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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꽃 아파트 / 이승남

 

수도원 가는 길, 배 밭 옆에 들어선 아파트 단지마다

창문을 다는 공사가 한창이다

문 하나가 생긴다는 것

드나드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한 봄날은

제 할일을 묵묵히 하고 있다

불빛하나 없던 곳,

배꽃이 피던 때처럼 환하다

 

문득, 주름진 이불처럼 덮여있던 슬레이트지붕들은

다 누가 개어 놓았을까

밤이 되어 저 꽃밭 언제나 낮게 깜빡거리며 피더니

바람이 불어도 꽃샘추위에도 떨어지지 않는

붉은 꽃송이들이 높게, 높게만 핀다

 

덮고 있던 추위들을 벗어 버리고 문들이 톡톡 열리고 있다

따스한 빛 뭉치들이 도글도글 20˚프라이팬에 구른다

굽지 않아도 알아서 익어갈 빛의 무게들

 

몇 개의 불빛이 떨어진 아파트 중간층의 봄 밤

아직 귀가하지 않은 늦은 시간들

배꽃들이 거름의 말에 귀를 여는 철

저 밤의 꽃밭은 왁자한 열매를 만들고 있겠다

 

창문 하나를 열고 닫는 소리들로 왁자한 봄 날, 온갖 문들이 달리는 공사로 바쁜 외각

수도원 주기도문이 적요를 조용히 열고 있겠다

 

           

 

 

絃 / 이승남

 

絃이 거쳐 온 곳들엔 다 공명이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그 어떤 크기 또는 어떤 새지 않는 넓이가 소리를 온전히 키우고 있었는지

먹먹한 그 집에서 스스로 나올 때 소리는

나비가 되는지

        

깊은 외부를 돌아 나온 소리의 날개에 리듬은 박혀 있고

몸통을 두드리면 쿵쿵 울리는 소리는

미쳐 빠져 나오지 못해 익사한 것들이다

모든 반주에

물기가 뚝뚝 흘러 노래를 흐르게 할 때

        

그의 몸속은 共振 회로처럼 빛을 촉발 한다

        

나무의 잎, 나이테를 어지럽게, 어지럽게 빙빙 돌아

허공에 뿌려놓은 소리를 따라

수천의 현이 소리를 내뿜고 있다

연주는 언제 끝날 것인가

이끌려 나온 모든 소리들이 나무 밑 제 그늘

떨어져 식은 소리로 수북하다

        

용수철 같은 저 참고 있는 絃이라니

푸른 소리가 다 날아가고 현악기 그 앙상한 연주가 한창이다

        

되짚어 내려간 소리들은 지금 뿌리 쪽에 다 모여 있겠다

스스로 줄을 끊은 현이

뿌리에 모여 휘어지고 있는 한 철

한동안 바람은 팽창하지 않겠다

 

 

 

 

세한도 / 이승남

 

저녁을 끌어 덮고 구릉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느려서 돌아가기를 좋아하는 마을의 노송들이 제자리에 서서 어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다

        

신작로를 따라 바늘귀에 분노를 꿰려는 바람,

        

칠흑의 저편에서 달려오는 불빛하나

        

어머니의 오랜 시집살이가 아침 연기를 하늘로 올리던 여기 쯤 그악했던 유배지는 지금 어떤 표지판도 없다

        

울음을 다 쏟아낸 암소의 빈 집

마을 어귀는 느리게 되새김질로 밝아 온다.

어느 열아홉, 유독 답을 주던 빈 굴뚝의 검은 화기도 다 빠졌겠다.

        

허물어진 빈 집

바깥보다 안이 더 춥다

 

 

 

 

저녁의 늦은 목소리

 

저녁은 스르륵 어스름을 넘어와 담장이 되기도 한다

아무 경계가 없다는 것도 모르고 저 혼자 담장이 되는 어둠, 정다운 것들 다 그 담장 밖에 서있고 가끔 시간이란 밝아지지 않는 어두운 담 같다는 생각도 들고

       

숲에서 천천히 걸어 나오던 어스름 나무들의 이름이 지워져 모두 숲이 되던 것을 기억한다면 늦은 목소리를 기억 하는 건 어렵지 않고 채마밭에서, 뒤란에서, 혹은 잠결에서 들리던 목소리 손발에 흙이 묻어있던 목소리

               

밥 냄새가 온 힘을 빼놓던 저녁이 있었고 애호박처럼 숨길  좋아하던 식의 날들과 멀기만 하던 곡식이 익어가는 철

       

허기가 곤두선 수북한 털의 개가 자꾸만 귀를 털어내던 저녁

        

피안이 저녁의 담을 스르륵 넘어 온다

오래 걸어왔으나 한 번도 앞서 간 적이 없는 그 저녁

목 밑까지 자란 세월을 끌어 덮고

이불 밑 어둠속에서 나직이 불러보면 가끔  들리는 저녁의 늦은 목소리

 

       

 

 

             지퍼

 

 

       체크무늬가방 속에 물러터진 자두 한 알

       노랗던 것이 붉게 익는 동안

       한 번도 그 관심을 열어보지 않았다

       구름을 막 벗어난 달이

       지퍼를 열고 하얀 웃음을 꺼내는 동안에도

       가끔 따끔거리며 화농을 키우고 있었을 자두 한 알

       오래 붉던 전구가 깨어지듯

       농익은 자두는 소리도 없이 터졌겠지

       캄캄한 가방 속 시큼하고 어두운 시간엔 통증도 없어

       까만 속을 까맣게 닫고만 있었겠지

      

       나뭇가지마다 지퍼가 열리 듯 연두색 이파리들이 돋아나고, 다시 파랗

    게  넓어져 허공이 닫히던 여름 쯤

       

       가방을 열었다

       작은 방을 닫고 있는 몇 칸의 지퍼들

       그 중 하나를 열었을 때 거기엔

       짓무른 종양이 저 혼자 가방을 물들이고 있었지

       아마도 열심히 외롭던 시간이었을 것이고

       몸에 나뭇가지 자국이 생겼다

       분홍빛 잎들이 촘촘히 돋아나 있는 가지

       터진 자두 한 알을 꺼낸 여름은 마취 중이었을 뿐이고

       굳게 닫혀있는 지퍼에는 손잡이가 없다

      

       봉합이 구물거리며 지나간 자리마다

       가지는 다 어디로 가고

       빈 꽃송이들만 점점이 박혀 있다

      

       가지도 없이 꽃도 없이 열렸다가  저 혼자 농익어 터진 자두 한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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