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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4편 / 이자인

 

 

 

늘 그만큼의 거리에서 당신을 향해 걸을 때

막 짓이겨진 풀냄새가 났습니다

 

들판을 건너온 바람결이 나를 휘감습니다

이파리들이 깃털처럼 아우성치며 돋더니

온몸이 말갈기처럼 일어납니다

푸른 등에서 말발굽소리 요란하게 들려옵니다

 

순간, 구겨진 길 하나가 허공으로 솟구치면서

펄럭이는 손 하나 보입니다

잠겼던 창문들이 열리고 길들이 쏟아집니다

한 여자의 손이 시간의 경계를 활시위처럼 끌어당깁니다

 

늑골에서 난폭하게 질주하는 기차소리가 들려옵니다

, 이 손을 잡아

몸이 사라지도록 달렸지만

레일은 이마에 새겨진 지도처럼 휘발되지 못한 시간을 따라옵니다

 

얼마나 더 어두워져야 그 손을 잡을 수 있을까요

얼굴에서 깨진 거울 조각들이 쏟아집니다

 

수백 년 동안 겹겹의 벽을 달려온 여자가

마지막 벽 앞에서 몸을 던집니다

열리지 않는 창을 향해 자신이 검붉은 문이 되려 한걸까요

현관 밖에서 죽은 새 떼들이 날아갑니다

 

나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이유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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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클릭하다

 

 

벽 속에서 소년이 걸어 나왔다.

 

어둠에도 문이 있어 문 속에도 문이 있어 눈 속에서 문이 복제되고 있었다.

 

열 개의 문이 하나씩 닫힐 때마다 나는 더 이상 울지 않게 되지*

 

소년의 등 뒤에서 검은 튜울립이 일제히 피어났다.

 

몸속에갇힌길이똬리를틀고다른길을집어삼키고있어붉게터지는구름사이로익사한꿈들 이가득차올라

 

도시의 그림자극은 지하창고에서 불현듯 버찌열매를 달고 자라나기 시작했다.

 

성장을 멈춘 몸 안, 내장된 메모리칩에 시멘트 정원이 파이프처럼 펼쳐졌다.

 

저항하지 않으면 어둠도 맨홀처럼 깊어져, 튜울립이 시멘트 속에서 웃었다.

 

상자 속에서 소년의 무릎이 빌딩의 숱한 내부들처럼 자라나고 있었다.

 

자동차시동거는소리가아득한곳에서건너와나비핀을머리에맨어린아이가

하늘색원피스를팔랑거리며눈부신손을잡고빛의속도로사라져

 

어둠의 뒤편은 빛이 아니야 검은 물 위로 휘어지는 팔들이 사월의 달력에 갇혀

펄럭여

 

벽들이 강물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갑자기 소년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영화-보이A(사이코 패스) 대사에서 인용

 

 

 

 

 

 

나비가 날아오는 시간

 

 

 

단백질은 쉽게 분해된다

그러므로 몸이 화석으로 남는 일은 드물다

 

유리컵 속에서

바람이 바람을 수정하는 동안

나비와 시간의 지층 사이로 뚫리는 투명한 통로

 

같은 하늘을

15천만 년 동안 날아오는 중

 

등 뒤 아득한 길 돌아와 내게 겹쳐지는 시간은

얼마나 사소하게 부서지는지

손등을 타고 넘는 물 근육들

혀 내밀었어

물의 머리가 물 꼬리 물고

내 연한 몸 휘감아

나사처럼 결합되는 물, 눈이 부셔

부재(不在)의 넓이 안에서 끌어당겨

주름진 물 얼굴을 지워

 

팔랑, 토기를 머리에 인 여인의 굽은 등이 일어서다

팔랑, 한 번의 날개짓에 수세기가 몰락하는 물의 서사

 

마음 속 빈곳 편집하고 있으면

까마득히 풀린 안개로

천년 앞 미루나무를 지나가

 

발등 출렁이는 거울 속에서

걸어온 보폭만큼 가벼워져

팔랑 팔랑 백악기를 건너가

 

 

 

 

억새

 

 

길이 우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다

 

때를 알고 돌아가는 것에서 이는 소리, 저 바람소리

바람보다 낮게 누워 오래도록 그가 흔들리는 걸 지켜보았다

 

무너지지 못하고 홀로 자전하는 어둠 속

길 위에 서서 중심을 잡는 어깨 위로

페가소스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었다

 

흘려보내라는 소리

새벽 이슥하도록 너의 중심에서 너의 바깥으로

나의 운행은 늘 슬픈 것이어서

그 길 끝에도 너는 있을 것이지만 그렇게 흘러서 가라

젖은 것들의 숙명은 그런 것이다

 

너를 만나러 가기 위해 왼손에 들고 갔던 출렁이는 강물이

제 울음소리 적시며 일몰 속으로 사라질 때

세계는 늘 마음 안에서 완성되는 것

 

붙잡는 건 허공을 움켜쥐는 일이어서

허공을 만나 본 자는 안다

흔들리며 일어서는 것이 춤이 된다는 걸

 

 

 

 

 

 

천일야화

 

 

나를 죽이고 싶어 하는 당신을 위해

밤마다 죽음의 노래를 불렀네

 

내 노래의 마침표를 찾는 당신의 칼은 길어지고 있네

몇 사람이던가, 스러진 발목들이 난폭한 춤을 출 때

노래하며 외줄을 탔네

치욕스런 외줄을 끊어 버려요, 누군가 소리쳤네

 

머리카락처럼 자라는 어둠의 노래에

무한증식! 당신은 태어나길 반복하네

 

보름달 우엉 우엉 우는 어느 밤

나는 당신을 죽이고 싶어 하네

날마다 한 생()씩을 건너온 전생이

비수로 당신에게 날아가 꽂혔네

당신과 나 한몸으로 칼춤을 추었네

 

이 노래의 끝은 어디인가

이제 그만 당신을 끌어안고

끝없이 재생되는 스크린 밖으로 나오고 싶네

하늘의 입을 틀어막고

자꾸 굴러 내리는 태양을 처형하고 싶네

 

 

 

 

 

당선 소감

 

  당선 소식을 들으며 바라 본 하늘에는 비행운이 길처럼 하얗게 흩어지고 있었다. 새들은 제 흔적을 지우며 지나가는데 무거운 것들은 허공에서도 저렇게 흔적을 남기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여행길에서 목적지로 가는 마지막 버스를 놓치고 막막하게 서 있었을 때 문득, 한 방향으로 나 있던 길이 소실점 끝에서 수천의 길들로 열리고 있는 걸 목도하였다. 그 후부터 속수무책으로 나의 외도는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삶의 여정에서 단단한 일상의 프레임에 갇힌 내가 서서히 사물화 되어 갈 때, 또는 걷고 있는 길이 목적성으로 딱딱하게 굳어 갈 때, 잠시 속도를 늦추고 길이 말랑해지도록 길을 풀어놓곤 했다. 길과 나 사이의 틈새를 느슨하게 넓혀 길이 내 안으로 잘 스며들게 하는 일은 한껏 부풀어 오른 길 속에서 사물들의 속내를 잠시 엿볼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시에게로 가까이 다가가는 일과도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어쩌면 산다는 건 길 위에서 태어나 길 속에 집을 짓고 길을 걷다가 길 중에 소멸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나의 시는 길과 길 사이에서 터졌다 사라지는 춤사위거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젖어있는 모든 존재의 울음을 대신 울어주는 일일 것이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그들의 숨겨진 비의를 잘 읽어낼 수 있으면 좋겠다.  

세계와 잘 통정하기 위해 성긴 저녁별을 바라보며 길이 나를 무사히 통과할 수 있도록 일인칭을 또 한 번 내려놓는다.

 

 시숙 되지 않은 작품을 세상에 내어놓게 해주신 심사위원님께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시산맥 편집진들과 지리산문학회 관계자 분께도 깊은 감사의 말을 드린다. 이곳에 당도하기까지 많은 귀한 인연들이 손을 내밀어주었다. 그분들께도 진심을 담아 감사드린다.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고자 노력하겠다. 그리고 시의 끈을 놓지 않도록 격려해주며 당선소식을 함께 기뻐해 준 문우들께 다시 한 번 고마움을 전한다.

 

 

 

 

최치원 신인문학상 심사평

 

시인은 늘 신인을 품고 꿈꾸며 산다. ‘신인에게 기대하거나 요구하는 바는 사실 제 자신에게 되묻고 탐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어떤 신인을 고대하는가. 그런 질문은 일차적으로 심사 대상인 투고작들을 향해 있으면서 결국 오늘의 시를 들여다보고 내일의 시를 꿈꾸는 자리에 잇닿아 있다. 그래서 신인문학상은 오로지 당선자의 기쁨으로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시인들이 모두 함께 설레고 축하할 일이다.

 

예심(140)을 거쳐 본심에 오른 작품은 모두 일곱 분의 것이었다. 이자인의 어둠을 클릭하다4, 신태희의 달빛, 수유6, 양기훈의 안대4, 권혜미의 횡경막이 부풀어 오르는 시간11, 한영철의 모기7, 전선용의 트라우마6, 양현주의 7편이 그것이다. 그 중에서 세 명의 심사위원들이 주목하여 논의했던 작품은 어둠을 클릭하다4, 달빛, 수유6, 안대4편이었다.

 

시는 짓는것이면서 흘러나오는것이다. 물론 짓는공력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시적 황홀이나 해방에 이를 수 없다. 대체적으로 시를 만드는데 들인 고심과 노력은 느껴지는데, 물처럼 꿈처럼 흘러나오는시적 출구와 통로는 상대적으로 희귀했다. 안대4편의 시를 보내온 양기훈은 그러한 시적 무의식에 길이 트여 시의 몸을 실을 수 있게 되고, 한 편 한 편의 시를 움켜쥐고 있는 관념적인 도식이 시의 안쪽으로 한층 더 녹아든다면, 그의 인상적인 상상력과 집요함이 좀 더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 여겨졌다. 달빛, 수유6편의 시를 쓰는 신태희은 비교적 자연스럽게 출렁거리며 시적 탄성(彈性)에 몸을 싣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연스러움이 다소 익숙했고, ‘소품단상에 머문 듯한 시편들이 많았다. 이것은 단지 시편의 길이가 짧다는 데서 기인한다기보다는 시적 사유와 감각이 운신하는 폭이 좁다는 인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는 자신이 가진 언어의 탄성에 업혀 더 멀리 밀려가도 좋을 것이다.

 

심사위원들이 어둠을 클릭하다4편을 보내온 이자인을 당선자로 합의하는 데에는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그는 시가 짓는것이면서 흘러나오는것이라는 것을 몸으로 터득하고 있는 듯이 느껴졌다. 다만 때때로 설명의 욕구가 시의 호흡을 돌보지 못하는 경우가 노출되었지만, 그의 시는 상상력의 흐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의외의 방향으로 번지는 시적 점선들을 가지고 있다. 5편의 투고작 중에서 당선작으로 선정된 아직,은 당신과 나 사이의 거리(距離), 존재자들의 관계에 어쩔 수 없이 내재하는 그 보이지 않는 거리를 공감각화하여 존재로 드러내준 작품이다. 그 감각의 구체성과 치열함에 신인문학상을 돌리기로 하였다. 우리는 모두 당선자와 함께 설레고 기뻐하고 축하하고 싶다.

 

심사위원= 김명인(시인), 황학주(시인), 김행숙(시인) (대표집필 김행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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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 문학동네 신인상 시부문 당선작] 구현우

 

 도그빌

 

 

  꿈에서 주운 개를 꿈 밖에서 키운다. 내가 먹는 밥을 먹인다. 내가 아는 곳으로 데려간다.

 

  발코니로 간 나의 개는 밑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를 태연히 빨아들인다.

  그게 발코니의 냄새인 줄 안다.

  한강으로 간 나의 개는 낯선 두 아이가 공 하나로 웃고 우는 장면을 지켜본다.

  그게 가족인 줄 안다.

  세탁소로 간 나의 개는 모피코트를 벗어놓고 나온 여자를 따라간다.

  그게 마음인 줄 안다.

  현관 앞에 멈춘

  나의 개는

  문을 열어두어도 안에서 불러봐도 꼼짝없이 앉아 있다.

  주인과

  타인이

  그게 그건 줄 안다.

 

  언제 어딘가로 사라졌는데, 나는

  나의 개가 있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린다.

  이전인지 이후인지 모르지만

 

  꿈에서 만난 개를 꿈에서 방치한다. 오줌을 뿌리며 따라오는 소리가 아직 뜻이 없는 낱말처럼 들린다.

 

  꿈 밖에서 나는 혼자 이인분의 요리를 먹는다.

 

  익숙하고도 익숙해지지 않는 도시를 걷다가

  나의 개를 닮은 개와

  나의 개를 하나도 안 닮은 개와

  개도 아닌데 개로 불리는 남녀노소가

  어디에나 있는 것을 본다.

 

  도시는 한꺼번에 어두워지고

 

  내가 없는데 내 방에 불이 들어온다.

 

 

 

 

 자각몽

 

 

  양의 이미지는 온순하지

  막상

  양을 그려놓고 보면

  온순하지 않지

  그것은 구름

  그것은 연기

 

  그녀로부터 달아나고 멀어지다가

  빨간 기와가 붉은 벽돌이었단 사실과

  울타리 너머도 울타리란 걸 알았을 때

  그 때 나는

  새하얘졌어

 

  이해하기 전에 뭉게구름

  뒤로 뭉게구름이 지나가

  변명하기 전에 담배 끝에서

  연기가 이어지고

  연기로 이어지고

  끝나버린 연애가 계속되고 있어

  주파수를 돌려

 

  오래된 노래를 틀어놓고

  그녀를 알기 전의 내가 되어서

  백 마리 이백 마리

  양을 세

  눈꺼풀을 내렸다 들어올렸다

  반복하다가

  환상이었던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던가

 

  진짜 양을 보지 못했으니까

  진짜 양은

  가짜 늑대에게

  잡아먹혀버렸으니까

 

 

 

 

 허브

 

 

  날마다 탁자에서 허브가 자란다. 허브를 먹으며 동생이 자란다. 귀가 얇은 식물은 모든 감정을 이해한다.

 

  모르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커브 아이와 어른 오가는 발에 차일 때마다 쓰임새가 달라지는 돌, ,

 

  동생과 나는 같은 탁자를 쓴다.

  탁자는 넓고 허브는 많고 동생은 탁자의 허브 또는 허브로 된 탁자를 먹는다. 탁자는 식탁으로 쓰일 수 있다. 책상으로도 쓰일 수 있다. 허브로 된 탁자는 자라는 성질이 있다.

 

  담 하나가 건물과 건물 사이에 쌓인다.

  밤마다 담을 두드리는 소리 똑똑 쿵쿵 흑흑 하나둘, 하나둘,

 

  나와 동생이 칼날과 연필로 새긴 수만 가지의 틈,

 

  허브가 시들어 죽는다. 그래도 상관없이 동생은 자라고 있다. 탁자는 딱딱한 성질이 있으며 그건 죽은 동물의 시체에서나 만져볼 수 있다.

  허브든 탁자든 결국 관상용 식물이 된다.

  나는 오른쪽으로 동생은 왼쪽으로, 다를 것 없는 심정으로.

 

  자꾸만 벽돌이 쌓인다.

 

  들은 적 없는 울음소리가 낯익어지면 가족이 된다.

  날마다 골목이 늘어 많아지는 서랍 하나둘, 하나둘.

 

  허브를 씹으며 현관을 나서는 동생과 나,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목격자들

 

 

  탁하고 번뜩이는 눈빛 야생의 너와 나, 다져진 나와 너는 살아서는 친해질 수 없을 테지만

 

  물체와 나, 이렇게 만났으니 더듬더듬 만져봐도 괜찮지

 

  뺨을 너와 맞대던 줄무늬고양이는

  수풀로 사라져서 보이지 않아 보이지 않지만

  목소리가 들려

  수풀- 너머 아파트의 외벽, 그늘, 창문, 그러니까 그즈음의 영역이 줄무늬고양이가 되어

 

  울고 있어

  나와 같은 곳을

  행인들과 주민들이 보고 있어 다만

  내가 본 것과 다른 고양이를 보고 있거나

  줄무늬를 기억하거나

  아니면

  또 다른......

 

  물체가 된 너는 도로 위를

  구르고 구르지

 

  인간적인 눈이 많은 번화가의 밤이라

  생물이던 너, 사물로 남은 너는

  프레임 속에서 요리되는 중이야

 

  맹목적인 눈도 의심 섞인 눈도 아닌 인간적인 눈

 

  표지판과 빵 냄새와 영어 학원과 알코올이 뒤섞인

  그림자가 따로 걷고 있어

  기묘하게도 너를 꼭 닮아

  마치 사람인 것도 사람이 아닌 것도 같은데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어

  누군가 받았어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무언가

  통째로

  삼겨버렸어

 

 

 

 

  본능 이상의 것

 

 

  폭설이 우리를 산장에 묶어두었다. 주인 없는 산장에서 보낸 이틀. 눈은 한시도 그치지 않았다. 산장이 눈에 파묻히지 않는 게 안도와 오해를 낳았다. 우리는 네 명이고 이틀 전에는 세 명이었다. 산장보다 좋은 곳을 찾으러 간 한 사람, 나빠져도 혼자가 좋다던 한 사람 있었다. 너희 말을 도저히 더 못 들어주겠다고, 차라리 눈 속으로 들어갔다. 모르는 두 사람은 언제부턴가 우리는 함께였다. 식량이 반에서 반으로 줄고 있었다. 산장은 아주 따뜻해서 지내는 동안 방한복을 벗고 있었다. 산장은 아주 넓어서 우리가 안 쓰는 방들이 수십 개가 넘었다. 먼지 쌓인 빵을 먹으며 우리는 정도껏 쌓이는 눈을, 겨울이 지나고도 비참히 내리는 눈을 보았다. 장작이 떨어지자 의자 다리를 부러뜨렸고 의자 다리를 잃어버리자 소설을 넣었고 소설이 재가 되자 역사를 던졌고 역사가 사라지자 성경을 찢었다. 잡담이 아니라면 말을 아꼈다. 벽난로가 식고 우리는 세 명이 되었다. 따뜻해졌다. 빵 대신 빵가루 묻은 먼지를 먹었다. 우리를 떠난 그 사람이 더 잘 지낼 거란 생각이 들어서 슬프게 추웠다. 눈이 비로 바뀌어 내리고 있었지만 우리는 산장을 떠날 수 없었다. 이미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얼어붙었다. 식량이 떨어지고 우리는 두 명이 되었다. 배가 불렀다. 여름이 분명했는데 우리는 산장에 묶여 있었다. 소모적인 대화가 계속되었다. 눈과 비가 절반씩 내리고 있었다. 춥고 배고팠지만 우리는 한 명이었다. 혼잣말을 하다 죽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소식을 듣고 있었다. 우리에 관한 뉴스가 평생 실종으로 보도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구현우 1989년 서울 출생. 안양예고와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

 

 

 

 

 

출처 : 신춘문예공모나라
글쓴이 : copyzigi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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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상 처리 / 안정희

 

    웃통을 벗은 사내들이 가랑이 사이로 참치 한 마리를 고정한다 그들이 신은 장화가 닿을 때 차가웠다 부드러웠다 짙은 눈썹 아래 사내의 눈빛이 참치 등 위로 미끄러진다 이렇게 밝은 빛을 본 적이 없다 너무 많은 산소로 익사할 것 같아 양초가 여러 개 놓인 샹들리에가 하늘에 달려 삐걱삐걱 흔들린다 사내의 땀이 떨어지면 촛농처럼 뜨거웠다

 

 뇌를 내리칠 몽둥이가 올라간다 눈꺼풀이 없어 눈을 뜬 채 눈알이 툭! ! 오바댜 스바냐 잘 배치되어 있던 신앙의 내장과 생식기관이 흩어진다 갈라디아 말라기 흔들리는 수만의 양초 불빛들, 무엇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개론 서적의 제목들, 여행 사진들, 소화되지 못한 푸질리어, 자바리가 갑판 위에서 뒤섞인다 샹들리에 크리스털이 쏟아진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에 베이는 생각들, 터지는 제목들, 버려질 피 묻은 것들이 비리다

 

  바늘 없는 주사기를 꼽고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아가미와 꼬리가 잘린다 하역을 위해 몸에 구멍을 낸다 고리에 걸려 밀려가며 마침내 환자가 될 수 있었을까 줄줄이 급속 냉동되는 판단들 싱싱한 죽음들이 냉동실에 다랑다랑 매달린다 나는 겨우 깨어난다 익힌 결론들이 칸칸이 생선살처럼 부서질 것이다 물에 빠진 물고기로 살아왔다

 

 

 

 

심벌즈 독주회

   

찌에 매달린 낚싯대처럼

구부정하게 휜 등

쉴 수 없는 대통령의 휴가 같고

흰색 노트에 흰색 글씨들만 쓰이고

수면에서 보일락 말락

잠이 들락 생각이 날락

엄연히 낚시 중 같은 배경이 필요했고

뭔가를 하고 있다는 위로가 있어야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무대 가운데 앉혀진 심벌즈 연주자

양손에 무거운 심벌즈를 들고

소리 없는 연주를 한다

기다리는 한 음표가 이 곡의 악보에 있을까

이 음악회의 청중들은

쉬는 중일까 기다리는 중일까

목요일에도, 베란다에도, 너의 얼굴에도

찌들이, 음표가 움직인다

 

수면 아래로, 눈에 묻은 물을 훔칠 틈도 없이

수면 위로, 젖은 머리칼로 얼굴을 덮고

물 안팎의 가쁜 호흡 중에도

익사하지 않는 얼굴들

음표를 무는 입술

!

 

온몸에 전해지는 트레몰로

비포장 트랙, 빈 트럭 안을 울리는

트레몰로 트레몰로

털털 빈털터리로

 

 

 

 

 

Jennifer Lopez American Vogue 2004*

 

  하늘거리는 푸른 드레스를 입은 그녀, 시커먼 사냥개들을 몰고 간다. 아름다운 팔이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검은 모가지. 시상식 카펫처럼 늘어진 붉은 혀들. 킬힐을 신고 카펫을 밟는다. 혀 위에서 그녀는 무사할까? 아가리에서 침들이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드레스가 부풀고 그림자의 치수가 늘어난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나의 배경에서 무엇이 사라지는지 알려 주곤 했다. 토요일의 침대에서 빠져나와 사진전 티켓 창구 앞에 묶여도, 사나운 쇼핑백들에 달려 다녀도, 너를 사랑해도, 나는 사라지는 것들 앞에 길들지 않는다.

 

  사냥개가 뛴다. 두 가지 세 가지 네 가지 늘어나는 모가지를 더 힘주어 잡는다. 사냥개의 목에 걸린 시폰 스카프처럼 그녀는 날리고, 하이힐이 벗겨지고, 사각사각 바람이 그녀의 푸른 드레스를 베어 문다. 사냥개들은 더 길게 혀를 늘어뜨린다. 혀가 당기고 있는 여자, 수십 마리의 사냥개가 그녀를 몰고 간다.

 

* 사진작가 Mario Testino의 작품.

 

 

 

 

 

 

길 막히는 사막

 

두바이사막 사파리

디젤 지프가 나의 앞을 따라다닌다

부연 바람은 부랴부랴 흩어지지만

바로바로 바퀴 자국은 사라지지만

나는 바로 앞만 볼 수 있는 들쥐 레밍이 된다

 

끼어드는 차들로

빠지지 않는 차들로

앞이 점점 길어진다

최근에 쓰여진 역사처럼

원조가 있다는 골목처럼

 

내가 따라가지 않아도

끊임없이 앞에 나타나는 언니, 헤겔, 아브라함

내가 운전하는 대로

당신들은 계속 내 앞을 달린다

 

사나운 사자 한 마리가 나타나

지프가 갑자기 멈춘다

연쇄 충돌로 핸들이 날아가고

범퍼가 줄줄이 찌그러진다

시동도 걸지 않고, 엔진의 열기도 없이

견인 고리에 매달려 가는 당신들

 

그때 깨진 앞 유리를 달고

나의 기가 막힌 사파리가 시작되었다

길 없는 사막에서

 

 

 

 

 

 

무빙워크

 

  누워 눈을 깜빡인다 속눈썹에 쓸리는 깜깜한 날들, 눈을 감은 걸까 뜨고도 이제 볼 수 없는 걸까 들숨에 빨려 오는 검정 비닐, 날숨은 멀리 가지 못하고 요일의 배치는 흩어진다 서리태처럼 흩어진다 콩콩 목요일은 장롱 밑으로, 콩콩 월요일은 링거액 안으로, 찾을 수 없는 요일들은 찾을 수 없는 곳으로만 굴러간다 잃어버린 요일은 남은 요일들로 채울 수 없었다 비닐봉지에 담긴 두부처럼 으깨지기 쉬운 얼굴, 깜빡깜빡 속눈썹에 찔려 어둠이 찢어진다 흐르는 얼굴을 막기 위해, 봉지 위에 봉지, 봉지 밑에 봉지 가득한 봉합에 속눈썹이 안구 쪽을 향해 자란다 눈물이 자란다 보지 않고도, 걷지 않고도, 뒤돌아서서도 간다 눈물을 환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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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당선작 _울타리의 노래(외 4편)/ 이설빈

 

 

울타리의 노래

 

 

 

1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어른들은 점잖게

펜스를 들추고 넘어가

마치 펜스라는 게

치마 속에 있다는 듯이

여기, 나는 펜스에 걸터앉아

모든 걸 넘겨봐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노래는 혀까지 미치지 못하고

눈썹에 고인 땀방울이

잠깐, 빛을 받아 넘쳐서

먼 지평의 굵은 턱선을 강조하는 시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바람이 불 때만 의미를 갖는예민한 솜털처럼

성급한 땀방울 하나

내가 이룬 모든 걸 거꾸로

그늘 속에 드리우고 있어

있지,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아직도 목초지는 멀어

 

2

내가 이룰 것들이란 다 무엇일까

한 획의 비행운?

점진적인 책갈피의 이동?

열두 개의 그림자 태엽?

노예선의 새로운 깃발?

주머니가 덜 마른 코트?

커다란 굴뚝을 입에 물고

여기, 나는 완강히 버티고 서서

모든 걸 넘겨 보낼 작정이야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맞아

내 검은 워커는 진창에서 얻었지

무릎까지 푸욱 잠겨서

비석에 새겨진 이름에는 이끼가 자라지

입술을 뒤덮는 콧수염처럼

 

3

아직도 목초지는 널고

건초지는 발밑에 영원처럼 머물고

노래도 새들도 떠난 둥지에는

느긋한 노을 한 줌

내가 이루지 못한 모든 걸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어

알아, 아직도 목초지는 멀고

나를 가리키던 시간들

내가 될 수 없던 몸짓들

그것들 모두가

내 생의 단위로 자라날 때까지

여기, 나는 펜스에 기대서서

그 모든 걸 굽어봐

 

4

아이들은

펜스를 짚고 넘어가

좀더 큰 아이들은

펜스를 훌쩍 넘어가

아기들은

펜스를 기어서 지나가

마치 펜스라는 게

텅 빈 빨랫줄인 것처럼

사람들, 눈부신 속옷들

바람에 멀리 날려 가고

목초지만큼 멀어져 가고, 나는

여기, 기다란 그림자 되어

펜스를 넘어서는데

하나, 둘…… 눈이 멀어

울타리를 지워가는데

 

 

 

숨 숲 수프

 

 

 

개구리를 토해 낸 뱀이 개구리의 어두운 허기로

쉬이익— 빨려 들어가듯

벌목꾼은 숲으로

 

붉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저녁,

배꼽의 태엽을 거꾸로 돌려보면

나는 그녀의 배 속에서 소화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갑자기 수면 위로 끌어올려진 심해어의 눈알처럼

인광을 내뿜는 무수한 저녁의 육체들

신경이 퉁퉁 불어서

 

근육질의 구름

우르릉우르릉 비석을 갈고 있다

벌목꾼은 검은 매왈츠*를

 

이제 검정 크레파스를 긁어내면 무지개가 맺힐 겁니다

그건…… 그건 살색이에요!

비명이 울창하던 노을

 

반달도끼로 도려낸 숲의 싱싱한 내장들

 

검은 책갈피를 펼쳐보는 새벽

감전된 새가 창백하게 짖었다

무딘 도끼날에 베어오는 소름

벌목꾼은 늪으로

 

쥐 먹은 자리를 에워싸는 머리카락들처럼

한데 모여 늪을 끓이는 침엽수들

개구리들의 눈빛을 모아 독기를 푼다

 

머리통은 예리한 발톱에 꿰여 지붕 위로

몸통은 덕지덕지 크레파스 늪 속으로

 

개구리 배 속에서 꾸역꾸역 자라난 뱀은

개구리—허눌을 벗는다

벌목꾼은 검은 매 왈츠를

 

 

   ————

   * Chris Garneau의 음악「Black Hawk Waltz」(Hidden Track)

 

 

 

몰락의 맛

 

 

 

  네가 하프라인을 줄기차게 넘나드는 왼쪽 날개였을때

  누군가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네가 출렁이는 골망처럼 환호성을 네지를 때마다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으깨고 있었다.

 

  네 시선이 오른쪽 카메라를 의식했을 때,

  전광판에 비친

  너의 뻥 뚫린 뒤통수와 마주쳤을 때,

  누군가 네 얼굴이 새겨진 은화들을 녹여서

  한 발의 탄환을 만들고 있었다.

 

                                                   *

 

  네가 플래시 세례를 받아

  안락의자의 늙은이로 다시 깨어났을 때

  산성山城처럼 커다란

  네 초상화를 그리던 잡부들은

  수염을 그려낼 목탄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사실은…… 갑자기 늘어난 네 흰 수염들 때문에

  초벌한 선산先山 전체를

  다시 한 번 불태웠다고 고백했다.

 

  너는 콧구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달덩이를 올려다보며 파이프를 입에 물었다.

 

                                                   *

 

  시간은 맑은 콧물처럼 훌쩍훌쩍 뒤로 흘러,

  거친 약솜으로 콧물을 훔치다 인중이 벌겋게 달아오른, 어느 저녁나절.

 

  네가 가지절임을 억지로 삼키는 아이였을 때

  네 어머니의 도마 위에서 사내들은 코가 잘려나갔다.

 

  네가 가지절임에서 질질 새어 나오는 물빛으로 잠들 때

  코 잘린 사내들이 수면 위로 입술을 떠올렸다.

 

  네가 물었다.

  너희의 이름은 무엇이냐?

                                                                                그들이 답했다.

                                                                            코 잘린 심연이오.

                                                                         핏물 빠진 수련이오.

 

                         수면에 바싹 다가가서 네가 물었다.

                               그럼 네 이름은 무엇이냐?

                                     바싹 다가선 코에

                       코 잘린 자리를 맞대며 그들이 답했다.

                             잘린 코들을 지지는 인두요.

                       몸을 버린 창백한 코…… 냄새를 맡아라.

                                          기억해내라.

                                          기억해내라.

 

                                                   *

 

  그렇다.

  너는 규토硅土 위에 지어진

  두 개의 집에 살았다.

 

  첫 번째 집에 돌아오면 네 어머니가

  축구화를 뒤집어 넣어주었다.

  신발장 속으로

  신발장 속에서

  정든 피라미드가 닳고 있었다.

  남몰래 가지절임을 뱉었던

  네 입안에서

  네 입안에서

  귀뚜라미가 울고 있었다.

 

  두 번째 집으로 돌아가면 네 아버지가

  마우스피스를 물려주었다.

  열기와 침묵 사이로

  열기와 침묵 사이에서

  관중들의 목젖이 헐고 있었다.

  어깨를 맞대고 양손으로 거시기를 가린

  네 이빨들 뒤에서

  네 이빨들 뒤에서

  골키퍼가 떨고 있었다.

 

                                                 *

 

  너는 총구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탄환이 장전된 파이프를 빨고 있다.

 

  네가 말했다.

  그렇다. 이것은……  냄새가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잡부들이 말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창문에 바싹 다가서서 네가 말했다.

                               이것이 파이프가 아니라면

                                     이것은 또한……

                                   가지절임도 아니다.

 

  너는 파이프에 불을 당긴다.

 

                                                  *  

 

  파이프는 단 한 번 격렬하게 불을 뿜었고, 양 갈래로 뚫려 있는 화장터의

굴뚝처럼, 너의 머리통은 앞뒤가 분간이 되질 않아 연기가 오래 머물렀다.

비탄과 폭동이 동시에 메아리치며 두개골 같은 성채城砦를 무너뜨렸고 폭

우 속의 지렁이처럼 장례 행렬은 잿더미 선산으로 민머리를 들이밀었다.

네 심복이 중얼거렸다.  유지를 받들겠습니다.  선생님의 오늘까지를 초상

화에 넣겠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선조께서는…… 닥쳐올 사건보다 열등

하게 존재하지 말라고 하셨지요.  잡부들은 무너진 성곽의 돌들로 무덤 위

에 탑을 쌓았고 꼭대기에 네 가죽을 벗겨 만든 커다란 북을 달았다. 쇠파이

프로 북을 내려치며

 

  심복이 물었다.

  선생, 이것은…… 파이프가 맞지요?

  초상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

  * 마그리트의 그림「이미지의 배반(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불안의 탄생석

 

 

 

  처음으로

  누군가 말했다

 

  여길 봐 우리가 무엇 앞에 서 있는지

  커다란 바위가 있고

  작은 돌들이 있어

  커다란 바위 둘레를 맴돌면서

  어떻게든 옮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죽을 때까지 함께일 수 있다

  그러나 작은 돌들을 걷어차면서

  어쨌든 치울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너나없이

  두 손 다 썼다고 여기면 먼저 떠나는 거다

  아마 죽을 때까지 어긋나겠지

 

  누가 먼저 말했건 그건

  더 이상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시 처음으로

  비가 내린다. 빗방울. 빗방울을 끌어내리는 손은 더 가벼운 빗방울들이다. 빗방울들. 작은 창에 게으르지만 분명하게, 내 뒤틀린 의식 위로 또 다른 흐름을 보태며 방점을 찍으며, 애써 가라앉힌 닻을 끌어올린다. 닻들을 올린다. 닻들을 끌어올리는 손은 더 무거운 닻이다. 닻을 올린다.

 

  처음에 덧붙이며

  눈뭉치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두발자전거를 탄다. 오르막길. 자전거에서 내린다. 네발자전거가 되어 나는 언덕을 끌고 있다. 내가 끌고 있는 것은 언덕이 아니라 단지 내 시선이다. 그 누가 한 번도 앞을 지나간 적 없는 것처럼 안경을 닦는다. 그 누가 한 번도 뒤를 봐준 적 없는 것처럼 성냥을 긋는다.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다.

 

  처음에로 연결된 전신주

  지나치며 본다. 아직도 묻히기를 거부하고 허공에 붙들린 채로 또 다른 경이의 교각으로 떠 있는, 그것을 본다. 높은 뇌압腦壓을 부여잡은 양극지의 긴장과 그보다 질긴 피복으로 감싼 무도정無道程의 흐름. 흐름? 순환. 그 성긴 편직編織건물들 사이 무정형으로 누빈 풍경들, 서로의 몸속으로 쑤셔박은 배관들을 나는 언덕에 심긴 채로 내려다본다. 비탈길. 비탈길? 가속구간. 

 

  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덩이가 구른다

 

  언제나 처음인 것처럼

  머리맡에 냉장고를 두고 이부자릴 편다 누군가 십 년째

  같은 자리에서 냉장고 문을 연다 위에서부터 차례로

  내용물은 모른 채 그것을 나눠 품은 비닐들

  기한 지난 쇠잔한 눈빛들 푸르게

  푸르게 발등으로 떨어진다 움찔

  움찔 냉장고 옆에 잠들어 있던 내가

  눈 뜬다 그 발은 아무것도 꺼내지 않고 문을

  닫는다 이마와 귓불이 서늘하다

  반쯤 덜 녹은 눈빛 얼렸다가

  닫힌다 냉장고가

 

  마지막인 듯 처음으로

  웅웅거린다……  꿀벌 떼가 비상하는 꿈…… 낡은 선풍기……  말벌이 되는 꿈……  라디에이터……  꿀벌 떼가 덮치는 말벌이 되는 꿈…… 물 새는 보일러……  내 꿈이 너의 꿈에 침수되는 꿈…… 따뜻해……  자다가 투욱,

  힘껏 감아 던진 고무동력기

  힘줄 풀리는 소리

  들린다. 예감의 오라 감기는 소리.

  뒤에서 팽팽하게 당겨지는 목줄.

  나는 기울어지며

  수평을 무너뜨리며,

  내가 딛고 있는 경계의 접점 속으로

  매듭 속으로 파묻힌다.

 

  또다시 처음에 덧붙이며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 눈사태에 이은

  산사태. 팔다리 수십 개

  눈덩이마다 박혀 있다.

  눈덩이는 수천 개

 

  처음이 어려운 것이다

  냉장고 문짝에서

  자석이 떨어진다.

  한기에 파묻힌 내 이마로

  자석이 떨어진다.

  낮달, 처음에로 끌려갈 뿐이다.

  별들의 예인선 다가온다.

  낮달.

 

  어렵게 처음에 덧붙이려는

  몸 잃은 팔다리 수만 개

  제자리를 찾아 밤하늘에 꿈틀거린다.

  나는 아— 하고

  처음으로 올려다본다

 

 

 

 빙점(氷點)

 

 

 

  이곳은 아무리 지나쳐도 강조되지 않는다

 

                                                     *

 

  욕조가 없고 창문이 없고 절정이 없으리라는 사실을 나는 또 지나친다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빙판이 투명해질 때를 조심해야 한다 내가 딛고 선 꿈이 수위를 높일 때를 너무 많은 심증은 초점을 부러뜨린다 네 탓이오 네 탓이오 너의 큰 탓이다 그러므로 가파르게 책망하오니…… 이 밤의 심지는 깎여나간다

 

                                                      *

 

  빛의 탄주彈奏는 눈앞을 컴컴하게 만든다 이곳에서 소금은 고향을 잊는다 이곳에서 낙엽은 스스로 썩지 않는다 이곳에서 물방울의 세계는 다시 한 번 뒤집히고 중력은 잠의 머리채를 잡아챈다 그리고 검고 매끄러운 벽돌이 구워지고 벽돌은 어떤 색유리보다도 성실하게 빛을 상영한다 이곳에서 방아쇠는 당겨지지 않았으나 메아리는 그 죽음보다 많은 뼈들을 일으켜 세우며 끌려간다 시간 밖으로 호명할 수 없는 날씨 속으로 기억의 구멍은 저벅저벅 뚫리고 그 숨통을 매듭지을 구두끈은 언제나 모자라다 이곳에서 방충망은 벌레와 문자를 구분 없이 거르고 부들부들 기도문을 읽으면 악몽은 기도문을 거꾸로 뇌까린다 코앞에서 마주 보는 거울 속에서 그 누구도 마주보지 않는다 그곳에서 유한은 무한을 함부로 다루기 시작한다 이곳에서 더 이상 되풀이되지 않으리라  나는 촛불을 불어 이곳을 구기고 싶다 저편에서 유언을 적지 못한 하늘이 날마다 자신을 번복하듯이 나는 아무리 깎아내도 강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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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결과 발표

 

 

  [심사 경위]


   올해로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은 14회째를 맞이한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인유는 흔한 수사지만, 그간 배출된 작가, 시인, 평론가들의 면면을 떠올리면 2000년대 이후 한국 문학의 ‘강산’을 변화시키는 데 이 상이 기여한 바를 자부하고 싶어진다. 문학의 새로운 진화를 적극 수용하고, 진화의 양태와 생리를 한발 앞서 찾아 읽겠다는 의욕과 의지는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스스로와의 약속이었다. 그래서 이 ‘상징적 입사식’의 통과는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해야 하는 쪽의 부담만큼이나 그것을 골라내고 가늠해야 하는 쪽의 어려움도 잇따른 과정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뜻 깊은 호명의 순간으로 이 상을 거쳐 간 이들의 행보와 다채로운 축적은 상의 성격을 형성하고 유지하고 있으며, 이 점이야말로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의의와 전통을 세우는 가장 든든한 뼈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이제 일부러 표내지 않아도 표가 나는 자연스런 모양새를 얻고 있는 듯하다. 올해 응모된 작품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기성의 세계에 기대거나 안주하기보다 다소 서투르고 투박해도 자기 본연의 목소리를 서사의 구성 가운데, 행간의 숨은 어조 속에 구축하고 표명하려는 의도가 뚜렷하게 드러난 예가 많았다. 이러한 강한 의도성이 완성도를 감하게 만드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험성에 대한 예민한 자의식은 여러 시행착오를 겪는다 해도 새로운 문학을 낳는 밑거름이자 그러한 욕망을 가동하고 지속시키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그러니 기성의 문법과 스타일에 기대기보다 실험의 가능성을 믿고 미지의 결과를 향해 성큼 나아가는 과감한 걸음에 마땅히 격려의 박수를 쳐주어야 할 것이다. 문학과사회 신인상은 그러한 과감성이 성숙의 예비조건으로 감지되는 문학적 동량을 향해 열린 문이자 편안한 익숙함보다는 때로 낯선 불편함을 마다하지 않는 오롯한 개성의 출현을 위해 마련된 통로이다. 그리고 이것은 본 상이 소수의 향유자가 고집하는 특정의 경향을 지지한다는 것과는 그 뜻이 엄연히 다르다. ‘신인’의 함의가 결정되지 않은, 결정되길 거부하는 현재 진행형의 가능성을 가리키는 한, 한국문학의 역사적 풍경을 새롭게 바꾸어갈 징조로 예감되고 문제적 징후로 되새겨지는 모든 다양한 시도와 결실에 우리는 언제든 첫번째로 그 이름을 불러줄 것이다.


   활짝 개방된 문과 닦아놓은 길을 따라 나타날 새로운 얼굴들은 기쁜 마음으로 맞이할 반가운 존재들이다. 올해는 신인상의 이러한 성격에 어울리는 이름을 부를 수 있게 되어 더없이 즐거운 한 해다. 총 981명이 응모한 가운데, 시 부문에는 483명, 소설 부문에는 487명, 평론 부문에는 11명이 노고의 산물을 보내주었다. 두 차례의 심사가 이루어졌으며, 4월 4일에 응모작 전체를 살피는 예심이 열렸고,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심사자들이 2주간 재독한 뒤 4월 18일에 본심을 진행하였다. 지난해에 소설 부분에서만 당선자를 내었던 아쉬움 탓에 올해 예심에서는 모든 부문에서 당선자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더더욱 주의 깊게 원고를 살피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오랜 검토 끝에 시는 16명, 소설은 13명, 평론은 2명의 응모자가 예심을 통과하였고, 본심에서 이들 중 당선의 후보로 꼽을 수 있는 작품을 선별하여 최종 논의에 들어갔다. 시와 소설 모두 후보작들이 예년에 비해 각자의 다양성을 뽐내는 경향이 두드러져 해당 작에 대한 심사자들의 품평도 상세하게 제시되었으며, 그만큼 토의도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논의 끝에 심사자들은 문학과사회 신인상의 취지가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 이견 없이 동의하였고, 최종적으로 신인상이라는 명칭에 걸맞는 작품에 작은 영광이 주어져야 한다는 데 흔쾌히 합의하였다. 이렇게 행복한 고민의 과정을 거쳐 올해에는 시와 소설 두 부문에서 당선을 결정하였다. 두 분의 당선자가 ‘새롭다’라는 형용에 어울리는 인물임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 심사자들의 마음은 뿌듯하다. 비록 평론 부문에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지만, 텍스트와 대결하길 마다하지 않는 치열한 비평적 성찰의 싹을 확인하였으니, 내년에는 좋은 결실이 있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문학이 여전히 인생을 걸어볼 만한 벅찬 꿈이라는 것을 자신들의 글을 통해 돌아보게 해준 응모자들 모두에게 이 자리를 빌려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리며, 글쓰기의 고통을 마다하지 않는 예비 작가들에게 동병상련의 공감과 힘찬 응원을 함께 전한다.

 

 

   심사위원

   김형중 강계숙 이수형 조연정 강동호

 


 

심사평


[시 부문]


  _작년 신인상 공모에서 시 부문은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미래의 시’를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에 좀더 엄격하려는 욕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투박한 눈이 그것을 미처 알아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등단 이후 의욕적인 자세로 후속 작업에 대해 고민하며 자신의 문학 세계를 단단하게 일구어 나가는 많은 신인들을 보며, 당선작을 내지 못한 필요 이상의 망설임과 무책임한 태만을 동시에 반성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올해 심사에서는 더 단호해지고 더 섬세해지고자 했다. 이러한 우리의 결심에 응대해주는 시들을 적지 않게 만나볼 수 있었다.
   올해 시 부문 응모자는 모두 483명으로 그중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오른 응모자는 김후빈, 윤은숙, 이다희, 이설빈, 이수인, 이종민, 이준형, 정솔아, 제주림 이상 9명이다. 9명 응모자의 시들을 꼼꼼히 읽은 후 김후빈, 이설빈, 제주림의 시로 본격적인 논의 대상을 좁혔다. 시와 소설의 경계를 실험하듯 장황하게 서술하며 시적 긴장에 소홀한 경우, 체험의 시적 형상화에 있어 체험의 인공성이 다소 어색하게 두드러진 경우, 단순한 문장의 나열이 간결한 배치의 매력으로 상승하지 못한 경우, 무엇보다도 기성 시인의 분위기를 강하게 발산하는 경우 등이 배제되었다.


   <非子> 외 9편을 응모한 김후빈의 시 중에는 죽음을 다루는 시들이 흥미롭게 읽혔다. <자연사박물관> <눈의 결정> 같은 시이다. 저수지에서 익사한 “언니”의 죽음을 그리는 <눈의 결정>은 특히나 강렬했는데 “물이 눈 속에서 얼어버릴 때” “물의 무늬가 결정지어질 때” 같은 구절들이 죽음의 순간을 강하게 환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는 소재가 시적 충격을 위해 동원되었다기보다는 어떤 강력한 체험과 결부되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정도로 김후빈의 시에서는 전반적으로 깊은 울림이 느껴지기도 했다. 결정적으로 김후빈의 시를 당선작으로 뽑는 일을 망설이게 한 것은 응모작의 제일 첫 머리에 놓인 <非子> 같은 시 때문이다. “비자나무”와 “非子”의 동음이의어를 활용하고 더불어 한자 非자의 이미지까지 함께 녹여낸 이 시는 이러한 조합의 상상력이 조금 단순하게 보였고 결정적으로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아마도 가족 안에 새겨진 시간의 형상들)와 매력적으로 뒤섞이지 못했다는 인상을 주었다. 언급한 작품들 이외에 특별히 인상적인 작품을 찾지 못한 것도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설빈의 시는 보내온 열 편의 시가 다소 편차를 보이기는 했지만 상상력의 깊이와 넓이의 측면에서 세 명의 후보작 중 가장 패기 있는 작품들로 느껴졌다. 시 한 편 한 편의 길이가 다소 길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고 출처를 알 수 없는 다양한 이미지들이 조금 두서없이 장황하게 병치되는 부분들도 없지 않지만, 그러한 병치가 말의 반복과 변주를 통해 리듬감을 형성해 시적 긴장을 성공적으로 이룰 때나, 결국 시인의 의도 안에 잘 통제되고 있는 듯한 안정감으로 승화될 경우, 그 매력이 상당했다. <울타리의 노래>가 전자에 속하는 성공적 사례라면 <몰락의 맛>은 후자에 속한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자신만의 독창적이고도 견고한 세계를 오랜 습작의 기간을 통해 단련해왔다는 확신은 받을 수 없었다. 생경함에 기대려는 태도가 오히려 낡은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했고(“규토硅土” “빛의 탄주彈奏”와 같은 낯선 한자 어휘를 노출시키는 장면들), 비슷한 이미지의 어휘들을 교체하며 같은 문장 구조를 단조롭게 나열하는 <빛>과 같은 시는 시적 방법론에 대한 응모자 자신의 불안을 반증하기도 했다. 물론, 스스로의 미숙함에 대한 불안으로 인해 범하는 실수가 줄어들 경우 어떤 매력적인 작품을 보여줄지는 <울타리의 노래> 같은 시가 증명해주고 있다. 이 가능성을 쉽게 저버릴 수는 없었다.


   <미래의 식탁> 외 9편을 응모한 제주림은 간결한 문장들 속에 일상적 삶의 단편들을 낯선 방식으로 매끄럽게 녹여내는 솜씨가 안정적이다. 이 응모자가 얼마나 오랜 습작의 시기를 거쳤는지 확신하게 해주는 부분이다. 관례에 어긋나는 언급인 듯도 하지만, 사실 제주림이 작년 신인상 심사의 본심에서 언급되었던 어떤 응모자와 다른 이름의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를 보고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는데 놀랍게도 작년의 심사평에서 언급되었던 이 응모자의 단점들이 올해의 응모작에서는 거의 대부분 보완되어 있었다. 그래서 특별히 애착이 가는 응모자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상의 익숙한 풍경들을 낯선 관계를 통해 재현하는 방식이 한정적이라는 점, 다루고 있는 대상 세계가 조금 협소하다는 점 등 많은 부분이 극복되어 있었다. 그런데 심사 현장에서 한 심사자가 지적했듯 제주림의 시는 아직 첫 시집을 내지는 않았지만 최근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이십대 중&#8231;후반의 어떤 여성 시인들이 공통적으로 보이는 미니멀리즘적 경향을 환기한다는 점에서 우리를 주저하게 했다. 이러한 공통된 시적 성향이 어떤 시대나 세대의 일반적 특징을 재현한 결과인지, 아니며 그저 일시적인 문학적 유행 현상의 결과인지 명확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이지만, 어느 쪽이든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제주림만의 독창성이 희박해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제주림의 시를 읽으며 우리는 시적 독창성과 완성도를 함께 갖추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되었다.


   이 세 명의 후보자 중 특히 이설빈과 제주림의 시에 대해 오랫동안 논의하였다. 논의가 꽤 길어졌는데 이는 심사위원 간의 의견 차이 때문이라기보다는 이 두 응모자 간의 뚜렷한 특징의 차이 때문이었다. 세 명의 심사위원들 각자가 애초에 당선작으로 염두에 둔 쪽은 분명한 편이었지만, 이설빈과 제주림의 시를 함께 낱낱이 비교해 읽을수록 각각의 매력은 물론 아쉬움도 상대적으로 커지면서 마지막에는 어느 쪽도 쉽게 지지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설빈이 보여주는 미숙함과 가능성에 대해, 제주림의 시가 보여주는 안정감과 익숙함에 대해 주로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끊임없이 공전되었고 결국 신인상의 기본 취지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고, 마침내 우리는 이설빈을 선택했다. 뻔한 말로 현재의 완성도보다는 미래의 가능성을 생각하기로 했다. 마지막에 손에서 내려놓은 제주림의 시에 대해서는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크고, 결국 손에서 놓지 않은 이설빈의 시에 대해 불안한 마음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단호해지기로 했다. 우리는 이설빈의 가능성을 믿어보기로 했다.
   선택을 당하는 쪽이 아니라 이번에는 운 좋게도 선택을 하는 쪽의 입장에 서게 된 사람으로서, 선택하지 않고 내려놓은 쪽에 마음이 더 쓰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우리 자신의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듯 선택에서 배제된 사람은 쉽게 자책에 빠진다. 상실과 실망에 대한 보상 행위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사람을 탓해볼 수도 있다. 건강한 결과로 이어지려면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그 과정들이 부디 스치듯 짧게 지나가기를 바란다. 스스로를 믿고 앞을 보기를 바란다. 조금은 뿌듯한 마음으로, 대체로는 불안한 심정으로 시인으로서의 첫 발을 내딛고 있는 수상자 이설빈에게도 똑같은 말을 반복해 하고 싶다. 스스로를 믿고 앞을 바라보자.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시 당선 소감

이설빈

1989년 서울 출생.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중.

 

어렵고

 

가렵다.

 

 

두렵고

 

마렵다.

 

             

             ——《문학과사회》2014년 여름호

출처 : 푸른 시의 방
글쓴이 : 강인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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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미술관 / 이상은

 

 

로트렉의 말이 웃고 있다

샤갈의 닭이 울고 있다

칸딘스키는 알 수 없는 음악을 연주한다

마티스는 수줍음을 숨기고 강렬하다

 

바에서 만난 남자가 전시회 티켓을 주었다

 

친구에게 자랑하며 찾아간 덕수궁은 겨울 날씨에 치여 쓸쓸했다

 

내가 걸려있는 벽이 보이는가

사람들은 날 보지 않고 지나간다

봐주세요, 봐주세요, 나의 향기를 맡으세요!

 

단정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며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지, 한다

 

겨울, 미술관은 사람들로 북적인다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엄마를 찾는다

엄마, 엄마가 늙는 게 싫어

더 이상 늙지 마세요

난 엄마에게 젊어 보이는 선글라스를 끼운다

 

엄마와 내가 손잡고 미술관에 걸어 들어간다

 

 

 

 

[심사평]

 

응모작품이 질이나 양에 있어 예년에 못 미치는 것은 아니었지만, 무언가 성에 차지 않았다. 요즈음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의 여러 문제점이 다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를 쓰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남의 시를 읽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연 어떤 시가 좋은 시인지 알지 못한다. 시를 읽는 가운데 좋은 시를 읽고 감동하고 이어 시를 쓰게 되는 것이 흔히 있는 시수업의 순서인데, 이것이 다 생략된 채 창작교실 같은 데서 기계적으로 시 쓰는 법을 익혀 억지로 시를 만들다 보니까 이런 현상이 벌어지지 않는가 싶다. 한편 표현하고 싶은 것이 너무 많아 시를 쓰겠다는 사람보다 말의 맛에 빠져 시를 쓰겠다는 사람에 더 신뢰를 둔다는 한 외국 시인의 말에도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 같은 불만에도 불구하고 당선작으로 뽑을 만한 시는 여러 편이 되었다. '메리제인'(정수지)은 궁상과 청승이 없이 경쾌하고 밝아 좋았다. 더듬거리고 우물거리는 대목도 없이 발빠르고 날렵하다. 휘파람이라도 불며 환한 대낮에 꽃길을 가는 느낌을 주는 시들이다. 다른 시의 성적인 이미지들도 칙칙하고 찐득어리는 대신 수채화처럼 곱다. 한데 작품의 편차가 심하다. '그 겨울날엔'(고봉국)은 특이한 분위기와 정서를 잘 그려낸 아름다운 시다. "쓸쓸함과 낭만이 너무나도 서글퍼", 또는 "쓸쓸함과 낭만이 떨어져 내린 자리" 같은 치기어린 거슬리는 표현이 없었더라면 좋았을 것 같다. '거울'(라한희)은 삶의 의미 따위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 상당한 수준으로 정리가 되어 있어 고개가 끄덕여진다. 한데 이상하게 머리로 쓴 시라는 느낌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너무 큰 얘기를 하려는 중압감을 벗어버리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을 것이다.'겨울, 미술관'(이상은)은 감각이 모던하고 신선하여, 시를 읽는 재미를 한껏 맛보게 해준다. 어려운 내용이 아니면서도 아무나 생각할 수 없는 것으로, 발상이 상식적이거나 평이하지 않은 것도 이 시의 좋은 점이다. 같은 작자의 '너에게'는 뛰어난 사랑 시로, 말을 다룸에 있어 상당한 수준임을 짐작케 한다. 토의 끝에 심사자들은 이 네 응모자의 시 중에서 이상은의 '겨울 미술관'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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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디의 시위 / 김완수

 

 

반디의 아스라한 시위가 궁금했다

다 켜지 못한 불을 꽁무니에 붙이고

구경꾼도 야경꾼도 없이 시위하는 걸 보고서

짠한 현장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한여름밤의 이슬 같은 몸짓이라

그보다 뭔가 고결한 이유가 있으려니 생각했다

 

처음엔 저를 청정으로 내모는 결벽인 줄 알았으나

반디가 제 의식(意識)에서 불면하는 건

서툰 자의가 아니었다

대낮의 쇳소리가 총성같이 울리고

소리의 여백이 산그늘보다 넓을 때

반디는 제가 뿌리내린 숙면에서 깨

의식의 게토로 이주했다

 

사람의 퇴거 명령이 탈바꿈을 재촉하자

반디는 목소리를 키웠다

세상 이목에서 사라질 줄 알아도

날로 산란(産卵)하는 인적은 버틸 수 없었겠지

야박하게 반디들 간을 내먹던 차윤(車胤)*

일찌감치 그 목소리를 읽었을지 모른다

외면의 우범지대에서

내게 황달 같은 불을 켠 반디

 

내 발그레한 시선에 촛농이 떨어지는데

하루살이들의 가열(苛烈)한 시위를 보면서도

손사래로 눈 가릴 수 있을까

이제는 두메 끝 벼랑으로 날아가

촛불을 살리는 반디

반디의 꺼지지 않는 의식이 궁금하다

 

* 가난하여 여름밤에 반딧불이를 모아 그 빛으로 글을 읽었다고 하는 중국 동진(東晉)의 학자

 

 

 

 

꿈꾸는 드러머

 

nefing.com

 

 

 

[심사평]

 

세 사람의 심사위원(황지우 나희덕 신형철)이 각자 진행한 예심에서 추려낸 본심 진출작의 리스트는 거의 일치했다. 특수한 취향에만 호소하는 작품들이 아니라 객관적 기준을 넉넉히 만족시키는 작품들이었다는 뜻이다. 본심에 오른 작품만을 놓고 본다면, 이들

 

작품의 수준은, 신춘문예나 문예지 신인상의 본심과 비교했을 때 우열을 쉽게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뛰어났다. 문학상의 권위는 오로지 응모작의 우수성이 부여해주는 것일 뿐이다. 이만하면 5.8문학상의 권위를 흔쾌히 인정해도 좋으리라.

 

총 여덟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랐다. <반성> 5, <하숙방 참사> 4, <고장 난 체육시간> 9, <반디의 시위> 7, <구름일기> 6, <말을 하고 있었네> 6, <눈동자> 6, <꽃씨의 수화> 6.

 

<반성> 5편은 반성이라는 주제를 집요하게 천착하고 있는 일련의 연작시들인데, 상투적인 인식과 표현을 배반하고 말겠다는 시인 자신의 긴장 상태가 작품 전편을 관통하고 있고, 말을 하는 방법은 산문적인데도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유려한 리듬이 형성되게 만드는 스타일도 인상적이다. 오랫동안 수련을 한 (아니면 그렇게 느껴지게 하는 기교를 갖고 있는) 응모자로 보인다. 그러나 연작 전체를 보면 뛰어난 결과라고 평가할 만하지만, 개별 작품들이 각자 홀로 설 수 있을 만큼의 독자적 완성도를 갖고 있지 못해서 그중에서 특별히 우수한 한 편을 고르기가 어렵다(, 당선작이 될만한 작품은 없다)는 점이 결정적인 결함으로 지적되고 말았다.

 

<하숙방 참사> 4편은 5.18의 참상을 구체적인 인물이나 사건을 통해 그려내고 있어서 주제의식이라는 측면에서는 5?18문학상의 취지에 잘 근접해 있다. 여리고 민감한 감수성으로 일상과 기억, 산 자와 죽은 자 사이를 넘나들며 죽음의 트라우마를 형상화한다. 그러나 소재의 핍진성에 비해 시상을 전개시키는 힘이나 표현력은 다소 떨어진다.

 

<고장 난 체육시간> 9편은 다채로운 내용과 형식으로 부조리한 현실과 역사의 폭력성을 그려내는 솜씨가 활달하다. <양치기 소년의 증언>에 나타난 잔혹 동화나 <죽음의 춤>에 나타난 이발사의 우화, <귀 먼 자들의 도시>에 나타난 환청과 시체놀이 등은 단순한 알레고리가 되고 만 것이 아니라 풍부한 전언들을 함유하고 있어서, 5.18을 직접 다루지는 않지만, 은유적이고 메타적인 시선으로 역사적 상처를 보편적인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있다고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고장 난 체육시간>이나 <사기인간지구력> 같은 미숙한 작품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 시적 완성도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 부족하지 않은가 한다.

 

<구름일기> 6편의 경우 보내온 시가 모두 골고루 뛰어나지만 <나무도마><살아있는 별>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후자는 한 문장도 더하거나 뺄 것이 없다 할 만큼 잘 짜인 시다. 805월에 대한 책을 읽다가 책에 나오는 어느 아름다운 죽은 사람에 대해 깊이 생각

 

하는 일이, 하늘의 별을 향해 전화를 거는 일이 되고, 그 별이 다시 책갈피에 끼워져 있는, 지금도 살아 있는 별이 되는 이 상상력의 흐름이 아름답다. 그러나 80년 광주를 제재로 삼았으되 그로부터 새로운 역사적 실존적 인식을 생산하는 데 이르지는 못했다는 점, 기타 다른 시들의 단정한완성도가 소박한인식론의 산물인 것처럼 보인다는 점에서 대상으로 천거할 수가 없었다.

 

<말을 하고 있었네> 6편은 베트남전쟁 당시 한국인에 의한 민간인 학살을 다룬 연작들이라는 점에서 5.18의 또 다른 타자를 발굴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 비극적인 죽음을 증언하는 것은 뜻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고, 한편 한편에 진심 어린 노력이 투여돼 있다는 것이 충분히 느껴지지만, 시적 형상화는 전반적으로 소박하다.

 

<눈동자> 6편은 언어적 감각이 섬세하고 신선하며, 전체적으로 시적인 완성도가 높은 편이다. 일상의 풍경 속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예민하게 포착해 내고 그것을 오래 되새김질한 문장들이 인상적이다. 이 내성적이고 개인적인 목소리는 충분히 독창적이고 매력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5.18문학상의 취지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대상으로 선정하기는 어려웠다.

 

<꽃씨의 수화> 6편에서 특히 빼어난 시는 <꽃씨의 수화>였다. 이 시는 광주항쟁 초기 사망자 중 한 사람인 김경철씨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이는데, 유사한 유형의 시들이 고루함과 생경함을 벗어던지지 못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빼어나다. 과거와 현재, 상처와 극복, 현실과 이상이라는 대립적 구도가 시를 안정적으로 떠받치고 있으며, 꽃씨와 수화의 이미지도 제 몫을 아름답게 해낸다. 부분적으로 어색한 표현들이 있지만, 여느 응모작들보다 한결 더 진실한 울림이 있는 작품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응모자가 함께 보낸 다른 작품들의 수준은 이만하지 못했다.

 

결국 대상은 <반디의 시위> 7편을 응모한 김완수씨에게 주어져야 한다는 데 심사위원들은 흔쾌히 합의할 수 있었다. <반디의 시위><혀짤배기 사관>이 특히 인상적이었는데, 둘 중 <반디의 시위>를 대상작으로 선정하기로 최종결정했다. 응모작 대부분이 골고루 우수했거니와, 심사위원들의 아래 논평은 이 응모자의 투고작품 전반에 대한 것이다. 골자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오랜만에 김수영의 시를 다시 읽는 것 같은 강렬한 부정의 정신과 그 심지에서 타오르는 시적 사유가 돋보인다. 군데군데 다소 자의적인 어색함이 시를 뻣뻣하게 경화시키는 대목이 있지만, 텍스트 안에 스스로 꿈틀대는 사유의 근육이 완강하게 느껴진다.”(황지우)

 

간결하고 담백한 시어로 대상을 정확하게 조준해내는 집중력이 있고, 시적인 논리나 구조가 탄탄하다. 5.18이라는 사건의 재현보다는 폭력의 메커니즘을 분석하고 풍자적으로 그려냄으로써 주제 의식을 확장하고 있다. 지성적 태도를 견지하면서도 딱딱하거나 도식적인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서정적 온기와 비판적 의식이 적절한 협업을 통해 균형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나희덕)

 

시에서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것이 언제나 제1의 장점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도무지 하고 싶은 말 자체가 없어 보이는 시들을 읽다가 지칠 때 즈음이면, 자신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고 그것을 백퍼센트의 상태로 전달하기 위해 역력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작품들 앞에서 반가워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작품들이 그러했다. 특히나 5.18문학상이니, 이러한 장점이 더 크게 대접받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는 한편 시적 표현의 묘를 놓치지도 않고 있으니 여러모로 모범적인 작품들이라고 해야 하겠다.”(신형철)

 

김완수씨의 수상을 세 사람의 뜻을 모아 경하(敬賀)한다. 세월호의 비극 앞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국가의 존재 이유에 대해 심각한 물음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와중에 5.18문학상 수상작이 우리의 분노와 슬픔을 논리화하고 역동화하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라는 우리 심사위원들의 마음은 전혀 엉뚱하거나 과도한 것이 아닐 것이라 믿는다.

 

심사위원 황지우, 나희덕,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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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우티건 풍으로 / 신윤서

 

 

선풍기의 날개 사이로 부는 바람은, 내 이름이다. 모기장을 둘러 친 침대에 기대어 워터멜론 슈가에서를 읽는다.

 

약속한 날들이 지나가버리고, 나는 결코 책제목처럼 달콤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는 몹시 쓸쓸했다. 당신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들판에 망연히 앉아 망초꽃이 흔들리는 것을 보고 있다.

 

강을 지날 때마다 높이 튀어 오르는 숭어의 은빛 비늘이거나,

빼곡히 적힌 수첩의 전화번호 따위로 우리의 관계가 표현되었으니,

그것은 참 슬픈 일이라 생각했다.

창가에 놓인 유자나무 한 그루가 칠 년째 열매를 매달지 않은 이유는 뻔하지 않겠는가.

 

선풍기의 날개 사이로 부는 바람이 나를 한 페이지 넘긴다.

오래 전 쉴 새 없이 내게로 날아들었던 그대들의 열렬한 편지들이 내 삶을 두껍게 하여

그동안 아무도 나를 즐겁게 읽어주지 않았다.

가끔은 아침을 거르고, 벌에 쏘인 듯 다급하게 지평선으로 가버렸다.

어쩌면 당신은 망초 속에서 늘 울고 있을지도 몰라서 새벽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로 짙은

안개가 내려앉는다.

 

경부선 첫 기차가 출발할 때까지 끝내 돌아서질 못하는, 여행 가방처럼 나는 무겁다.

긴 치맛자락처럼 책의 내용에 굵게 밑줄을 그으며, 서성이고 망설이다 끝내 나는

당신의 기억 속에서 현실로 다시 되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내 이름이 떠나버린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당신이, 선풍기 바람이 불어오는 모기장이 쳐진 침대 위에 누운 나의 반쯤 드러난

가슴을 열고 들어와 나를 달콤하게 읽어주기를 바란다.

당신이 나의 주인공이 되어 들판에 망연히 앉아 망초꽃이 흔들리는 것을

읽어줬으면 좋겠다.

 

 

 

 

 

군과 실천문학사를 따르면 신씨는 이번 '2회 오장환신인문학상''브라우티건 풍으로' 5편의 시를 응모해 당선의 영예를 안았다.

 

신씨에게는 상패와 500만 원의 상금을 주고, 수상작은 다음 달 발행하는 '계간 실천문학' 겨울호에 실린다.

 

이번 '2회 오장환신인문학상'에 전국에서 150여 명이 750여 편의 시를 응모한 것으로 알려졌다.

 

심사를 맡았던 송찬호·최금진 시인은 심사평에서 "신인으로서 지녀야 할 도전정신과 참신성, '재치''가치'로 바꿀 줄 아는 능력, 그리고 투고작들의 한결같은 완성도를 높이 샀다"고 말했다.

 

당선작인 '브라우티건 풍으로'에 대한 평은 "당신과 나의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고찰을 그리고 있다. 실험성과 사실성으로 양분돼 있는 듯한 지금의 문학 구도에서, 존재의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그의 작품들은 분명 희귀한 것이다. 이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유도 이에 있다"고 밝혔다.

 

신씨는 대구에서 출생해 부산에서 성장했다. 그는 2012년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대상을 받았다.

 

군은 회인면 출신인 오장환(吳章煥·1918~1951) 시인의 시적 성과를 기리고, 나날이 부박해지는 문학적 환경 속에서 시의 현실적 위의를 되새기기 위해 지난해 이 상을 제정했다.

 

오 시인은 한국 아방가르드 시단의 흐름에서 김수영과 황지우로 이어지는 하나의 길을 개척한 시인으로 1933'조선문학''목욕간'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왔다.

 

오 시인은 이후 '시인부락''자오선'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성백(1937)', '헌사(1939)' 등의 시집을 남긴 뒤 1946년 월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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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영화법(投影畵法) 외 4편

 

조 희 진


  투명 물고기였다 어시장 대형 수족관에서 보았던 살을 발린 물고기처럼 당신은 남은 뼈와 꼬리만으로 밤하늘을 유영하고 있었다 날숨 뱉고 아가미만 뻐끔거렸다
 
  당신의 깊은 속살까지 떠온 밤, 캄캄한 검은 비닐봉지 속에서 내가 점점 투명해졌다 유리파편처럼 부스러진 별 부스러기들이 남쪽물고기자리에서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주머니 속 거슬러 받은 동전이 더욱 쩔렁거렸다

 

  앙상하게 격자무늬로 남은 당신의 창, 당신의 서랍에는 아직도 딱딱하게 굳어가는 당신의 붓, 당신의 명분들이 가지런히 그대로 놓여 있다 뾰족한 붓끝을 물에 적신다 핏기가신 밤하늘에 아픈 갈비뼈 하나를 긋는다 쩍쩍 갈필이 난다

 

  자꾸 갈라지려는 내가 면도날처럼 선명해지고 싶어 눈 꼬리를 치켜뜨고 날카롭게 눈썹을 다듬는다 당신의 비린 냄새도 A병동 냉동 수족관에서 서서히 얼어붙어 화석처럼 선명하게 굳어갈 것이다 자라나지 않은 눈썹을 한밤중에 일어나 또 민다 

 

 


‘오늘’이라는 매뉴얼 

 

  이 달의 카달로그에도 네 바코드는 없었다 여전히 과거로만 똬리를 트는 내 인식 속의 오류, 단 한 번도 눈으로 마주친 적 없는 너를 마른 빵처럼 뜯어 먹다 이불 속으로 발을 뻗는다 이불을 눈 아래까지 끌어 덮고 멀티의 배꼽을 누른다 절반쯤 익어가는 정오의 햇덩이, 절반의 광고방송, 뉴스는 언제나 수족관의 열대어처럼 소리 없이 입만 달싹이는 현란한 구문의 반복 
  
  조간신문의 풍성한 메뉴는 새벽 네 시의 공복 속으로 던져진다 초고속 CCTV에 반짝, 우주 공간의 별 하나로 네가 찍힌 건 수년 전이었고 붉은 직인이 찍힌 네 생의 독촉장은 잊을 만하면 또 배달된다 오늘은 플라스틱 바구니에 시든 사과 향, 먹다만 사과는 금세 갈변되었다 햇살 한 번 들인 적 없는 위장 속에선 자꾸 신물이 올라왔다 사과껍질 안쪽에 붙은 과육, 그 사소한 분량만이라도 반송하고 싶다 슬픔 어딘가에 더 딱딱하게 익어갈 부드러운 육질이 남아 있다면 

 

  툭툭 굵은 실밥 터지는 소리 들린다 누군가 내 겨드랑이에서 초인종을 누른다 아무도 없는 긴 복도 끝, 검은 빗물만 뚝뚝 흘러내리고 있다 아직 끌러보지도 않은 크고 작은 상자 위, 또 배달된 젖은 짐들이 아무렇게나 쌓여가고 있다 터진 겨드랑이에 시침핀을 꽂는다 배열이 일정하지 못한 모서리의 아픈 시간들이 지금 무겁게 회복하고 있는 중이다

 

 

 

견인


  오래 버텨온 그가 무허가 컨테이너 박스처럼 녹슬어 가고 있다 튿어진 나일론 잠바 사이 그가 걸어온 구비 진 길들이 훤히 들여다보인다 자바라 방충망 샷시 인테리어... 때 절은 소매 끝의 내력이 건설 삼보중기 문고리에 쩍쩍 달라붙고 있다 뚜껑이 없어져버린 그의 잠속에서 이월의 난로가 꽁꽁 얼어붙어 있다 썬팅이 벗겨져 피부각질처럼 나달거리는 창문 안으로 부려진 시간들이 보인다 먼지 속에 박제된 꿈의 도구들, 벽의 내부로 찬바람 들이칠 때마다 죽은 빙어가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보인다 반쯤 떨어져 나간 차양이 표정을 철거당한 콘크리트 바닥위에서 덜컹거리고 있다 리모델링할 수 없는, 눈동자 속으로 얼어붙은 하늘 한 자락 무심히 펄럭인다 비장하게 녹슬어 가고 있는 철문처럼 눈꺼풀이 잠깐 열렸다 천천히 닫힌다 굳은살 박인 손가락 사이로 타들어가고 있던 꽁초가 그 이력의 한가운데로 툭, 떨어진다

 

 

 

비상등


저 쪽이 들판이라고 말해준 건 너였고
이 길이 곧 바로 동쪽 바다로 가는 길이라고 말해준 것도 뭉뚝한 너의 두 눈,
초봄이었지
몇 개의 길고 긴 터널을 지났는데 대관령에서 또 터널을 만났다
그런데 이게 뭐야,
육중한 몸의 앞다리 두 개를 펼쳐들고 언제나 어정쩡한 직립의 자세로 서 있는 백말의 조각상처럼 불쑥,
내 앞을 끼어든 것도 너잖아
작년에 핀 복사꽃이 올해도 복사꽃이라고? 오늘은 어제의 복사판이라고?
깜빡거리는 네 눈빛의 의민 또 뭐야,
내 기억이 안개 속에서 자꾸 지워지잖아
이 길 위에서 눈 한번 딱 감았다 떴을 뿐인데
저 들판의 꽃들은 언제 피었다 언제 져버린 걸까
희미하게 사라져 가는 네 눈빛 속의 말들
그 눈빛으로 다시 한 번 내 기억의 들판을 말해 줘

 

 

 

우기, 그렇게

 


물 향기 수목원 편백나무 울타리 곁에는 아카샤 모텔만 땅속으로 뿌리를 번성해 가고 있었다   
 
유리문 굳게 닫힌 미소지움 안과, 진료실 책상 위로 얇은 일간지들 묵묵히 쌓여가고 있었다

 

서로를 오해하거나 견주려 들지도 않았다
 
둥글게 솟아오른 미소지움 원시의 안구 속으로 몇 차례 낙뢰의 환영들이 흘러갔다  
 
백내장의 눈시울 같은 계절 그 너머, 양 날개 그물 살 부비는 소리 들렸다
 
불거져 나온 광대뼈, 나비 한 마리 슬쩍 앉았다 간 흔적, 단치마 사그락거리며 누군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등 갈퀴 풀숲을 헤치고 막 날아오르려는 북방기생 나비처럼 활짝 펴든 양 날개, 결절된 등 비늘의 시간들이 흩날렸다 

 

흐드득 풀숲에 떨어진 보드라운 잎맥들과 거세게 몰아쳤던 유월의 단상들이, 그렇게
 
긴 장마의 출구였다

 

 

 
[당선소감]

 

둑을 무너뜨리고 방류되는 물길 위의 한 잎 나뭇잎 
 
  무릴 지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저는 늘 혼자였던 것 같습니다. 어느 누군가가 단지, 제 피부색이 조금 검다는 이유로 출생년도가 조금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지나친 세금을 물린다면, 그건 분명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그 어떤 것도 새로 만들거나 조작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목적지가 모두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전혀 우왕좌왕하지 않았다면 그건 터무니없는 거짓이겠지요.
  불투명한 사물들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노작 홍사용 문학관 시창작반이었습니다. 아마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시편들을 접했을 때였을 겁니다. 서양의 전통적인 사조나 미학담론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우주적 상상력을 시에 투영시킨 작품들, 특히 만년의 꾸준한 창작활동을 본받고 싶었단 말을 감히 해도 될 지요.
  강둑을 무너뜨리고 방류되는 물길처럼, 시시각각 역마다 사람들이 방류됩니다. 제가 어느 지점에서 어떻게 흘러들었는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때에 따라 방류되는 그 물길 위의 한 잎 나뭇잎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시산맥’이라는 역에 방류된 제 시가 어떻게 해석될지 어떤 반열에 놓일지 걱정이 앞섭니다.
  시가 뭔지도 모르고 시 수업에 뛰어들어 얼떨떨해 했을 때의 최정례 선생님, 밥숟가락도 제대로 못 쥐는 제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숟갈질을 가르치며, ‘시’라는 ‘잡곡밥’의 거칠고도 쓴 맛을 곱씹게 만들어 주신 이덕규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돈이나 밥이 되는 것도 아닌 시 쓰는 것을 곱게 봐준 가족들께 고맙단 말 하고 싶고, 주야로 함께한 노작 시창작반 동료들, 햇살들도 늘 제 옆에  있다는 것, 잊으면 안 되겠지요.
  제 시의 방류를 도와주신 시산맥 심사위원님들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조희진

경남 함안 출생, 경기 오산 거주, 한국방송통신대 일본어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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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뀌꽃이 걸어오는 시간 외 4편

 

지 연


1
사내는 물비린내가 난다고 했다
여뀌꽃이 피기 전에 여자
유방암 항암치료를 하고 돌아왔다
사내는 다른 여자를 품고 있었다
나란히 앉아 피아노를 치면서
샵을 누르며 웃는 소리

 

계단을 내려가며
여자는 빛을 밟고 밟았다
외가로 보낸 딸아이를
왼쪽 젖무덤에 올려놓았다

 

2
도려진 가슴을 만졌다
살갗에 입을 부딪치며
수많은 여뀌가 숨구멍을 찾고 있었다

 

여자의 외짝 무덤이 철렁 떠오를 때마다 나는 욕실로 간다 전신 거울에 맺힌 물방울들 십년이 지났지만 가묘(假墓)의 하루, 하루가 흘러내린다 나에게 이혼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여자의 시간이 온다 몸에 붙은 젖무덤이 파헤쳐진다 여뀌들이 솟아오른다 물이 잘 빠지는 무덤에 여뀌꽃 어머니, 미끄럼 타는 물방울들 가묘 위에 가묘들

 

저승에 한쪽 가슴을 주고
이승에서 꺼져가던 여자
물방울에 기대면
나에게 빈젖을 물리고
여뀌꽃 피기 전에
투둑 떨어집니다

 

 

 

친절한 금자씨 2013 


어두운 방에서 고시공부하다 실성한 여자
산굴뚝나비처럼 걸어가고 있었어
연기처럼 날아올랐어
골짜기를 지나 바다를 지나 머나먼 사막

 

산굴뚝나비가 노을 한 입을 베어 물었어
네발을 겅중 세우고 날개를 접었다 펴고 있었어
광활한 어둠이 전갈처럼 다가왔어
표범무늬 날개눈이 커지고 있었어
삼켜도 삼켜도 날개로 달려오는 전갈들
산굴뚝나비 선인장에 숨어 이슬을 빨았어
무너져도 무너지지 않는 사구 그 깊은 창고에
산굴뚝나비 가시로 눈을 빗질했어
별이 떨어지고 있었어 아니, 하얀 모래알
여자가 그림자 속에서 속삭였어
전갈이 가위를 세웠어

 

그림자 머리가 쪼개지고 표범이
표범무늬 날개눈 속에 얼굴이
허기진 산굴뚝나비처럼
날개를 접었다 폈다 했어
모래 바람이 쏟아졌어
생의 메마른 무늬들
가루약 같은

 

 

 

봄에 따시끼를 듣다

 

  오후 세 시가 되면 사내는 알람처럼 멜로디언을 불지 사람들이 힐끔힐끔 못을 날리지 그러거나 말거나 사내는 화단에 앉아 나비야 노래를 스타카토로 깨워 부르지 천분(天盆)에 노랑나비 흰나비 날아온다고 뛰어다니지

 

  아이들이 몰려오지 발을 구르고 손뼉을 치지 따시끼 따시끼 왕따 시끼 따시끼 나비 반주에 맞춰가며 침을 튀기지 사내는 팔을 휘저으며 갓 심은 팬지꽃 위로 올라서겠다는 듯 꽃을 밟지 아파트 값이 내려갈까 조마조마한 사람들이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항의한다지

 

  통장이 삼천지구대에 민원을 넣었는지 사내가 사라졌지 지하주차장 벽에 아이들과 따. 시. 끼. 짖어대듯 유성 펜으로 썼다는 풍문만 있지 반올림 건반을 징검다리 삼아 이사 갔는지 벙그러진 입으로 나비가 떼 지어 들어갔는지 알람은 더 이상 울리지 않지 몇몇 사람이 화단에 물을 주었다지

 

  바람이 문을 때렸지 햇살이 방범창을 뚫고 들어왔지 봄이 언제 적에 왔는지도 모르느냐고 바닥을 쳤지 따시끼, 순간 바닥에 납작 엎드린 나비가 공중 위로 날아올랐지 따시끼 따시끼 왕따 시끼 따시끼 벽지에 앉아 멜로디언을 불었지 자리끼 같은 따시끼 봄이 환장하게 피어났지

 

 


환풍기

 


1
  그는 화장지를 돌돌 말아 왼쪽 귀를 막았어 자신보다 먼저 진물 흘리는 귀를 참을 수 없었어 꽃을 만나면 꽃을 나비를 만나면 나비를 돌돌 말아 넣었어 왼쪽 귀에 밀어 넣으면 오른쪽 귀로 빠져나가는 진물 더듬이들 한번은 먹바람을 한 움큼 잡아 귀에 넣고 양쪽 귀를 막았어 우왕우왕 뇌벽을 세차게 때리는 바람, 경기를 일으키던 나무들이 아주 잠시 하늘을 보여주었어 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십자드라이버로 화장지를 빼고 싶었어 거짓말쟁이, 이상한 일이었어 그가 돌려서 빼놓은 바닥의 화장지가 꽃이 나비가 솔바람이 환풍기가 되어 도는 것이었어

2

  내 최초의 기억은 때에 전 환풍기를 바라보는 일이었어 돌아가는 환풍기에서 곧게 뻗어 들어오는 빛, 혀끝으로 핥고 싶었어 어머니는 분식집을 했어 밀가루에 오지 않는 아버지를 넣고 치대고 밀고 떼었어 뜨거운 물에 수제비가 풀어지듯 나는 자라 도로를 핥는 바퀴를 보았어 그 바퀴를 따라 걷다보면 집에서 얼마나 멀어지는지 몰랐어 길은 잃기도 쉬웠지만 잃어버릴수록 찾기도 쉬워졌어 메뉴판을 꼼꼼히 훑어보고 오세요 손님처럼 아버지

3
  차 한 대가 순식간에 지나갔어 길이 기침하여 뱉은 돌멩이를 발로 찼어 길은 구심점을 향한 환풍기의 날개, 날개를 타고 나는 길과 바퀴를 눈으로 핥았어 속도에 튕겨진 돌멩이처럼 그가 휴지를 돌리며 나를 따라왔어 해가 붉게 환풍기를 돌렸어 노을, 그가 손을 뻗어 허공의 노을을 돌돌 접었어 아버지를 닮은 그가 내 손에 쥐어준 노을이 어지럽게 돌다 손바닥에 박혔어 그와 나만이 아는 외곽의 노을이 바퀴살이 되어 바람을 일으키고 있어 나는 손을 들어 오른쪽 귀를 막았어

 

 


바람 바이러스


교회 종소리가 울리면
삭발한 여자가 인형을 만든대

 

삐걱이는 의자에 앉으면 벽에 자꾸 머리를 찧는 바람의 말이 들린대 아이는 벽에 머리를 파륵파릅 찧는 아이였대 여자는 아이를 데리고 새벽 예배에 다녔대 그런데 그날은 이상하게 아이가 옆으로 흔들거렸대 여자는 아이를 업고 찬송가를 불렀대 그때 처음으로 아이가 여자의 등에 깊이 머리를 기대었대

 

등에서부터 바람이 지나갔대
바람이 여자에게 우왁 달려왔대
가슴에 머리를 찧는 바람을 안고
여자는 인형을 만들었대

 

걸어 다니지 못해서 무릎 닳은 바람
추워서 어쩌냐고 여자는 이불을 뜯어 인형 옷을 만들었대 바람이 새처럼 이야기를 한 것도 그즈음 이었대 엄마엄마 얼었던 눈이 흘러내려 엄마엄마 내 몸에 목이 아픈 꽃이 필까? 말 못하던 아이가 눈을 후비며 이야기 한대 문에 걸린 인형도 테이블에 앉은 인형도 모두 이불 한 조각, 조각난 천의 시간이 여자의 등을 바라본대 빗방울이 고인 오목한 등 바라보다가 목을 앞뒤로 흔드는 인형들은 바람을 토닥토닥 덮어준대 바람을 따라다니는 인형의 헤엄 다리는 밤새 해어져 여자는 다리를 더 촘촘히 바느질 한대

 

여자는 하얀 실처럼
바늘의 뾰족한 눈물이 되어
수시로 세상의 안과 밖을 시침질 한대

 

  대에 대에엥 종이 울리면 누구나 바람의 호위병 가게 문을 연대 바람이 사람들의 등으로 달려가 머리를 훕훕훕 찧는대 어른들은 여자의 인형을 안고 헐겁게 웃는대 여자의 등에 바람 길이 생겨난대

 

 

 

[당선소감]


  시는 내 무의식을 끝없이 끌어올리는 설렘이었습니다. 그 두근거림은 오래지 않아 나를 할퀴기 시작했습니다. 시는 더 이상 설렘이 아니라 살풀이가 되어 주술을 외우고 있었습니다. 무당이 된 듯 나는 발에 땅을 딛지 못하였고 작두 위에서 아슬아슬 울고 있었습니다. 스스로 베이고 떨어지기를 수십 번 그러다 생각했습니다.
 
  나는 어떤 시를 쓰고 싶은가? 내 인생 위에 시는 어느 지점에 있는가? 내가 쓴 시가 나와 타인을 위로할 수 있는가? 그러다 시와 떨어져 지내기로 했습니다. 가끔 생각날 때마다 벽면 그림자를 후려쳤습니다. 단 한 줄도 쓰지 않았고 쓸 수도 없었습니다. 텅 빈 시간과 풍경이 나를 채웠다가 어둠으로 지워졌습니다. 무방비로 심심하였으나 그 심심함 속으로 햇볕이 드나들었고 풀벌레가 지루하게 울기도 했습니다. 이제 시에게 매달리지도 끌려가지도 않겠습니다. 찾아오면 찾아오는 대로 떠나면 떠난 대로 동행하며 걷겠습니다. 

 

  당선 전화를 받고 노랑으로 건너가는 논두렁을 보았습니다. 익어가며 깊어가는 알곡들이 바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바닥이 남루하지 않겠지요. 내 후미진 바닥에도 꼬물꼬물 기어가는 것들 걸어가는 걸들 뛰는 것들이 있겠지요. 눈물겹게 한 생을 적시는 것들 초라하지만 형형한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것들……. 저들의 노래를 끝없이 받아 적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초록에서 노랑으로 가는 길목에 내 가난한 발을 올려도 좋겠습니다. 바짓가랑이에 이슬이 적시면 더더욱 좋겠습니다. 가난한 눈으로 오래 바라보겠습니다.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 들뜨지도 않겠습니다.


  당선 소식을 듣고 기뻐해주신 스승님께 고개 숙여 감사 인사를 올립니다. 자신이 행복해야 읽는 사람도 행복하다며 아버지처럼 응원해주신 김동수 교수님, 쓰고 쓰다보면 된다며 주눅 든 어깨를 토닥여주신 문신 선생님, 두 분 스승님께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기 위해 느리고 깊게 걷겠습니다. 밤 열시가 넘도록 치열하게 공부했던 ‘글벗’ 식구들과 멀리서도 박수를 보내고 있을 ‘온글’ 식구들에게도 이 자리를 빌려 감사함을 전합니다. 그리고 누구보다 재미없는 시를 또박또박 읽어주던 수현이, 마냥 잘한다고 칭찬했던 성민이, 읽어라 배워라 따끔하게 지적했던 남편 김동석님께 고마움을 전합니다. 모든 것은 나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돌아보면 주변이 나를 이루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를 둘러싼 모든 분들과 풍경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글을 잡아주신 시산맥 심사위원님께 감사드립니다.

 

지연

1971년 전북 임실 출생35회 전북여성백일장 시부문 장원.   2013년 미션21크리스천 신춘문예 동시 가작 당선.

kiki2174@hanmail.net

 

 

 

 

[제 7회 시산맥 신인상 심사평]

 


앞으로 펼칠 활약상을 기대하며

 

  시인에게는 천지간의 운행원리를 물리적인 측면이나 심리적인 측면에서 천착해 들어가려는 탐구의지가 있어야 하고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사회 속에 내재된 사회적 또는 역사적 시점에서의 갈등과 모순, 순행적인 측면과 역행적인 측면, 조리와 부조리를 가늠하려는 자세가 요구된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심미적으로 시적 플롯을 구성해야 다각적으로 독자와 소통이 될 수도 있고 다채로운 플롯의 묘미가 있는 형상성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시인의 선험 내지는 경험적 인식에서 빚어진 삶의 미학과 메시지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없는 작품의 완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시인을 지망하는 사람에게는 기본적인 시작의 기법을 충실히 습득할 의무가 있다. 작품(시)을 형상화함에 있어 시적 기교가 지나치게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여 기법과 기교를 충분히 익히되 작품을 쓸 때에는 그러한 것들을 모두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이 시작법에 소홀해도 된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래서는 모든 시인의 염원이기도 한 ‘좋은 시’를 생산하는 것이 요원해질 수밖에 없고 시간을 아무리 벼려도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기는 어렵다.
  이러한 취지를 갖고 본심에 오른 작품들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총 820여 편의 작품이 응모되었고, 이 중에서 24명의 250여 편이 예심을 통과하였다. 본심에 오른 작품들답게 대체로 기본적인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대체로 서사적 플롯이나 극적 플롯이 편향적으로 치우쳐진 플롯구성의 문제를 갖고 있었다. 이는 기성시인들의 작품을 살피면서 겉만 보고 따라 쓰는 결과로 보였다. 또 다른 측면으로는 독창성을 드러내려는 욕심이 과하다보니 시의 본질을 구현하는 데에는 소홀하고 기교만 두드러지는 작품도 꽤 있었다. 그러한 작품들 중에서도 김미옥, 김욱, 김일곤, 이재근, 임희선, 정은, 조희진, 지연, 홍애니, 황선주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러한 문제를 다소 극복한 것으로 보였다. 심사위원들은 이들의 작품에 주목하여 세심히 읽고 다각적인 측면에서 평가하며 토의하였다. 그런 다음에 최종으로 김욱, 조희진, 지연, 황선주의 작품을 선하였고, 다시 네 사람의 작품을 놓고 오랜 시간 동안 다시 평가하며 토의한 끝에 지연, 조희진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기로 하였다.
  김욱의 작품은 시적 구성이 원만했고 의미를 재현해내는 시적 표현의 유연함이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시적의미를 구현하는 심도가 약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한 황선주의 작품은 시적 기교가 탁월하다는 평가가 있었지만 시적의미를 명징하게 드러내주는 측면이 아쉽다는 지적이 있었다. 비록 당선작에는 들지 못했지만 이들의 시적 내공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여 앞으로의 기대를 갖게 하였다.
  최종적으로 지연의 작품 「여뀌꽃이 걸어오는 시간」 외 4편과 조희진의 작품 「투영화법(投影畵法)」 외 4편을 당선작으로 뽑았다. 지연의 작품 「여뀌꽃이 걸어오는 시간」에서는 슬픔을 슬픔의 의미에만 가두지 않고 여성성과 모성으로 심화시켜 잘 녹여내 형상화한 특징이 빼어나 보였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이러한 심미적인 측면을 잘 드러내주는 형상성을 잘 갖췄다는 측면에서 당선작으로 뽑는 데 망설임이 없게 하였다. 조희진의 작품 「투영화법(投影畵法)」에서는 화자가 처해진 현실 속에서의 결핍과 초조함이 선명하게 잘 드러나고 있었다. 또한 그것이 비추는 현상이 우리 삶의 비극적인 측면을 반추하게 하는 기운을 갖고 있었다. 다른 작품들 속에서도 사물이나 현상을 관조하면서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삶의 미학을 특징적으로 잘 형상화했다는 점이 두드러져 당선작으로 선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이 흡족하기보다는 앞으로 펼칠 활약상에 기대를 거는 심정이 더 크다. 더욱 정진해서 이후에 더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심사위원 : 김광기(글) 박남희 나금숙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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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밖  / 김태인

 

 

 

진실

을 알게 되겠지만 지금 광주에선..

80년 오월 아침, 초등 1학년 교실에서 꺼내진 이야기다

광주민주화운동임을 깨닫기까지

꽤 오랜 시일이 걸렸다

 

 

서소문 밖

공원을 거닌다, 이교(圯橋)

흙다리 아래 백사장, 형장의 이슬을 딛고 선 노송군락

맑은 핏물 흐르던 만초천은 혈맥이 막힌 지 오래

순교의 피, 거룩한 믿음의 증거를 수혈하는 헌양탑 홀로 섰다

 

 

순교자

가 아닐까, 탑에 걸린 얼굴들처럼

누구든 자신의 믿음에 목을 걸 수 있다면

청명을 고집하여 살점 뜯겨진 하늘귀도

눈이 파헤쳐진 백사장도 팔다리 쳐진 소나무도

 

어머니들

뒹구는 목을 품고 각혈했을

얼굴을 주위든 탑신이 젖는다

슬픈 그림자 드리우지 않는 탑, 만초천이 와류하며

출렁이는 거룩한 진실을 빨아올린다

 

 

오솔길

에 꽃샘추위 훅 불어 목을 친 솔방울이 풍덩 빠졌다

순교의 혈통이 실개울에 넘쳐흐른다

하얀 발자국을 찍는다, 투명한 몸속에서 밤이 피처럼 흐르고

핏자국을 지우며 뒤따라 걷는 하얀 개울이 있다

오랜 자손처럼 솔방울들 잘 쓸어 놓은,

봄이 오시는 길

 

 

짓밟힌 꽃

은 누군가의 아픈 기억에 책갈피를 꽂아둔다

무릎 헤진 오솔길, 숲 그림자 덧대어 기웠다

나무 그림자 동아줄에 묶인 채 촉수를 뻗는다

피를 먹고 자란 붉은 노송, 잘린 양팔에 울컥 솟은

봄바람이 흐르는 피를 흩날린다

흩날리는 곳마다 어머니 품 같은 탑이 솟았다

 

 

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탑에 얼굴이 자라고

푸른 나무에 목이 자라고

하얀 달은 하늘귀로 흐르고

오솔길은 탑 안으로 흐르고

밤 비둘기, 동아줄을 풀고 날아오른다

 

 

 

* 마태오 복음 5:6

 

 심사평

   <시부문>

<예심> 고재종

<예심통과작>

1. 봄날 버스 외 6편

2. 일요일 외 5편

3. 치약의 전설 외 5편

4. 꽃샘추위 외 6편

5. 무간도 외 8편

모두 163명의 845편의 응모작을 읽었다. 하릴없는 삼류 사랑타령과 열혈청년 기질의 피 튀기는 구호의 숲에서 건져낸 작품은 20여명의 작품이었다. 이 작품들의 수준은 예전보다 기량 면에서 진일보한 면을 보여주었으나 여전히 문제의식 면에선 후한 점수를 줄 수 없었다. 그 중 나는 5편을 주목하였는데, 「아내의 자리」는 아내에 대한 애틋한 시선이 너무도 진정스러워 작품을 보다가 하마터면 울 뻔했다. 「광주」는 김준태 시인의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 십자가여!」 이후 광주를 제대로 그리고 폭넓게 은유화 해내며 큰 감동을 자아냈다. 「점, 구름의 고고학」은 자신의 생은 알지 못하고 "남의 생만 읽을 수 있는 여자" 곧 점치는 여자를 구름의 고고학으로 읽어내는 솜씨가 만만치 않았다. 「고독사」는 "한생의 밑바닥을 토해내는 라마승처럼 아무런 남길 것이 없이" 고독사한 사람을 독사와 매칭시켜 팩트와 상상력의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낸 수작이었다. 「사이시옷과 사람 인(人)」은 산동네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며 내는 '파찰음'을 알뜰살뜰 따뜻한 인정의 '접속사'로 이어내는 솜씨가 이미 기성작가 수준이었다. 이 분들은 누구를 뽑아도 괜찮을 수준을 보여주어 작품을 읽는 내내 마음이 설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예심> 이승철

<예심통과작>

1. 봄날 버스 외 6편

2. 일요일 외 5편

3. 치약의 전설 외 5편

4. 꽃샘추위 외 6편

5. 무간도 외 8편

<5·18>을 형성화한 작품들이 지난해보다 많은 편이어서 좋았다. 상처를 어루만지는 시각이 돋보여 심사자의 마음을 흡족케 했다. 시상(詩想)이 상투성, 단조로움을 벗어난 작품을 찾으려고 했다. 문학은‘언어를 구원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구원할 것인가’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문제는 사물과 현상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통찰력이 남다름과 언어를 상투화 시키지 않되, 세상 속 비의를 발견케 하는 시적 자세가 중요하다. 또한‘신인'에 걸맞는 패기, 진정성, 세상과의 대결의식을 갖추어야 한다. 선정작 5명의 간략한 평은 이렇다. 「봄날 버스 외 6편」은 광주항쟁의 전과정을 새로운 시각으로 형성화하는데 성공했다. 「일요일 외 5편」은 일상의 삶과 현대인의 소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치약의 전설 외 5편」은 사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하는 발견의 시각을 갖추고 있다. 「꽃샘추위 외 6편」은 치열한 주제의식이 돋보인다. 「무간도 외 8편」은 다양한 시각과 시적 형식의 새로운 시도가 엿보인다.

 

<본심> 정희성

예심을 통해 올라온 여덟 분의 작품을 일독하고 그중 세 분의 작품 봄날 버스 외 6편 무간도 외 8편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으로 범위를 좁혔다. 명색이 5·18문학상이라면 그 명칭에 걸맞는 주제의식에서 자유롭기 어렵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는 시가 반드시 5·18을 소재로 다루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5·18에 광주라는 지역명칭을 얹는 것도 5·18을 협소하게 만드는 일이 될 것이다. 말하자면 5·18은 4·19와 같은 것이지 ‘광주사태’는 아니지 않은가. 이런 점에서 ‘민주주의와 자유를 향한 민중들의 열망’이 담겨있는 작품이면 5·18문학상에 값한다고 보았다.

세 분의 작품 가운데 봄날 버스 외 6편은 5·18 당시의 참상을 재구성하는 형식으로 사건을 정밀하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강렬한 시적 감동에는 이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조롱박이 된 주먹밥 외 6편도 주제의식이 강하고 감정이 잘 절제된 단정한 시였다. 그러나 ‘주먹밥’이라는 이미지가 주제의식을 강화하기도 하지만 상투성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이 눈에 거슬렸다.

무간도 외 8편은 한편 한편이 짜임새가 있고 참신해 보였다. 그 가운데서 서소문 밖에 눈이 간 것은 주제와의 관련성이 돋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 시는 서소문 밖 순교자 헌양탑 이야기에 주력하면서 그 위에 슬그머니 5·18을 오버랩시키는 수법이 자못 능청스럽다. 이는 5·18을 정면에서 접근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형상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시상(詩想)의 단조로움을 벗어나 시적형식의 새로움이 엿보이고,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적 통찰력이 남달랐다. “누구든 자신의 믿음에 목을 걸 수 있다면....순교가 아닐까”,“복되어라 의로움에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이라는 시행은 천주교 순교자만을 겨냥해서 하는 말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나는 본심 심사위원으로서 이 시를 맛있는 시로 보고 당선작으로 추천하며 아직 이름을 모르는 이 시인의 탄생을 축하한다.

<선정작> 서소문 밖 / 김태인 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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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앞치마 / 손영자

 

꽃무늬 에어프런 두른 친구 엄마가 부러웠던 어린 시절

엄마는 잿빛 투박한 앞치마를 두르셨다

 

어스름 새벽부터 자정을 넘길 때까지

앞치마는 생선 비린내를 풍기며

인근 골목으로 배달을 다녔다

 

항상 아랫배에 매달려 엄마 손처럼 늘 젖어 있던 앞치마

양쪽 볼룩한 주머니엔 땀에 젖은 하루가 담기고

퀴퀴한 비린내와 근심도 들어 있었다

 

자정 넘긴 늦은 시간

하루치의 노동을 세며 잠을 떨치던 엄마

생선이나 야채를 주무른 거친 손을 볼 때마다

알반지를 낀 친구 엄마 하얀 손을 생각했

 

장시간 허리에 묶여 고된 일을 끈낸 하루가 풀릴 때

부종으로 시달린 다리를 접을 수 있었다

잠든 머리맡에 놓여 있다가

새벽녘 부스스한 잠을 털고 일어나면

앞치마도 엄마의 허리를 잡고 함께 일어 났다

 

엄마의 무릎처럼 튼튼한 앞치마도

조금씩 엄마와 함께 늘어 갔다

내가 그토록 싫어 했던 앞치마

가끔 장터에서 얼룩진 앞치마를 만나면

울컥, 그리움이 치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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