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시작신인상 당선작] 최원 차성환
마른 잠 외 4편 / 최원
천년 묵은 뱀은 팔다리가 생기고 귀가 자라고
사람처럼 말도 한다는데
뱀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다
목줄기에 차곡차곡 빛이 쌓인다
한 손에 잡고 있는 푸른 술병
항온동물로서 여름 햇살을 온전히 받으며
생의 일부가 삭제되는 중이다
뱀은 밟는 것이 아니다
뱀은 죽이는 것이 아니다
뱀은 발을 구르고 주문을 외우며 몰아내야 하는
멸시의 동물이 아니다
뱀은 그냥 뱀이어서 살다 보면 돌돌 말릴 일도 있으므로
머리와 꼬리가 맞닿은 잠
시작과 끝을 구분할 수 없는 잠의 머리맡에서
한낮이 발효되는 것이다
한때 우리에게는 궁극이라 불리는
아름답게 독기 서린 꼬리가 있었고
태양의 밀어를 해석하는 귀가 있었고
나무의 그림자는 이쪽에서 저쪽으로
부드럽게 얼굴을 쓸고 지나갔다
늙은 유두 같은 꼬리를 물고
꾸는 꿈은 무르다
쉽게 부스러지는 꿈의 밖에서
오후의 느린 햇살이 어깨를 누른다
누구에게나 일몰이 올 것이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끌고
인파 속으로 흘러드는 그의 뒤에서
하루가 짧은 얼굴을 풀어 놓는다
앵두나무 맞은편
연탄 화로 둘레에 세 중노인 매일 앉아 있다
골목길 건너 담장 밖으로
앵두가 빨갛게 익었다
페인트 벗겨진 담벼락마다
재개발 공고문이 너덜거리는 이 동네에서
꽃이 피기 전부터 열매가 익을 때까지
한 무리 새처럼
그들은 같은 얘기만 한다
달궈진 석쇠 위에 알밤 몇 개
어제는 찬성 둘 반대 하나
오늘은 찬성 하나 반대 둘
그런 걸 변심이라 하는데 내 맘 나도 모르겠다며
자진처럼 벌주를 마시는 걸 변명이라 하는데
찬반의 주장들이 귀 떨어진 밤처럼 피식피식 익어 갈 때
안주가 익기를 기다리는 그들은
때론 아군으로 때론 적군으로
변심과 변명을 데워진 혈액처럼 순환시킨다
떨어진 앵두를 주워 술잔에 담근다 그런 게 있다
술잔에 빠지면 커 보이는 앵두처럼
붉고 둥근 것은 달콤할 것이라는 오래된 인식처럼
식어 가는 화로 위에 부풀어 오르는 저녁
잔이 채워졌다 비워졌다 한다
앵두가 커 보였다 작아 보였다 한다
먹을 수도 먹지 않을 수도 없는
붉고 둥글고 말랑거리는 것이
술잔 속에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한다
입술에 닿았다 떨어졌다 한다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
우리는 회현동의 오래된 삼류 호텔 술집에 함께 있었다 명신과 나는 술을 나르고 미주는 술을 따랐다 아진은 미주의 옆자리에서 사내들에게 쉽게 가슴을 꺼내 보이던 여자 미주는 아름다운 구슬처럼 화장한 검은 눈이 도도한 여자 그런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사내는 없을 것이므로 미주가 지나칠 때 이는 바람 앞에서 명신과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곤 했다 그것이 그녀의 영혼이라고 생각했던 명신은 언제부턴가 미주의 앞에서 말을 쉽게 잊었다 미주는 많은 사내들이 찾는 여자였으므로 취한 메뚜기처럼 룸을 옮겨 다니곤 했는데, 그러다 사내들에게 들키곤 했는데, 명신은 미주 대신 따귀를 맞았고 미주는 호텔 룸 키를 들고 사내와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날 술집에서 명신은 마른 화초처럼 취했다 어릴수록 흔한 일에 분노했고 명신은 그것이 사랑이라고 믿었다 막 전역한 명신은 눈이 붉은 사내 미주와 아진을 꼬드겨 질척하게 놀아 볼까 반쪽짜리 농을 치던 나를 노려볼 때도 복학할 때까지만이라고 더듬더듬 말할 때도 그랬다 그러는 사이에도 사내들은 미주를 사랑했을 것이다 하룻밤 사랑하고 한동안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고 다시 하룻밤 사랑하고 긴 시간 잊곤 하며 시간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몇 년 후 명신은 지하철 기관사가 됐다고 마지막 전화를 했다 그렇게 흘러가던 시간의 끝인 어느 아침 출근길 미주를 본 것이다 내가 열차에서 내리고 반대 방향에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어두워지면 모이고 해 뜰 무렵 헤어지던 시절의 기억은 그렇게 시작되는 것이다 그 원숙한 여인은 미주였을 것이다 찌익찌익 옷상자에 박스테이프 붙이는 소리가 먼지처럼 매캐하던 회현동의 지하철역이었으므로 미주여야 했다 명신 또한 그 시각 뜨거운 바람을 몰고 들어오던 열차의 운전석에서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고 있었고 아직 열차가 움직이고 있었지만 한눈에 알아봤어야 하는 것이다 한 시절의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듯, 어둠 속을 달리던 명신에게 인파 속에서도 그 시절의 사랑을 단번에 찾아내는 것은 의무였을 것이다 그날 거기에 미주가 있었고 내가 미주를 봤으며 명신도 미주를 봤어야 하는 것이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내리고 타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을 시간이라는 말을 뼈저리게 공감하며 명신의 붉은 눈은 미주를 움켜쥐고 있어야 한다 나와 아진, 그리고 낡은 술집에서의 한때를 기억해 냈어야 한다 그 시절의 표정으로 문 닫는 것을 잠깐 잊어도 좋았을 것이나 명신은 미주를 향한 욕망 혹은 채우지 못한 욕정 대신 자신만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를 떠올리며 열차를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운행은 순조로울 것이고 명신은 조금은 들뜬 그러나 중년의 목소리로 차내 방송을 했을 것이다 문 닫습니다 열차 출발합니다 이 열차는 당고개를 출발하여 오이도까지 가는 열차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니다, 특별한 날의 특별한 방송을 중년의 명신은 했을 것이다 지하를 벗어나 중천을 향해 서서히 기어오르는 태양빛 가득한 지상을 언덕을 지나 평지로 때론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흰 구름의 동쪽에서 노을 짙은 서쪽으로 나아가는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바랄 법한 생을 빗댄 방송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랬어야 한다 그러므로 바쁜 출근길 말 없는 사람들이 생은 어찌 됐건 해피엔딩이라고 믿으며 출근 도장을 찍을 것이고 하루를 또다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모두가 바라듯 해피엔딩이어야 한다 그것이 내가 이 상투적인 이야기를 써 나가는 이유이지 않은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의 가볍게 쥔 주먹에서 사연의 모래가 유행가처럼 흘러내려 세상은 뿌연 삶의 색이다
안개의 긴 이름
마흔 살에도 한 편의 시 같은 연애를 할 수 있을까 인구의 절반은 여자 나는 애인도 없고 아내도 없고 아이도 없으므로 바닥을 친 인간 어쩌면 지금이 바닥
얼굴이 붉어지도록 부끄럽던 날 꽃을 꺾어 팽개치던 날 시와 연애 중입니다 고개를 돌리고 고백하던 그날
집으로 돌아와 2연과 3연 사이 의미와 무의미가 혼재된 나의 문장들 사이에 검은 털이 무성한 음부를 그려 넣었습니다 내 모든 시들은 4연 16행
쎈타를 까! 쎈타를! (주먹을 휘두르며 소리를 지르는 사내들 화면은 흑백)
펜 끝에서 태어난 나의 애인 방바닥과 침대에 널려 있는 애인들 매일매일이 피곤한 아침입니다 몸에 달라붙어 바스락거리는 애인들 끈적거리는 애인들
두 주먹 불끈 쥐고 힘차게 외치던 호시절의 구호처럼 모든 힘이 중앙으로 집중되는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 까마득한 날들을 등지고 앉아 발톱을 자릅니다 내 몸의 끝과 끝에서만 자라나는 단단한 것들 사사십육 사사십육
이제껏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것을 갖게 된다면,
나는 어찌해야 하나요 일기를 쓰다가 새로운 형식의 곱셈을 생각하는데 복서의 눈이 찢어지고 던져진 흰 수건 울컥, 눈물이 나옵니다 나는 이토록 흰 수건을 본 적이 없었습니다 밟히고 구겨진 나의 애인들은 철없는 아이처럼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세상의 절반은 육지 절반은 바다
살을 파고든 발톱을 자른 자리에서 몇 방울 피가 났습니다 등을 구부리고 발가락에 호호 입김을 불어 줍니다 발이 따뜻해지고 내 마음도 따뜻해지고 오늘 밤 자고 나면 나는 이제 절뚝거리지 않겠지만 그렇다고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다워지지는 않겠지만 발가락을 주무르며 아름다울수록 긴 이름을 지어 주는 시대를 생각합니다
밤의 패턴
도시가 어둠 속에서 소화되고 있다
물러지고 흐려지고 뒤죽박죽
섞이고 있다
가로등은 멀리 있으므로 있으나 마나
각자의 이쪽에서 저쪽으로 서로를 향해
걷는 모양새다
당신의 얼굴이나 나의 얼굴이
검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
모든 결정은 동공의 권역에서 이뤄진다
당신과 나의 얼굴에 하나씩
선명하게 빛나는 점, 약속도 없이
담배를 물고 있으므로 우연이다
자의 반 타의 반 주먹을 휘두른다
우리는, 힘겹게 휘두르며 생각한다
도무지 맞지를 않아
사실,
우리는 먼 곳으로부터 가까운 곳으로,
흑점으로부터 붉은 불꽃의 눈동자에게로
다가왔으므로 필연이다
침과 침이 섞이고 피와 피가 섞인다
까닥까닥 흔들리는 전등 아래
흐트러진 머리를 등지고 앉아
국수를 말아 먹는다
당선 소감
결론은 그렇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 길에 들어서게 된 건가. 기억의 잿간을 뒤적이다 눅눅해진 한 줌의 당신을 집어 들었습니다. 지금 문득 꺼냈다는 건 한동안 파묻혀 있었다는 것.
그 시절 우리는 행복과 고통과 원죄들을 함께 생산하고 나누어 가졌습니다. 그리고 진눈깨비 내리던, 내겐 무참함이 더해지던 이른 봄의 어느 날을 마지막으로 당신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없었습니다만, 그 무참함이 이 뜬금없는 길을 향한 첫 걸음이었음을 비로소 시인합니다. 그렇게 십 년이 넘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나름 꿀피부를 자랑하던 내 얼굴에는 기미가 내려앉았고, 당신에 대한 그리움 혹은 증오를 시로 승화시키려 애쓰는 흔한 과오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이 말을 하고 싶어 턱없이 모자란 나의 능력에도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는지 모릅니다. ‘잘 살고 계시죠? 그렇다면 더 잘 사세요.’ 제법 그럴 듯한 말을 하고 싶지만 어떤 미사여구도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혹여 너무 가늘어서 인식하기 어려울 정도라도 당신과 나 사이에 존재하는 연결선이 있다면 오늘부로 SWITCH OFF.
이 귀중한 기회를 저에게 주신 계간 <시작> 채상우 발행인님과 김춘식, 이형권, 유성호, 홍용희, 임지연, 이찬, 이현승 심사 위원님들께 진심으로 허리와 머리를 함께 숙여 감사드립니다. 저는 육십억 지구인을 감동시킬 한 편의 시보다 이 당선 소감이 더 쓰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사라졌으나, 긴 시간 이끌어 주신 시사랑 목요반 선생님들 그리고 박정석, 김승일 두 팀장님께 감사 인사드립니다.
저의 등단 소식을 듣고 엉엉 울어 버리신 이복수 여사님, 끈질기게 나를 시인이라 불러 주신 임병두 형님, 석봉 형, 흥식 형, 기덕, 절친 수정, 성기, 재근, 류경, 재희, 3임 씨 또 누구지? 암튼 사랑합니다.
현재 혼미한 정신 상태로 인하여 앞서 열거하지 못한, 내 휴대전화기에 입력되어 있는, 저를 응원해 준 수많은 친구들 고마워요. 사실 진부한 표현이기도 하고 부끄러워 대놓고 말은 못 했지만 여러분은 나의 일생이라는 시의 가장 힘 있는 한 행 한 행입니다.
서일대학 문예창작과 동기들과 선후배님들, 많이 늦었습니다. 그사이 학과 통합이란 이름으로 ‘타과인 듯 타과 아닌 타과 같은 학과’가 된다고 하던데 이제 저는 등단 턱으로 소주 한잔 사 줄 후배들을 잃게 되었습니다. 뭐,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방도 없음으로.
마지막으로
탕아였거나, 혹은 아무것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닐 그런 저를 시인으로 만들어 놓으신 장석원 교수님. 이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리 몸부림쳐 봐도 할 수 있는 건 고작 ‘고맙습니다’라는 말밖에 없는 저는 어찌해야 합니까.
최원
1974년 충남 안면도 출생. 서일대학 문예창작학과 졸업. 저서로 <버선발로 디딘 누룩>(공저)이 있음
붉은 방 외 4편 / 차성환
트럭에 실린 토마토가 가파른 비탈을 오른다
개들은 혓바닥을 토해 내며 뒤를 쫓고
트로트에 맞춰 들썩이는 토마토
토마토가 왔어요 맛 좋고 싱싱한 토마토
확성기에 들어간 토마토가 온 동네를 구르며 깨우다
부서진 담벼락 앞에 멈춘다
포클레인이 커다란 아가리를 쳐들고 있다
집과 집이 바짝 맞닿은 크레바스의 깊은 골목에서
아이들은 곰팡이 핀 얼굴로 기어 나오고
아줌마들이 넝쿨 같은 손가락을 뻗는다
한 손 한 손 건네받은 토마토를
가슴팍에 묻어 조금씩 베어 문다
아이들은 토마토 힘줄을 물고 빨고
개들은 바닥에 터진 토마토를 할짝거린다
이곳에는 누구나 다 기울어져 산다
쓰러지지 않게 어깨를 기댄 판자촌
깨진 유리창 너머,
아직 철거되지 않은 생이 붉은 방을 켜고
채 익지 않은 밤을 기다린다
한없이 부풀어 오르는 토마토
그림자를 널어놓은 빨랫줄 위로
발갛게 무른 달이 떠오르고 있다
모래 여자
오지 않는다 모레 온다고 했던 모래 여자, 새끼손가락 걸고 약속했건만 떠나자마자 사채업자가 들이닥쳐 잘라 버렸다 모래밥을 안쳐 놓고 오지에 가서 오지 않는 여자 오늘 밤도 내일 밤도 아닌 모레 온다고 한 여자 잘린 손가락에 대마초가 피고 냄새를 맡은 경찰이 철문을 두들긴다 방구석에 놓인 관 뚜껑이 열리고 삼베옷을 입은 아버지가 튀어나온다 아버지는 대마 잎을 염소처럼 뜯어 먹고 나는 염소젖을 쓰다듬으며 음마음마 소리내 운다 모레에 오지 않을 것 같고 와도 안 될 것 같은 여자 귓가엔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도시는 황사로 가득한데 치맛자락을 붙잡은 내게 모레에 올게 모래를 흩뿌리며 사라진 여자 뻑뻑한 눈알을 긁어 대는 나를 두고 모레 온다며 떠난 여자 모래를 씹으며 모레를 세면 손가락들이 모래로 떨어지고 방 안에 나 대신 모래 한 푸대 부려 놓고 달아난 여자 대마 꽃처럼 푸슬푸슬한 붉은 입술로 도망간 모래, 모레, 모래 여자
검은 구두
발을 집어넣다가 물컹한 쥐를 밟은 후로는 팬티도 뒤집어서 털어 입는다 가끔씩 바퀴벌레가 기어 나오고 여자의 긴 머리카락이 뽑혀 나오는 검은 구두, 뒤꿈치가 까지고 새끼발톱이 뭉개져 피 칠갑을 하며 내 발을 길들인 검은 구두 봄날의 잔디를 깔창에 깔고 뽀송한 구름을 구겨 넣고 습기 제거 해충 박멸의 구호를 외치던 그해 여름 아스팔트 위로 천 개의 구두가 달려오는 장마가 지나가고 가을이 와도 구두 속에는 계속 비가 내린다 어디선가 시체 썩는 냄새가 나고 나는 비를 피해 숨어 다닌다 내 발은 불어 터져 구두를 벗을 수 없는데 미칠 듯이 가려운 발등을 뒷굽으로 찍어 댄다 점액질을 흘리며 나를 끌고 다니는 검은 구두, 간신히 구둣방을 찾아 발을 내밀자 이 구두는 당신 발이라니까 의사의 멱살을 잡고 바닥에 주저앉아 밑창을 뜯어 보지만 우라지게 튼튼한 겨울 아무도 찾지 않는 숲의 제철소를 찾아가 용접가위로 검은 구두를 뜯는다 울컥울컥 검붉은 핏물이 터져 나오는 검은 구두 손바닥만 한 날개를 편 바퀴벌레 떼가 날아오르고 머리카락이 수챗구멍을 꽉 막아 죽은 쥐가 물 위로 떠오른다 나는 소스라치게 검은 구두를 집어 던지고,
다시 까맣게 때가 타기 시작한 새 구두를 신은 맨발이 흰 눈밭을 걸어가고 있었다
Ah! Monde
이빨 사이에서 와그작 부서진다 툭 툭 터진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사람들이 숨는다 아몬드 4년 전 떠나간 애인한테서 전화가 온다 수화기가 없이 벨만 울린다 아몬드 오래전 죽은 아버지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말을 한다 안방으로 들고 간 밥상을 물끄러미 보고만 있으신다 아몬드 햇빛이 아이스크림 위에 아몬드처럼 부서진다 나는 놀이공원에 혼자 눅눅해진 콘에 담겨 흘러내린다 아몬드 육개장에 얼굴을 파묻고 퍼먹는다 떨어지는 눈물에 국물이 줄지 않는다 아몬드 어머니의 주름치마를 잡은 손 안에 계속 주름이 접혀 들어온다 나사 하나가 손에 들려 있다 아몬드 석가모니 그림자 서린 수자타 마을의 강을 건넌다 발목이 물에 흘려 떠내려간다 아몬드 숨을 참고 물속으로 들어간다 나는 항상 이불 속에서 질식사 직전에 빠져나온다 아몬드 가슴 위에 포개 놓은 손이 박쥐가 돼서 파닥거린다 방 안을 날아다닌다 아몬드 머리가 달아난 검은 지네가 입속에서 기어 나온다 와그작 와그작 아몬드 사이에서 이빨이 부서진다
모시모시
흰 벽지에 검은 못이 박혀 있다 콘크리트 벽을 뚫고 들어간 못의 뿌리가 자란다 검은 실 줄기가 밤새 퍼져 나가 베개 위에 긴 머리카락을 펼쳐 놓는다 못에 걸어 둔 시계가 시간을 잃고 초침이 경련한다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 못의 뿌리가 기어간다 장롱에서 그물에 감긴 아기가 끌려 나온다 벽의 모서리에서 시멘트 가루가 조금씩 떨어진다 바짝 마른 동공을 등 뒤에서 뻗어 나온 모세혈관이 움켜쥐고 있다 몸에 있는 점들이 천장에 달려가 별자리처럼 박힌다 슬금슬금 다가오는 검은 못의 촉수, 살갗이 곤두선다 점이 있던 자리에 핏물이 맺힌다 서랍 속 장도리를 꺼내 구석에서 울고 있는 아기를 내려친다 시계를 부순다 이놈의 못이 이놈의 못이 장도리의 쇠발톱에 못을 걸어 뽑는다 끌려 나오는 검은 뿌리 헐떡거리는 못을 뿌리째 씹어 먹는다 못이 빠진 구멍에 터진 수도 배관이 검붉은 피를 쏟아 낸다 방 안에 핏물이 고인다 나는 축축한 웅덩이 한가운데서 깨어난다
당선 소감
대관람차 안에서 등단 소식이 담긴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랜 꿈이었기에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았습니다. 대관람차는 상층부를 향해 반원을 그리며 떠오르고 다시 나머지 반을 찾아 내려옵니다. 지상에 발을 딛고 내려왔을 때 각오가 생겼습니다. 지금 쓰고 있는 시보다 더 나은 시를 쓰겠습니다. 아직 쓰지 않은 시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살겠습니다.
등단을 하면 제게 처음 시를 가르쳐 주신 김혜순 선생님께 가장 먼저 소식을 알려 드리고 싶었습니다. 오랫동안 뵙지 못해 죄송스럽지만 기쁜 마음으로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항상 저를 독려해 주시고 일깨워 주시는 서울과기대의 최승호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수사적 표현에 매달리지 말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시가 출발해야 한다는 말씀 가슴 깊이 새겨듣겠습니다.
한양시창작단의 문우들과 강동우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지난 1년 동안 함께 참 지지고 볶고 많이 했습니다. 같이했기에 시가 즐거웠습니다. 우리는 내내 즐거울 것입니다.
유성호 선생님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선생님 곁에서 시를 읽고 배우면서 저를 돌아보고 조금 더 성숙할 수 있었습니다. 늘 겸손한 자세로 시를 열심히 살아내겠습니다.
끝으로 <시작> 편집 위원님들과 채상우 발행인님께 감사드립니다. 아직 많이 부족하지만 앞으로의 가능성을 보고 뽑아 주신 거라 생각합니다. 그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꼭 보여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차성환
1978년 서울 출생. 서울예술대 문예창작과 졸업.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석사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 과정 중.
심사평
이번 2015년도 제13회 시작신인상 시 부문에 응모한 신인들과 시편들은 모두 140명, 990편이었다. 투고된 몇몇 시편들은 한국시의 변화된 지형과 예술적 짜임을 다시금 절감케 하는 흐뭇한 느낌을 자아내기도 했지만, 대다수의 응모작들은 기실 단 한 편만으로도 자격 미달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쉽게 감지할 수 있을 만큼 투박하고 조악한 수준을 보여 주었다. 우리 심사 위원들은 990편의 작품들을 서로 돌려 읽으면서, 당선을 염두에 두고 집중적인 토론을 벌어야 할 응모작들을 어렵지 않게 선별할 수 있었다.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마지막까지 집중적으로 토론을 벌인 신인들은 다섯 명이었고, 몇 차례의 재독 과정을 통해 두 신인의 당선을 최종적으로 확정할 수 있었다.
임희정의 응모작들은 세련되고 완성도 높은 이미지 조각술이 눈길을 끌었다. 일종의 알레고리적 이야기 구조를 능숙하게 구사할 수 있는 기법의 차원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또한 일상적 차원의 개연성을 멀찌감치 벗어나, 귀기와 전율스런 육체의 이미지들을 예술적 내용으로 삼을 수 있는 미학적 용기의 차원에서도 후한 점수를 얻었다. 그러나 저 세련된 이미지 조각술과 미학적 용기를 감싸 쥘 수 있는 그만의 예술적 사유와 일관성의 구도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심사 위원들의 동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
김미소의 응모작들은 이국적이고 독특한 소재 활용이 돋보였다. 인도 등지의 힌두문화권에서 행해지는 제식을 소재로 삼은 「목을 펴는 사람」이라든지, 디지털 문화에 따른 전자 쓰레기를 제제로 삼아 현대 문명 비판을 시도한 <쓰레기 섬 창조주> 같은 작품들이 그러하다. 또한 육체적 상상력을 활용하여 감각의 구체적 질감과 기억의 문제를 결부시킨 <길 위에서> 역시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자신의 시작의 고뇌를 알레고리 구조를 활용하여 형상화한 <지면 없는 추락>이나 인간의 죽음의 과정을 추적한 <영정 앞에서> 같은 작품들은 이 신인의 시작법과 전체적인 시풍이 자연스럽게 엇물리지 않는 문제점을 노출시켰고, 언어의 숙련도와 예술적 세공술의 차원에서 신뢰하기 어려운 불균형한 모습을 곳곳에서 드러냈다. 또한 제 기술적 장점들을 온전히 자신의 예술적 프레임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사유의 깊이와 구성력의 차원에서 적지 않은 약점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시편들 전체를 마치 숨결처럼 제 몸에 들러붙게 만들 수 있는 예술적 직관력과 구성력의 확보를 주문하고 싶다.
박민서의 응모작들은 이른바 몸의 세계를 제 예술적 상상력의 바탕으로 삼고 있는 시편들이 지닐 수 있는 여러 장점들을 고스란히 포괄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또한 끈적거리는 질감으로 휘감겨 오는 점액질의 상상력을 형상화하는 이미지 조각술이나, 비유법의 정통적인 기술과 방법론을 구사할 수 있는 언어적 숙련도의 차원에서 후한 평가를 얻었다. 그러나 응모한 몇몇 작품들은 조악한 수준의 발상과 사유를 그대로 노출시키고 있었다, 이후 보다 많은 예술적 연마의 과정이 요청된다는 것이 심사 위원들의 공통된 의견과 시각이었다. 단편적인 시적 기법과 부분적인 세공술의 숙련도를 넘어서, 한 편의 시 작품 전체를 일관된 예술적 짜임새로 갈무리할 수 있는 구성력이 요청된다고 하겠다. 곧 각각의 시편들과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시어의 음영과 예술적 구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안목과 상상력과 구성력이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차성환의 응모작들은 우리 일상의 세부를 밀착 인화할 수 있는 섬세한 관찰력의 차원에서 심사 위원들 대다수를 충족시켰다고 하겠다. 특히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사물의 세부들을 집요하게 소묘하면서 그 뒷면의 침묵의 공간에서 어떤 감성의 음영을 소리 없이 환기시킬 수 있는 기술적 숙련도에서 신뢰감을 주었다. 물론 응모한 작품들 가운데 일부는 예술적 세공의 완성도와 마름질의 밀도의 차원에서 의심스런 부분을 노출시켰기에, 당선 여부를 두고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집중적인 토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심사 위원들은 저 관찰력의 집요함과 언어들 사이로 휘감긴 끈덕진 질감의 내면성을 신뢰하기로 했고, 결국 당선자의 한 사람으로 결정하였다. 당선을 축하한다. 보다 빼어난 시편들을 지속적으로 산출해 낼 수 있는 큰 시인으로 성장하기를 기원한다.
최원의 시편들은 오랜 시적 수련을 거친 자만이 빚어낼 수 있는 정제된 언어의 밀도 높은 짜임새와 더불어, 상이한 여러 소재들을 제 몸의 리듬감으로 이끌고 갈 수 있는 예술적 일관성의 구도를 충실하게 구비하고 있었다. 심사 위원들 모두에게서 공통된 호평이 이어졌다. 특히 응모작들 모두가 빠짐없이 고른 수준과 예술적 세공의 밀도를 자랑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당선을 염두에 둔 토의가 이루어졌다고 하겠다. 일상의 차원에서 매번 벌어지는 착시와 오인과 왜곡의 현상들을 진득하게 가라앉은 낮은 음색으로 소묘한 <앵두나무 맞은편>이나, 일상 세계의 소소한 인연들이 시간의 깊이를 가로지르며 일구어 내는 저 운명과 우연의 현란한 엇갈림을 밀착 인화의 기법으로 그려 낸 <미주 명신 아진 그리고 나>는 이 신인의 만만찮은 재능과 수련의 과정을 충실하게 예증해 준다. 또한 우리 삶 곳곳에 깃든 저 황폐한 진실들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돌파하려는 잔인한 리얼리즘의 세계를 견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심사 위원들 모두 어렵지 않게 만장일치로 당선을 결정했다. 동료가 된 것을 환영한다. 한국시의 미래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기대주로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심사위원 김춘식 유성호 이형권 홍용희 이현승 임지연 이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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