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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 / 안희연(安姬燕)

 

나는 핏기가 남아 있는 도마와 반대편이라는 말을 좋아해요

 

오늘은 발목이 부러진 새들을 주워 꽃다발을 만들었지요

 

벌겋고 물컹한 얼굴들

뻐끔거리는 이 어린 것들을 좀 보세요

은밀해지기란 얼마나 쉬운 일인지

나의 화분은 치사량의 그늘을 머금고도 잘 자라고 있습니다

 

창밖엔 지겹도록 눈이 옵니다

 

나는 벽난로 속에 마른 장작을 넣다 말고

새하얀 몰락에 대해 생각해요

호수, 발자국, 목소리……

지붕 없는 것들은 모조리 파묻혔는데

장미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에겐 얼마나 많은 담장이 필요한 걸까요

초대하지 않은 편지만이 문을 두드려요

 

빈 액자를 걸어두고 기다려보는 거예요

돌아올지도 모르니까

물고기의 비늘을 긁어 담아놓은 유리병 속에

새벽이 들어 있을지도 모르니까

 

별들은 밤새도록 곤두박질치는 장면을 상연 중입니다

 

무릎을 켜면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음악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당신이 이 편지를 받을 즈음엔

나는 샛노란 국자를 들고 죽은 새의 무덤을 휘젓고 있겠지요

 

 * 고트호브: 그린란드의 수도로 ‘바람직한 희망’이라는 뜻.

 

 

 

 

필라멘트

 

내 눈 속에는 돌을 안고 가라앉는 사람이 있지

누군가 내 눈꺼풀을 덮어주면

 

흰 천에 덮인 채로 말라간다

키에 맞는 나무상자가 곁에 있다

 

목덜미를 끌고 가는 새벽

나는 침대 밑에서 오래된 외투를 꺼낸다

닿자마자 물크러지는 열매 같아

연필로 그린 새가 날아가고

 

창문을 열면 나무와 하늘과 여름이

새의 무게만큼 비어 있다

 

나를 엎지르면서 또 한 대의 기차가 지나가고

 

발목을 끊고 그림자도 달아나버리고

 

살짝살짝 어깨를 떨고 있는 고요

나는 우산을 접으면서 작아진다

 

 

 

 

입체안경

 

스크린은 도로를 감추고 있다.

 

승객을 가득 태운 버스가 간다. 차창마다 똑같은 옆모습이 붙어 있다. 우리는 이름 대신 번호를 가졌지.

 

버스를 그려서 그 안에 버스를 구겨넣었어. 원을 그려서 그 안에 얼굴을 구겨넣듯이.

 

긴 커브를 돌았다. 두 겹으로, 네 겹으로, 여덟 겹으로…… 흩어진다는 것. 목이 등 뒤로 돌아갈 때의 속도 같은 것.

 

손잡이는 말했어. 한 곳에 오래 머물기 위해 유연하게 흔들리는 법.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손을 내려도 여전히 손잡이에 매달려 있는 것이 있지. 오분 전의 얼굴. 삼십초 전의 가로수. 나는 나로부터 불시에 멀어지고

 

의자가 조금 흐트러진 것 같은데. 나는 의자의 구조에 대하여 의심을 품었다.

 

하루해가 저물 때까지 한 사람을 완성하는 일.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키 크는 일에 관해서라면 나도 조금 할 말이 있어요 허물어지는 계단을 달려와 단숨에 뛰어내리는 일 공중에 떠오를 때마다 나는 킥킥 비행기가 된 것 같지만 폭죽처럼 온몸은 터지고 바닥엔 흩뿌려진 색종이들 나는 아름다운 착지를 꿈꿔요 옥상은 매일 밤 높아져요

 

   누군가 나를 찢고 달아날 때마다 나는 매번 다른 사람이 되지요 나는 뺨이 붉은 소년이었다가 잇몸만 남은 노인이었다가…… 지금은 철길 위에 꼼짝없이 묶여 있네요 경쾌한 기적을 울리며 기적 없이 다가오는 것들, 바퀴가 끌고 갈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토막 난 허리를 상상하면 거짓말처럼 배가 고파요 얼굴을 뒤적이다가 가는 고양이들

 

   줄줄이 나무들이 쓰러집니다 어제 죽은 내가 전하는 안부 같아서 나는 양팔을 벌리고 검은 해일을 안아요 다음 장면에선 비가 오고 철골만 남은 건물들이 유령처럼 서 있습니다 이곳에선 내가 주인공이에요 모자를 썼다 벗었다 쓰면서 스러져가는 불빛을 흉내내죠 목소리가 나오지 않지만 괜찮아요 가위를 든 손이 불현듯 나타났다 사라져도

 

   꽃병에 꽂혀 있는 흰 뼈들 성냥으로 만든 집은 자주 흔들립니다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방금 전 내다버린 상자들이 도착해 있고 창문은 추락을 보여줄 때 가장 선명해지지요 창밖의 아이들은 온종일 머리통을 공처럼 굴리며 놀아요 소매가 더러워지도록 땅을 파면 몸통들이 웃고 있고

 

   나도 따라 환하게 웃어봅니다 누군가 또 나를 찢고 달아나요 나는 다시 빛나는 눈을 가진 맹인이 되어…… 맹렬한 불 속에서…… 진짜 죽음이 와도 완성하지 못할 긴 편지를 쓰고 있어요 벽에서 태어난 새들의 날갯짓 소리가 들려와요

 

 

 ▲ 안희연 / 1986년생.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석사과정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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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제12회 ‘창비신인시인상’에 접수된 426명의 원고를 심사위원 3인이 한달 간 검토했고, 각자 3명 내외로 2차심에 추천했다. 이들의 원고를 약 2주 간 집중 검토한 후 10월 18일 최종회의를 진행했다. 시를 통해 실패를 무릅쓰고 세계라는 감성공동체에 지속적으로 참여해나갈 강한 의지와 체력이 엿보이는 신인을 우리는 만나고 싶었다.

   거침없이 질주하는 언어가 인상적이나 알맞은 그릇에 담기지 못해 언어의 긴장감과 시적 전개가 다소 정체되어버린 김지은의 시편들을 아쉽게 내려놓으며, 최종적으로 심도 깊게 논의한 것은 김숙, 안희연, 장혜령 3인의 작품이었다.

   김숙의 「저녁의 저울」외 5편은 탄탄한 서정을 갖추었고 언어를 조율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서정적인 언어를 지루하지 않고 세련되게 다루는 솜씨가 인상적이다. 특히 표제작이 매우 아름다워 오래 붙잡고 있었다. 응모된 거의 모든 시편들이 큰 편차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으나, 다른 시적 공간으로 진입하려는 의지가 다소 약해 보였다. 시의 매혹은 어떤 완성에서 온다기보다, 지금껏 내가 내딛지 못한 다른 시공간으로 옮겨가는 중에 낯설고 막다른 상처처럼 얻어지는 듯하다.

   장혜령의 「이방인」외 9편은 자신만의 확고한 스타일이 있다. 특히 「이방인」은 수작이다. 사유는 날카로우며 유연하다. 언어는 개성적인 에스프리로 흠뻑 젖어 있다. 돌발적으로 툭 던져지는 듯한 구절은 시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놀랍게도 뚜렷한 하나의 전언을 향해 화살표처럼 모여든다. 장혜령은 당선자가 결정되기 직전까지 우리를 고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런 고심을 「이방인」이라는 시를 통해서만 주로 안겨줬다는 데 아쉬움이 있다. 나머지 대부분의 작품들에서는 「이방인」을 통해 보여준 강점들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다. 만약 「이방인」이 이번에 응모한 시편들 중 비교적 최근에 창작된 것이라면, 장혜령은 지금 명백히 도약하고 있는 중이다.

   안희연의 「고트호브에서 온 편지」외 9편은 매우 감각적인 언어를 수집하고 배치하면서도 자신이 구사하는 언어의 진폭을 상당히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 당연히 그것은 진지한 고투의 산물이다. 동시에 실패를 무릅쓰고 부단히 다채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고자 노력한다. 이렇게 조탁된 시의 행간에는 침묵이 생명체처럼 도사리고 있고, 그 침묵이 주는 텐션은 매혹적이다. 이 모든 덕목은 최근 신인들에게 그리 흔히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현재보다 미래를 더 기대할 수 잇다는 점에 신뢰를 보내며 당선자로 선정했다.

   심심찮게 관찰되는 무거운 추 같은 미완의 세계를 발목에 매달고 난바다를 건너 또 다른 시의 영토로 한 번 더 도약하는 것은 지금부터 온전히 그의 몫이다. 앞으로 있을 그 고투의 과정에서 우리에게 부디 매혹을 선사해주길. 이 새로운 시인이 우리의 예감과 기대를 멋지게 증명해주길 부탁한다.

 

      [심사위원] 김중일, 박성우, 이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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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렁이를 알아가다 / 서귀옥

 

 

얼마나 천천히

몸을 대보는 지요 아스팔트 위에서

겉돌았던 생을 자책하듯 틈새기 찾으며

보도블록들이 공중에 쏟아지지 않게 꽉 붙들고

누가 몰래 이 별의 불룩한 자루 속을 뒤지나

누가 자꾸 이 별의 아픈 데를 헤집나 알아내겠다는 듯

민들레를 펼쳐놓고 안테나 뽑고 있네요

빗물에 둥둥 뜬 노란 암호를 풀면서

웅덩이로 풍선을 불면서

자전거바퀴에 감긴 빗방울 체인을 휙휙 채면서

스며들기 좋은 데를 기웃거리네요

이 별의 마디마디 흠집이 저리 깊었나, 다 읽히고 마네요

저러다 밟히면 어쩌나 싶어도 흙투성이로 뒹굴고 차이는 일들이

이 바닥을 알아가는 일이라는데요

진창에 바람 불어넣어 씨앗을 터뜨리기도 하고

꼬챙이 휘두르며 꽃밭을 들쑤시다가 부러지기도 하는데요

하긴 차갑게 스며들지 않고서

어떻게 이 별에 다시 태어날 수 있겠어요

태양이 높이 튀어 올랐다 내려오는 사이

뜨겁던 꽃이 식어버리고

버드나무에 앉은 매미 울음소리가 홀쭉해지고

차갑게 얼어붙은 처마의 톱니 날 풀리는 것들이 모두

별의 깊은 데에 몸 대보는 일이지요

흙빛을 닮아가기 위해 몸속 거친 끈 하나

풀어놓는 일이지요

 

 

 

 

 

[수상소감] “이제 할 일은 독창성·신선함 찾기”

 

  한 사내를 사랑했다.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 선생님이다. 영화를 본 날부터 나는 키팅과 시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 사내를 보듯 대놓고 시를 짝사랑하게 되었다. “어떤 사실을 안다고 생각했을 때 그것을 다른 시각으로 봐라, 그것이 틀리고 바보스러울지라도 시도를 해봐라!”라며 책상 위에 올라서는 그를 보고,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사실 그때까지 마음의 여유 정도 부리듯 습작을 해왔던 나는 마치 대낮 길거리에서 번개를 맞은 것 같았다. 죽고 못 사는 애인 삼아 시를 좇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시에 걷어차일 때마다 ‘내 삶의 목적을 한층 보람되게 하려고…’라며 수치를 무릅쓴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치고받고 밀고 당기는 동안 나도 시도 얼룩덜룩해졌다. 분명한 것은 시도 아주 멀리 달아나지 않고 내 옆을 걷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살면서 겪은 것들이 고스란히 스며들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서 말이다.

  수상 소식을 듣고 손을 뻗었더니 비로소 시의 감촉이 만져졌다. 거친 내 발뒤꿈치의 질감과 비슷했다. 어쩌면 나는 시를 따라다닌답시고 내 그림자를 좇고 있었던 건 아닐까.

  이제 내가 할 일은 눈 먼 집착 때문에 매너리즘에 빠져 결여된 독창성이나 신선함을 찾는 일, 사랑도 좀 세련되게 하는 일이다.

  부족한 작품 뽑아주신 심사위원에게 감사드린다.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을 터, 이제 그것을 스스로의 손으로 찾아 그 존재만의 옷을 해 입히겠다. 우석대학교 문예창작과 선생님들께도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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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사평] 신인다운 기발한 발상·기법 아쉬워

 

  예선을 거친 10명의 응모작 50여 편은 두 심사위원에게 우송되어 각기 심사를 했다. 그 결과 응모자 3명 내외의 작품이 각자 선정되었고, 9월 23일(월요일) 김유정문학촌에서 만나, 각자가 선정한 작품을 중심으로 토의를 거쳐 합의에 이르렀다.

  다행스럽게도 두 심사위원들이 선정한 작품은 서귀옥씨의 4편, 장모란씨의 3편, 이향숙씨와 최주현씨의 작품이 각기 2편씩이었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4편의 작품이 선정된 서귀옥씨가 당선신인으로 결정되었고, 그의 작품 중에서도 최우수작으로 <지렁이를 알아가다>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응모자들의 작품 50여 편은 대체로 고른 수준의 작품이라는 의견이었으나, 체험적 설득력이 약한 듯, 서술과 기교에서도 지나친 감추기로 내용의 연결과 시적 승화가 허약한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위의 4명의 작품들은 내공의 깊이가 헤아려지고, 소통의 보편성이 무난한 수작으로 평가되었지만, 참신성이나 기발함에서는 아쉬움도 적지 않았다.

  예술작품에서 치명적인 약점은 비슷함이어서, “비슷하면 가짜다”라고 공인되었는데, 응모작품들의 발상 및 주제가 엇비슷했고, 심지어는 제목이 동일한 경우도 있었다. 왠지 기성시인들이 수도 없이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을 별 감동 없이 재활용한 듯, 단지 무난한 수준에 이른 듯한 느낌도 떨칠 수 없었다.

  신인다운 기발한 발상이나 기법을 신인에게 기대한다는 것이 무리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그래야만 하는 것이 신작과 신인다움이라서 많이 아쉬웠다. 더욱이 같은 응모자의 작품들끼리도 서로 엇비슷한 시상과 전개과정이어서 작품별로 나타나주어야 하는 그 작품 나름의 독자성 유일함 등이 부족했다는 지적도 있었다.

  적지 않은 아쉬움에도, 소통에 결정적인 약점이 되는 지나친 감추기가 아닌, 즉 너무 감추지 않으면서도, 참신하다고 평가되는 서귀옥씨의 <지렁이를 알아가다>,‘물수제비를 뜨다’,‘빈자리’,‘웅덩이’,‘풀’ 등의 작품은 그 중 가장 우수하다고 평가되었다. 장모란씨의 ‘신장개업’과 ‘쌍화점’, 최주현씨의 ‘소금쟁이, 날아오르다’,‘선지국’과, 이향숙씨의 ‘허공에 머물다’,‘별을 달다’도 발상의 신선함과 점증점강의 기교도 돋보였음을 밝히고 싶다.

  서귀옥씨의 <지렁이를 알아가다> 역시 서술 상 다소 복잡한 느낌이었다. 시는 언어 경제학적이라는 특성과, 너무 많은 정보를 담으면 강조점이 희석되고 만다는 사실도 잊지 않기 바라면서, 우리문단에 우뚝한 시인으로 대성하기 바란다. 당선신인으로 선정됨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심사위원 정현종·유안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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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리나에게 부쳐 외 4편

 

박소진

 

 

기차를 탄 안나 카레리나와

멀어지는 브론스키를 보았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보통의 날에

고전을 읽고

그곳의 입맞춤을 따라한다

한 줌의 익숙한 기억으로

화려한 군무여

 

그러나 나는 여전히 느리다

사랑할 여유가 없고

온종일 노랗게 짓무른 하늘만 본다

때로는 가쁜 숨을 토하며

 

내가 울었던 날이

구름도 하얗게 쇤 어느 날이

지나치지도 않게 적당했던 하루에

토해내고 천천히 지워지고

수신인 없는 편지 마지막에

내 이름 세 글자를 쓰고

연약한 연애를 닮은 얼굴로 초라한 옷깃을 여민다

 

그런 기차를 타고 싶었다

안나가 울던 기차

안나처럼 사랑하리라 했다

안나처럼 수줍지만 초라하지 않게 

 

 

 

 

예술과 진실

 

 

정직한 아름다움은 범주에 들지 못했다

단순함은 복잡해지고 묘사는 난해했다

천 년이 흐르는 동안

모방의 예술가는 선을 말했고

거짓의 진실을 살고 죽었다

 

미의 표본이 없어

신은 죽었다

만물이 제 모습을 신이라 여겼다

두꺼비도 제 모습이 아름다웠고

황소에게 인간은 두 무릎을 바쳤다

거짓은 치장으로 비만해지고

진실은 가난으로 배를 주렸다

그렇게 또 다른 천년이 오고

비너스는 다산했고

어느 날, 아도니스는 예수였다

 

그림자 없는 종은 없고

영혼도 제 모습이 있어 상상력은 번창했다

신도 당신의 모습을 발밑으로 보지만

진실의 창은

오만으로 재갈 물려 검게 닫혔다

 

 

 

 

 

동행

 

 

당신을 떠나온 어느 날은

시리게 따뜻했다

몇 안 되는 세간을 들인 날,

남루한 이야기를 늘어놓고 허리를 굽혔다

공손한 무릎에 두 손을 얹고

천천히 낯선 여자의 품으로 가라앉았다

 

가을이 새롭다

새로 만난 엄마가 자신의 방법으로 가을을 그린다

이 인연은 또 얼마나 많은 것을 보여주려나

이건 벌개미취, 이건 들국화

꽃들은 사람의 감정과 상관없이 활짝 행복하다

몇 번의 발자국을 나란히 하늘 아래 찍어본다

낯선 길이 걸어오고

서로 부둥켜 하얀 들판을 걷고

차가워진 팔을 겹쳐 안았다

 

발자국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기억이란 그런 것이다

제 어미 그리워 우는 여자를 달래어

저린 젖가슴위로 입김을 불어넣는다

가늠 없이 겹쳐 안은 팔 사이로

남아있는 마음이 여자를 적시며 흘렀다

 

 

   

 

그 해, 오늘

 

 

눈을 떴다 핏덩이를 안는다

모래알 같은 기억이 씹힌다

가냘픈 태동, 갓난애가 놀고 있다

아기는 자라 여자의 이야기가 되리

엄마의 창은 딸의 눈이라

딸의 목소리가 어미의 웃음이라

엄마는 나와 열 달을 같이 살았다

나를 매만지고

흐르는 나를 치켜 올리고 옷깃을 여미며

손을 잡고 속삭였다

 

엄마처럼 나도 아기에게 말을 걸어본다

이건 초록 여름 나무

저건 토끼 닮은 구름

내가 걸어 엄마가 걸었고

내가 멈추면 엄마도 앉았다

내가 눕고 아기는 기었다

 

배앓이에 눈을 뜬다

호흡이 정적을 깨고 엄마를 부른다

아기의 달아오른 울음이 손에 잡힌다

나는 내 딸과 열 달을 살았다

그 해, 엄마도 나와 열 달을 살았다

심장이 뛰고

기억이 온기를 내뿜는다

 

 

 

 

 

딸기꽃

 

 

손이 시리다

딸기는 찬물에 씻어야한다

입김에 영글었던 씨앗들이 짓이겨지고

붉게 탄 입술을 하나씩 잘랐다

등 뒤 너머 식구들 웃음소리에

찬 손은 얼어가고

 

천국에 초대받은 아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올 때 딸기 꼭지가 생긴다는구나

가진 것 중 가장 순백의 이야기를

내게 바치겠다고

당돌하고 수줍게

머리에 이고 보는구나

 

명랑한 핏빛을 품고

그 속에서 고귀하게 피었다

프리카*에게 바쳐질 만 했구나

손이 시려 그만 조각을 냈다

가시를 품은 장미로 돌아가지 못한

망각의 꽃잎은

그 누구도 기억하지 못해

홀로 외롭다

 

너를 따다가

손이 시렸다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여신

 

 

 

 

 

성명 : 박 소 진

주소 : 서울시 성북구 돈암2동

약력 :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졸업

전) PANTOS Logistics 우크라이나 법인 주재 근무

한양대학교 교육공학과 석사 재학 중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전국문학창작공모대회 시 부문 최우수상 (일반부) 수상

(2011.10.15.)

자유문학세대예술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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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거 / 권기만

 

 

얼굴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아무도 본 적 없지만 내 얼굴에는

다섯 마리 토끼가 산다 내가 미소를 지으면

깡충깡깡충 뛰어다닌다

내가 우울하면 쫄쫄쫄 굶는다

 

다섯 마리 토끼가 뛰어다니는 얼굴을 보는 건

즐겁다 토끼가 뛰어다니고 있다면 틀림없이

맛있는 대화중이거나 사랑하고 있을 때다

소곤소곤은 토끼가 제일 좋아하는 풀이다

 

한겨울에는 토끼도 어쩔 수 없이

말 속에 굴을 파고 들어가 잠을 잔다 봄이 오고

사방에서 꽃이 터지면 기다렸다는 듯 소풍을 간다

꽃 한 송이마다 한아름의 미소가 사는 걸 알아보는 건

토끼다 입 다물고 있어도 봄이 지나고 나면

살금살금 미소가 살쪄있다

 

소곤소곤 조곤조곤을 뜯다가 어른 토끼들은

구름 속으로 이사를 간다 큰소리는 토끼가

제일 싫어하는 풀이다 아이들 말은 토끼의 발

버짐 핀 듯 얼굴 왼쪽이 간지럽다

다섯 마리 새끼토끼가 풀을 뜯는 모양이다

 

 

 

발 달린 벌

 

nefing.com

 

 

[당선소감]

 

나는 가끔 우주에서 날아온 별에 입술을 데이곤 한다. 꽃의 화기에 한동안 눈이 멀기도 하지만 그보다 바람의 꼬드김에 환장하는 날이 더 많다. 살갗에 별이 뜨는 날이면 달에서 파도가 친다. 산짐승 같은 어둠을 베고 잠들던 어린 시절에 내 영혼은 아직 멈추어 있다. 적응이라는 이름으로 시대를 관통하는 일은 언제나 상처다. 발전할수록 기억에 대한 훼손과 무례는 늘어난다. 돌아갈 곳을 만드는 일과 시 쓰기는 무관하지 않다. 문풍지의 떨림이 시의 긴장이라고 생각한 것은 그래서 일 것이다. 기억이 저장된, 훼손되지 않은 영혼의 고향을 찾아 방황하는 현대인의 아픈 처지를 시가 담아낼 수 있다면 분명 누군가의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 복무하고 싶다는 바램을 오래전부터 품어 왔다. 그러나 떠밀려 억지로라도 건너야 하는 시대에서 개인의 저항은 미미하기 그지없다. 동시대의 아픔을 나누겠다고? 그러나 그러한 고뇌가 시를 관통하지 않으면 그 시는 공허하다. 그것을 앓아야 건강해지는 영혼이 있단 걸 시를 쓰면서 깨달았다. 시를 향한 고뇌가 훼손되지않은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다. 비록 아직 그 길을 온전하게 찾아내진 못했지만 그 희망을 발견했다는 것으로 이젠 용기를 가지려고 한다.

 

투고해놓고 제 의 허약함에 놀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러한 일에 용기를 내어서 걸어가보라고 손을 들어주신 강은교, 이경림, 권혁웅 심사위원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아울러 문학 부흥에 앞장 서 주신 지리산문학회와 시산맥 관계자분들께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동리목월 김성춘, 구광렬, 손진은 교수님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시작나무, 시와사람들 그리고 언제나 한몸처럼 응원해준 영남시 동인들과 기쁨을 나누고 싶습니다.

 

 

 

 

[심사평]

 

신인상 심사평에서는 흔히 '신인다운 패기'를 심사의 기준으로 삼았다는 말을 듣곤 하는데, 사실 이 기준에 따라 신인을 고르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떤 경우에도 신인상은 입사(入社)의 관문이고, 이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다른 이와 비슷해야지 달라서는 곤란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사실 패기란 신인의 숫기 없음을 격려하거나 거친 솜시를 에둘러 말한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번 경우는 사정이 달랐고, 심사위원들로서는 그 점이 기뻤다. 10명의 본심자(강두원, 강태승, 권기만, 남상진, 박광석, 박선희, 박은석, 이기호, 임원혁, 전영) 중에서 세 명을 집중적으로 검토했다.

 

박광석의 시들은 오랜 수련의 흔적을 품고 있다. 호흡도 안정되어 있고, 시상을 전개하는 방식도 탄탄하다. 그런데 바로 그 안정과 탄탄함이 약점이다. 생각이 제재 주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표현이 흔한 투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좋은 시와 비슷하다는 것만큼 시에 해로운 것도 없다. 근사(近似)하다는 건 바로 그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박선희의 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한때 시적인 정념을 가장 잘 표현한다고 간주되었던 구절들이 있다. "바람의 행진" "지문 위 실핏줄" "몸에서 자라는 산" 같은 구절이 그런데, 모두 이 응모자의 시에서 뽐은 구절이다. 이런 구절은 정념을 담는 게 아니라 흩어버리는 역활밖에 하지 못한다. 잘 표현된 상념일수록 타협의 산물임을 명심해주셨으면 한다.

 

서두에서 말한 패기를 권기만의 작품에서 발견했다. 능청스레 풀어가는 입담 너머에서, 삶에 관한 통찰이 오롯이 빛난다. 무엇보다도 '그럴듯함'의 흉내를 내지 않은, 생활세계에서 길어 올린 정서가 작품마다 배여 있다. 동거처럼 미소 짓게 하는 작품에서 설국처럼 둔중한 슬픔을 안은 작품까지, 그 정서의 폭도 넓다. 수상을 축하드리고, 패기 있게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시길 기원한다.

 

심사위원 강은교(시인), 이경림(시인), 권혁웅(시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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넝쿨장미 / 남지은

 

뾰족한 악몽을 밀어내고

담장에 오르는 새벽

 

나는 내가 비좁다

 

창을 열면

내 안으로 눈이 내리고

 

붉은 새가 걷는다 붉은 새가

 

떼로 날아오르면

검게 찢어지는 하늘이

 

칼들이 쏟아져내리고

아버지가 보인다

 

취한 손으로 가족들 발톱을

뽑아내는

 

모두가 찌르고 모두가 찔리고

모두가 떠나지 않고 이곳에 서 있다

 

내 안으로만 쌓이는 눈

창이 열리면

 

나는 나를 뚫는다

새가 새를 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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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회 《시인세계》신인작품 공모 당선작 발표

 

 

      새로운 시인

      〈당선작 없음〉

 

 

 

 

 

【심사평】시와 ‘시적인 것’을 구별하라

 

   결선에 오른 열여덟 분의 응모작을 몇 번이나 주의 깊게 읽었다. 그 중에서 「밤의 시학이 원하는 단편들」외(성혜경), 「자줏빛 가죽 드레스」외(신지영), 「이끼의 섬」외(이아랑) 등 세 분의 작품을 주목했다. 그러나 세 분의 작품들은 다른 두 분의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했다. 나 역시 이들의 작품이 아직은 당선이라는 중력을 감당하기에는 모자라다는 점에 동의했다.

   끝내 당선작을 찾지 못했다. 응모작들을 읽은 소감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시들이 지나치게 길고 장황했다. 시가 말의 응축과 언어의 내핍의 바탕으로 의미를 세우는 장르라는 걸 응모자들이 잊은 것처럼 보였다. 둘째, 시들이 공감이 가지 않는 자의적(恣意的) 말놀이에 빠져 있었다. 모호함에도 그럴 만한 당위성이 있어야 한다. 자기도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方言)들은 시가 될 수가 없다. 시단에 유행하는 한 기류의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 셋째, 상투성에 오염되어 있는 시들이 많았다. 이는 자기 체험을 꿰뚫어보는 통찰과 독창적인 사유가 없다는 뜻이다. 이런 부류들은 시가 아니라 ‘시적인 것’에 매혹 당한다.

   ‘시적인 것’들은 널려 있지만, 정작 그 중에 제대로 된 시를 찾기는 어려웠다. 당선작을 내기 어렵다는 두 분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_ 장석주

 

   문제는 일상생활의 산문을 시에 도입하면서도 시의 특성을 살린다는 어려운 가능성을 성취하는 데 있다. 일상생활의 산문을 도입해서 그대로 산문이 되어버린다는 것은 시의 패배이자 자기부정이다. 많은 응모작품들이 산문이 되어버리는 함정에 빠져 있다는 느낌이다. 약속이나 한 듯이 장황하고 사설이 많고 생략과 절제의 미덕을 모르는 것이 안타깝게 생각되었다. 그 점 치열한 자기반성이 요청된다. (끝으로 이아랑, 이재근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함) _ 유종호

 

   결국 ‘새로운 시인’의 탄생을 다음 기회로 미루게 되었다. 투고된 대부분의 시들은 산문체의 장황한 서술방식을 취하고 있으며, 상상력마저 간접체험의 것으로 채워져 있었다. 언어의 긴장과 압축, 함축된 시 본래의 모습과는 달랐다. 투고시를 모두 읽고 선자 세 사람은 이 같은 소감을 동시에 주고받았다. (끝으로 성혜경, 이재근, 기랑, 이아랑, 신지영의 작품에 대하여 언급함) _ 김종해

 

 

 

                   —《시인세계》2012년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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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후협상 / 김필대

 

금요일,

마음이 늘 몸보다 앞선다

무작정 나선 길

곧 되돌아 올 길을, 천천히 지우며 떠난다

 

생각하면

비 젖은 꽃송이처럼 너는 기울어진다

대책 없는 시간은 흘러가고

처음부터 일일이 설명에 열 올리던

네 그림자 지쳐 길게 누워있다

 

다시 꽃 피는 날, 낯익은 이름 부르면

외롭고 쓸쓸히 한 세상 살아온

잊었던 이름들 먼저 대답하고

퇴근시간에 맞춰 허리 굽히는 山들

 

일주일치의 근심을 배낭에 구겨 넣고

사람들은 도시를 빠져나가고,

 

물끄러미 혼자 시간을 보내다가

숨겨둔 히든카드 한 장을 만지작거린다

 

늦어버린 저녁 먹으러 간다

너를 보내고도

아직도 널 보내지 못한, 비공식

막후협상은 남아있다

 

 

주소를 묻다

 

자정을 알리는 소리에

오늘은 어제가 되고 기다렸던 내일이

오늘로 신발을 갈아 신었습니다

시간은 새 주소로 자리를 옮기고

초를 세며 걷기 시작합니다

 

이파리 버린 가로수들

계절은 주소를 잃어버리고

도시는 어지러운 불빛을 허리에 두르고

잠을 반납하고 있습니다

출구를 잃은 바람조차 생각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감나무 그늘 뒤로 달빛이 서성일 때

후두둑 감꽃이 떨어지듯

누군가 황급히 돌아간 발자국

남겨진 한 줄의 말씀처럼 선명합니다

 

달빛에 휜 나뭇가지처럼 당신에게 휘어져

한여름의 분수를 오래 바라본 적이 있습니다

높이 올라 추락하는 마음을 그때 보았습니다

 

이제 막 도착한 오늘이

지금의 날 예견한 듯 바라봅니다

짐을 꾸리다 발견한 오래된 시집 한 권

놓쳐버린 詩句처럼 우리는 어디쯤에서 멈췄을까요

 

안개 속으로 천천히 걸어갑니다

아직 詩를 떠나지 못하는 이유를 들고

 

 

 

슬픔을 나누는 명상

 

좀 더 많은 슬픔을 가진 자가

작은 슬픔을 가진 자를 위로하는 게

이 작은 나라의 법이다

봄꽃 지천으로 피었으되 정작

자신의 부재를 알리고 떠나는

들꽃 하나 아직 보지 못했다

운명 따윈 믿지 않은지 오래지만

예정된 절대적인 힘에 가슴 졸이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출구가 막힌 슬픔의 극한,

가혹한 현실도

서로 손을 잡으면 삶의 통로가 생기려나

이 한줌의 기쁨을 위해 얼마나 많은 슬픔이 길을 잃었나

진정 알고 싶던 운명의 변주곡

이곳을 관장하시는 운명의 神께

우리가 원하는 것들의 목록을 적어 보낼까

소박하지만 빈들에 엎드린 한 송이 들꽃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 한통

알아들을 수 없는 노래라도

기꺼이 함께 부를 수 있는 세상이 있었으면

 

 

떠나기 위해 돌아오다

 

말없이 떠나고 싶은 것은

어딘가에 나를 버리러 가는 일

가진 것 훌훌 털어내고

빈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첫걸음만 내디딜 수 있다면

길은 어디에나 있다

아무도 이웃하지 않은 저기 홀로선 미루나무에게

짧은 작별을 고하고

누구도 기억하지 않을

가난했던 우리의 청춘에게도

위로의 술 한 잔쯤 권하고 싶을 때,

 

익숙해진 계절병은 제 시간 그 장소에

어김없이 돌아오고

비오는 날의 강가, 물줄기가 드럼을 친다

 

너를 두고 그림자만 데리고 떠나는 길

심장소리보다 더 크게

물의 심장이 울고 있다

빗소리가 앞서서 강을 건너는 동안

나는 자욱하게 지워지는 중이다

 

 

 

새해를 기다리며

 

어머니처럼 늙어버린 계절이

나를 향해 오고 있다

사람들 사이를 비틀거리며 지나가는

겨울처럼 서러운 중년의 사내는

코트 깃을 세우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만난 사람들

쓸쓸히 헤어진 어느 길모퉁이

새해 인사장 대신 악수를 청하노니

잘 가라 그대 새해여

 

어제 올랐던 삶의 산봉우리

체온으로 덥혀진 한 잔 술 권하고

다시 봄을 기다리는 저 아래 삶의 계곡엔

가난이 눈처럼 쌓여있다

용케도 운명에 매몰되지 않은 영혼들이

산그늘 아래 오랫동안

울고 서있다

 

태양은 습관처럼 다시 뜨겠지만

일출과 일몰이 다르듯

양지와 음지가 있다

빛은 고르지 않다

 

그늘에 발을 묻고 사는 잡초의 이름을

누가 기억할 수 있을까

아무도 불러주지 않는 얼룩진 삶들

저 산 밑에 살고 있다

 

세상의 맨 끝줄에 서서, 오지 않는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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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예감성 제4회 신인상 공모 당선자 발표

 

안녕하세요. 깨끗함과 개혁을 표방하는 문예감성 제4회 신인상 공모에 많은 분들이 응모해 주심에 대하여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최초 발표일을 3월15일로 공지 했습니다만 많은 분들이 응모를 해 주셔서 1차, 2차를 거치는 과정에 다소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발표가 늦어진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당선작은 빠른 시간 안으로 신인상 수상작 게시판에 등재토록 하겠습니다. 당선되신 모든 분들에게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장르별 당선자

 

1. 시 부문
  김현승  '지렁이 발자국' 외4편
  김필대  '막후협상' 외 4편

 

 

지렁이 발자국 / 김현승

 

콘크리트 틈에 지렁이들이 피었다

그 와중에 모래 씨앗들을

새끼처럼 품은 이들이 있다

꺼지지 않는 호흡이다

토막 난 바람에도 혼절할까

온몸을 환대로 감싼다

그들을 깨운 생에 자양분이 되는 건

이슬 한 움큼

구름이건 햇살이건 바람이건

목숨이 세포인 생물에는 모두

견뎌야 하는 순간들이 있다고

메마르고 어지러운 시간들이 온몸에 달라붙는다

환절環節마다 말라붙은 오후를 계속 기다보면

제 세상의 끝이 보일까

우거진 밤을 두 근육으로 밀어 끈 후에는

수평선이 닿아있는 시간의 배후에서

집을 짓고 있을지 몰라

그 틈에서도 그들은 호흡을 하고 있다

 

오늘, 거리에서 헝클어진 발자국을 보았다

 

 

지하역에 문병 가겠어요

 

결핍된 목구멍 속으로

지하의 生이 운반되어 오네요

정지했던 시간의 틈이 문을 열어요

코까지 차오른 숙성된 시간들이

토사물처럼 분비되지요

네 줄 서기로 흩어졌던 신발들이

멀미하는 구멍 속으로 모여요

사막 같은 발끝들을 머물게 했던

역사(驛舍)에 또

빈 바람만 씹히네요

 

결빙된 하루가 지하역에서 미끄러워요

그냥 내버려두면 넘어지겠어요

그것 봐요,

기절한 술병들이 흠집 나 있잖아요

구겨진 구직 전단지들 위에 딱지가 앉아 있어요

 

역 구멍 속으로 등이 굴곡진 생명들이 동거해요

관절염으로 마비된 넋들

시름시름 바닥을 기더라도 바람막이 벙커가 필요한 거겠죠

텅 빈 갈망으로 꽁꽁 둘러 싼

닳고 닳은 옷들

해진 마음 한 귀퉁일 매만져 줄래요

종양 같은 먼지의 무게를 덜어 주겠어요

 

지하역에 구멍이 있어요

지하역 구멍은 상처막이 벙커예요

그 안에 머무는 마른 생명들, 모두

편도선이 퉁퉁 부어 있어요

 

지하역으로 비대한 어둠이 걸어오고 있어요

 

 

노파의 장롱

 

긁히고 베이던 어린 날들이 있었지요

 

그때는 몰랐어요

처음부터 있었던 그대의 둔탁한 부재(不在)를

출처를 알 수 없던 살갗의 홍조는 늘

부재(不在)의 모서리에서 나온 것이겠지요

그러자 점점 귀 기울이게 되었어요

그대가 내게 건네는 말들에

쪼그라든 풀잎들, 꽃받침이 헐거워진 자리,

내장의 언어들을 물려주기 위해

내 몸에 자국을 남겼대요

 

처음으로 그대의 내력을 알게 되었어요

이불홑청 흐트러진 꽃잎들 사이로

첫울음 터뜨린 후,

내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목련꽃을 낳은 해에

세상 울음길을 터 주었다는 것을

 

그러고 보니 그대의 낯이 쓸쓸하게 늙어 있네요

가장 낮게 엎드려 볼을 대고 서성여 보았어요

바람의 얼굴을 한 채 그대의 소매를 잡아당겼지요

 

차고 비릿한 숨이 몰아치고

검고 눅눅한 싱싱한 꽃잎들이 번져가고 있어요

 

어서 이 꽃잎들을 품어야겠어요

 

 

 

오래된 통증

 

그때도 사나운 밤이었다

 

골목 10m 간격의 나뭇가지들이 떼울음을 울었고

울음소리는 내 따귀를 때리고 있었다

차가운 울음 부스러기들이 몸에 들러붙을까, 슬쩍

피할 궁리를 하고 있는데

골목 한 귀퉁이에서 생선 비린내들이 새어나왔다

먼 과거로부터 흘러 들어온 생선 대가리들,

떠돌이 차림으로 각질처럼 길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도시의 무덤 속에 웅크린 중년의 사내,

얼어가는 수도관에 목숨을 걸어 놓고

초보의 몸짓으로 웅크리고 있었다

건너편 멀리 보이는 ‘來 美 安’ 불빛들과 부딪혀

동파하는 중년의 눈빛

골목의 울음 위에 얹혀 골목을 밀어올렸다

 

그때는 비릿한 밤이었다

고양이 울음이 어디선가 들려오고

생선 대가리의 울음이 저릿한 두 귀밑 거리를 메우던 밤

중년의 눈빛이 마음의 고리에 걸려 바람에 흔들린다

내내 비린 기억이 가시지 않는다

 

 

 

겨울 품에 들다

 

베개 밑에 겨울이 내려앉는다

 

충혈된 별 그림자가

손을 맞대고 비비는 소리

이불 속에 들어와 체온을 지펴주고

연방 꼼지락대던 어린 발가락들은

눈부신 공상에 잠이 멎는다

 

마당에는 새치름한 눈의 요정들이

얼음 왕국을 만들고 천장 밑 환상화에

까르르대던 머리맡

할머니의 잔소리도 유쾌한 그날은

목련도 한껏 필듯하였다

이불 속 공상을 지피는 집을 찾지 못해

꼼지락대던 시린 발가락들도

베개 밑 겨울과 잠을 청할 때

베개 밖 겨울에도 눈이 내려앉는다

 

아스팔트길에 피울

인조 불빛을 가공하는 도시

어떤 이들은

귓가에 걸린 별 그림자 소리 잃어가고

어떤 이들은

베개 밑 겨울만 훔쳐가지만

할머니가 계시던 그해, 겨우내

지붕 위에 베개 밑에 겨울이 내려앉던,

그 이불 속 어린 발가락들은 여전히

그리운 공상을 잊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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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의 경우 (외 4편)

 

   안미린

 

 복제되고 다음 날 같다

가가 다에게 고백을 했다

전생에 나는 너를 잡아먹은 적이 있어

나는 외계인이 아니었어?

아니었어

아니었어?

어른이었어,

여자애라면 머리를 돌돌 말아 고정시켰지

 

노을과 환타가 동시에 쏟아졌을 때 가는 울었어,

다가 나에게 고백을 했다

강제적인 첫 경험들 말야

목이 부러진 인형에 얼굴을 붙여 주는 시간

내와 네의 발음을 구분하는 숙제

색연필을 쏟은 와락 같은 거

색깔이 덜 마른 벽에 대한 불안 같은 거?

옷핀의 구조 같은 거

셀 수 있는 모서리

잔디로 결정된 풀들의 길이

여름의 정글짐

겨울의 정글짐

물을 먹지 않고 마시는 감각과

씨앗 근처의 눈부신 맛

팔을 벌려 납작해지며 벽을 안아 봤던 날

나도 몰래 홀수로 얼음이 얼고

무수해졌어

자기 이외의 생명?

자기 이외의 생명,

메롱하는 것

 

나는 라에게 거짓말을 했다

네 키와 같은 사람은 거리에 가까워

너와 마주 댄 등은 깊이에 가까워

라는 흔들릴 만큼 웃었다

나는 제외될 만큼 웃었다

꽉 쥔 주먹만 들어가는 장갑이 일곱 개 완성되었다.

 

 

 

 

흐린 기린

 

 잠시 진화가 멈췄다

 

얼굴에 남겨진 코를 눌러 봤다

돼지 코가 되었지만 웃지는 않아

동물원이 무너져서 다행이다

동물원이 사라져서 안타까워

어째서일까 아무도 기린을 훔치지 않아

방을 지어 올린다면 방의 가능성

얼룩을 따라 살살 자라날 얼룩이들

천장이 동물원이 될 텐데

천장을 만질 수 있는 건 여전히 강제적인 것과

그 색이 싫어서 불어 터뜨린 풍선

 

옛날 기린들이 기어올 텐데

흰 색소의 솜사탕을 물고 흐려지면서

다르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가까운 동물원에서

가까운 너희 집으로

멀리서 보면 아름다워서 아무도 몰라보겠지

안녕 안녕 손을 흔들면 내 팔이 아니었다고 내가 흔드는 지진

 

진화가 다시 시작되었다

기린 없는 높이로 방의 전등을 갈고

나는 완전한 키가 될 거야

너는 조금씩 네가 될 거야

기린들이 전부 진화했을 때

목은 무늬였다니

 

 

 

우산의 안

 

 

 

깨끗하게 잘린 샴쌍둥이가 가볍게 다툰 후

거울을 반으로 가른다

다른 나라와 틀린 나라 사이로

눈이나 새가 내린다

 

왼쪽의 아이가 팔을 박박 긁으면

오른쪽의 아이가 잃은 팔에 놀라 알약을 토해 낸다

흔한 종교들은 여름에만 믿고

왼쪽의 아이가 좀 더 건강해진다

 

일기장은 어쩌지?

오른쪽을 잘라 내며 오른쪽의 아이가

 

~척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등을 넓게 계산한 스웨터를 뭉치면

둥근 무기들이 감춰질 거야

멀리 피가 묻은 건?

삭제될 거야, 서로의 소매에서 한 명처럼 기도한다면

지도 같은 손금을 겹쳐 미지근한 차원을 만든다면

 

우리가 악수한다면?

지도 같은 손금을 겹쳐 푸른 미로를 만든다면?

머리와 어깨를 부드럽게 끼워 맞추고 깔깔 웃는 왼쪽

 

우리는 올 풀리는 시간과

리본을 묶어 주는 기계

녹스는 손톱들을 조심해야 해

겉과 끝의 우산살들

아이의 오른쪽이 시험 삼은 우산을 착 접으면서

 

 

 

멀리의 감각

 

 

 

그 순간 사진을 찍었어야 했는데

너희 집 변기가 무릎부터 뼈가 되는 장면

 

잘린 나무와 나무 밑동이 동시에 의자가 되었지만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모두가 의자에 앉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의자의 그림자가 사람의 뒷면에 가까워졌다

식탁 의자들은 떼를 지으며 발랄해졌고

흔들의자의 곡선은 안쪽으로 휜 종아리를 달달 외웠지

 

그네는 의심스러울 만큼 견고했지만

오늘도 세계를 부드럽게 밀어 올렸지만

줄을 잡았던 손바닥에선 철철 흐르는 피 냄새가 났다

끊기는

무너지는

쏟아지는

가라앉는

착지한 순간

 

 

 

반투명

 

 

 

스무 살의 신이 있다

거울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결과물

 

갓난애 눈물을 굳혀 만든 양초를 잃어버렸어

꿈속의 나와 꿈 밖의 내가 동시에 울기로 한다

눕혀진 거울을 세우던 최초의 시간

한번쯤 울어 보려고 퇴화하는 마지막 감정

나는 꿈 밖의 내게 이름 불렀지

나 자신을 전부 만져 봤던 감각을 기억해?

입에 넣어 봤던 꼬리의 길이를 가늠해?

투명의 반대말이 뭐게?

 

스무 살의 신이 있어

빛으로 빛을 비추는 짓 한다

그림자가 검정색 인형에게 이름을 줬다 빼앗았을 때

눈물처럼 눈알이 떨어졌을 때

다음은 네 차례야

충분해진 촛불을 끄고

케이크에 얼굴을 푹 박아 줄 차례

 

 

 

〈당선소감〉

 

 

   어쩌다 오물이 묻으면 두 번 반 절하고 싶던 시집들, 다시 읽고 싶어서 잊고 싶던 시들, 시가 좋았지만 저 자신이 쓸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외계인의 가능성을 흠모하지만, 외계인의 피부를 가질 수는 없듯이 말이에요. 밤중에 소식을 들었습니다. 스스스 일어나 묘지로 향했습니다. 맨손으로 비석에 쌓인 밤 먼지를 털어 냈습니다. 12시였으니까 그들 중 두 명쯤 부스스 일어나 스르르 축하해 주었는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여기는 미국이지만, 언어를 배우기보다 어떻게 하면 계속 모를 수 있을까 골몰해 왔습니다. 모르는 언어란, 알아듣지 못한다는 묘한 안도감이란, 오래도록 앓고 있던 이명을 마침내 잠재워 주었으니까요. 이 시들은 겨우 고요한 시간, 오전의 생생한 묘지에서 쓰인 것입니다. 혼잣말을 해도 손끝은 언제나 따뜻했습니다. 없는 사람들이 있었으니까요. 살아 있었어도, 우리가 서로 말이 통하지 않는 건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묘지의 외국인들에게 고맙습니다. 살아 있는 사람들에겐 살아 있으므로 한 명 한 명 만나서 감사를 드릴게요.

   계속 시를 쓰겠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매끄러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계속계속 시를 쓰겠습니다. 외계인의 완성된 눈망울을 가질게요.

 

————

▶안미린 / 1980년 서울 출생. 동덕여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심사평〉

 

   "안미린의 시들은 자유로운 어법 그 자체였다. 과감하게 생략하고 비약하고 가로질렀다. 말맛이 탱글탱글 살아 있었다. 시선은 다이내믹하게 줌인과 줌아웃을 했다. 그럼에도 행간에 계절의 지나감과 경험했던 감각들의 애틋함이 다소곳이 숨겨져 있었다. 언어로는 힘주지 않아 경쾌했고 감수성에는 깊이가 있어 묵직했다. 마음을 아프게 하는 구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풀처럼 심어 두곤 했다. 신뢰감 이상을 맛보았달까. 이런 신인이 이제 새로이 시인의 세계에 진입하여 우리의 동료가 된다는 사실에 설렜다."

      ―심사위원 김소연 시인 심사평 중에서

 

▶ 심사위원 _ 김소연・김수이・김행숙

 

 

〈심사 경위〉

 

   올해도 <세계의 문학 신인상>을 향한 응모자들의 뜨거운 열의와 성원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해를 거듭할수록 응모작의 수가 급증하여 《세계의 문학》 편집진들은 그 양적, 질적 성장으로 인해 어느 때보다 큰 기대와 관심을 가지고 심사에 임했다. 2012년 제6회 <세계의 문학 신인상〉 시 부문에는 275명의 응모자가 2967편의 작품을, 소설 부문에는 350명의 응모자가 786편의 작품을, 평론 부문에는 5명의 응모자가 10편의 작품을 투고하였다. 심사 진행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심과 본심위원의 특별한 구분 없이, 심사위원들의 1차 독회를 거쳐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을 다시 교독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응모 편수가 적은 평론 부문은 바로 본심으로 넘겼다. 소설 본심은 2월 6일, 시 본심은 8일, 그리고 평론 본심은 14일에 민음사 회의실에서 진행하였다.

 

   예심을 통과하여 본심에 오른 작품은 다음과 같다.

 

● 시 부문

김 선_ 「우리들의 회의」 외 9편

김해선_ 「꼽추」 외 9편

박수지_ 「개의 날」 외 10편

안미린_ 「라의 경우」 외 9편

이경진_ 「수사반장」 외 9편

이상협_ 「사진 감광사」 외 9편

임지은_ 「토요일의 지느러미」 외 9편

임 현_ 「벌레들」 외 9편

정 순_ 「참새」 외 9편

조다희_ 「뒤뜰에 뱉어 놓은 신드롬들의 악상」 외 14편

최형욱_ 「연주가 시작되려는 순간」 외 9편

한인준_ 「게스트 하우스」 외 9편

 

 

                                          —《세계의 문학》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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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산맥의 낯선 진화를 기다리며

 

  갈라파고스라는 섬이 있다. 남미대륙 에콰도르에서 서쪽으로 1,000km 폐쇄적 자연환경으로 인해 여타 대륙과는 다른 형태의 생명 진화가 이루어졌으며 그것은 다윈의 진화론에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 갈라파고스 섬에서 만나는 동물들, 코끼리거북 바다이구아나 왕바다도마뱀… 그들은 기존 생태계를 뛰어넘는 독특한 모습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시인이라면 이렇듯 갈라파고스 섬의 낯선 동물들처럼 독창적 진화를 꽤해야 하지 않을까. 세류에 흔들리지 말자. 자기만의 정신세계를 구축하고 독자적인 시적교감을 육화시켜 자아의 색깔이 선명한 시를 쓰자. 시는 편편이 언어와의 전투이고 사고의 혁명이다. 나만의 우주를 세우는 것이다.

  시산맥, 시의 산맥 아우르며 무성한 숲의 진화 이루어나갈 새로운 시인을 찾아나서는 길. 창조적 아날로지의 열쇠를 구하는 간절한 바램으로 투고된 작품들을 촘촘히 돌려 읽었다. 최종심에 올라온 5명 중 아직은 기초체력을 좀 더 다져야할 것으로 보이는 이동영, 문유형, 이향숙의 작품들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고, 「고래 등을 깁는 땅거미」 외 10편을 투고한 박영수와 「그들은 모두 자작나무였다」 외 9편을 투고한 손상호의 작품으로 압축하여 되읽었다. 두 분의 투고 작에서 “시는 설명하지 않고 표상하지도 않으며 단지 보여줄 뿐이다. 현실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재창조하려고 시도한다.”는 옥타비오 파스의 말이 아니더라도 그들만의 심상을 실체화하려는 언어의 구체적 몸짓을 느꼈다. 즉 작품 속에서 녹여내려는 이미지와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저마다 뚜렷한 개성과 주제의식으로 미적 세계를 구현하는 힘이 돋보였다. 그러나 시 쓰기가 시인을 표상하는 화자의 시적 충동으로부터 시작하고 그 내면을 언어의 전개로 성취되는 과업이라고 볼 때 손상호의 작품들은 대부분「그, 여학생, 사내, 그녀」 등을 등장시켜 화자가 한 걸음 물러선 타자적 구도의 서사로 풀어내려는 소설적 경향이 짙게 보였다. 이러한 시적 전개는 객관적 위치는 확보될 수 있으나 작품의 진정성과 깊이가 떨어지는 취약점을 노출시키게 됨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현실감 넘치는 주제와 실체적 묘사 등 장점들이 많았음에도 아직은 농익지 못한 전개가 걸림돌이 되었다. 머지않아 시단에서 꼭 다시 만날 이름임을 기억하며 작품을 내려놓았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손상호의「그들은 모두 자작나무였다」에서 언어와 피 터지게 싸우려는 치열성이 아쉽기는 해도 화자의 내면과 언어의 질감이 서로 번져 상투하며 자연스레 교감이 이루어지는 특장을 보이고 있어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백화는 겨울에 나무가 된다> <얼어터진 곳에서만 부를 수 있는 이름, 부르면 벼랑에 서 있는 것들은 자작나무가 되었다> 등 툭툭 던지는 잠언 투의 문장들이 크게 거부감을 주지 않으면서도 시를 다 읽고 난 뒤 여운처럼 남는 뒷맛이 좋았다. 그러나 함께 투고된 다른 작품과의 질적 차이가 너무 커서 심사자를 안타깝게 했다. 결국 이번호 최종 당선작은 선정하지 못했다. 시도 시인도 넘쳐난다는 요즘 세태라이지만 갈라파고스의 낯선 진화를 꿈꾸며 개봉했던 시산맥 신인상 부문은 빈손이 되었다. 투고해 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분투의 원고를 다시 기다린다.

 

 

심사위원: 박남희, 이영식(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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