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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혈목이의 책장 / 이병철

 

 

당신은 풀잎 위에 누워 돌을 떨어뜨리고 있었어요 나는 당신 귀밑머리에 매달린 하얀 박쥐들을 떼어냈고요 우리의 책은 폭설을 쏟아내고 있었지요 마른 혀도 꽃이 될 수 있을까요 그때 바람이 입 속으로 들어왔어요

 

바람이 갈비뼈를 두드리자 피아노 소리가 났어요 소리가 빚어낸 동전 몇 닢 손에 쥔 하늘은 구름을 보름달솥에 고았지요 어둠이 우러났어요 별가루 뿌리고 배추흰나비와 벚꽃잎 고명 얹은 국 한 사발 떠 주었지요

 

국을 들이킨 당신은 은어 떼 헤엄치는 수박 향기로 반짝였지요 당신이 흘러든 풀섶에서 유혈목이가 기어나와 내 품을 파고들었어요 책장엔 진달래꽃 피어났고요 알몸을 포갠 우리는 따뜻한 무덤이 되어갔지요

 

 

 

 

오늘의 냄새

 

nefing.com

 

 

[당선소감] “부끄럽지 않은 행복한 시인 될 것

 

이십대의 모든 날들을 시 쓰기에 바쳤습니다. 시가 돈이 되지 않아도 행복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오솔길의 임금이 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서른 살이 되자, 돈이 되지 않는 시를 계속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멀리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달아나면 달아날수록 시는 더 강하게 저를 잡아당겼습니다. 돌아선 뒤통수에 쏟아지는 시의 따가운 눈총이 미안하고 괴로워 몹시 취해버린 밤도 많았습니다.

 

계절이 바뀌는 저녁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제 나름으로는 갈림길에서 받은 전화였습니다. 용기와 힘, 그리고 막막한 두려움이 동시에 제 가슴에 불을 밝혔습니다. 그 불빛을 의지해 뒤돌아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화는 시가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서른 살에 세상을 떠난 김유정 선생이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누나 집에 얹혀살며 늑막염으로 괴로워하던 가난한 청년, 치료비도 없이 병과 문학을 함께 키워야 했던 김유정 선생을 떠올려봅니다.

 

선생은 절망 가운데서도 결코 문학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 나이 서른 살 짧은 생애였지만, 선생이 남긴 문학은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김유정 선생의 서른한 살, 서른두 살을 제가 살아낸다는 마음으로 열심히 읽고 쓰겠습니다.

 

선생으로부터 걸려온 전화 한 통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숨이 여린 작품을 잡아 일으켜 근력과 호흡을 불어 넣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언제나 온화한 미소로 격려해주시는 이승하 교수님, 제겐 아버지와도 같으신 이경교 교수님, 시 쓰기의 즐거움을 알게 해주신 장석주 선생님께 감사 드립니다. 명지전문대, 서울과기대, 중앙대 대학원 문예창작학과의 모든 선생님들께 감사 드립니다. 부끄럽지 않은 제자가 되겠습니다. 행복한 시인이 되겠습니다.

 

 

 

 

[심사평] 응축·변주·확장 탁월한 수작

 

본심에서 세 분의 작품을 거론했다.

 

먼저 <죽은 시인의 사회> 11편을 투고한 심상숙의 작품들에선 시적 포즈나 비의 같은 것에 욕심 부리지 않고 문장을 끌고 가는 정서의 힘이 느껴졌다. 시인이 관찰하는 인물, 사건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이 남다른 묘사 문장을 탄생시켰다.

 

그렇지만 어떤 시들은 기행문이나 산문 같았다.

 

<비의 기원> 4편을 응모한 민경란의 시는 다른 응모작들에서 흔히 보이는 상투적인 우화 만들기, 한결 같은 감상적 정서를 훌쩍 벗어나 주변 공간 묘사에 의지해 자신을 표현하고, 해부하고, 고백하는 남다른 표현법을 갖고 있었다. 자신만의 표현법, 자신만의 문장 구사 방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자신만의 언어 세계를 갖고 있다는 것과 같은 말일 것이다.

 

하지만 일상적 대화 수준으로 떨어져 버린 문장의 나열이 들어있는 <광염소나타> 같은 시가 신뢰를 떨어트렸다. <유혈목이의 책장> 4편을 응모한 이병철의 시들은 어떤 순간에 집중하여 그 순간을 증폭시켜 이미지의 정원으로 확장하는 시적 구축의 방법이 흥미로웠다. 이를테면 네 입술이 닫히는 순간 세상의 문들도 닫히, ‘추억 속 고통은 무슨 힘으로 밝히지?’하고 고통스럽게 질문하다가 뒤틀리고 찢겨진 살결을 보이며 검게 물든 엽록소를 배설할 거야’(<일기예보>) 라고 다짐하는 장면에 이르는, 시적 언술의 연속이 작은 한순간에서부터 독자를 이끌고 가 확장된 시의 이미지 공간에 부려 놓는 힘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 개인 저녁의 안부 편지>에서처럼 지나치게 화려하거나 센티멘탈하기만 할 때는 시를 쓴 의도를 의심하게 했다.

 

논의 끝에 이미지의 응축과 변주, 확장이 시의 문장들에 깃들게 함으로써 시적 긴장이 발생하게 한 <유혈목이의 책장>을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 심사위원 정현종·김혜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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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이층도서관 / 조유희

   
언젠가 한번쯤 만났을 수수꽃다리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햇빛
바닥을 치는 햇빛을 볼 때마다 나는 밀란 쿤데라를 생각한다

 

도서관 건너편 양로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생명력 없는 책들에서 생명을 찾는 사람들,
책속에는 그림자로 가득하다

 

오래된 이야기 끝에 놓여 있는 그림자와 새로운 그림자 사이에
도서관 책들은 우울하다

 

쉽게 읽혀지지도 않고, 쉽게 깨달을 수도 없는 행간들
삐죽하게 꽂혀있던 사람과 사람 사이에 행간들은 좁혀있지 않는다

 

딱딱한 시선으로 따라 나오는 문자들의 행렬은
오래된 이야기를 다 읽어내지 못하고 있다
머리위로 펄럭이며 1mm씩 자라나는 기억에는 표정이 없다

 

생명 없는 책이 생명 있는 사람을 읽는다
사람들의 얼굴에는 웃음도 없고 망각도 없다

 

햇빛은 타인을 이해하지 않는다

 

참을 수 없는 허기가 책장을 넘긴다
책장 속에 번지는 얼굴들이 내 어깨를 읽는다

 

누군가 읽고 간 햇빛이
책갈피 사이에 끼어 있다

 

 

 

 

 

[심사평]

 

신인상 심사는 언제나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미지의 신인이 갖고 있을 폭발적인 에너지는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그러나 기성시인들의 응모작 심사에서도 느꼈던 작품들의 편차는 신인이기에 더욱 심했다. 의욕과 성취도의 불균형 때문이다. 접수번호 신인 26의 [소주, 병]과 접수번호 신인 108의 [우리 동네 이층도서관]은 각각 해당 작품의 성취도와 성취도를 떨어뜨리는 약점 때문에 한동안 즐거운 망설임을 거듭하게 만들었다. 접수번호 26은 작품 속에 끌어들인 서사가 내용을 풍요롭게 만드는 동시에 마무리의 긴장도를 떨어뜨리는 취약점이 되었다. 그에 비해 접수번호 108의 [우리 동네 이층도서관]은 유창한 발화가 관념을 형상화시키는 미학적 능력이 월등했기에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아마도 오랜 트레이닝과 사색의 결과이겠지만, 앞으로도 이미지와 상상력, 마무리의 증폭점 등에 세심한 관심을 가지길 바란다.

 

심사위원 박제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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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이마가 단단하구나 / 심상숙

 

책상위에서 달그락거리는 약수터조약돌을 만지작거린다

조약돌에 깃든

멀어졌다가 다가오는 발자국소리

벽 쪽으로 돌아누우며 혼잣말을 끌어 덮던 친구

외국에 가족을 두고 오래 뒤뚱거리던 외발자국 소리

손바닥위의 차가운 체온이 묵직하다

모가 난 제 앞가슴에

약수 물 푸르도록 고여 있구나

약수터로 내딛는 길 위에 오독하니 얹혀져

아침을 밟고 내려서는 이를 뜻밖에도 뒤뚱거리게 하던

흔들리는 몸속에 기울지 않는

수평저울 추 하나씩 나지막이 매달아주던

기운달 다시 산 꼬리를 환하게 부풀어 오를 때면

약수터에 파문을 일으켰던 게 바로 너 였구나

산새소리 바람에 나부끼고

흰 눈이 싹을 틔우던 날

차가운 품 헤집어 슬며시

모난 가슴께로 따스하게 들쳐주던

숨 추수리던 이 머리맡에 앉아

떨리는 손바닥에 꼭 쥐어주고픈

들어서 놓을 때마다 맑은 소리로

중심을 향하여 날개를 다는 작은 조약돌

오래 밟힌

너의 흰 이마가 단단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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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최대화 외 4편

 

   황유원

 

 

 

화물칸에 일렉기타를 한 만 대쯤 싣고 가는 세상에서 가장 길고, 무거운 마음

 

그 속을 누가 알겠냐마는 철로만은 알지,

짓밟힌 몸길이를 짓밟힌 시간으로 나눠 기차가 절망하기 시작한 지점에서부터 자기 합리화에 성공하는 지점까지 걸린 속도를 계산해내며 자기를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짓밟고 가는 기차의 무게를 참고 견디지

 

기차가 아무리 짓밟고 가도 손가락도 발가락도 잘리지 않는 건 손가락도 발가락도, 아무것도 없어서

 

손가락을 잃은 기타리스트는 알지 흉측한 음악을 만들 바에야 약을 먹고 죽는 게 낫다는 걸

발가락이 없는 애벌레는 알지 발가락이 없으면 기어서라도, 가고 싶은 곳엔 가고 봐야 한다는 걸

 

말하자면 비시각적 음표들의 시각적 극대화

 

그러나 약은 치료하기도 하는 것,

 

병명보다 더 많은 치료제를 잔뜩 싣고 가던 기차가 마침내 말기에 다다라 포기하고 탈선할 때

눈 내린 들판에 처박힌 기차에서 동그란 알약들이 쏟아져나올 때의 기분이란

 

그 기분 누가 알겠냐마는 환자들만은 알지,

환자들은 꿈속에서 거기까지 걸어가 그 약을 모두 주워 먹은 다음날 아침 병실에서 깨어나 기차의 차가운 몸을 이해하지 넘어진 채 몸을 뒤로 돌리던 기차를 이해하며 몸을 정확히 당신들 반대편으로 돌리지

 

현실도피는 없어, 현실의 최대화만이 있을 뿐

 

오늘밤 그들의 기도가 기차처럼 길어져 결국 지구를 몇 바퀴씩이나 돈 기도들의 속도가 기차를 조금씩 허공에 뜨게 해 마침내 이륙한 기차를 바라보며 철로가 난생처음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는 희망,

을 품자마자 기차는 곤두박질치고

지진처럼 지축이 흔들려 복부를 강타당한 남자처럼 철로가 신물을 토할 때 신물 위로 기타가 쏟아지는 기분

 

그 기분은 누가 알까

침대에서 굴러 떨어져 꿈에서 엎질러진 아이나 알까

 

아무리 길게 써도 저 레일에는 모자랄 것이므로 여기서 그만둬도 상관은 없겠지만

 

고요한 밤, 캐롤을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린 아주아주 거룩한 밤, 깨진 전구를 뛰어넘어 크리스마스의 본질을 거침없이 이해하고 산타를 엉망진창으로 때려눕히고

 

지구가 한 바퀴 돌기 전까지 기타를 모두 수리해야 하는 수리공의 마음은 망가진 리프(riff)들을 밤새 고치고 있는 기타리스트밖에 모르지

 

너에겐 싣고 가다 넘어져 모두 엎질러버릴 만한 그 무엇이 있나?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이라도 있니?

넘쳐서 어쩔 수 없이 들켜버리는 리듬을 타고 비옥한 꿈속을 달리다 넘어지는 곳이 늘 절벽 앞이어서 느껴보는

아찔함, 그 뒤에 웅크리고 앉아 그 리듬을 정면으로

견뎌본 적 있니!

 

구겨진 리듬을 잘 펼치면 과연 어디까지 펼쳐질 수 있을지, 무엇까지 덮어볼 수 있을지를 가늠하며 최대한 붉은 와인을 박스째 주문해

 

뱃속에 와인을 만 박스나 싣고 가는 기차가 오늘밤 도무지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유를 누가 이해하겠냐마는

사랑을 한 박스나 마시고도 제대로 서 있는* 조니 미첼은 이해하지, 어쩌면 술집을 이름표처럼 달고 다니다 이름을 아무 데서나 콸콸 쏟아버리던 에이미 와인하우스**도 이해하지

 

잠시 동안의 짧고 굵은 경악과 모든 최대화에 따르는 극심한 부작용, 그때마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경적을 울리며 긴 열차 한 대 빨려들어오는 느낌, 결국 일망타진 당하고 마는 느낌을

 

너무 긴 문장에겐 이제 그만, 쉼표를

 

 

———

* Joni Mitchell, 〈A Case of You〉중에서.

** Amy Winehouse.

 

 

 

 

풍차의 육체미

 

 

 

그냥 풍차가 됐으면

바람 불면 돌아가다

바람 자면 멈추는

돈키호테도

로시난테도 아닌

그냥 븅 븅

힘차게 제자리를 지키고픈

달려가서 안기고픈 남자의 규모로

븅 븅

잘리지도 않아서 영원히 자를 수 있는 공중을 썰며

븅 븅

호프나 한잔하고 부리는 호기로

정오 조금 지난 시간에 벌써 뒤풀이를 계획하는 아저씨 아줌마들이

일단 목부터 축이고 볼 때

그 목구멍들을 통해 넘어가는 힘으로

븅 븅

네가 런던에서 파리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보고 반한 육체미

븅 븅

내가 암스테르담에서 보고 매달려 돌아가고 싶던 힘찬 팔

난 지금 혼자 콩나물해장국 한 그릇을 비운 후 장충단공원에 앉아

문자나 주고받으며 당신들의 잡담을 엿듣고 있을 뿐인데

여긴 풍차가 하나도 없는데

난 갑자기 풍차가 되고 싶고

븅 븅

뭐라도 잡고 돌리고 싶고

뭐라도 븅 븅 돌아갔음 좋겠는데

여름바람에 감사하며

담배 피는 영감탱이들을 피해 부채 부치고 있는 할머니의

고약한 표정도 예쁘게 봐줄 수 있는

풍차가 됐으면

븅 븅

꽃받 오가는 꿀벌들의 날개 소리를

딱 100배만 확대한 음량으로

븅 븅

위풍당당

힘차게

난 버스도 안 타고 있는데

갑자기 내려서 좀 걷고 싶은 기분이고

식당에서 보던 야구경기를

여기저기 계단에 앉아 손에 스마트폰을 든 사람들이 이어서

봐주고 있는 듯한 기분이고

계속되는 경기

븅 븅 븅

계속되는 안타

붕 부웅 붕

계속되는 향기

부웅 부우웅 브응

소리를 녹음해줄 순 있지만

모양을 녹화해줄 순 있지만

지금 이 향기를 첨부해줄 순 없네

내가 풍차가 아니라서

힘찬 팔이 아니라서

마음에 드는 사실 몇 가지

부우웅븅 븅 븅

풍차는 없어도

딱 몇 초만

풍차가 됐으면

 

 

 

새처럼 우는 성(聖) 프란체스코를 위한 demo tape

 

 

 

내가 다가갈 때마다

푸드득

새들이 도망갔다

참새 비둘기 까치

다 나를 피했다

있는 힘을 다해

두루미 청둥오리 수리부엉이

훨훨 훨훨 훌훌

황망한 어궤조산(魚潰鳥散)

성 프란체스코여

그대 새의 음성

투명한 예각들 부서져내린다

돌을 쪼아 조각내듯

그러나 돌멩이 하나 상처 입히지 않고

돌 틈으로 꽃 몇 송이 밀어내는 힘으로

산산조각나는 공중

번개처럼

번개가 지나가고 난 뒤의 말짱한 하늘 같은 것들 남겨두고서

공중분해되는 새들

나무 속에 숨어서

도처에서 울려퍼지는

문자메시지 오는 소리처럼

부서지는 문자들의 빛나는 꼭짓점

형태 없는 소리들에게 거룩한 이름을

새들의 자세

새들의 종종걸음

새들이 거는 전화

마이크만한 새들이 떨어뜨리는 노래

군함새 저어새 해오라기

얼마간 비축해둔 힘으로

훨훨 훌훌 훨훨

겨자를 잔뜩 친 새 날개 스시

식초를 잔뜩 친 새 성대 냉면

푸드덕 파다닥

자유를 찾은 것처럼

곧 도살당할 것처럼

소쩍새 마도요 수리부엉이

귓구멍을 두들겨패는 성질머리

불현듯 시작돼서 생각지도 못했던 방식으로

꾀꼬리 찌르레기 섬휘파람새

내리막길에서 손을 놓은 자전거의 속도

큰 날개 휘저어

춤을 추는 것처럼

다들 모여 어서

춤구경이나 하라는 것처럼

새들이 도망

갔다 도망

갔다 도망갔고

도망갔다 도망

갔으나

끝내 도망가지지 않는 잡새들

훌훌 훨훨 훨훨

 

 

 

초겨울에 대한 반가사유

 

 

 

내가 여기서 가만히 팔을 괴고 앉아 있는데 저기 식탁 위

에 놓인 물병이 흔들,

리고 있다면 저 흔들림은 나만의 흔들림

 

에서

이 세상의 흔들림

 

까지.

 

찬 마룻바닥 위

벽에 걸린 가을 풀 거꾸로 말라가는 시간 속에서

반가사유상의 왼발바닥이 새하얘진다

 

창밖에는 길어온 물항아리 하나 하늘에 떠 있다

흔들흔들

출렁이다가

 

엎질러지는 날개들

박살나는 물항아리의

예리하고

빛나는 펼쳐짐으로

 

넓어지는 접촉면

발에서, 무릎으로

골반으로 가슴으로

번져오는 추위 속에

마침내 시려오는 머리.

 

반가사유가 뭐 별건가

시원한 바람 한 줌, 십 분여의 뻥 뚫린 환기보다 못한 것

 

엔터키 때리듯 벌떡!

일어나 창 쪽으로 달려가려다 말고

한 칸,

또 한 칸 스페이스바 누르듯

저린 발 뗀다

 

금동여래입상이 뭐 별건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하늘색이 된 하늘

창을 열고 그 앞에 선 자라면 누구라도 잠시, 확장될 것

 

얼굴은 활주로 같은 것

그 위를 무허가로 비행하는 표정들

자주 착륙하는 낯익은 표정들과

한번 이륙한 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표정들 속에서

금동여래입상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새하얘지고

 

금동미륵반가사유상과 금동여래입상의 차이는 오로지 넘버뿐

 

스페이스바는 누르고

엔터키는 때린다

거꾸로 할 수 있다면

날 놀래킬 것

 

그럴 때마다 촛불들이 쓰러지는 저녁바다

불바다가 되는 수평선 수직선

경계선 따위

그 온갖 선(線)들

 

저 불이 밤바람에 옮겨붙으면, 저 불이 더 불어나면

안 된다

안 되지만

 

뭐 안 될 것도 없다

그럴 때마다 브레이크 브레이크, 멀리 해안도로에서 타이어 타는 냄새

물이 불어나듯

넘치는 불의 계절

물불 같은 거, 가리질 말 것

 

손가락도 없는 눈으로

잡을 수도 없는 구름이나 오래 매만져보는 이 늦가을, 마지막 날 아침

스페이스바 길게 누르고 있는동안만큼

반가사유상의 사유가

엎질러지고 있는 저 하늘

 

여래입상 따위

엔터,

엔터,

거기 털썩

주저앉혀버려

 

 

 

레코드 속 밀림

 

 

1

 

예술은 두 종류,

차가워지거나 뜨거워지거나

 

목이 쉬면 빛이 바래는 가사가 있고

휘발된 노래 밑바닥에 반정부군처럼 살아남아

지구 반대편 지원군을 불러모으는 가사가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변함없는 사실은

 

마음을 다하면

판은 돌아가는 거

 

2

 

봄밤, 짐승들이 합창하는

레코드 속 밀림의 고요

식지 않은 피를 싣고서 최대한 무리하지 않게

어슬렁거리는 무리들

 

이것이 바로 열대우림에서 맞는 봄밤

따뜻한 비를 맞는 호랑이들의 피부에 핀 착한 꽃들이 질 때

그들을 달래며 저어보는 부드러운 밀림서

 

호랑이는 두 종류,

찢어지거나 불타오르거나

 

 

▲ 황유원| 1982년 울산에서 태어났다. 서강대 종교학과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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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부문 심사 경위】

 

 

   2013년 문학동네 신인상 시 부문에는 총 734명이 4535편의 작품을 응모해주셨다. 최근 몇 년 동안 줄곧 세 분의 심사위원이 심사를 맡아주었는데 올해는 네 분이 심사위원으로 수고해주셨다. 응모작을 4등분해서 김혜순, 남진우, 신형철, 이문재가 개별적으로 예심을 진행했고 각자 3~5명 정도의 응모자를 본심에 올렸다.

   본심에서 논의된 응모자들의 명단을 표제작 제목을 기준 삼아 가나다순으로 적으면 다음과 같다. 「나무라기엔 늦은」외 네 편을 투고한 김진규씨, 「사진」외 다섯 편을 투고한 박혜민씨, 「샤브샤브」외 네 편을 투고한 장형순씨,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투고한 황유원씨, 「속눈썹 나무 숲에 대한 진술서」외 네 편을 투고한 김은정씨, 「오브제」외 다섯 편을 투고한 임정민씨, 「원만이 아저씨」외 네 편을 투고한 이동호씨, 「인력의 이유」외 여섯 편을 투고한 박민규씨, 「임계」외 네 편을 투고한 김정희씨, 「점원들의 점심시간」외 네 편을 투고한 최몽휘씨, 「코시체」외 여덟 편을 투고한 용윤선씨, 「타인을 읽다」외 네 편을 투고한 한연희씨, 「최초로 레몬을 먹어본 개가 레몬에게 갖는 두려움」외 네 편을 투고한 백록담씨, 「하얀 숲」외 네 편을 투고한 오솔뫼씨.

   심사위원들은 본심에 올라온 작품을 며칠간 숙독하고 본심회의에 참석했는데, 놀랍게도, 본심은 불과 십 분 만에 끝나고 말았다. 네 분의 심사위원이 회의에 참석하면서 당선자로 염두에 둔 응모자가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세상의 모든 최대화」외 네 편을 응모한 황유원씨였다. 더 이상 회의를 진행할 이유가 없었다. 심사위원들은 황유원씨의 작품이 어째서 우수한가에 대해 잠깐 동안 의견을 교환하고 그를 당선자로 최종 확정했다. 마라톤이 되기 일쑤인 심사회의를 백 미터 달리기로 만들어준 황유원씨에게 축하의 인사를, 함께 달려준 모든 응모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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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를 기다리며

 

   전문영

 

 

1

 

할머니는 오래된 노래를 지우듯 화분의 잎을 닦는다

사과가 담겨 있던 스티로폼 망이 찢어지던 날

땅에 떨어졌던 사과는 모두 묻었다 그 자리를 더듬듯

할머니는 스티로폼 망으로 꽃을 만들어 가지 끝마다 매단다

사과는 이제 없는데 저 조그만 해먹 위에서 무엇이 쉬고 있는지

할머니는 결코 말해주지 않는다

 

2

 

어느 날 손가락들이 한 나병 환자를 두고 갔다

그것은 달밤의 계곡물 위로 사과가 떠내려가는 일과 같고

이후 그녀는 늘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사과를 영영 잃어버렸다고 말하면서도

혹시 진딧물이 기어오를까 두려워 발밑을 살피는 것이다

 

매주 목요일 내가 그녀의 등에 물을 끼얹으면

그녀는 안심한다 사과 먹는 벌레가 다 쓸려 내려간다고

샤워기를 등에 갖다 대면 그녀의 손등은 살짝 구부러진다

이제 막 사과를 쥐려고 하는 사람처럼

창문은 얼룩져 밖을 헤아릴 수 없고

그녀는 사과 같은 건 모두 놀이터에 있다고 믿는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의 놀이터에서

한 소녀가 발을 굴러 그네를 띄우고 있다

그 어떤 사과도 도달하지 못했던 천진한 곡선을 그리며

발바닥이 깨끗하게 퍼진 채로 공중에 떠오른다

그 순간의 출렁임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바나나, 멜론, 포도, 복숭아…… 다만 사과는 아닌 그 무엇이다

소녀는 아직 사과에 대해서는 모르는 것이다

 

3

 

조카는 사과밭 사이를 뛰었다 숨었다 정신이 없다

일교차가 심할수록 사과는 덜 시어진다고 하니

조카는 분명 지금 달아져가는 중이다

 

어른의 손가락은 아이들의 첫 사과인지도 모른다

내 검지를 쥔 조카의 악력이 대단하다

다섯 손가락이 각자의 위치로부터 힘껏 내 검지를 밀어낸다

조카는 기도란 미는 힘이란 것을 벌써 안다

 

기도가 기도를 밀고

손바닥이 손바닥을 밀듯이

사과나무가 자신의 손목을 밀어내자

나뭇잎은 간구하던 몸짓 그대로

손끝이 조금 말려든 채 흙 위에 눕는다

사과를 기다리는 것처럼

 

 

 

 

스코틀랜드 야드

 

 

1

 

어디긴 어디야, 도로 위지

라는 말을 끝으로 네 전화가 끊어졌다

이건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런던 경시청 건물은 그레이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위치해 스코틀랜드 야드를 불렸다

하지만 이사한 건물들마저 모조리 스코틀랜드 야드라고 불리자 다들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러다간 런던 전역이 스코틀랜드 야드가 될 지경이었으니까

 

2

 

게임 스코틀랜드 야드의 규칙

—도둑 Mr. X는 택시, 버스, 지하철을 타고 런던을 돌아다닌다

—경찰은Mr. X를 스코틀랜드 야드 안으로 데려가야 한다

 

3

 

남동생은 유도에서 낙법을 제일 중요하게 여겼다

마치 매쳐지거나 넘어지길 고대하는 사람처럼

물론 칼을 사고 베이지 않으면 베일 때까지 신경 쓰인다

그래도 칼이 나를 베려고 작정하면 낙법은 전혀 쓸모가 없는데

아무리 말해도 동생은 내게 낙법을 가르치려 들었다

 

낙법은 몸이 땅에 닿기 전

손이나 팔로 먼저 바닥을 딛는 기술이다

즉, 몸에서 손과 팔을 떼어놓는 것이다

네게서 다시 전화가 온다 이제 역전앞이란다

그래도 네가 보이지 않는 건

나는 역전이고 너는 역전앞이기 때문이다

역전은 낙법을 배우면서 앞을 떼어버렸고

역전앞은 역전의 공격이 두려워 관망 중이다

 

신중한 동생은 경기에서 결코 낙법을 쓰는 일이 없었다

마치 낙법의 바깥에 영영 내던져진 사람처럼

어쩌면 낙법은 동생 앞을 내내 서성였고

동생은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마 너도 낙법을 배웠다면 좋았을 거다 그랬다면

역전앞에서 쓰러지는 순간이 곧 역전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쓰러지면서 닿으려 할 때 역전은 결코 물러나지 않는다

 

4

 

Mr. X는 지하철을 기다리다가 경찰에 붙들렸다

경찰이 그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는 순간

Mr. X는 본능적으로 낙법을 취하고는 스스로 놀랐다

아무리 잠깐이라지만 자신의 전부인 손을 몸에서 떼어놓았다니!

그래도 경찰이 그를 두고 돌아가려 했을 때만큼은 아니었다

Mr. X가 이유를 묻자 경찰이 속삭였다

당신은 이미 스코틀랜드 야드 안에 있소

곧 지하철이 도착했지만 Mr. X는 움직일 수 없었다

어딜 가나 스코틀랜드 야드라면

낙법도, 낙법의 바깥도 소용없어졌다는 얘기였으니까

 

 

 

 

팬시

 

 

편재적이라는 말 알아?

 

그건 문방구의 다른 이름이다

문을 열면 오른쪽엔 소년이 왼쪽엔 소녀가 있고

공룡이 소년을 편들고 곰돌이가 소녀의 뒤에 선다

1000원에 스티커, 색연필, 줄넘기로 빼곡해지는 생활!

 

공책을 고를 때는 위에서 두 번째 공책을 빼낸다

그게 제일 위에 놓인 공책보다 조금 낫다는 건 내가 발견한 법칙

나처럼 머릴 잘 굴리는 애는 좀처럼 없다

 

공책표지는 한 소년의 일생을 예고한다

"제이에겐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오렌지 더벅머리의 제이는 바람개비를 불고 있다

곧 바람이 불어올 것처럼

그 다음을 기대하며 페이지를 넘겨보지만

교실에서도 집에 돌아가서도

아무도 제이에 대해서는 적지 않는다

 

"다들 그렇게 살아"라는 말을 들을 때

쑥 하고 꺼져내리는 느낌으로

벌써 공책 한권을 다 썼다

제이의 삶이 한번 훌렁 뒤집히면 뒤표지다

거기서 제이는 헬apt을 쓰고 구호를 외치는 중이다

"제이는 초콜릿을 좋아해!"라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야기가 시작될 거라고 아직 믿고 있다

 

공책이 쌓이면 소년들은 제이의 얼굴을 하고

"다들 그렇게 산다며?" 중얼거리다가

문방구에서 우르르 빠져나와 도로 주변을 얼쩡거린다

모범이 택시라면 한대 훔칠 기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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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의 체온 외 4편 / 전비담

 

겨우내 엠뷸런스가 울어서 그 병원에는 

곧 떨어질 이름들만 피었다

영안실로 가는 침대의 난간을 움켜쥐고 

절뚝이며 따라가는 얼굴처럼 

하얗게 질려서 

  

기어코 봄날 초입에

한주먹 틀어막은 울음이

툭. 떨어진다

이제는 저 혼자 복도를 걸어나갈 수 없는 것들이

군데군데 멍이 들거나 구멍이 뚫린 채로 

하나씩 호명될 때마다

한 줌의 시든 수의로 기록되는,

 

목련! 하고 부르면

뚝. 

뚝. 

한웅큼의 하얀 종말이 뛰어내릴 때

찬란하게 하얀 것들에서는

포르말린의 체온이 풍긴다

 

꽃, 

하고 입술 오므리면

죽음, 

하고 휘어진 복도를 

힘없이 돌아나오는 메아리

  

건물 뒤편에서

시신을 말리는 냉각팬이 

쉴 새 없이 돌아간다

누가 저걸 

죽은 꽃들의 누적된

향이 앓는 소리라 했나

  

목련 피는 소리 갸르릉거리는 밤에는 

죽은 내 친구가 입 안 가득  

덜 삭은 생을 물고 양치하는 소리 들리지 

 

하얀 꽃색 버려두고 

꽃향이 자꾸 내 뒤를 밟는 건

일찍 떠나 비릿해진

꽃의 체온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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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파도에 관한 에필로그

 

 파도가 죽었다 상의 한 마디 없이

 

성급하게 죽은 파도는 흰 거품을 피우고 

암청색 물고랑에 휘청거리다 바다가득 눕는다

바다는 파도가 누운 무덤이다  

 

바다는 저만치 물러나 있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짐짓 딴전을 피운다  

희미해져가기로 마음먹은 것은  

심장을 아무리 펼쳐도 품을 수 없다  

 

파도가 멈춰서 모든 미래가 유출되었으니

너무 중요한 허무는 모른 척하기로 한다 

다만 다 닳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돌아와  

그 무덤에 꽃을 피워야 한다  

 

바다는 낙하하는 해로부터 붉은 꽃씨를 받아

조로한 파도의 무덤에 눈물을 뿌린다   

꽃잎이 한 잎 한 잎 피어나는 건 혼자 죽은 파도의 의무거나

도착하기도 전에 해답이 된 미래의 기억놀이 

푸른 녹이 슨 물결로  

없는 파도의 붉은 말소리를 더듬는 무덤 위   

잘 익은 산호꽃인 줄 알았는데  

하얀 거품꽃이 피어 있다  

 

바다는 최초부터 파도의 에필로그라는 것,

을 다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로드킬

 

그날 밤 한 대의 자동차가 

하나의 비명과 충돌했다.

비명이 해처럼 부서졌다.

궤도를 일탈하지 않아도 궤도가 달아난 건

아무 짓도 안한 빨간 해에 눈이 멀어

길이 저혼자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지상의 먼지들이 놀라서

양철처럼 가벼워져 튀어올랐지만

먼지는 다만 먼지일 뿐

금방 가라앉는 유전자를 가진. 

 

금방 사라질 것들은

좀 더 있다 사라질 것들에

재빠르게 밀려난다.

 

도처엔 맨홀, 부서진 피를 

맨홀들이 끌어당긴다. 

맨홀은 길 위가 부서뜨린 

피의 후속조치.

그러므로 길 위의 일에 대해

길은 아무 짓 하지 않는다.

 

그날 밤 길 옆 아까시숲에서

목소리마다 가시울음

울던 새 한 마리

결국 자기 부리로 목을 찢고

숲의 경계를 넘었다. 

자기 목에 부리를 박은 새는

짹 소리도 내지 못한다.

그날 허공에 

한 뼘 새의 자리 지워졌을 뿐

길은 길끼리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길 위의 것들은 

붉은 해가 부서져도

그저 사소하게 

농담 주고받듯

지나쳐가야 한다.

  

 

 

 

 

종소리

 

동그란 투명이 그늘을 깨우러 간다

 

잠자는 그늘을 깨우다가

그늘을 꽉 쥐고 있는 못에 긁혀

투명이 빨강처럼 쭈뼛 아프지

그것은 못과 한통속 된 삐죽한 그늘의 소행*

투명이 가끔 빗금 긋는 

심장소리 내는 건 그 때문이야

 

한 가슴의 부서짐을 막을 수 있다면

속고 속고 또 속아도 

말없이 부서지는 

투명의 주소지는 유리의 영토 

그 나라의 언어는

뾰족한 혀도 기꺼이 안아 품는 

죽은 조개의 침묵

새의 부리가 유리의 나라를 

터트릴 수 없는 까닭이야

 

후미진 골목 구멍뚫린 바람벽도

동그랗게 채우는 투명은

바람벽의 땜장이 

 

아무도 보지 못하는 곳

아무도 보여주지 않는 그곳

가장 높은 종탑 중심에서 돌아가는

커다란 유리알 거울

볼 줄 아는 눈만 보는

투명의 유일한 관객

 

단 하나를 위해

달려가 스스로 텀벙텀벙

허공으로 뛰어드는

동그란 제병祭餠들

 

* 스톡홀름 증후군: 인질이 인질범에게 정신적으로 동화되는 심리적 현상

 

 

 

 

 

 

플래시

 

꽃이 떨다가 뛰어내리자

캄캄하던 꽃의 살 속에

플래시가 터졌다

뛰어내려서야

환해지는 꽃의 살 속

 

사뿐히, 날아

그러쥐던 허공을 놓아버리자

꽃 속에서 숨죽이던 도마뱀이

붉게 흥건해졌다

 

그제야 만져보았다 

이빨이 물컹해져버린

물,

비린 쇠냄새가 손가락 끝에 엉겨붙는

빨간 울음소리는

혀를 빼문 채 고개를 누인 개처럼

경계선을 잃었으므로

 

울음소리는

이제 곧 팔레트에 옮겨질 것이고

진공의 큐브 속에서 굴절되겠지

 

램프가 되었다가

담요가 되었다가

빨간 모자가 되다가

 

쫓아갈 우주의 시간표보다

훨씬 먼저 변형되어

이상한 냄새를 활짝,

피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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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심사평

 

총 874명이 응모하여 예년과 비슷한 성원을 해주었다. 심사위원들은 그중 예심을 통과한 11명, 강민근, 구현우, 김창훈, 김해슬, 김혜린, 이시용, 이재은, 임지은, 최설, 최세운, 최수현의 시에 주목하였다. 이 중 습작 수준에 머물러 있거나 기성의 시를 연상시키는 경우를 우선 배제하였고,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고려해온 덕목인 자기만의 개성적 목소리가 시편에 내재되어 있는가를 중시해서 최종적으로 5명의 응모작으로 압축하였다. 강민근, 구현우, 김창훈, 임지은, 최수현 시를 두고 심사자들은 장고(長考)에 들어갔으나, 흔쾌히 당선작을 내기 어렵다는 데 모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최종심에 남은 대상작들이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우선 시편의 완성도가 높은 경우는 누군가의 시와 닮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주었다. 몇 해 전부터 신인상 심사 때마다 2000년대 이후 한국 시단에서 크게 주목받았던 시인들을 떠올리게 하는 시편들이 많다는 사실은 계속해서 제기되었던 문제다. 올해에도 여전히 유사한 한계가 되풀이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한편, 완성도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을 준다 해도 앞으로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어봄직한 특유의 패기와 고유의 독특함이 묻어나는 시편이 눈에 띄었다면 그 또한 반가운 일이었을 텐데, 매력적인 신인들이 보유하기 마련인 그러한 미덕을 발견하기 어려웠다는 점도 심사자들의 고민을 깊게 하였다. 마지막까지 이야기된 것은 최수현의 시였다. 속칭 ‘B급 정서’로 불리는 도발성과 불량함이 스산한 불안감과 우울의 정서와 결합된 양상이 또 다른 세대적 특징을 드러내고 있다고 여겨졌고, 이를 파격적이거나 자극적인 요설의 형식이 아닌 정제된 언어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으로 지목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정서의 양식화가 심사자들이 판단하기엔 모 시인의 경우와 너무나 닮아 있다는 점이 단점으로 지목되었다. 최수현의 시를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것을 끝내 주저하게 만든 것은 바로 이 기시감 때문이다. 자기만의 시적 개성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좀더 과감한 실험성과 용기 있는 일탈이 그에게는 더 필요할지 모르겠다. 심사자들은 이러한 논의 끝에 결국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시 부문의 당선작은 내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기대를 갖고 소식을 기다렸을 응모자 분들에게 이 자리를 빌려 응원과 감사의 말을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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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 이재연

 

 

환상과 자폐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파트만 무수히 태어났다.

우리들은 무성한 아파트를 반성했지만 반성뿐인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어떤 결론은 보기에도 민망했고 입 속에서도 서걱거렸다.

저녁이 되어 사람의 그림자가 발등에 수북이 떨어지자,

우리들은 우리 속의 쓸쓸함을 꺼내

천천히 쓰다듬기 시작했다.

 

 

 

태양이 식자, 어떤 청춘들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떠돌았고 우리들은 골짜기의 그림자처럼 두꺼워졌다. 그런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바람은 언제 어디서나 나타났지만 주위를 환기시키지 못했고 풀잎들을 일으켜 세우지도 못했다.

 

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은 이름을 주고받고 헤어졌다가 다시 만나, 서로 다치지 않게 거래를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한 거래 끝에서도 생을 뚜렷하게 뒤척이는 영혼을, 시인들은 검은 모자를 눌러쓰듯 자꾸 눌러썼지만 세상의 절반은 영혼의 범람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밤이 되어 측백나무가 제 키를 껴안고 울 때, 어떤 이는 단순하게 흙으로 돌아갔다. 또 다른 이는 삶과 죽음이 하나인 세계로 들어갔지만 남은 자들은 소수자에 불과했다.

 

뱀처럼 차가운 달이 뜰 때면 도시 외곽을 에둘러 흐르는 냇물이 움직였다. 그 물 꼬리를 바라보면 천천히 소름이 돋았다.

 

곳곳에 기도가 넘쳐흘렀지만, 어떤 불신은 막무가내 손을 뻗어와 소름이 멈추지 않았다.

 

()을 바꿔도 또 다른 나로부터 오늘을 골몰했고 흩날려 귀환하지 않는 꽃씨처럼 아릿한 방식으로 아이들은 줄어들었다.

 

얼굴보다 먼저 시들어가는 한 떼의 젊은이들은 제 내면을 들여다보며 술을 마셨고 아침이면 아이들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웃자란 아이들이 돌아오자 곧, 태양이 식었다.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

 

nefing.com

 

 

 

충북 보은군이 후원하고 실천문학사가 주관하는 오장환신인문학상수상자의 첫 시집이 나왔다. 22일 군은 20121회 오장환신인문학상을 수상한 이재연 시인이 최근 쓸쓸함이 아직도 신비로웠다’(실천문학사 ·143·사진)라는 제목의 첫 시집을 발간했다고 밝혔다.

 

이 시인의 시집에는 현대인의 생에 관해 원초적 의미를 부여한 42편의 주옥같은 시편들이 실렸으며 오장환신인문학상수상자의 첫 시집이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홍일표 시인은 그의 시를 따라가다 보면 존재의 쓸쓸함이 배면에 자욱하다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연민에 빠지지 않고, 냉온의 정서를 조율하면서 균형을 유지한다고 평했다.

 

보은 출신인 오장환 시인(1918~1951)의 시적 성과를 기리는 오장환신인문학상은 부박해지는 문학적 환경 속에서 시의 현실적 우월성을 되새기기 위해 제정됐다.

 

그동안 이 시인을 비롯해 신윤서(2리호(3채인숙(4박순희(5) 시인 등은 차세대 문단을 이끌 주인공으로 주목받는 신인들을 배출했으나 지원이 미약해 이들의 시집 출간은 이뤄지지 않아 이 시인의 첫 시집 발간으로 나머지 시인들의 시집 출간도 이어질 전망이다. 군 관계자는 신인 시인들이 문단에서 왕성하게 활동하도록 시집 출간비용 지원 등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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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절염 / 이상윤

 

어머니 무릎에 강이 흘렀다

걸음을 옮기면 강물소리가 들렸다

그 강엔,

물렁뼈에 의지한 지구의 중력과

어머니가 걸어 온 세상의 길들이 산다

오래전 샛강이었을 때

어머니는 운동화를 깁다 새벽 강을 건넜고

빈 쌀독을 다독거리다 눈 덮인 겨울 강을 건넜다

늘어나는 나의 발 치수에 맞춰

강폭은 넓어지고 수심은 더 깊어졌다

어제도 차오르는 강 수위를 낮추려

약손한의원과 샛별약국으로 가는 강을 건넜다

강을 건너고 난 어머니는

광목천으로 시린 강의 마디를 여몄다

 

언제부턴가 내게도 강물소리가 났다

어깨에 샛강이 흘렀다

강물이 등줄기를 타고 잠자리까지 차올랐다

아침저녁 강물소리를 들으려

귀는 강의 초입에 쫑긋 서 있었다

산다는 건 몸에 강을 하나씩 들이는 것이다

저녁 바람 뒤끝이 젖었다

내일도 강물소리가 무척 요란하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누군가 파스를 붙였나 보다

마을에 어머니의 강물냄새가 난다

 

 

 

직립의 숲

 

도시는 직립하는 것들의 숲이다

바람도 때론 직벽 앞에선 직립을 강요받는다

만일 직립이 완고하다면

바람은 생각을 수평으로 비틀게 된다

아니, 비트는 게 아니라

직립에게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는 것이다

 

추락을 피해 직립을 선택한 인류가

층을 올리는 건 모순이다

혹시 직립의 궁극이 추락은 아닐까

계단이 필요했다는 가설이 힘을 얻는다

추락하기 위해선

기어올라야 한다는 게 그럴듯한 이유다

 

계단을 만들지 못한 인류가

간혹 샤워 부스에 올가미를 건다

직립의 자세로 매달려야 바닥에 닿지 않는다

새들은 그 사실을 알고

허공을 수평으로 눕히기 위해 날개를 만들고

아침이면 서둘러 나무를 떠난다

조간신문이 말한다

어제 밤 도시의 숲에서

누군가 마흔을 하루 남기고 직립을 버렸다고

하지만 그건 일종의 오보다

죽음도 직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그는 어제 직립을 버린 것이 아니라

직립을 바닥에 눕혔던 것이다

 

 

 

빈집

  

바람이 채질하던 덕석에 가을볕이 시끄럽다

가을 장맛비에 손을 탄 장독이

몸을 뒤집어 할머니의 손맛을 털고 있다

습관을 지운다는 건 자신을 뒤집어야 하는 거다

들깨 턴 밭에서 사부작대던 저녁이

댓돌 무릎까지 차오르자

단단한 바람이 수수깡 벽을 잡아 비끄러맨다

새 앞가슴으로 앉아 군불을 품던 아궁이는

설마른 할머니의 기억을 때고

굴뚝 그늘엔 산까치의 발자국이 부산스럽다

대추나무 손가락 마디가 굵다

늙음이란 순을 낸 마디에 굳은살이 서는 거다

문지방 시리게 들락거리는 문풍지를

마을 개가 꼬리가 길다고 늙은 아재처럼 나무란다

곡간 창엔 들쥐들이 달을 켜고

할머니가 내어 준 세간을 새벽까지 정리한다

겨울이 마을 들머리에 왔는지

낙수그릇에 잔별들이 이를 달달 떨며

큰 눈이 오던 날

뒷산으로 마실 간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운 수족관

 

   마트는 동물원이야 동물들은 질소에 잠들어 있어 건드리면 빳빳하게 성을 내 세게 움켜쥐면 펑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녀석도 있어

 

   아이가 들어왔어 고래밥을 한 개 집어 드네 고래에게 밥을 줄 모양이야

 

   고래밥이 정말 고래의 밥일까

   아니라면, 동해에 서식하던 고래가 진화해 육지로 걸어 나온 걸 거야

 

   동해노래방에서 고래를 사냥하던 기억이 나 그녀는 고래의 속눈썹을 가졌었지 고래 숨구멍 같은 입으로 긴 한 숨을 뱉어내곤 했어

 

   어쩌면 고래밥은 수족관일 수도 있어 오징어, 거북이 심지어 한 쪽 어깨가 허물어진 별들도 살거든

 

   수족관에 어떻게 그 많은 바다생물이 살까

   수족관은 심해처럼 깊을지도 몰라 그게 어부가 커다란 그물을 들고 마트에 오지 않는 이유일 거야

 

   수족관은 왜 내 마음처럼 깜깜한 걸까

   햇살이 들면 어둠에 익숙해져버린 물고기들의 마음이 쉽게 상하기 때문일 거야

 

   어! 수족관 뒷면에 입장료가 붙어 있네 이건 분명 내 기다림의 시간일 거야

 

   떨어진 수족관에서 어류들이 우루루 흘러나왔어 사각형 어보가 어류들의 이름과 서식지를 설명하네 그녀의 서식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어

 

   집으로 가는 어두운 골목길

   젖은 별이 그리움에 부레처럼 부풀어 올랐어 나는 그녀가 없는 수족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몰라

 

   수족관을 흔들어봤어 스윽스윽 그녀와 듣던 파도 소리가 들려

 

 

 

 

새의 독백

 

   바람도 직사각형으로 불어들었어 새장 밖 하늘은 쇠창살이 그려진 푸른 도화지야 밤하늘을 울음소리로 건너는 새들의 대오(隊伍)도 빗물이 덧칠한 얼룩이지 난 점점 변해가고 있어 알람기능이 내장된, 단단한 절망의 돌기들로 덮여진 로봇 새로 쇠창살의 두께를 가늠하던 부리엔 밤낮 기어나가려는 생을 풀칠하던 사료들이 자라고 있어 의도를 간파한 눈초리를 모조의 지저귐으로 받아내지 깃털이 뽑힌 날개는 엉성한 손가락으로 진화해 가고 있어 새장 속에 난 늘 부재중이야 머릿속엔 하늘 길에 대한 지도가 두 발의 잔 지문처럼 그어져 있어 어둠이 세상 틀의 경계를 잠으로 돌려보내면 난 흘러나와 나미비아의 등이 굽은 사막을 건너는 낙타를 바라보고, 킬리만자로의 초원에서 잠이 든 표범의 허름한 어깨를 쓰다듬고, 시베리아의 저녁 굴뚝에서 사각으로 접혀진 내 영혼이 아직도 흐르는 오로라의 강을 바라보곤 해 오늘도 밤을 틈타 비행 연습을 해 혹시, 정말 혹시, 올지도 모를 그 어떤 날의 딱 한 번의 우연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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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 / 김관민

 

 

미안해요, 당신을 윤리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신발을 신발장에만 가두려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수학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모든 걸 계산하려고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지루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국어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을 그렇고 그런 이야기 속에 살게 했으니

당신은 얼마나 심심했을까요

 

미안해요, 당신을 음악책에 담으려 했어요

당신의 눈에 들리지 않는 음표들만 늘어놓았으니

당신은 얼마나 짜증났을까요

 

정말 미안해요,

당신은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인데

당신은 책이 아닌 이렇게 내 앞에 서 있는데

나는 그동안 뭘 하고 있었던 거죠

 

, 정말 미안해요

또다시 당신에게서 답을 구하려 했네요

 

 

 

 

 

[당선소감]

 

고맙습니다.

감사한 분들이 정말 많네요.

일일이 언급하면 진부하고 지루할 것 같아 줄입니다.

그래도 스승님이신 최승호 시인을 빼놓을 순 없겠죠.

정말, 감사합니다.

! 그리고 훌륭한 선생님들이 심사해주시고 뽑아주셔서

영광입니다. 무엇보다.

자만하지 않고, 열심히, 즐겁게

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쓸데없는 장식 뺀 돌직구표현

 

시를 읽는 가장 큰 재미는 다른 데서는 들어보지 못한 말을 그 시에서 처음 듣는 데 있지 않나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인은 세상을 보는 남들과는 다른 눈과 귀와 손이 있어야 할 것이고, 거기서 남들과는 다른 어법이 나오게 되는 것이리라.

 

이번 응모작품은 그 양에 있어 전년보다 훨씬 많았고 수준도 결코 뒤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너무 비슷비슷한 소리들이 많아 시를 읽는 재미가 반감되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가운데서도 다음 작품들은 여러 면에서 심사자들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것들이었다. ‘안개, 당신의 행방’(이주)은 우선 아름답다. 그윽한 수묵화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안개가 자욱한 숲길을 걷는 느낌도 주면서, 특히 뒷련에 이르러서는 사람 사는 일의 아득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든다. 빼어난 서정시로 읽어 틀림이 없겠지만, 자기만의 목소리나 어법이 모자란다는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미안하다’(김동연)는 말하자면 환경시라 할 수 있겠는데, 호소력도 있고 표현에 무리는 없지만 너무 뻔한 소리다. 옳은 소리, 지당한 말씀이 다 좋은 시가 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잘 지내니?’(조영훈)는 발랄한 발상과 표현이 장점이다. 하지만 외국어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걸린다. 시 하면 일단 폼을 잡고 인상을 쓰고 보는 것도 가관으로 그런 점을 극복하고 있는 면은 살만하지만, 이 작자의 다른 시들은 어쩐지 좀 가볍다는 느낌을 준다.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김관민)는 우선 어법이 특이하다. 이 점은 같은 작자의 악성종양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는데, 이런 어법은 우리 시에서 보기 어려웠던 터여서 신선한 느낌을 준다.

 

쓸데없는 장식 없이 핵심으로 돌진하는 시법도 시에 힘을 더해준다. 당선작의 수준이 된다고 생각되는 이상의 네 작품을 놓고 토의한 끝에 심사자들은 김관민의 책에 담을 수 없는 여자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그의 앞으로의 활약에 크게 기대를 건다.

 

심사위원 유종호 문학평론가와 신경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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