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물 / 류흔
조용한 사과 세 개와
과도하게 날카로운 과도果刀 하나.
위의 두 가지 정물이 깔고 앉은 쟁반까지
지금은 고요 모드.
스케치에 온 신경을 써야하기에
사과는 향기가 없네.
세 알 모두 조용히, 조용히, 조용히
이젤과 화판의 뒷면을 마주한 채 조용히.
과도를 그릴 땐 조심조심.
혹 베이더라도 피 대신 칠해주면 되는 빨강물감.
채색은 나중의 일이므로
그때 가서 베일 일.
쟁반을 운반할 때는 더 조심.
떨어뜨리면 쟁쟁쟁, 쟁쟁하게 소리 낼 듯.
사과와 과도의 활동반경을 결정해주는 쟁반.
그들의 딱딱한 방석.
구르는 것의 구심점이랄까, 가두리양식장 같은 거.
구도에 따라 타원이 되기도
둥근 테두리를 지우면 바닥도 되지.
스케치는 꼭, 4B로 해야 할 듯.
1B는 얕아.
4H는 높고
4B는 깊숙하지.
깊은 것이 숙성된 느낌, 또는 지속적으로 익어가는 세월.
유구하며, 길지.
깊숙이 찔리는 사과와 가해하는 과도.
과도는 친절하다, 깎기 직전에 칼로 한번 탁 쳐서 마취시키는 것을 보면.
과도는 과격하다, 살살 돌려 깎은 다음에 일어날 일이지만
정물이 아닐 경우, 심각해지지.
사각사각.
아삭한 정물을 씹어 먹는 소리로 오인할 수 있으나
합이 8각인 4B연필을 운행하는 소리.
그러니까 지금은 스케치 중.
사과 세 개와 과도 한 개, 그리고 쟁반을 그리네.
미리 정해둔 작품명은 정물.
배경이 있는,
고요한 이름이지.
돌 / 류흔
이것은 무언가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느낌이다
곰삭은 바람과 시간을 이룩해왔다는 생각이다
암암리에 어둠을 다져온 세월의 전문가일 것이다
그가 구를 때는 소리 먼저 처소를 떠난다
돌에게 있어 순간이란 돌아갈 수 없거나
돌이킬 수 없는 과거의 장면들이다
지층地層같이 두터운 연대를 곱씹어 왔다
빙산의 일각처럼, 드러난 부리는 일종의 순筍이다
오래 스크럼을 풀지 않는 성곽에서는 이끼가 슬슬 모여들었다
돌발突發은 튀어나온 돌이 문득 발을 내미는 행위다
돌의 삶에는 기교가 없다는 게 정설이다
물이 얕고 살이 센 곳에서는 돌돌돌, 세 번 구른다
이 정도는 손쉬운 기교에 속한다
뼈 속이 빈 새처럼 날아다니는 돌이 있다
부석사에는 부석부석한 돌이 천 년 넘어 떠있고
골리앗은 이것으로 이마가 터졌다
어떤 전례前例도 돌 속에 갇힌다
우리가 공기를 세지 못하듯이
돌의 숫자를 포기하는 순간 미지수가 태어났다
돌을 보지 않고는 눈 둘 데 없는 이유다
지천에 넘치는 돌은 모자 밑에 앉아 거리를 이동한다
예禮를 표하고자 돌은 잠시 모자를 들어 올리지만
대부분의 그것은 미풍이며 양속이다
아무래도 이것은 세상을 모색하고 있다는 느낌이며
납작한 놈들은 푱푱 물 위를 뛰어서 건너기도 한다
몇 발짝 안가 가라앉을 줄 알면서
저리 닳고 닳아왔는가, 생각 없는 돌이다
대가리다 무턱대고 들이대는 대거리다
쉼 없이 침묵하고 있어도 다 들리는
속삭임이다 광장의 신념이며 눈물이며 매캐한
암약이다 아스팔트에 가부좌한 화두다 화약이다
화근이다 쌩, 짱돌이다 피하지 못했으므로
피다 흐르는 장미다 붉은 향기다 피지 못한
꽃이다 흥건하고 물렁한 고름이다 붕대를 두른
돌이 깃발을 들고 뛰어간다 탁탁탁, 골목을 돌아
간다 뒤쫓는 호각號角과 돌아간 돌은 호각지세다
돌에 맞아 쓰러진 소리의 꼬리가 짧다, 퍽
퍽 아프겠다 간단명료한 통증과 연이은 절명이다
울음이다 우릉우릉 타는 구름이다 검은 바위다
거대한 엄습이다 쪼개진 바위가 내린다 바위가 다 닳고
시간은 자란다 경적을 울리며 세월이 온다
모른 체한다 슬그머니, 돌을 주워들었다
나는 문외한이다 / 류흔
가만히 생각해보면 나는
문외한門外漢이다.
무엇에 대(관)해서 그럴까.
문득 생각해도 골똘히 생각해도
왼쪽/오른쪽, 어느 편으로 생각해봐도 나는
문외한이다.
무엇에 관(대)하여 그럴까.
나는 다 자라서, 얼굴은 성인용이고 주름은 주름주름하다.
어떤 것이 나를 매만져서
내가 바르게 컸거나 부드러워진 것이라면
누가 나를 더 주물러다오.
주물주물, 주물러서 주물을 떠 다오.
그 주물에 얼굴을 붓고 빤빤하게 펴 다오.
나는 그 방면에 더는 모르니
문외한이다.
무엇에 대하여 그렇다.
나는 여태껏 발설하지 않은 소문,
잘 간직해 온 구설口舌의 내력이다. 나는
배꼽아래 검정 잉크를 쏟은 지 오래된 사내, 수많은 여자에게 오점汚點을 남긴 얼룩이다.
나는 어려져서 얼굴이 곱고
일대를 주름잡는다.
나는 댐처럼 골목을 막아서서 주머니를 뒤진다.
이때의 나는 전문가다.
수문을 조금 열어서
털린 주머니만 방류해주는 솜씨를 좀 보아.
무일푼인 주머니들은 턱이 돌아가거나 골목을 돌아갔다.
돌아간 모서리의 마지막은 막다른 골목 - 여기서
커브는 살해되었다.
그건 전문가의 솜씨여서,
나는 모르는 일이다.
무엇에 대(관)하여 그럴까.
나는 예의바르게 늙었고 주름이 주름졌으며
착한 눈을 끔벅이는 나를 통틀어 사람들은
문외한이라 칭한다.
가족사진 / 류흔
1
벽에 매달린 사람들
유리액자 틈에서
비좁은 세월을 견디느라
다들 수고가 많다
눈이 선한 저 사람들이
눈에 선하다
2
누구는 산에 있고
누구는 강에 있다
강에 뿌려 달라 했는데 비碑에 새겨진 사람,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신
누님이 있다
있다/없다/있다/없다
아카시아 잎을 한 장씩 떼 보는데
없다
줄기만 남은 세월,
시간은 흐르는데 기다림은 멈춰 서서
있다없다 여러 번을 세어 봐도
없는 사람은 없는 벽에
표정을 닮은
허공이 못 박혀 있다
3
없는 사람이 없다
없어진 사람이,
있다
2호선에 고래가 산다 / 류흔
30분 넘게 잠영을 하던
고래가 숨을 쉬러 박차 오른다
힐끗, 보라매 카센터 간판을 본 것도 같은데
신대방이다
고래, 본인 입장에선
신대륙이어야 폼 날 텐데 신대방이라니
이 노선에는 신촌이 있고 신천이 있고 신림도 있지
신도림이 있고 신당이 있고 신답이 있지
마지막으로 신설동이 있는데, 그건 최근에 신설된 역일 것이다
신字 돌림 문중을 주유하는 고래여
잠실에는 누에를 뱉어놓고 사라진 고래여
들르는 족족 인어 떼를 삼켰다가
틈틈이 게워내는 고래여
너의 해적인 내가 오늘은 술이 과하구나
나는 뚝섬에나 내려서 보물을 숨길 테니
너는 또, 어느 항구를 찾아가거라
넉넉한,
오늘밤은 달이 두 개로구나
고래고래 불러보는
고래여!
[당선소감]
하루는 '시를 쓰는 시간과 시를 쓰지 않는 시간'으로 나뉩니다. 그런 하루가 하루하루 흐르더니 어느새 6년이 지났습니다. 이 기간에 저는, 더는 잃어버릴 것이 없을 만큼 많을 것을 잃었고, 더는 얻을 것이 없을 만큼 많은 것을 얻었습니다. 세속생활과 맞바꾼 시 쓰기. 대립각을 세운 둘 사이에서 '먹고사는' 문제로 기준 삼거나 섣불리 구분 지어선 안 되는 그 무엇을 저는 감히 '문학에의 추종, 혹은 맹목' 으로 정의합니다.
배울 스승이 없었으므로, 문우(文友)도 문법도 미래파도 과거파도 경향도 사조도 몰랐습니다. 서점 바닥에 주저앉아 시집을 읽거나, 구립도서관에서 무료로 나눠주는 과년(過年)한 문예지들을 실어오거나, 강인한 선생님 거처하시는 <푸른 시의 방>, 마경덕 선생님 가꾸시는 <내 영혼의 깊은 곳>, 또한 고경숙 시인께서 애써 양식하시는 <사유의 전복> 등등, 이런 곳의 눈먼 시들을 슬쩍 훔쳐와 주린 배를 속여 왔습니다.
다다익선과 자급자족의 시 쓰기. 그러니까, 밥 먹고 시 쓰기. 일어나서 시 쓰기. 오줌 눌 때 시시, 하기. 방금 완성한 시를 소리 내 읽고 나서 빙그레 웃거나 쫙쫙 찢거나 마우스를 꾹 눌러 지워버리는 행태를 반복하기. "나만 좋으면 돼" 라고 중얼거리기. 전생의 나는 누에고치였었나, 스스로 가두며 쓰기. 이런 스타카토의 문체 속에 포함되기. 아, 그리고 첫 시집 내기.
첫 시집 <꽃의 배후>를 출간한 것은 의도한 기획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불가사의하지만 그간 써온 시를 누군가에게 한번은 보여주고 싶어 모처에 제출했는데 덜컥 선정됐고, 창작지원금으로 시집을 내야한다는 조건도 그제야 알게 됐습니다. 거듭거듭 후회하며 원고교정을 하고, 출간된 시집을 지인에게 전달하고, 일면식조차 없는 문인께 시집을 부치면서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라는 반문도 여러 번이었습니다.
저는 시 쓰기를 천형으로 받아들였기에 작품 이외의 여러 문제들, 일테면 독자와의 만남, 다른 시인과의 교류, 작품발표(또는, 그 지면), 출간 같은 문제는 정말이지 '문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시집을 출간하는 문제를 일으켰으니 한 번 더 문제 일으킨들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시산맥을 엿보게 된 것입니다.
사실, 시 산맥이 험준하다는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튼튼한 자일과 촘촘한 바람막이를 입고 앞서 출발하신 분, 이미 종주의 끝자락에서 성취의 땀을 닦고 계신 분, 그리고 시원한 막걸리 한사발의 하산주를 들이켜고 계시는 풍류객까지, 막 기슭의 초입에 들어선 제가 얼마큼 잰 걸음으로 올라야 그분들을 만나 뵐 수 있을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한 걸음부터 떼겠습니다. 초행길인 저를 불러주신 고마운 분들께서 시산맥의 어둡고 울창한 길목마다 푸른 리본 매달아주시길 기대하오며.
류흔 시인
경북 안동 출생.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받음. 2011년 시집 『꽃의 배후』발간.
심사 : 박남희, 이성렬, 이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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