘쳐흐르기 시작했다 한다

 

한 악장이 끝나자 지상의 체온이 상승했다 한다

다음 악장이 끝나자 '꽃이 피고 지고'라는 글귀가 사라졌다 한다

 

사람들의 표정이 우기로 가득 찼을 때

어제 헤어졌던 적도의 사내를 오후의 카페에서 다시 만날 지경이라 했다

'내 안의 침묵이 부서지고 있어 이 정도는, 눈물 한 점 떨어뜨린 것에 불과 해'라고

거인이 중얼거렸다 한다 

 

역류, 침하, 붕괴, 수몰을

표류하는 물위의 집에서 사람들이 나눠 쓰고 있었다 한다

 

어느 날, 누군가 해로부터 달려왔다 한다

자신을 거인의 옆에서 악보를 넘기던 페이지 터너*했다 다음 악장이 준비될 때까지

뉴턴의 사과를 심으라 했단다

 

그제야 꼭지가 떨어져 나간 우산 아래 옹송거리던 새들이

유실된 항로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한다

   

 

 * 페이지 터너 : 연주자의 옆에 앉아 악보를 넘겨주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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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 부문 당선자 - 박한라



■ 당선소감


 

병으로 인해 개미 다리조차 튼튼해 보이고 부러웠던 시절, 아무도 손을 내밀지 않을 때 오직 신과 시만 손을 건넸다. 이상했다. 약보다 시가 내 혈액을 돌아 나를 낫게 했다. 삶이란 이해되지 않으므로 오해할 수 있어 좋다. 그러므로 나는 시를 꾸준히 먹어야 오래 살 것 같다. 그리고 이제 나도 그 누구에게 처방을 받았듯이 더 큰 아픔을 주는 시의 처방을 내려주고 싶다. 아픔은 더 큰 아픔이 있을 때 낫는 것. 남의 불행이 나에게 씁쓸달콤한 감각으로 전이해오는 악마의 슬픔을 다 같이 누렸으면 좋겠다. 아니, 나에게도 그런 아픔이 있을 거라는 예지로 두려웠으면 좋겠다. 다른 말 필요 없이 진실로 시를 사랑하므로, 나는 시로서 계속 번식하고 진화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게 산소호흡기를 달아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깊게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그리고 1년 전 시를 포기하고 싶을 때 나를 붙잡아주시고 ‘너의 시 쓰기는 탁월하다. 그러니 자신을 굳게 믿어라’라고 믿음의 암시를 주신 김명인 선생님께 한없이 감사드린다. 처음으로 너는 시를 잘 쓴다고 인정해주신 이재무 시인님과 대학생 시절 내가 절망했을 때 따듯한 인간애로 상한 마음을 낫게 해주신 손택수 시인님께도 감사드린다. 글의 기반을 닦아주신 김완하 교수님과 정기철 교수님, 항상 믿어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한 부모님과 대학원 지도교수님이신 이혜원 교수님께도 깊은 감사드린다.

 


■  심사평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많았다. 자극적이고 말초적인 감각의 드라마와 미디어와 영상의 시대에 가려 시의 구심력이 사라져간다는 세간의 흉문에 상관없이 여전히 시를 그리워하고 시가 줄 수 있는 위안과 희망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응모작의 성향이나 시적 수위의 편차는 조금씩 다를 수 있어도 전체적으로 관통되어지는 신뢰가 있었다. 시가 기능할 수 있는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 해당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일을 이들은 자신의 삶속에서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총 500여 편을 검토한 후 최종적으로 압축되어 올라온 작품들은 <고양이 안테나> <붉은 기호의 행방> <누구나 갈비뼈에 몸을 묶고 산다> 였다.

민경란의 <붉은 기호의 행방>은 이미지가 활달하고 언어를 다루는 감각이 돋보이는 시였다. 하지만 자신이 대상을 통해 시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모호한 점이 아쉬었다. 좀 더 말하고 싶은 것을 뒤로 숨기고 정밀한 이미지로 집중한다면 새로운 시로 탄생할 거라고 믿는다.

이인호의 <누구나 갈비뼈에 몸을 묶고 산다>는 시어를 고르는 수준이 섬세하고 따뜻한 서정성이 돋보이는 시였다. 하지만 동봉한 다른 작품들 중에 상투적인 표현과 일상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진술들이 눈에 거슬렸다. 세계를 인식하는 통찰력과 함께 신인으로서 신선한 패기가 보태어진다면 좋은 시로 거듭날 것이라고 믿는다

박한라의 <고양이 안테나>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별 망설임이 없었다. 응모된 작품 중 눈에 띌 정도로 압도적인 작품이었다. <고양이 안테나>는 고양이털이 수신하는 주파수의 시적 발상이 신선했고 마지막까지 호흡을 놓치지 않고 시적으로 전개해 가는 완성도도 높은 작품이었다. "고양이는 털을 곧추세워 계절을 탄 바람의 끝자락을 강신호로 받아낸다" 같은 표현이나 "전파를 헤엄쳐 온 밤하늘의 음량이 점점 높아진다" 같은 시행은 숙련된 신뢰를 주었다. 응모한 다른 작품의 고른 수준 또한 이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시의 매혹을 아는 시인이라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멋진 결실을 얻을 것이라 여긴다.   

 

<심사위원 공광규, 김경주, 정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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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작가회의는 문예진흥기금 특별지원조건으로 확인서를 제출하라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요구를 거부하기로 전 회원의 뜻을 모아 결의하였습니다. 이 확인서에는 “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소속되었으나 실제 불법 시위에는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았음을 확인하며 향후 불법폭력시위 사실이 확인될 경우 보조금 반환은 물론 관련된 일체의 책임을 지겠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작가회의는 이러한 내용의 모욕적인 확인서 제출을 거부하고, 정부의 정책에 무조건 찬성할 것을 요구하며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지침에 강력히 항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한국작가회의에 대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10년 문예진흥기금 정기공모 사업 보조금 지원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었습니다.(2010년 문예진흥기금 공모에 선정된 사업 보조금은 3개 사업 3,400만원이고, 이 가운데 2,000만원이 『내일을 여는 작가』 발간에 배정되어 있습니다.) 이에 작가편집위원회는 비상편집회의를 열어 『내일을 여는 작가』의 발간을 잠정적으로 중단하기로 하고, 편집위원이 전원 사퇴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공지사항 아래글 "작가편집위원회에서 드리는 말씀" 참조)

[제10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공모]도 무기한 연기하기로 하였습니다. 아울러, 부득이하게 지금까지 접수된 응모작은 반환해 드리게 되었습니다. 『내일을 여는 작가』 발간이 정상화될 때까지 신인상은 공모하지 않습니다. [제10회 『내일을 여는 작가』 신인상 공모]에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신 예비문인 여러분께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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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물 외 4편 / 최옥자 

연잎 위에 고인 물방울에 거미 한 마리
갇혀 있다. 연잎의 먹이가 되어 허우적댄다
연잎은 먹이가 지칠 때가지 조용히 기다린다
거미의 비명은 물방울 밖으로 나가지 못한다
몇 겹의 그물 밖에 펼쳐진 여름의 고요에 가 닿지 못한다
기다림의 팽팽한 끝, 거미의 움직임이 느려진다
긴 다리를 쭉 뻗어 내리며 고개를 떨어뜨린다

햇빛이 물방울을 증발시킨다
물기 마른 연잎 위엔 죽어있는 거미
어느새 몸을 말리고
느긋한 여름 하늘 끝 거미줄을 친친 감고 있다
죽어서도 멈추지 않는
시방(十方)으로 뻗어나가는 저 생명의 모의(謀議),
죽은 어미 몸에서 새끼거미들이 빠져 나온다
아직 세상의 눈물을 맛보지 못한 몸이 투명하다
어미의 몸에 감긴 거미줄을 찾아낸
새끼거미들이 하나 둘
어미의 거미줄을 타고 연잎을 빠져나가
하늘로 하늘로 오르고 있다


죽지 않는 식욕 

활어가게에서 사온 고등어 등에서 집어등 불빛이 새어 나온다 한 사내의 주름 깊은 가슴이 바다의 기억인양 조명(照明)되고 있다
일렁이는 것들은 녹슬지 않는 것인지 아직도 싱싱한 시간들, 파도가 고등어 등에 바다의 기억을 새겨놓듯 물마루에 걸린 아내 얼굴이 사내의 가슴에 주름살을 만들고 있다

그물을 끌어 올릴수록 더욱 쏜살같이 내달리는 고등어 떼
힘을 주었다 풀어도, 아귀를 벗어나려 필사적인 고등어 위로
뭍으로 달아난 아내 얼굴이 겹쳐진다

여전히 누그러지지 않는 성깔들이 서로의 가슴에 생치기를 내는 저녁, 도마 위의 고등어가 파닥거리다가 숨을 놓는다
나는 얇게 저민 고등어 살을 꾸역꾸역 삼킨다

상처에 대한 호기심은 언제나 솔깃하다



도토리거위벌레의 시간 

마른 도토리가 두드린다. 갈참나무 그늘아래 펼쳐 놓은 초록빛 보자기 위로 대구루루 구르던 도토리 몇 알, 풋풋했던 여름날의 얘기가 저장된 껍질을 깨고 그대의 시간이 부화를 시작하는 중이다. 날선 칼로 싹둑 자른 듯 나뒹구는 갈참나무가지의 상처 만져보았는가, 도토리 속에 알을 낳고 어느 날 문득 생가지를 잘라 땅에 떨어뜨린다는 도토리거위벌레, 영문도 모르는 애벌레들은 지상의 제 집 한 채를 야금야금 파먹다가 겨울이 오면 새 집을 찾아 땅속으로 떠난다지. 그날 왜 도토리를 가져왔을까. 유리그릇에 담겨 내 방 앉은뱅이책상 위에서 겨울을 보낸 도토리, 가끔 흔들어 보았지만 유충은 보이지 않고 희미한 숨소리, 난 그대의 목소리가 도토리 속에서 잠자고 있다고 믿었다. 갈참나무가지를 잘라내던 도토리거위벌레의 시간처럼 그대가 얘기하던 57분 동안 지구의 자전 속도가 변하고 있었을까. 갈참나무에 등 기댄 그대 주위를 하루가 공전하고 있었다. 그날의 그대 목소리가 도토리 밖으로 나오고 있다. 그대가 얘기하는 동안 무심히 흘렀던 57분 동안의 말들은 성충이 되는 과정을 거쳐 내게 돌아온 것이다. 다시 태어난 도토리거위벌레가 어미와 똑같은 삶을 산다 할지라도 그 시간의 눈금들이 정말 같은 의미를 잦는 것일까. 누군가를 마음에 담는다는 것은 그런 것 아닐까요? 비록 그대 떠도는 곳 알 수 없지만 그대 목소리 힘들 때마다 도닥도닥 내 등 다독여주는데 그것으로 그대의 시간은 충분한 것 아니까요.



게거미*의 7월 

혜화역 3번 출구에 부는 바람은 뾰족하고 눅진해
그 바람 속에서 그녀가 달곰한 냄새를 피우고 있어
꽃잎에 오래 엎드려야 꽃이 되지
꽃잎이 되고서야 향기를 품지

향기도 그물이야
대학로의 풍경이 된, 그녀의 그물 안에는 시간들이
가위 바위 보를 하고 있어
10시가 이기든 오후 3시가 이기든 마찬가지야
아이 업은 포대기 연신 뽀얀 젖으로 적시며 그녀,
그저 하루를 구워갈 뿐이야

국자에 설탕을 녹여, 소다를 섞어, 부글부글
그녀처럼 끓어올라
철판에 붓고 누름판으로 누르면 달고나 달달달달 달고나
노릇노릇 익은 그녀가 별모양을 새기지
7월의 햇볕이 날카롭게 보도블록에 꽂혀 가
아이 입에 젖을 물리도 그늘은 오지 않아
그물 사이를 빠져나가는 시선들이 가시처럼 박혀 가

그녀가 잠시 졸고 있는 사이 낮별들이 떴어
북두칠성이 자꾸만 별들을 만들어내 방금 태어난 게자리별이
집게발 들어 바람의 모서리를 잘라내
북극성 향해 옆걸음질 쳐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은 사라지지
흔적 없는 그녀의 남편도 저 북극성을 보았을까
오늘도 그녀의 그물 안에는 기다림만 가득하지

* 거미줄을 치지 않고 꽃그늘에 숨에 먹이를 잡으며 게처럼 옆으로 걷는 거미



 펠릿Pellet*

새들은 소화기관을 단순화시켜 몸무게를 줄인다지. 통째로 삼켜 소화되지 않는 먹이의 뼈와 털을 부리를 통해 뱉어낸다지.

융화되지 못하는 단어들이 떠다니는 퍼즐 위로 흰눈썹황금새 한 마리 내려앉는다. 햇살을 삼켰다 내뱉듯 부리를 크게 벌리고 목울대 울컥, 단전 깊은 곳에서 끌어낸 문장의 찌꺼기 뱉어낸다. 귀퉁이들이 떨어져나간 단어 조각들이 삭이다만 문장부호들이 엉겨있다. 바람의 행간에서 지혜를 구해야 하는 삶의 단애, 부득이한 선택이 진화로 이어지고 진리가 지구 밖으로 알려지는 이 순간에도 나는 퍼즐에 매달린다. 내가 배운 유일한 문장은 부패되고 쓸모없어진 지 오래, 퍼즐의 완성을 꿈꾸며 흰눈썹황금새가 뱉어놓은 문장의 찌꺼기 헤집어 보았는데, 넓적사슴벌레 하늘소 풍뎅이의 등껍질조각들, 매미 나비의 날개조각들, 나는 낱말조각들을 그러모은다. 내가 믿은 진실의 팔 할은 거짓말, 암기를 끝내기도 전에 과거가 되어버리는 문자에 밀려 늘 변두리에서 오그라지고 있는 내가 오늘도 퍼즐 위에 토해내는 시 한 줄 









■ 심사평

이번 신인상 시 부문 응모자는 120여 명에 달했다. 응모작의 전반적인 경향은 제 나름대로 개성적인 어법과 섬세한 표현감각을 지니고는 있으나, 너무 말이 많고 사변적이어서 마치 소설의 한 대목을 읽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그만큼 복잡다단하고 최근의 시적 경향 또한 이를 부추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시와 삶의 진정성이 배제된 이러한 흐름은 혼란만 부추길 뿐 결코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러는 중에서도 본심에 오른 고은희, 최옥자, 김혜숙, 안병호, 서근희, 안정윤, 윤범일의 시들은 기성시인들과는 다른 자기만의 개성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최옥자의 「그물」, 고은희의 「맨발의 표정」, 김혜숙의 「소리집 풍경」, 안병호의 「뼈」, 서근희의 「茶飯事」, 안정윤의 「툰드라 산 19번지」, 윤범일의 「호떡주의자에게」 등은 대상을 형상화하는 솜씨와 신선한 표현이 심사위원들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러나 안병호의 경우 가족사나 가난의 소재를 다루되 너무 길다는 점에서, 윤범일의 경우 표현의 묘미에만 주력할 뿐 주제의식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먼저 제외되었다. 남은 세 사람의 시들은 막상막하여서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주로 생태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김혜숙은 “주인이 없어 지나가는 햇볕이 문을 열어주던 트라이앵글 꽃밭”(「트라이앵글 꽃밭」) 같은 빛나는 표현감각과 “붉고 뜨거운 불의 핏물을 다 빼내야 소리의 집이 된다는데”(「소리의 집」) 같은 대상에 대한 깊이를 겸비하고 있다. 그러나 다소 주관적이고 불명확한 진술이 마음에 걸렸다. 주로 태생지인 강원도에서의 자기 체험적 요소를 시적 소재로 끌어들이고 있는 고은희는 짧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단호한 어법을 거느린 독특한 문체, 비극적인 서사를 잘 갈무리한 솜씨 등 이번 응모자 중에서 솔직히 가장 발군이었다. 그래서 끝까지 심사위원들과 격론을 벌였다. 다만, 「꽝꽝나무 아버지」 같은 경우 너무 긴 가족사를 압축적으로 표현하려다 보니 다소 주관적 표현 위주인데다가 구체성이 떨어지지 않느냐는 지적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쉽지만 고은희의 시적 가능성에 계속 주목하기로 하였음을 밝힌다. 당선자로 뽑은 최옥자의 시들은 주로 모성애를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데, 섬세한 관찰력과 묘사력 그리고 주제의식이 명확한 게 특장이다. 게다가 언어의 운용이 뛰어나고 「게거미의 7월」처럼 표현의 재미까지 곁들이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기의 생활체험을 시적 진정성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는 점을 높이 샀다. 그러나 시적 완결성 차원에서 아직 미숙한 점도 있음을 아울러 밝힌다. 부디 당선에 취해 자만하지 말고 「팰릿」의 새처럼 좋은 시를 부지런히 토해내어 주목 받는 시인이 되길 바란다.

< 심사위원 : 최두석, 김선태(글), 공광규, 고 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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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닫이 외 4편 / 정진혁

 

도시의 산동네가 낯선 서산댁은

낡은 반닫이 문을 연다

바다가 펼쳐지며 먼 갯벌에서 불어온 비린내가

온 방안을 적신다

서산댁은 맑은 눈으로 바다를 뒤져

뭔가를 꺼내고 있다

길게 비벼온 생의 자국들이 시커멓게 눈을 뜬다

갯벌에서 막 나온 낙지의 발이 지난 기억처럼

반닫이 밖으로 삐져나오고 있다

한참을 뒤지다 찾고 있는 것을 잊은 듯

미동 없는 짐승이 되어

세월처럼 쭈그리고 앉아 있다

남편이 간 물길을 쳐다보는 것일까

집채만 한 파도가 일렁인다

거기 황혼의 빛이 있고

죽어라 갯벌 속을 긁어대던 호미소리며

굴 까던 시린 손이

조개국물 같은 진한 슬픔을 찾는 것인가

생의 비릿함에 문을 연 것은 아닐 터

먼저 보낸 남편의 따듯한 손길이 배인 옷 한 벌이며

갯벌 속을 헤매며 입던 후줄근한 몸빼바지

몇 벌 꺼낸다

이고 지고 살아온 보따리가 어지럽다

낙지며 소라 바지락 맛조개

보이는 것만을 믿고 잡아 올리던 손이

그 어디를 뒤져도 헛손질이다

살다보면 그런 게 있다

어디서부터 느릿느릿 걸어 나오는 것인지

도대체 잡을 수 없는

낮잠 같은

반닫이 속을 다 비우고도 찾을 수 없는

통곡 같은

시커먼 갯벌 속에서

찾을 것이 더 있다는 듯

서산댁은 쉽게 문을 닫지 못하고

그녀의 몸이 점점 갯벌 속에 잠긴다

 

 

 

 

 

바람 부는 날

 

반쯤 내용을 잃어버린 바람이 불고 있다

연둣빛 테이프에 붙어 날리는 하얀 종이

男시다 모집에서 力(역)시다만 남은

길 잃은 개의 사진에 개꼬리만 남은

회생이 없는 파산만 남은

빌라월세 있음이 어울리는 옹색한 글자들이

너덜너덜 전봇대에 붙어 나부끼고 있다

지나는 행인들은 글자에 담긴

밑바닥을 아는지 모르는지

침묵이 지나가고

찢겨진 글자들은 세상이 궁금해

몇 안 되는 언어로 소리를 지르면

생의 모서리에 달라붙어 숨을 조이는

연둣빛 테이프가 손에 힘을 준다

한낮의 전봇대는

그저 그림자만 낳고 생각에 잠겨 있다

바람이 불수록 기억할 것이 있다는 듯

파다다닥 한낮을 깨우는 초라한 소리 깊어 가는데

아직 닿아야 할 길을 비틀거리는 발걸음에 가두고

생을 반쯤 잃어버린 사내가

전봇대의 양쪽 어깨를 잡더니

머리를 처박으며 마구 흔들어 댄다

검게 탄 목덜미가 울렁이며 헐렁한 바지가 펄럭인다

그의 손이 연둣빛이 되어 전봇대에 달라붙는다

반쯤 내용을 잃은 바람이 소리소리 지른다

길 잃은 사내가

회생이 불가능한 사내가

개꼬리만한 가난을 숨기지 못하고

바람에 숨차게 흔들리고 있다

 

 

 

 

수도배관

 

너를 만나기 위해 나를 깎는다

거칠게 일어나는 쇠의 소리 앞에서

너를 향한 길을 연다

세월로 깊어지는 골짜기 만나기 위해

만나서 이어지고 상처 아물어

눈물 하나 흘리지 않고 흐르기 위해

막막한 산 속에서

꼭대기와 꼭대기가 이어지는

하얗게 빛나는 나사산 정상에서

날카로운 쇠의 냄새 앞에서

밋밋한 시간의 틈에 앉아 둥글둥글 살아온 삶을

그늘진 마음만큼 깎아낸다

어디선가 꾸르륵 이어져가야 할 소리 들린다

나사 절삭기 앞에서

이편에서 건너편으로 가기 위해

삽입길이를 확인하고

기억을 정리하는 중이다

오래 나를 따라다닌 그리움이 나사산을 센다

하나 둘 셋……

날카로운 비명소리

그 소리 따라 걷다보면

어느새 나를 축축하게 적시는 너

깎이는 아픔이 커서 열이 나고 단내가 나더라도

내게서 너에게로 가는 거친 마음에 기름이 흘러

아픔을 식힌다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를 테프론으로 감는다

아픔 새나가지 않도록 하얗게 감는다

네 몸속으로 들어간다

새롭게 난 길

수도꼭지를 틀자

내 생의 내면을 가로지르며

쏟아지는 물소리

 

 

 

 

신경치료

 

생의 옷자락이 너덜거린다

구석에서 구석으로 몰리며

질기고 딱딱한 삶을 씹어대다

귀퉁이가 깨지고 금이 간 사내는

삶에 바람이 드는 것을 시리게 아파한다

가장 위험한 이빨이라고 의사는 입속을 뒤진다

신경을 죽이는 그의 손에

지난 시간의 푸르고 시린 기억이 지워지고 있다

단단히 뿌리를 박고

억센 가시도 씹어대던 당찬 맞물림이

이를 갈아대는 기계소리와 신경을 긁어대는 세상 인심에

무표정으로 죽어가고 있다

한때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사내는

꿈속에 길게 뿌리를 뻗는 죽은 신경의 끈을 잡고

이제 역이든 공원이든 어디에서도 잘 수 있다

사내의 헝클어진 머리 모양은

사내의 옷차림은

이미 신경치료가 끝났다

이빨 모양을 본떠 금 간 삶을 덮어 씌어야 한다

투구처럼 반짝이는 생기가

깨진 생을 감싸 안는다

다른 재질로 다른 빛깔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어금니 옆에서 반짝인다

지녀온 삶의 각도를 다시 조정해보는 거다

바람이 분다

바람은 한낮의 거리에 잠들어 있는

술 냄새 풍기는 사내를

시리게 하지 못하고 비껴간다

사람들은 모두 그러려니 치부하고 있다

그 방치의 일부분에

신경이 죽은 이빨이 침묵하고 있다

 

 

 

 

어둠의 집

 

고구마 상자를 열자

지난 여름의 햇살이 꿈틀대고 있었다

살아갈 날들이 뿌리 없는 줄기에 매달려 있었다

보이는 것만을 믿어 온 나는 죄인이었다

발자국도 없이 걸은 길이

어둠 속에서도 파랗게 엉켜 있었다

그들이 찾아낸 빛

네 귀퉁이 틈으로 줄기가 발을 뻗었다

뻗어 나가지 못하는 시간을 밀어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한 틈으로

손을 내민 마음

상자 안을 온통 지탱하고 있었다

마당이 없이 방 하나가 전부인 집

수원시 북수동 273번지

등짝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곳

벽에서 언제나 어둠의 냄새가 묻어나던 집

일곱 켤레의 신발이 쉴 곳을 찾지 못해

아무렇게나 뒹굴던 집

창이 없는 집

밤이면 내 누울 자리

아버지 너무 답답해요 창이라도 하나 내요

아버지는 소리로 벽을 밀어보다가

방문 앞에 상자를 깔고 한뎃잠을 주무셨다

온종일 자전거 페달을 밟던 다리를 웅크리고

상자 위에서 주무시는 아버지

어둠의 집을 지탱하며

가난의 틈을 비집느라 자꾸 말라가고 있었다

물기하나 없이 줄기를 키우는 고구마 안에

아버지를 먹고 자라던 수척한 기억이 새겨 있었다

 

 

 

 

 

심사평

 

일백여 명에 가까운 응모자 가운데 본심에 올려놓은 임혜진, 정진혁, 권지현, 하얀, 고민교, 서로, 임태경, 전은영, 황인산, 최정하, 이설야, 김나래의 시들은 기성 시단과 다른 나름대로의 개성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서로의 <신상명세서>, 임태경의 <현대인의 생활백서>, 하얀의 <메어리 포핀즈의 초대>, 임혜진의 <머리카락이 길 때쯤엔> 등은 읽기의 재미와 신선함을 주었다. 그 가운데 임혜진의 시들은 전편이 고른 수준이라는 인상을 주어 한참동안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들 시의 문장들이 어쩐지 생활 경험과 충분히 손잡고 있지 않다는 느낌이 들어 당선의 대상에서 먼저 내려놓았다. 황인산의 작품들은 생활 경험과 감정을 시원시원하게 진술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었으나 여운이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남는 작품들이다. 마지막에 남은 정진혁의 시들은 폭넓은 제재로 화자의 현장을 잘 붙잡고 있었다. 또 모든 시편을 긴 호흡으로 무리 없이 소화하고 있었다. 정진혁의 시에 등장하는 인물과 제재는 “방 하나가 전부인 집”이며, “전봇대에 붙은 구인광고”이고, 수도배관과 치과의 신경치료를 하면서 얻은 삶의 은유이다. <반닫이>에서는 도시 산동네로 와서 사는 바닷가의 인물이 반닫이 문을 열면서 바다로 향하는 상상과 기억의 진술이 자연스럽다. 남편을 일찍 여읜 인물의 갯벌 노동과 “조갯국물 같은 진한 슬픔”과 “생의 비릿함”이 시 전체 어조와도 잘 어울린다. 몇 편에 보이는 이런 시의 진술과 구성 능력을 높이 사서 당선작으로 뽑았다.

 

- 심사위원 : 공광규(글), 김선태, 고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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뻘밭 외 5편 / 이용헌 

방글라데시에서 왔다고 했다
물음표 모양의 쇠갈고리를 들고
폐지뭉치를 퍽퍽 찔러대는 그의 오른손은
의문투성이다

다섯 손가락 중 세 개는 보이지 않았다
남은 두 개는 엄지와 검지뿐이었다
검은 눈썹 아래 짙푸른 눈망울을 끔뻑이며
온종일 1톤 트럭에 폐지를 싣는 그의 손놀림은
뻘밭을 기어가는 게발 같았다

끼니때마다 그의 왼손에는 바다가 들려 있었다
그가 마른기침을 할 때마다 파도는 넘실거렸다
가끔은 은빛 숟가락을 입에 문 게발이
펄펄 끓는 순두부 사발에 꼼지락거리다가
땡그랑 댕댕, 나동그라지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붉은 노을이 제본소 바닥에 흩어졌다

모르겠어요 이제는 맵지 않아요
그의 혀끝은 이미 바다 건너 두고 온 맛과 키스와
달콤한 모국어를 잃어버렸다
세 개의 손가락이 잘려나간 이후
그는 더 이상 아내에게 편지를 쓰지 않는다고 했다

그의 고향은 방글라데시,
인도양의 푸른 파도가 제본기의 책갈피처럼
펄럭이며 밀려올 때면
그는 공장 한 귀퉁이 폐지뭉치 위에서
낡은 지도책을 펴놓고
엄지와 검지로 바다의 거리를 재기도 하였다



바다의 문장 

‘ㅡ’모음 하나뿐인 속초 앞바다가 진종일 시를 쓰고 있네. 수평선 가득 떠도는 비문非文을 처얼썩철썩 후려치며 온몸으로 시를 쓰고 있네. 달랑 남은 백사장 위에 천 번도 더 썼다 지우는 시, 밀었다 두드렸다 밤새 퇴고推敲를 해도 끝내 한 행을 넘지 못하네. ‘ㅡ’ 아득도 하다는 듯 ‘ㅡ’ 깊기도 하다는 듯, 달빛은 자꾸 허연 지우개가루를 뱉어내네. 철퍼덕철퍼덕 앉았다 누웠다 파도는 빈 종이만 구겨 던지네. 생각하매 나 태어난 생生의 바다도 ‘ㅡ’모음 하나였네. ‘ㅡ’모음으로 누워 젖을 빨고 ‘ㅡ’모음 하나로 옹알이를 하였네. 모음에 자음을 더하거나 자음에 모음을 더하기까지는 무수한 입술들이 스쳐갔네. 행과 행을 넘어 행간을 짚기까지는 아직도 숱한 눈과 귀를 훔쳐야 하네. 태초의 문장은 모음 하나, 속초 앞바다가 온몸으로 태초의 말씀을 풀고 계시네. 까마득한 수평선 위로 낯익은 자음들이 날아가네. 




좌판 스크린  

진눈깨비 날리는 중부시장, 명란젓을 팔던 노파가 졸고 있다
갯지렁이처럼 불거진 손등을 무릎에 포갠 채
꼬무락꼬무락 바다의 밑바닥으로 가라앉고 있다
물너울 넘실대던 흥남 앞바다로 가는 것일까

스무 살 저편 그녀는 바다를 건너는 게 꿈이었다
한 뙈기 밭두렁에 눌러 붙은 열두 식구의 목구멍은
아버지의 그물질에 달려 있었다
망망창창 아침 바다는 매양 날것으로 반짝였으나
배가 고파요 어머니,
어느 해 겨울부터 어머닌 아버지를 깨우지 않았다

개마고원을 넘어온 높바람이 밤배를 밀던 밤
물살을 가르는 그녀의 등줄기에는 지느러미가 돋고 있었다
아버지의 그물 속에서 팔딱이던 눈 퀭한 생선처럼
그녀의 눈동자엔 물거품이 일었다 지고
꿈을 짚던 관자놀이엔 아가미가 벌쭉거리고 있었다

낯선 포구의 밤이 흐르는 건 시간 문제였다
탱탱한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뭇 사내의 알을 배는 일뿐이었다
밤마다 등지느러미를 흔들며 젖은 옷고름을 풀어헤치면
그리움의 자손들이 치어 떼처럼 몰려 왔다
자줏빛 젖꼭지가 퉁퉁 불어 있는 날들이 늘어갔다
그녀는 밤새 낳았던 알을 노을에 절이며 울었다

명란젓이요 명란,
길모퉁이를 도는 바람이 비닐천막의 치마폭을 걷어올리자
한 무리의 명태 떼가 흥남 앞바다를 가르며 달아난다
화들짝 놀란 그녀의 고쟁이 속에서 후훅, 갯내음이 쏟아진다 




너의 나무였다  

하늘 아래 와지직 찌그러지고 싶을 때가 있다
단 한 번 너에게 몸을 허락하고
무참히 던져져 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물을 담으면 물이 되고 술을 담으면 술이 되고
내 온전히 네 것으로 되는 길은 아득하나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꼭 한 번 몸을 열어 촉촉해지고 싶은 날이 있다
처음부터 나의 생生은
네 목울대 근처를 서성이는 목마른 나무였거나
차마 혀와 입술로 해갈하지 못한
또 다른 고백을 받아 적는 순백의 종이였거니
수천 수만의 꿈 잘리고 말리다가
끝내는 마음까지 척, 비어버린 종이컵이 되었다

알아?
단지 네 입술이 몸에 닿는 순간 미련 없이 열반하는 나 




방하착放下着*                          

백병원 영안실 앞마당, 잿비둘기 한 마리가 언 땅을 찍고 있다
채송화 줄기처럼 연붉은 발가락을 바짓단 밖으로 내놓고

불광동 옥탑방에 세 들어 살던 비둘기가
탑골공원에 나가는 일은 일과 아닌 일과였다
3호선을 따라 무악재를 넘어 종로3가에 이르는 길은
그가 기억해야 하는 유일한 항로였다
기껏해야 빵부스러기로 끼니를 때우는 노후지만
척신隻身의 그에게도 날개는 있었다
장기판을 거들거나 사물패를 따르다가도 그는 훌쩍
하늘로 오를 수 있었다
가진 것이 많을수록 높이 날 수 없다는 것, 그에게는
적빈赤貧이 곧 자유였다

방하착放下着을 아시나요?
날개가 점점 무거워져요
더 이상 내려놓을 것도 없는 나이에 그는 그녀를 만났다
창공의 편대에서 떨어져 나온 은빛 비행기처럼 희디흰
그녀의 처소는 달비듬만 내려앉는 공원벤치라 했다
한때는 축포소리에 맞춰 수없이 하늘로 솟아올랐다는 그녀는
어느 날부터 날갯짓을 하지 못했다
누구 하나 속깃을 씻겨주는 이도 없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곤 싸구려 밥집을 기웃거리거나
근처 낙원떡집 앞을 서성이거나 가끔은 넋 나간 기억으로
도로를 무단횡단 하는 것이었다

출근길 신호대기 중 횡단보도 너머로 본 그것,
희뿌연 아스팔트 위에 채송화 꽃물 붉었던 그 자리,
오늘 그녀는 이승의 마지막으로 방하착을 알고 갔을까

모가지가 댕강댕강 잘려나간 가로수들이 조문행렬로 서 있는
마른내길 영안실 앞마당,
잿비둘기 한 마리 등솔기를 들썩이며 곡哭을 하고 있다

* 방하착(放下着):일체의 집착이나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의 불교용어


 

 



금성가구 

  작업실 문을 나설 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막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던 내가 마침 금성가구점 앞에 멈춰 서게 되리라고는, 가랑비가 굵어지지만 않았어도 몰랐을 것이다. 가방 속에서 접이우산을 꺼내 펼치려다 우연히 그 집 유리창 안을 훔쳐보게 되리라고는,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내가 그쪽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쪽이 나에게 보여준 셈이었지만 여하튼 달빛은 이미 허옇게 내뱉은 혼령을 거두어 가고 버즘나무 이파리가 상두꾼을 대신하여 땅을 치던 밤이었다. 어둑한 보도 위에는 진종일 밟힌 시간들이 오와 열을 맞춘 채 쓰러져 있었고 나는 늦은 문상을 끝내듯 저벅저벅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때 통유리 너머로 괭이눈처럼 반짝이는 것들이 보였다. 입술과 입술이 움직이는 것 같기도 했고 눈동자와 눈동자가 서로를 탐조하는 것 같기도 하였다. 처음엔 건너편의 네온등이 딸꾹질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본 그들은 분명 쌍쌍이 궁둥이를 포개고 있었고 번들거리는 대리석 위에서 떼를 지어 교접하고 있었다. 어둠 속 의자들이 밤마다 은밀하게 열락을 즐기는 것은 어쩌면 공공연한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금성가구를 지날 때마다 금성으로 가는 꿈을 꾸곤 했었다. 가끔은 유년에 즐겨 듣던 트랜지스터라디오도 떠올렸지만 어느 날부터 흘러간 노래 같은 건 가슴에 남겨두지 않기로 했다. 과거를 소멸시키며 가앙가앙 우주로 멀어져 가는 일은 풍구질을 뿌리치고 날아가는 쥐불깡통처럼 뜨겁고 아뜩하였으나 정말이지 한순간에 지상을 떠난다는 것은 얼마나 환상적인가. 허나 금성으로 가는 길은 겨우 사거리 신호등 앞에서 멈추곤 했었다.

오늘도 금성가구 앞에는 색색의 의자들이 늘어 서 있다. 아니 앉아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들은 부뚜막의 고양이처럼 다소곳이 앉아 손님을 기다리거나 페르시안 고양이마냥 무료한 하품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낮 동안의 의자들은 청량리나 미아리의 여자들처럼 암고양이 소리를 내거나 절대 다리를 꼬고 앉는 법이 없다. 이제 금성가구 안에 또 하나의 금성이 있다는 건 내 마음 안에 또 하나의 내 마음이 있는 것처럼 더 이상 비밀이 아니다.


 

 

 

 


[심사평] 현실을 포착하는 힘있는 언어

예년에 비해 응모작이 적었지만,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 작품이 많았다. 오랜 기간 작품을 써 온 흔적이 역력한 작품도 많이 눈에 띄었다. 민족문학작가회의 기관지라는 점을 의식해서인지 노동과 일상을 서정적 시선으로 포착하고 그려내는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 중에는 제법 안정적인 시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분들도 있었다. 그러나 심사위원들을 한숨짓게 만든 것은, 고민 없는 서정과 치열한 가치가 보이지 않는 노동, 사소하기만 한 일상의 풍경이었다. 매끄럽고 안정적인 언어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런 것들을 극복하고 나를 둘러싼 거대한 세계와 대면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튼튼한 언어를 창조해야 한다.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남은 이들은 송부선, 신호승, 이설야, 심진숙, 이용헌 등 5명이었다.

송부선 씨의 작품들은 안정적인 서정적 언어를 구사하고 있음에도, 전체적으로 진부한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호승 씨의 작품들은 개성적인 언어와 리듬이 눈에 띄었지만, 군더더기가 많았다. 이설야 씨의 작품들은 대체로 유년의 풍경을 남다른 시각으로 그려내는 데 성공하고 있지만, 습작기에서 흔히 나타나는 수사에 대한 욕망을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심진숙 씨와 이용헌 씨의 작품들을 놓고 마지막까지 고민했다.
심진숙 씨는 환상과 현실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안정적인 시세계를 보여주었다. 「내 꽃신, 초록물뱀」「파라핀으로 만든 아버지」 같은 작품은 그의 환상이 구체적인 현실의 고통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확신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응모작들에 소품이 많고, 형식에 치중하다 보니 진정성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점은 그의 단점이었다.
이용헌 씨는 현실을 포착하는 시선에 만만찮은 깊이와 진정성을 지니고 있었다. 무엇보다 시를 이끌어가는 힘 있는 언어가 그의 장점이었다. 작품마다 편차가 있고, 거친 부분도 없지 않았지만, 우리는 그의 진정성과 힘 있는 언어에 힘을 실어주기로 했다. 더욱 정진하길 바란다.

심사위원 : 안상학. 김근.


[당선소감]

꿈속에서도 시를 썼다. 때로는 깜깜하고 때로는 눈부신 무언가가 나를 끌고 다녔다. 몽유(夢遊)의 행려처럼 하릴없이 곤고한 나를 인도하고 지배하는 내 안의 교주는 시공을 넘나드는 시마(詩魔)였다. 눈을 뜨면 쪽창에 걸린 새벽별이 예언의 묵시처럼 가물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사이비 신도(信徒), 시시종종 시를 욕보이고 구구절절 문학을 배반하기 일쑤였다. 고백컨대 나는 아직도 사무사(思無邪)의 근처에도 이르지 못했다. 평생을 시인 흉내만 내다가 자취도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그러함에도 시는 나에게 절망이자 곧 희망이다. 비루한 현실에서 절망을 구걸 없이 살려낼 수 있는 것은 시의 힘을 빌리는 일뿐이었다. 궁극적으로 절망의 밑바닥에는 생과 사의 양단(兩端)만이 존재한다. 생을 버리지 않는 한 선택의 여지는 희망 쪽이다. 그 희망 쪽에 목숨을 걸게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절망과 슬픔들이었다. 나는 그것을 슬픔의 미학이라 부르고 싶다. 문학은 결국 상처와 결핍의 이야기며 행복을 꿈꾸는 사람의 이야기임을 믿는다. 그러기에 나는 사람 냄새가 나는 시를 쓰고 싶다. 할 수만 있다면 세상의 모든 악다구니와 하늘의 말씀을 등에 짊어지고도 달팽이처럼 유유히 사유의 늪을 기어가고 싶다. 이제 시를 잃고 흘러간 과거는 나의 이력에서 지울 것이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뒤에서 힘이 되어준 풀밭 동인들, 특히 문학에 대한 열정만 믿고 노심초사 조언을 아끼지 않은 선배 시인들께 고마움을 전하며, 부족한 글을 영광스러운 자리에 올려주신 심사위원님께도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 또한 늦깎이로 다시 출발하는 나를 묵묵히 응원해준 여러 벗들과 광은, 채은 두 아이와도 이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다. 시작은 이제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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