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궁근종 / 조연희
내 안에 남성이 하나 생겼다
염증이었던 그가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그러다 문득 완치되지 못한 염증이나 상처가
끝내 근육종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바람이 한 트럭씩 몰려다니던 거리,
그 방은 늘 겨울이었다
주전자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창틀에는 서리꽃이 만발했다
왕성한 햇빛 하나가 예각으로 찾아들면
화들짝 꽃망울이 터지기도 했지만
안과 밖의 심한 기온차로
수증기 같은 눈물만 뚝뚝 흘리던 새벽
하여 단단한 이 상처는 채 피지 못한 꽃망울이다
오래된 비명이다
너를 향한 내 몸과 마음의 不和이다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변할 때 악성이 되는 것이라고
섬유질 같은 슬픔이
끝내 근육질로 몸 바꿔버린 삶과 죽음의 임계지역에서
지금 변심한 애인 하나 잠들어 있다
마네킹 / 조연희
여기저기 장기불황의 조짐이 보이던 날들
<임대문의>를 내건 후부터 바퀴벌레가 먼저 임대해 왔다
내 눈물은 헐거워진 수도꼭지처럼 좀체 꽉
채워지질 않았고 누수 되어버린 꿈
쇼 윈도우 불빛 아래서 수없이 복제된 나는
밤마다 시장사람들을 닮아 점점 수다스러워져 가고 있었다
곧 재개발이 될 거라는 풍문과는 다르게 이곳에서는
희망도 턱없이 낮은 공시지가로 책정되는지
사람들은
그리마의 모습으로 발 빠르게 지나다니기만 할 뿐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진 않았다
윗도리가 나를 입고 바지가 나를 꿰차고 신발이 나를 신고
하루에도 수십 번 씩 실연을 당하기 위해 서 있는 나
단골은 바람둥이 애인 같아서
잊을 만하면 나타나
애정이 식은 손으로 휘적거리기만 할 뿐
어쩌다 네 귀퉁이가 닳은 홀쭉한 종이가방의 모습으로
기약 없이 사라져 갈 뿐
이 세상에 영원한 단골은 없나니, 그때마다 암전되는 내 몸
나는 철 지난 내 가죽 들을 옷걸이에 걸어놓았다
복제된 나만큼이나 수많은 가죽들이
외상값으로 줄줄이 밀려 있었다
앞집 정육점에선 벌건 속살들이
내 가죽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내 발 밑에 내가 버린 입술들이 수북했다
나는 하루라도 빨리 내 기다림도, 추위도 모두
임대해주고 싶었다
위험한 공터 / 조연희
무허가 건물에 사는 그녀는 오늘도 구청직원의 방문을 받았다 마음이 공터였으므로 가건물 슬레이트에 햇볕이 허락도 없이 장대처럼 딱딱 꽂히고 위암 말기인 그녀, 암세포는 그녀에게 허락받고 제 터를 넓혀가는 것일까 세상은 땅주인처럼 당당한 얼굴로 철수를 통보하고 불법무단점유지인 채 마감되는 생도 있어
무허가로 사랑하고
무허가로 애 낳고
무허가로 병들고
무허가로 어머니는 벽돌을 구웠고 공터 속에 벽돌을 쌓아올렸다 하루가 지나면 그 담장들은 여지없이 철거되었지만 골조만 남은 어머니는 혼자 세상과 대치했다 마스크처럼 붉은 딱지들로 입을 가린 채 침묵시위 하는 가구들은 알고 있었을까 때때로 토지변상금액보다 체불된 이자가 더 많은 삶도 있다는 것을. 어머니 목단 꽃무늬 월남치마에서 붉은 꽃잎이 뚝뚝 떨어지는 오후 땅거미가 어머니 깊은 자궁까지 무단 침입해 붉게 하혈할 때 석양이 다 된 어머니 랄랄라라 허락도 없이 날 낳으셨군요
다리가 많은 바람의 지역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무단으로 점유한 면적들을 측량해보시던
위험한 공터인 나의 어머니
남편의 외투 / 조연희
녹슨 못 위에 남편의 가죽이 걸려 있다
탈피한 곤충의 허물처럼
한 세월을 고스란히 벗어놓은 채
(이제 저것도 우울의 단추를 열어 보이고 싶은가 보다)
가죽이란 견고한 재질도
그토록 많은 상처를 받는 것일까
간신히 봉합해 온 샐러리맨 10년
말줄임표 같은 박음선이 조금씩 뜯어지며
삐죽삐죽 신음소리가 새나오고 있다
굵은 주름이 접힌 곰배팔 소매는
아직도 시간 외 작업 중이다
다중인격의 여벌이 필요한 시대
(사람들은 더욱 많은 신분이 필요하고)
단 한 번의 베팅으로 수직 상승을 꿈꾸는
단벌의 인생도 있냐는 듯
녹슨 못 위에서 가죽점퍼가
육체 이탈한 영혼처럼
남편의 구부러진 등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다
사각 뒤주의 추억 / 조연희
아버지는 강박증 환자였다 반듯한 네 꼭짓점을 붙들고서야 비로소 균형 잡는 <마주 보는 변의 길이가 다르거나> <마주 보는 두 쌍의 길이가 평행이 아닐 때> 떨어진 모서리 한 조각 주워들고서도 정맥이 불거지는 아버지는 사각 뒤주였다 난 영원한 의대증(衣帶症)환자였으므로 이 옷 저 옷 기웃거릴 뿐 스스로 신분을 끊을 수도 다른 신분으로 갈아입을 수도 없었다 사각 뒤주는 유일한 내 도포였다 윤달 같은 골방이었다 아버지에게 우린 언제나 다운증후군에 걸린 딸들이거나 정신분열의 아들들이었으므로 아버지는 뒤주 하나씩 던져주고 이상하게도 밤마다 우리는 네 각이 거세된 방을 꿈꾸었다 학질에 걸린 세상 달도 꽃도 나무도 모두 네모나게 보일 때 쯤 문득 사각형의 내가 삐걱삐걱 소리를 내며 네모나게 굴러갔다 내 혁명은 고작 바람이거나 별이거나 어쩌다 왕실의 미늘창을 기웃거리는 자귀나무쯤이었으므로 모든 불행은 아버지의 힘이 넘칠 때 시작됐다 불화의 전모를 알 수 없는 뒤주 속에서 이 땅의 의심 많은 아버지와 유약한 아들들이 一家를 이루고,
2
(가로인 어머니의 길이) x (세로인 사도세자의 길이) x (아버지의 높이)= 사각 뒤주의 부피
3
2004년 강남구 압구정동 어느새 높게 키가 자라 있는
사각뒤주와 뒤주 사이
눈물 많은 어머니들 밑넓이로 누워 있으면
주먹 센 아버지, 그 각을 밟고 섰고
우유부단한 아들이나 딸들,
대칭을 이루며 한 변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각 숲 모서리 모서리들 속으로
익명의 수많은 思悼 세자들이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 의대증: 특정한 옷에 대한 기피나 선호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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